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혼의 시선 - 앙리 카르티에-브레송의 사진 에세이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 지음, 권오룡 옮김 / 열화당 / 200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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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찍는 사진, 읽는 마음, 따순 사랑
 [찾아 읽는 사진책 49] 앙리 카르티에-브레송, 《영혼의 시선》(열화당,2006)



 앙리 카르티에-브레송 님이 사진을 어떻게 바라보면서 찍었는가 하는 짤막한 이야기를 담은 책 《영혼의 시선》(열화당,2006)을 읽습니다. 브레송 님은 “사진을 찍는다는 것은 달아나는 현실 앞에서 모든 능력을 집중해 그 숨결을 포착하는 것이다(15쪽).” 하고 말합니다. 언제나 내가 두 발을 디딘 땅에서 내 모든 넋과 기운과 사랑과 땀방울과 말미를 바쳐서 일구는 사진 한 장인 셈입니다.

 참으로 마땅합니다. 글 한 줄을 쓸 때이든 그림 한 장을 그릴 때이든 노래 한 가락을 부를 때이든 춤 한 사위를 출 때이든 똑같이 마땅합니다. 언제나 모든 넋을 바치고 모든 기운을 들이며 모든 사랑을 쏟는 한편 모든 땀방울을 흘리면서 모든 말미를 깃들이는 삶입니다.

 사진을 찍으려 하는 사람 누구나 사진을 쉽게 찍을 수 없습니다. 내 온마음을 바치지 않았으면 쉽게 찍을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내 온마음을 바치는 사람은 사진을 쉽게 찍습니다.

 사진길을 걸으려 하는 사람 모두 사진길을 걱정없이 걸을 수 없습니다. 내 온몸을 쏟아붓지 않았으면 사진길을 걱정없이 걸을 수 없습니다. 곧, 내 온몸을 쏟아붓는 사람은 사진길을 걱정없이 걷습니다. 다만, 사진길을 걱정없이 걷는대서 먹고사는 길이 다 풀리지 않아요. 때로는 먹고살기 힘겹고, 어느 때에는 밥을 굶으며, 어느 때에는 외롭거나 쓸쓸합니다. 그렇지만 내 온몸을 쏟아붓는 내 사랑하는 삶길을 일구는 사진일 때에는 가난이나 외로움이란 아무것 아닙니다. 오히려 좋은 벗입니다. 살가은 길동무예요.

 브레송 님은 “나는 기쁨을 위해 일했고 나 자신의 즐거움을 위해 일했다(21∼22쪽).” 하고 말합니다. 기쁘게 살아갈 사람들이고, 즐겁게 일할 사람들이에요. 꼭 사진을 찍기에 기쁘게 살지 않습니다. 반드시 사진기를 쥐었대서 즐거이 일하지 않아요. 호미를 쥐어 밭을 일구든, 펜이나 자판을 가까이하면서 회사일을 보든, 언제나 마찬가지입니다. 나 스스로 내가 선 일터에서 기쁘게 살아가면 됩니다. 나 스스로 내가 두 발 디딘 보금자리에서 예쁘게 어울리면서 즐거이 일하면 돼요.

 기쁘게 살지 않을 때에는 기쁘지 않은 사진만 만듭니다. 기쁘게 살 때에는 아주 홀가분하면서 손쉽게 기쁨을 나누는 사진을 일굽니다.

 사진은 억지로 만들지 못합니다. 사진은 홀가분하게 찍습니다. 사진은 남달리 만들지 못합니다. 사진은 내가 살아가는 결과 무늬 그대로 곱게 찍습니다.

 사진은 전문가들끼리 키득거리는 꼼수가 아닙니다. 사진은 대학교 사진학과를 다니거나 나라밖 사진학교를 다닌 사람들끼리 꼼지락거리는 손재주가 아닙니다. 사진은 이름난 스승한테서 배우며 내 이름을 높이는 가방끈이 아닙니다.

 사진은 오직 내 사랑을 바친 삶입니다. 내 사랑을 바친 내 삶이 그대로 사진으로 나타납니다.

 사진을 억지로 만든다면, 내 삶부터 억지로 만들듯 꾸미는 삶이기 때문입니다. 내 삶부터 꾸밈없을 뿐 아니라 수수할 때에 다큐멘타리라 하는 사진이 제대로 꽃을 피웁니다. 내 삶부터 살가운 손길로 이웃하고 어깨동무를 할 때에 상업사진이나 패션사진이 아리땁게 꽃을 피웁니다.

 누가 돈을 많이 준다 하면서 부탁하는 사진이기에 만듦사진이 되지 않습니다. 돈을 안 받고 찍어 주는 사진이기에 살갑거나 부드럽거나 착하거나 좋은 사진이 되지 않아요. 내 삶결 그대로 사진입니다. 내 삶결이 좋아야 내 사진이 좋습니다. 내 삶결이 보드라운 꽃송이여야 내 사진이 보드라운 꽃송이가 돼요.

 브레송 님은 “사진을 찍는 동안이나 암실에서 잔재주를 피워 사진을 조작하려 해서는 안 된다. 이런 속임수들은 안목 있는 사람들에게는 여실히 드러난다(26쪽).” 하고 말합니다. 잔솜씨는 누구나 알아챕니다. 잔재주는 누구나 느낍니다. 밥을 할 때에 어떻게 밥을 하는가는 밥술을 한 번 뜨면 누구나 알아챕니다. 요리사가 차리는 밥이든 어머니가 차리는 밥이든 할아버지가 차리는 밥이든 아이들이 차리는 밥이든, 밥을 차리면서 사랑과 꿈과 믿음과 땀을 어느 만큼 쏟았느냐에 따라 밥맛이 달라져요.

 사진맛이란, 또 사진결이란, 또 사진삶이란, 나 스스로 내 사랑과 꿈과 믿음과 땀을 들이는 만큼 거듭납니다. 잔재주로는 잔재주 사진만 태어납니다. 잔솜씨로는 잔솜씨 사진만 만들고 말아요.

 브레송 님이 들려주는 “나는 인위적인 초상사진보다 여권사진을 찍는 사진사의 진열장에 겹겹이 쌓여 있는 조그만 증명사진들이 훨씬 더 좋다. 이런 사진들은 언제나 찍힌 사람들에 대한 궁금증을 불러일으키고, 사람들이 얻길 바라는, 시적 동일시 대신 기록사진으로 남은 인물의 신분을 증명하고 있다(30쪽).” 같은 말마디라든지 “암실에서 확대기를 통해 네거티브 필름을 재단하는 식으로 재구성한다고 해서 처음 찍었을 때 구성이 빈약한 사진이 살아나는 경우는 거의 없다(33쪽).” 같은 말마디를 가만히 되씹습니다. 번역을 한결 보드라이 했으면 얼마나 좋았으랴 싶지만, 이 또한 사진찍기 삶읽기하고 매한가지입니다. 브레송 님 책 《영혼의 시선》을 한국말로 옮긴 분 스스로 이 땅에서 누구와 이웃으로 사귀면서 어떠한 삶을 일구느냐에 따라 ‘어떤 한국말로 옮’겨서 ‘누가 읽도록 하려는 책’인가가 달라지거든요.

 이리하여 “누구나 사진을 찍는 동안 그림을 그리는 것이다(50쪽).” 같은 말마디를 읽으면서 밑줄을 긋습니다. 사진을 찍는 동안 그림을 그립니다. 그림을 그리는 동안 내 삶을 사랑합니다. 내 삶을 사랑하는 동안 내 꿈을 이룹니다. 내 꿈을 이루는 동안 내 착한 아이를 쓰다듬는 내 손길을 따뜻하게 돌봅니다.

 “비행기는 너무 빨라서 한 나라에서 다음 나라로 이동할 때 일어나는 점진적인 변화를 볼 수 없다(59∼60쪽).” 같은 말마디를 읽을 때에도 밑줄을 긋습니다. 좋으니까 밑줄을 긋습니다.

 나도 비행기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나는 고속철도 또한 좋아하지 않습니다. 나는 자동차마저 좋아하지 않습니다. 나는 자전거를 좋아합니다. 나는 내 두 다리를 사랑합니다. 언젠가 나이가 많이 들어 자전거를 탈 수 없거나 두 다리로 걸을 수조차 없이 된다면, 이때에는 한 자리에 가만히 누워 지내겠지요. 누워서 지내야 한다면 누운 자리에서만 둘레를 살필 수 있겠지요. 그런데, 이렇게 누워서 지내야 한다면, 누운 채 바라보는 내 둘레 삶자락을 사랑하면 됩니다. 아직 두 다리가 튼튼해서 자전거를 달릴 수 있다면, 자전거로 달리며 만나는 내 삶터 둘레 이웃 보금자리를 가만히 살피면서 사랑하면 돼요.

 “앙드레 케르테스가 셔터를 누를 때마다, 나는 그의 심장이 뛰는 것을 느낀다(87쪽).” 하고 적바림하는 브레송 님입니다. 그래요, 브레송 님은 앙드레 케르테스 님이 사진기 단추를 누를 때마다 벌떡벌떡 일어서듯 쿵쾅거리는 심장소리를 느낍니다. 나는 브레송 님이 한 줄 두 줄 살며시 적은 글월을 읽으면서 손에 펜을 쥔 브레송 님 뜨거운 핏줄기를 느낍니다.

 피로 쓰는 글이고, 피로 그리는 그림이며, 피로 찍는 사진입니다. 피를 바쳐 부르는 노래요, 피를 바쳐 추는 춤이며, 피를 바쳐 이루는 삶입니다.

 내 마음으로 바라보는 사진입니다. 내 사랑이 깃든 손발로 씩씩하게 일하며 일구는 삶을 좋아하는 내 마음으로 바라보는 사진입니다. (4344.9.1.나무.ㅎㄲㅅㄱ)


― 영혼의 시선 (앙리 카르티에-브레송 글,권오룡 옮김,열화당 펴냄,2006.9.20./13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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