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실길 책읽기


 네 식구가 여러 날 함께 움직일 짐을 꾸린다. 어른 둘이 짊어질 가방에는 어른 둘이 쓸 여러 가지보다 두 아이가 쓸 여러 가지가 훨씬 많은 자리를 차지한다. 두 아이가 입을 옷가지만으로 가방이 셋 나온다. 철이 바뀌는 때요, 네 식구가 갈 곳은 퍽 따스한 곳인 터라, 여름옷과 가을옷을 한꺼번에 챙겨야 하니 옷가방이 여럿 나올밖에 없는지 모른다. 여름옷만 챙기거나 가을겨울옷만 챙긴다면 이야기는 달라질 수 있다.

 옷걸이를 열일곱 챙기고, 빨래집게를 스물 챙긴다. 빨래비누는 다섯 장 챙길까 생각한다. 우산은 안 챙기고 싶은데, 그래도 넣어야겠지. 손닦개를 넣고 걸레로 쓸 천을 하나 마련한다. 여관에서 머물 때에는 방바닥을 훔쳐야 하니까. 빨래바가지 하나쯤 넣을까 하다가 내려놓기로 한다. 아이 수저를 챙기기로 한다. 옷가지를 넉넉히 챙겼지만, 기차와 시외버스 에어컨을 걱정하면서 담요를 하나 챙기려 하고, 갓난쟁이를 눕힐 때에 쓸 깔개를 챙기기로 한다. 논둑에서 자라는 호박 한 알 땄고, 다 먹지 못한 멧느타리버섯 몇을 챙긴다. 부산에서 만날 분한테 드려야지.

 가방에 아이들 옷가지를 넣기 앞서 바닥에 죽 깔았을 때에, 문득 우리한테 자가용이 있으면 이만 한 짐을 조금도 짐으로 여기지 않았으리라 느낀다. 아마 이것저것 더 챙겨서 자가용 짐칸에 차곡차곡 실으려 했으리라. 어른 둘은 아이 몫까지 등으로 짊어지고 손으로 들어야 한다. 오로지 몸뚱이를 써야 한다. 택시를 얻어 타더라도 가방은 손수 짊어져야 한다. 기차를 타서 짐칸에 올려놓으면 우리 가방만 줄줄이 놓일 텐데, 어떻게 보면 ‘어디 집을 옮기는’ 사람처럼 보일는지 모른다. 그런데 참말 우리는 ‘집을 옮기려고’ 길을 떠난다. 새 보금자리를 마련할 때까지 머물러야 하니까 옷가지를 더 챙긴다. 조금 무겁거나 벅차더라도 새 마을로 가서 여관에 풀어놓으면 되니, 더 힘을 내자고 다짐한다.

 혼자 마실길을 나서면 내 가방에는 책이 꽤 들어간다. 혼자 마실길을 나서건 온 식구가 마실길을 나서건 내 옷가지는 몇 챙기지 않는다. 내 옷을 하나 덜면 아이 옷가지를 너덧 더 넣을 수 있으니까. 옆지기도 비슷한 마음이지 않을까. 어버이라면 으레 이러한 마음이지 않을까. 아이 옷가지를 꽤 많이 챙긴다 하더라도 여느 때에 ‘아이가 참 예쁘다고 여기며 좋아하던 옷’을 모두 챙기지 못한다. 아이는 어쩌면 제가 여느 때에 좋아하던 옷이 한두 가지 또는 여러 가지 없다며 투덜거릴는지 모른다. 어쨌든 ‘다른 예쁜 옷이 있으’니까 옷이야 금세 잊고 신나게 뛰놀 마음으로 부풀 수 있다. 어찌 되든, 아이는 제 옷가지 때문에 가방이 큼지막할 수밖에 없는 줄을 알지 못한다. 알 까닭도 없다. 어버이라면 이렇게 살아내야 하니까.

 새삼스럽지만, 내가 떠올리지 못하는 내 한두 살이나 두어 살이나 서너 살이나 너덧 살이나 대여섯 살 무렵, 내 어버이가 나를 데리고 어디를 돌아다닐 때에 짐을 얼마나 꾸려 어떻게 짊어졌을까를 헤아려 본다. 생각나지 않더라도 어떤 모습 어떤 느낌 어떤 마음이었을까를 곱씹는다. 예전에는 시외버스나 기차가 훨씬 좁았고, 가난한 평교사 살림에 좀 넉넉한 기차를 꿈꿀 수조차 없었을 텐데, 내 어버이는 두 아이를 데리고 어떻게 마실을 다녔을까. 아니, 마실을 다닐 엄두를 아예 못 냈을까.

 오늘부터 여러 날 땀 실컷 쏟으면서 어른 둘이 낑낑대겠구나. 옆지기는 첫째 아이가 힘들어 하리라 걱정한다. 첫째도 둘째도 모두 힘들겠지. 어른보다 아이가 훨씬 힘든 마실길이 될 터이니, 이래저래 고단하다면 고단한 대로 차에서 눈을 붙이면서 아이들을 상냥하게 보듬으며 토닥이는 어버이 구실을 잊지 말자고 생각한다. 마음만 있으면 된다 할 수 있지만, 비오듯 쏟아지는 땀방울에 이런 생각이 쓸려서 사라지지 않기를 빌며 꾹꾹 적바림한다. (4344.9.22.나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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