헌책방 책읽기


 책은 물건이 아닙니다. 책은 책입니다. 쌀은 물건이 아닙니다. 쌀은 쌀입니다. 쌀은 쌀이지만 ‘물건을 사고팔듯’ 쌀도 사고팔 수 있습니다. 볍씨를 심어 모를 낸 다음 모를 옮겨심고는 석 달이나 다섯 달을 기다려 나락을 베어 얻은 쌀은, 논일꾼만 먹을 밥이 되지 않습니다. 논을 일구지 않는 사람도 돈을 치러 장만해서 먹을 밥이 됩니다. 책 또한 책방에서 사고팔지만, ‘사고판대서 모두 물건이라 여길’ 수 없습니다. 책은 새 것이건 헌 것이건 종이에 아로새진 이야기를 마음으로 아로새기면서 내 삶을 새롭게 북돋우거나 일구는 길동무 구실을 합니다.

 책은 내 주머니를 털어 기쁘게 장만한 다음 읽을 수 있습니다. 책은 도서관에 가서 빌려 읽을 수 있습니다. 책은 새책방이든 헌책방이든 찾아가서 가만히 읽을 수 있습니다. 읽고 내려놓아도 책읽기입니다. 반드시 장만해서 내 집 내 책꽂이에 꽂아야 책읽기가 아닙니다.

 읽기와 훑기는 같지 않습니다. 책을 살까 말까 망설이면서 훑는 일은 책읽기가 아닙니다. 훑기이자 살피기입니다. 내 집 내 책꽂이에 건사할 만한가 아닌가를 따지는 일입니다.

 주머니를 털어 장만하든 말든, 손에 쥐는 동안 내 마음에서 무언가 뭉클하게 샘솟는 이야기가 있어야 책읽기가 됩니다. 서서 한 쪽을 읽든 선 채로 백 쪽을 읽든, 이렇게 읽으면서 내 넋을 곱게 돌보는 길을 헤아린다면 책읽기가 됩니다. 도서관에서는 제아무리 많다 싶은 책을 읽어도 ‘값을 치르지 않’아 고맙습니다. 헌책방에서는 서거나 앉아 책을 읽다가 내 가슴을 울리는 아름다운 이야기에 몸둘 바를 모르면서 ‘이 책 얼마예요?’ 하고 묻습니다.

 새책방에서는 책 뒤에 찍힌 값대로 돈을 치릅니다. 헌책방에서는 헌책방마다 다 다른 값을 치릅니다. 같은 헌책이라 하더라도 헌책방 한 곳에 스며들기까지 거친 길은 다 다릅니다. 어느 책은 무척 거친 길을 거칩니다. 어느 책은 무척 고운 길을 거칩니다. 어느 책은 얄궂은 책임자한테서 버려지는 바람에 잔뜩 구겨지거나 먼지와 때와 파리똥을 뒤집어씁니다. 어느 책은 사랑스러운 책임자가 예쁘게 들고 와서 헌책방에 내다 팔았기에 무척 정갈합니다. 여느 책이든 드문 책이든 헌책방마다 똑같이 값을 매길 수 있지만, 다 다른 사람이 일구는 다 다른 헌책방에서는 다 다른 책을 다 다른 눈길로 바라보면서 다 다른 값을 매깁니다.

 물건을 사고파는 마당에서는 물건이란 다 같은 값일 테지요. 오늘날 사람들은 누리집을 뒤지면서 ‘책값’이 아닌 ‘인터넷 최저가’를 따질 테니, 책을 책으로 여기지 못하고 물건으로 다루면서 ‘인터넷 최저가’에 길들고 만다면, 헌책방마실을 하면서 헌책방마다 같은 책을 놓고도 책값을 조금씩 다르게 부르는 모습을 보면 그만 어리둥절할는지 모릅니다. 뭐 이런 주먹구구가 다 있나 여길는지 모르고, 바가지가 아니냐 생각할는지 모릅니다.

 책은 이야기입니다. 책이라는 종이에 아로새긴 이야기가 먼저 하나 있습니다. 처음 새책으로 찍을 때에는 모든 책은 다 같은 이야기입니다. 이 새책이 다 다른 사람한테 다 다른 곳에서 다 다른 모습으로 팔려서 다 다른 책임자가 다 다른 넋으로 다 다른 매무새로 읽을 때에는 ‘다 같은 새책’이 ‘다 다른 책’으로 옷을 갈아입습니다. ‘다 다른 책’으로 옷을 갈아입은 다음, 책임자가 더는 이 책을 돌볼 겨를이 되지 않아 헌책방에 내놓는다면, 이때부터는 ‘다 다른 헌책’이 됩니다.

 새책 소식을 듣고 기쁘게 장만해서 읽은 사람이 내놓은 책, 신문사 보도자료로 들어갔다가 한 주 만에 버려진 책, 출판사 일꾼이나 글쓴이가 당신한테 고맙다고 여긴 이한테 선물했다가 슬그머니 버려진 책, 기쁘게 읽은 책이지만 집을 옮기거나 나라밖으로 떠나며 어쩔 수 없이 내놓아야 해서 헌책방으로 들어온 책, 책임자가 숨을 거두면서 집식구가 헌책방으로 몽땅 내놓은 책, 책임자가 숨을 거두어 대학도서관에 모든 책을 바쳤으나 대학도서관은 책 놓을 자리가 모자라다며 몰래 내다 버리는 통에 헌책방 일꾼이 폐휴지 모으는 곳에서 건져내어 어렵사리 되살린 책, 폐휴지와 함께 재활용쓰레기로 버려졌다가 헌책방 일꾼이 가까스로 되살린 책, 쌈짓돈 그러모아 장만해서 읽고 예쁘게 건사하다가 살림돈이 바닥나는 통에 조금이나마 돈을 얻으려고 책임자가 내다 팔아 헌책방으로 들어온 책, 내 가난한 지난날을 곱씹으면서 오늘 가난하게 살아가며 좋은 책 하나 만나고 싶어 할 젊은 가난한 넋이 헌책방에서 좋은 책을 값싸게 장만하기를 빌며 기꺼이 내놓았기에 헌책방 책시렁에 꽂힌 책, …… 모든 책은 똑같은 책이지만, 모든 책은 모두 다른 책입니다. 모든 책은 처음 새책방에 꽂힐 때에는 다 같은 이야기를 거느리지만, 모든 책은 새책방을 떠나 헌책방으로 들어올 때에는 모두 다른 이야기를 다스립니다.

 헌책방마실을 하면서 똑같은 책을 여럿 장만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똑같은 책’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 책은 부산에 있던 인문사회과학책방에서 팔던 자국이 남습니다. 이 책은 이름난 소설쟁이 아무개 이름이 적힙니다. 이 책은 신문사 아무개 기자한테 선물한 자국과 드림 도장이 찍힙니다. 이 책은 이 책을 사서 읽은 사람이 끄적인 일기가 깃듭니다. 다 같은 줄거리를 종이에 찍은 책이지만, 다 같은 줄거리를 읽는 사람은 다 다릅니다. 다 다른 사람이 다 다른 이야기를 살아내면서 책 하나에 수많은 삶과 눈물과 웃음과 죽음을 아로새깁니다.

 헌책방에서 책을 읽거나 장만할 때에는 물건을 사들이지 않습니다. 헌책방에서는 물건을 사들이지 않기 때문에 이웃 헌책방하고 ‘값 견주기’라든지 ‘흥정’을 할 까닭이 없습니다. 흥정이란, 물건, 곧 공산품을 살 때에 하는 일입니다. 쌀을 사거나 푸성귀를 살 때에는 흥정을 할 수 없습니다. 고운 목숨을 장만해서 내 목숨을 사랑하는 먹을거리를 장만하는데 흥정을 할 수 없습니다. 내가 심어 내가 기르지 못한 푸성귀를 돌보고 길러서 이렇게 내놓아 준 분한테 고마울 뿐입니다. 내 마음밭을 일구고 내 생각밭을 가꾸며 내 삶밭을 꾸릴 새 기운을 북돋우는 고마운 책을 장만할 때에는 ‘책을 살’ 뿐 ‘돈값을 따질’ 일이 없습니다.

 낯과 이름을 모르는 누군가 아끼며 사랑했을 책 하나를 나는 얼마나 아끼며 사랑할 만한 마음그릇인가를 돌아보면서 헌책방 앞에 서서 책 하나 곰곰이 읽습니다. 눈가에 눈물이 핑 돌면서 주머니를 뒤적입니다. 나는 헌책방으로 책을 장만하러 가는 길에 내 지갑에 빳빳한 종이돈을 마련합니다. 헌 돈을 내건 새 돈을 내건 다를 구석 없다 할 테지만, 고마운 마음밥을 베푸는 이음고리이자 쉼터인 헌책방 일꾼한테는 ‘되도록 빳빳한 새 돈’을 건네고 싶습니다. 책 몇 권 장만하고는 간이영수증을 받습니다. 헌책방 일꾼이 볼펜으로 꾹꾹 눌러 적는 숫자를 읽으며, 이 영수증을 고이고이 건사해서 나중에 우리 아이들이 크면 하나하나 보여주자고 생각합니다. (4344.9.23.쇠.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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