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소리내는 잣나무 ㅣ 아나스타시아 2
블라지미르 메그레 지음, 한병석 옮김 / 한글샘 / 2007년 10월
평점 :
사랑으로 부르는 소리를 듣는가
[따뜻한 삶읽기, 인문책 43] 블라지미르 메그레, 《소리내는 잣나무》
- 책이름 : 소리내는 잣나무
- 글 : 블라지미르 메그레
- 옮긴이 : 한병석
- 펴낸곳 : 한글샘 (2007.10.20.)
- 책값 : 12000원
(1) 소리 듣기
나는 내 귀가 받아들이는 소리를 좋아합니다. 온누리 모든 소리가 하나같이 듣기 좋다고는 여기지 않으나, 내가 즐거이 살아갈 터전에서 고맙게 들을 수 있는 소리라면 모두 좋아합니다.
멧자락 한켠에 깃든 시골집에 머물며 멧자락을 둘러싼 숲이 들려주는 소리를 듣습니다. 우리한테는 자가용이 없기 때문에 ‘터지는 소리(폭발음)’를 우리 스스로 낼 까닭이 없고, 들을 까닭이 없으며, 퍼뜨릴 까닭이 없습니다. 참말 자동차 소리는 무시무시합니다. 시끄럽습니다. 자동차가 한 번 지나가기만 하더라도 멧골자락이 조용해집니다. 멧골자락 다른 소리들은 자동차 시동 거는 소리랑 자동차 부르릉거리며 달리는 소리에 주눅이 듭니다. 다른 어느 소리도 받아들이지 않아요.
우리 집에는 보일러가 있습니다. 보일러 또한 ‘터지는 소리’를 냅니다. 그런데, 보일러 터지는 소리는 풀벌레나 멧새나 개구리가 우는 소리를 잠재우지 않습니다. 보일러가 돌건 말건 풀벌레나 멧새나 개구리나 아랑곳하지 않습니다. 살포시 둘레 목소리와 노랫소리하고 녹아들어요.
.. “사람이 우울한 상태에 있으면 병을 고치기 어렵고, 약도 도움이 안 돼. 그런데 사람을 사랑으로 대하면 병은 금세 사라져 … 육신의 병이 나타나는 이유는 사람이 스스로 자연과 멀어진 때문이기도 하고 또 스스로 품는 어두운 감정 때문이기도 해. 그뿐 아니라 질병이란 훨씬 더 큰 고통에 대한 경고이거나 그것을 막는 것이기도 하지 … 하느님은 당신에게 그러면 안 된다고 말하는 거야. 통증으로 말씀하시지. 이 고통은 당신의 고통이지만, 그의 것이기도 해. 하지만 당신은 진통제를 먹어 가며 계속 자기 방식대로 살지. 통증이 무엇 때문인지 생각조차 하지 않아 … 다른 모든 진리도 사람들은 다 알아. 행하지 않을 뿐이야.” .. (32, 38, 69, 70쪽)
사람들 발자국 소리나 이야기 소리 또한 풀벌레가 울던 소리를 잠재웁니다. 사람들이 떠들거나 복닥거리는 소리가 나면 풀벌레이든 멧새이든 개구리이든 소리를 뚝 그칩니다. 사람들 스스로 얼마나 느낄는지 모릅니다만, 자연하고 하나로 얼크러지려는 사람이 아니라 한다면 풀벌레이든 멧새이든 개구리이든 그저 가만히 기다립니다. 이놈들이 얼른 이곳에서 사라져 주기만을 기다립니다.
나는 사람들 발자국 소리나 이야기 소리를 딱히 싫어하지 않습니다. 다만, 모든 사람들 말소리가 구수하거나 따사롭거나 살갑지 않습니다. 둘레에 어떤 목숨붙이가 어떤 보금자리에서 어떤 삶을 잇는가를 헤아리지 않는 사람들 목소리는 ‘같은 사람’으로서 듣기에도 영 못마땅합니다.
멧골집에서 볼일을 보러 큰도시로 나간다든지, 먹을거리를 좀 장만하려고 읍내 장마당에 나간다든지 하면, 금세 소리가 바뀝니다. 마을길로 접어들면 풀벌레나 멧새 소리는 잦아듭니다. 두찻길밖에 안 되는 한길이라지만, 읍내로 이어지는 시골길에 접어들면 ‘오가는 자동차가 아주 적어’도 풀벌레나 멧새나 개구리가 마음껏 노래하지 않습니다. 그예 쥐죽은 듯한 소리라고 할까요.
읍내에 닿으면, 시골자락이라 하더라도 여느 자연 소리를 들을 수 없습니다. 다른 큰 도시처럼 귀를 쩌렁쩌렁 울리면서 따갑게 퍼지는 소리까지는 아니나, 보드라우면서 맑은 소리가 이곳 읍내를 감돌지 않습니다. 자동차가 오가고, 가겟집에서 소리가 흘러나오며, 뜻없는 사람들 뜻없는 말소리가 울려퍼집니다.
.. “당신은 받은 게 그리 많음에도 왜 행동하지 않아? … 진리를 아는 것은 그것을 큰 소리로 말하는 데 있지 않아. 그건 생활양식에 있는 거야.” … “영혼이 어느 정도 무감각해지고 어떤 심연의 어둠에 빠져야 주위에 일어나는 일을 의식하면서도 기뻐할 수 있을까?” … “내가 한 말 모두를 당신이 계속 의심한다면 내가 무슨 증거를 대도 당신은 그걸 알 수 없거나 의심할 거야.” .. (165, 170, 194, 262쪽)
골목동네에서 살던 때를 떠올립니다. 고향집 인천에서든, 옆에 붙은 서울에서든, 이러한 데에서 지낼 때에는 자연이 나누는 소리를 한 번도 듣지 못했습니다. 언제나 너무 고요했습니다. 깊은 밤 아무런 자동차가 오가지 않을 때조차 풀벌레라도 울어 주는 소리 하나 들리지 않았습니다. 달빛이나 별빛이 흐르는 소리를 들을 수 없는 도시입니다. 달빛조차 볼 수 없고 별빛조차 느낄 수 없으니, 달빛소리나 별빛소리를 어떻게 듣겠어요. 가끔 비둘기 소리를 듣는다거나 참새 소리를 듣지만, 이나마 들을 수 있으면 참 고마운 노릇입니다. 거의 하루 내내 자동차 시끄러운 소리에다가 가겟집 소리에다가 뜻없는 말소리만 가득합니다. 사람이 사람다이 살아가며 나눌 사랑어린 소리를 들을 수 없습니다.
누군가 귀에 대고 “사랑해.” 하고 속삭인대서 사랑어린 소리가 되지 않습니다. 사랑어린 소리란 나비 날갯짓 소리입니다. 사랑어린 소리란 바람이 풀잎을 흔드는 소리입니다. 사랑어린 소리란 개구리가 논물에서 헤엄치는 소리입니다. 사랑어린 소리란 도토리가 톡 떨어지며 또르르 구르는 소리입니다.
귀가 있대서 모든 사람이 소리를 듣지 않습니다. 귀가 있지만 소리를 듣는다기보다 소리에 무디어지곤 합니다. 눈이 있대서 모든 사람이 모습을 보지 않습니다. 눈이 있으나 모습을 보기보다 모습에 무뚝뚝해지곤 합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풀내음을 옳게 맡지 못합니다. 요즈음 사람들을 흙내음에 싱그러운 기운을 느끼지 못합니다. 이즈막 사람들은 물내음에 온몸을 정갈히 다스리지 못합니다.
뜬소리이든 막소리이든 두 귀로 얼마든지 주워담을 수 있습니다. 삶소리이든 자연소리이든 두 귀로 마음껏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무엇을 꿈꾸고 어디를 바라보며 어떤 사랑을 일구려 하느냐에 따라 달라지겠지요. 소리 하나로 이루려는 꿈이 무엇인가에 따라 사람들마다 걷는 길이 바뀌겠지요. 아파서 눈물짓는 지구별 울음소리를 듣는 사람이 있으나, 아프기에 한숨짓는 이웃사람 울음소리에 귀를 막거나 한귀로 소리를 흘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소리는 어디에나 있습니다. 소리는 누구나 듣습니다. 어디에나 있는 소리이지만, 느끼지 못할 만큼 몹시 바쁜 도시자락이요, 이제는 시골자락이래서 느긋하거나 넉넉한 소리결이 되지 못합니다. 누구나 듣는 소리이건만, 들을 때조차 제대로 깨닫지 못할 만큼 아주 힘든 도시자락이면서, 언제부터인가 시골자락마저 포근하거나 따사로운 소리마디가 되지 못합니다.
.. “그 사람을 만난 적이 없어요.” “마음으로 감사하다 할 수 있지.” “소리도 없이요? 누가 그걸 듣는다고?” “마음으로 듣는 사람은 듣는 법이지.” … “사랑이 들어 올릴 수 있는 자만이 높은 곳에 오를 수 있다네 … 자네와 대화하면서 그 애는 생각을 늦추지 않고 오히려 더 빨리 했다네.” … “교만은 부자연스러운 사람의 형상을 만들어. 그게 산 영혼을 가리는 거야. 바로 이 때문에 과거의 철학자들과 오늘의 천재들이 별반 짓는 게 없는 거야. 첫발을 내디뎠을 뿐인데 자만에 싸여 처음에 받은 걸 다 잃어버리는 거야.” .. (219, 220, 227쪽)
눈으로 보는 사람은 눈으로 봅니다만, 눈으로 보면서도 믿지 않기 일쑤입니다. 마음으로 듣는 사람은 마음으로 듣습니다만, 내 마음에 들리면서도 믿지 않기 일쑤예요. 소리들이 슬프게 눈물을 흘리면서 시나브로 죽습니다.
(2) 이야기 듣기
아나스타시아 두 번째 이야기 《소리내는 잣나무》(한글샘,2007)를 읽습니다. 아나스타시아 이야기를 글로 써서 책으로 내는 블라지미르라는 사람은 이 책에서 더할 나위 없이 ‘바보스러운 사람인 듯’ 나타납니다. 왜냐하면, 블라지미르라는 사람이 하는 짓은 참말 하나같이 바보스럽거든요. 참을 코앞에서 마주할 뿐 아니라 온몸으로 겪으면서도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거짓을 눈앞에서 맞이할 뿐 아니라 온몸으로 치르면서도 옳게 깨닫지 못합니다. 참에 눈멀고 거짓에 속아넘곤 합니다. 참을 뒤로 젖히고 거짓에 손을 담그곤 합니다.
그러나, 블라지미르라는 사람이 바보짓을 일삼는대서 블라지미르라는 사람이 바보이지는 않습니다. 블라지미르라는 사람이 껍데기를 벗기까지는 이런 일을 겪어야 하니까 바보스레 부대낄밖에 없습니다. 바보스레 온몸으로 부딪히면서 깨지거나 넘어지면서 비로소, 좀 늦게 알아챕니다.
잘 살피면, 블라지미르는 ‘좀 늦게 알아채며 뉘우친다’ 하더라도 옳게 받아들이면서 깨닫습니다. 블라지미르처럼 ‘바보스럽지 않다’는 사람들은 처음부터 속아넘어가지 않는다 하지만, 속아넘어가지 않을 뿐, 참다이 살아가거나 올바로 바라보지 못하곤 합니다.
나는 어느 쪽이 더 낫거나 덜 떨어지는지 모릅니다. 어느 쪽을 더 낫다고 여겨야 한다고 느끼지 않습니다. 다 다른 사람들은 다 다른 마음그릇에 걸맞게 다 다른 길을 걸어가면서 다 다른 삶을 다 달리 아름다이 일구는 뜻을 찾기 마련입니다. 러시아에서는 러시아대로 아름다운 삶길을 찾고, 한국에서는 한국대로 아름다운 삶길을 찾으며, 칠레에서는 칠레대로 아름다운 삶길을 찾으면 돼요.
.. “블라지미르, 내가 살 곳은 여기야. 여기에 있어야만 난 나의 소명을 다 할 수 있어. 부모가 지은 사랑의 공간보다 더 큰 힘을 주는 것은 세상에 없어 … 앵두나무는 죽지 않았던 거야. 앵두나무의 생각과 열의, 그리고 감정이 너무나도 순수했고, 그래서 죽지 않은 거야. 누구도 무엇도 순수한 사랑을 없앨 수 없어.” … “더 이상 사람들을 가르칠 필요가 없어요. 아담과 이브의 사과로 유혹은 그만해야 해요. 이제 사람들이 느껴 볼 수 있게 해 주어야 해요. 과거에 사람이 느낀 대로, 사람의 능력이 어땠는지 사람이 누구인지 한 번 느낄 수 있게 해 주어야 해요.” … “새벽의 장관은 감상해야 하는 것이지, 왜 그런지 따지고 캐기 시작하면 황홀한 감동은 사라지고, 남는 것은 아무런 결과도 없고 아무것도 바꾸지 못하는 논리일 뿐이야.” .. (33, 53, 221, 222쪽)
한국땅 곳곳에 고인돌이 있습니다. 한국에서 태어나 살아가는 아이들은 학교를 다닐 때에 고인돌 이야기를 배웁니다. 그러나, 고인돌이 왜 고인돌이요 이 고인돌에 어떠한 빛이 깃들었는가를 가르치지 않으며 배우지 않습니다. 그저 크기를 재고 연대를 따지며 무슨무슨 부족이니 씨족이니 겨레이니 하는 ‘역사’ 지식조각을 그러모을 뿐입니다.
돌이켜보면, 고인돌 하나만 이러하지 않습니다. 역사책에 담기는 이야기는 온통 지식조각입니다. 조각조각 찢긴 지식입니다. 살아가는 슬기나 살아가는 아름다움이나 살아가는 빛줄기를 담은 역사책은 없습니다. 다른 교과서라 해서 이와 같은 틀을 벗어나지 않습니다. 오로지 지식조각으로 이루어지는 교과서이고, 이 지식조각 교과서를 머리에 쑤셔넣겠다는 학교입니다.
옛사람은 왜 고인돌을 빚었는지 헤아리지 못하도록 가로막는 책이고 교과서요 역사이면서 학교입니다. 옛사람이든 ‘오늘사람’이든 ‘앞사람’이든, 서로를 사랑하고 아끼면서 보살피는 참길을 착하게 일구는 나날을 즐기는 이야기가 무엇인가를 돌아보도록 이끌지 않는 책이고 교과서요 역사이면서 학교예요.
어머니는 아기한테 젖을 물립니다. 아기가 커서 젖을 떼면 어머니(이든 아버지이든) 자리에 서는 사람들은 아이한테 밥을 차려 줍니다. 어머니는 아기한테 왜 젖을 물릴까요. 어버이 되는 사람들은 왜 아이들한테 밥을 차려 줄까요.
밥은 왜 먹어야 하나요. 밥을 먹으며 목숨을 잇는 우리들은 무엇을 하면서 살아갈 사람인가요. 어떤 목숨을 내 몸으로 받아들이는가요. 어떤 삶을 내 손으로 일구는가요. 어떤 사람을 사귀려 하는가요. 어느 곳에서 내 보금자리를 곱게 돌보려 하는지요.
.. “손이 사랑으로 땅을 만진 것이지. 기계가 아닌 바로 사람의 손으로 자기 토지의 흙을 다정하게 만져 주었지. 땅은 느꼈어.” … “책은 표지를 잘 만들려면 화가가 있어야 하는데, 마음을 담아내야 하오. 의미와 목적에 맞아야 하오.” … “콘크리트 벽에 싸여 태어나는 자기 아이한테 여자가 줄 게 뭐가 있을까? 그녀는 아이한테 어떤 세상을 준비해 놓았을까? 아이가 태어나 살 세상이 어떤 곳인지 생각이라도 해 봤을까? … 엄마가 창조하고 선사한 이 사랑의 공간에서라면 그 존재는 어떤 것도 무서울 것이 없는 거야 … 모유를 먹는 갓난아기에게 모유와 함께 지난 세월의 깨달음과 지혜를, 심지어는 태초의 것까지 전달할 수가 있는 것이지.” .. (80, 141, 199, 200, 201쪽)
시골마을에서 살아가는 흙일꾼들이 ‘풀베는 기계(예초기)’를 써서 풀을 깎는 모습을 보면 몹시 슬프면서 아픕니다. 풀은 끔찍하게 목덜미가 잘리면서도 풀내음을 남깁니다. 죽음과 두려움이 서리는 풀내음인데, 풀은 참말 풀이라서 죽음과 두려움이 서리는 풀내음이라 하더라도 사람 코에는 푸른 빛깔입니다. 참 대단하지요. 풀은 이렇게 끔찍하게 죽으면서도 푸른 빛깔을 남겨요. 사람은 숨을 거둘 때에 이 흙에 무엇을 남길 만한가요. 사람들은 살아가면서 이 누리에 어떤 빛깔을 아로새기는가요.
풀베는 기계에 목덜미가 잘리는 풀은 ‘기계에 잘려 둘레로 흩뿌려질’ 때에 마치 총알처럼 휭휭 날아가 박힙니다. 풀은 스스로 총알이 되고 싶지 않았을 테지만, 기름을 먹는 기계 칼날에 목덜미가 잘리면서 마치 총알처럼 되고 맙니다. 기계로 풀을 베는 자리 둘레로 지나가던 사람이 이 풀조각 총알을 맞으면 살이 찢기거나 아주 따갑습니다. 기계로 풀을 베는 사람은 한여름에도 두툼한 바지에 두툼한 긴소매 옷을 입으며, 얼굴은 수건이나 가리개를 뒤집어씁니다. 옆에서 누가 소리를 치며 불러도 알아듣지 못합니다. 기계소리가 워낙 크고, 기계에 잘리는 풀이 내는 소리가 대단히 크거든요.
풀약을 먹고 말라죽고 만 길가를 지날 때면 언제나 죽음이 번진 냄새를 맡습니다. 기계에 목덜미가 잘린 풀밭을 지날 때에도 노상 죽음이 퍼진 냄새를 맡습니다. 낫으로 풀을 베거나 호미로 풀을 캔 자리를 지날 때에는 죽음내음을 맡지 않습니다. ‘손으로 만진 땅’과 ‘기계로 만진 땅’은 땅거죽부터 느낌이 사뭇 달라요.
.. “잣나무도 같아. 느끼고 이해하는 사람만이 많은 걸 들을 수 있는 거야 … 하지만 그 안락이란 오류고 허상이야. 사람은 세상의 로봇이 되고 말아. 삶의 본질을 사색하고 다른 사람들의 말을 들어줄 시간이 항상 부족해. 자기 삶에 대해서도 숙고할 시간이 없어. 사람은 프로그램된 로봇과 같은 거야. 지금 당신은 직접 눈과 귀로 보고 듣지만 믿지는 못하고 있어 … 사랑하려면 먼저 이웃을 알아야 해. 모르는 사람을 사랑할 순 없지 … 지구의 한편에서 기후변화가 일어나면 다른 곳으로 이동하라는 신호라고 받아들였지. 그곳이 쉴 수 있게 … 자연과 달리 이런 매커니즘, 기계들은 스스로 존재하지 못해. 자신을 재생산할 수 없는 것은 물론이고, 고장이 나면 나무와 달리 스스로 복원되지도 않아. 때문에 이 기계장치를 서비스하기 위해서는 많은 사람들이 필요했고, 사실상 많은 사람들을 바이오로봇으로 만들어 버렸어. 바이오로봇은 진리를 스스로 깨닫는 능력을 상실했기 때문에 조종이 아주 쉬워.” .. (247, 250, 254, 256쪽)
아나스타시아 이야기 둘째 권을 읽으면서 곰곰이 되짚습니다. 아버지라는 자리에서 살아가는 몸으로 돌아보자면, 나는 우리 두 아이가 태어나서 자라야 할 만한 사랑스러운 보금자리를 옳게 건사하지 못했습니다. 아이들이 어떤 보금자리에서 새 목숨을 즐거이 누리도록 해야 하는가를 참다이 다스리지 못했습니다.
오늘날 거의 모든 사람들이 ‘아이들이 태어나서 살아갈 집’을 참다이 살피지 않는대서, 내가 참다이 살피지 않은 일을 둘러댈 수 없습니다. 다른 여느 사람들을 슬프게 바라보기 앞서, 나는 나부터 내 삶을 슬프게 바라보아야 합니다. 슬픈 내 삶을 옳게 깨달아, 기쁜 내 삶으로 다시 태어나도록 이끌어야 합니다.
(3) 사랑 듣기
사람을 살찌우는 밥은 가공식품이 아닙니다. 사람을 살찌우는 밥은 사랑어린 밥입니다. 사랑어린 손길로 사랑어린 ‘목숨 깃든 먹을거리’를 손질해서 마련한 밥일 때에 비로소 사람을 살찌울 수 있습니다.
‘어머니 손맛’이나 ‘맛집 멋집’이 사람을 살찌우지 않습니다. 사랑어린 손길로 지은 밥일 때에 목숨을 새로 짓습니다. 어머니가 차려 주든 아버지가 차려 주든, 또 할머니가 차려 주든 할아버지가 차려 주든, 사람을 살찌우는 밥이라 할 때에는 반드시 사랑이 어려야 합니다. 미움이든 시샘이든 꿍꿍이셈이든 깃들어서는 안 됩니다. 돈벌이 꾀하려는 마음이든 이름값 높이려는 마음이 깃들어서는 안 됩니다. 내 밥솜씨를 자랑하려는 밥차림이란 사람을 살찌우지 못합니다. 멋들어진 밥집으로 모셔서 밥 한 끼니 올린다 해서 사람을 살찌우지 못해요.
.. “대부분의 사람들은 연애소설이나 추리소설을 주로 읽어. 왜 그렇지?” “그건, 그런 책은 읽으면서 생각할 필요가 거의 없기 때문이야. 성경은 깊이 생각하며 읽어야 하고, 여러 문제에 대해 스스로 답해야 해.” .. (65쪽)
생각을 하면서 살아야 하고, ‘우리가 품어야 할 생각’에는 꼭 사랑이 감돌아야 합니다. 그러니까, ‘그냥 생각을 하면서 살아야’ 할 사람이어서는 산 목숨이 아닌 죽은 목숨입니다. ‘사랑이 감도는 따사롭고 너그러운 생각을 하면서 살아야’ 비로소 산 목숨이요 산 사람입니다.
깊이 생각한대서 깊다 할 만한 생각을 얻지 않습니다. 사랑스레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사랑스레 널리 헤아려야 합니다. 사랑스레 따사로이 껴안아야 합니다. 사랑스레 글줄을 적바림해야 합니다. 사랑스레 붓질을 하고, 사랑스레 사진기 단추를 눌러야 합니다.
사랑스레 부를 노래요, 사랑스레 출 춤입니다. 사랑스레 껴안을 옆지기요, 사랑으로 품에 안는 아이들입니다.
도시에서는 어쩔 수 없이 자동차를 타거나 전철을 탑니다. 이러한 탈거리를 몰아야 한다면, 힘들겠지만 사랑을 실어 운전대를 잡아야 합니다. 이러한 탈거리에 몸을 실었으면 내 사랑을 고이 펼치면서 찻삯을 치러야 합니다. 셈틀 자판을 또닥거리며 일하는 회사원이라 하더라도 셈틀 단추를 켜서 불을 넣을 때에 내 따순 사랑을 실어야 합니다. 따순 사랑이 없다면, 텃밭을 일구면서도 살진 푸성귀를 얻지 못합니다. 따순 사랑이 없을 때에는, 제아무리 멋들어진다는 사랑노래를 부른다는 이름난 노래꾼이라 하더라도 가슴으로 벅차오르는 기쁨을 들려주지 못합니다.
.. “택일이라고요? 아이는 아무 때나 나오잖아요.” “아무렇게나 잉태하니까 아무 때나 나오지. 엄마는 언제고 아기의 탄생을 당기거나 늦출 수 있어.” … “그녀한테 왜 내가 필요하죠? 실험용? 무슨 목적이죠?” “그 애는 그냥 사랑한 거야, 블라지미르. 언제나 그렇듯 진정으로. 자네가 사는 세상에서 여자에게 기쁨을 주는 그런 사람을 택하지 않아서 그 애는 행복하다네. 우월한 지위에 자신을 놓지 않은 것일세. 자기가 다른 모든 여자와 같은 것이 기쁘다네.” .. (187, 191쪽)
아나스타시아 이야기를 읽는 사람들이 ‘아나스타시아가 이 이야기책에 담은 사랑’을 느끼면서 ‘사랑을 느낀 내가 내 둘레 살붙이부터 내 이웃과 동무 모두한테 예쁘게 사랑을 나누는 길’을 잘 살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사랑을 나누려 할 때에는 참말 사랑을 나눕니다. 사랑을 나누려 하지 않았으면 언제까지나 사랑을 나눌 수 없습니다. (4344.9.6.불.ㅎㄲㅅㄱ)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