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늑대의 돼지꿈
다시마 세이조 그림, 기무라 유이치 글, 박이엽 옮김 / 현암사 / 2002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늑대는 늑대답게 꿈을 꿉니다
[다 함께 즐기는 그림책 90] 다시마 세이조·기무라 유이치, 《늑대의 돼지 꿈》(현암사,2002)
아버지는 새벽 두 시나 세 시 무렵이면 잠에서 깹니다. 이때에 일어나 글쓰기를 하지 않으면 하루 내내 글쓰기를 조금도 할 수 없습니다.
아버지는 새벽 두어 시에 일어나 글쓰기를 하면서 틈틈이 첫째 아이가 뻥뻥 걷어차는 이불을 다시 덮어 줍니다. 이리 돌아눕고 저리 구르며 이불이 이리저리 벗겨집니다. 살며시 덮었어도 1분이 채 지나지 않아 이불을 걷어차기 일쑤입니다. 어쩜 이럴 수 있나 싶지만, 자다 보면 이럴 수 있겠지요.
새근새근 자던 아이는 갑작스레 잠꼬대를 합니다. 꿈결에 터져나오는 말입니다. 예쁜 말로 잠꼬대를 하면 지난 하루 예쁘고 즐겁게 놀았다는 뜻이고, 미운 말로 잠꼬대를 하면 지난 하루 아버지와 어머니가 즐거이 놀아 주지 못했다는 뜻입니다.
새벽녘, 두어 시간 글쓰기를 하며 뻣뻣해지는 몸을 아이 옆에 살짝 눕힙니다. 드러누운 채 손을 뻗어 작은 공책을 집습니다. 문득 떠오르는 말 몇 마디를 작은 공책에 적바림합니다. ‘사진은 많은 일을 할 수 있고, 많은 일을 할 수 없습니다. 사랑은 할 수 있는 일만 끝없이 많습니다.’
우리 식구한테 돈이 넉넉하다면, 이 돈으로 꽤 많은 일을 즐기거나 누리거나 할 수 있겠지요. 우리 식구한테 돈이 얼마 없으니, 이것도 못하고 저것도 못합니다. 우리 식구한테 돈이 얼마 없으나 서로 사랑하며 아끼는 마음이 가득하다면, 우리 네 사람은 못할 일은 한 가지 없이 온통 즐거이 누리거나 나눌 일이 가득하리라 느낍니다.
집이 없거나 옷이 없다면 꽤나 고달프겠지요. 그렇지만, 집은 있되 사랑이 없다면, 옷은 많되 사랑이 없다면, 이러한 삶은 얼마나 삶답다 할는지 모르겠습니다. 이름은 드높으나 사랑이 없으면, 힘은 세다지만 사랑이 없으면, 책을 많이 읽었되 사랑이 없으면, 이러한 사람들 삶은 얼마나 즐겁거나 기쁘거나 보람찰는지 궁금합니다.
.. 늑대는 놓쳐 버린 새끼 돼지를 머릿속에 그려 보았어요. “아, 맛있는 새끼 돼지. 그놈을 꼭 먹어야 해.” 늑대의 뱃속에서는 꼬르륵 소리가 났어요 .. (6쪽)
새벽에 둘째 오줌기저귀를 갈며 생각합니다. 지난 2008년부터 네 해째 기저귀 갈이와 기저귀 빨래로 하루를 보냅니다. 참말 어느 하루라도 손빨래를 쉰 날이 없습니다.
누군가는 말합니다. 내 큼지막한 가방에 아이 기저귀가 잔뜩 담기는데, 이 잔뜩 담긴 천기저귀는 더 줄지 않고 더 늘지 않는다고. 네, 늘 그대로입니다. 이 가방에 천기저귀 아닌 종이기저귀가 담겼다면, 가방은 차츰 가벼워질 수 있겠지요. 가벼워지다가 다시 무거워지겠지요. 그리고, 이 가방 둘레에는 비닐봉지에 담긴 쓰레기덩이가 차츰 늘 테고요.
종이기저귀를 쓰는 집에서는 기저귀 값을 걱정하기도 합니다. 기저귀는 따로 다른 쓰레기봉투에 담아 버려야 하니, 버릴 때에도 돈이나 품이 꽤 듭니다. 종이기저귀를 쓸 때에는 물휴지도 함께 써야 합니다. 물휴지 값 또한 만만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종이기저귀를 쓰며 드는 돈이나 품이라든지, 종이기저귀 못지않게 써야 할 물휴지 때문에 들어야 할 돈이나 품을 넘어 생각할 노릇입니다. 종이기저귀나 물휴지는 갓난쟁이 몸에 얼마나 좋을까요. 자연에서 얻어 만든 종이기저귀나 물휴지인가요. 화학약품이나 화학소재로 만든 종이기저귀나 물휴지가 아닌가요.
화학제품인 종이기저귀와 물휴지가 버려질 때에는 또 얼마나 끔찍한 쓰레기가 새로 생기는 셈인지요. 이 끔찍한 쓰레기는 어디에 버리고 이 땅은 얼마나 더러워질는지요. 서울 옆에 있는 광역시 인천은 서울사람이 쓸 전기를 만드는 발전소가 있고, 서울사람이 버리는 쓰레기를 쌓는 쓰레기터(매립장)가 있습니다. 서울사람이 쓸 웬만한 공산품을 만드는 공장은 인천에 있습니다. 서울사람이 쓸 웬만한 수입품을 들여올 항구 또한 인천에 있습니다. 서울사람이 버리는 똥물은 온통 인천으로 흘러들어 인천에서 거르든 어찌하든 하고 나서 인천 앞바다로 빠져나가게끔 합니다. 서울사람은 서울사람이 싼값으로 물건을 손쉽게 사들여 쓰고 버리도록 이루어진 얼거리가 무엇인가를 깨닫지 않습니다. 가르치는 사람 또한 없습니다. 그저, 많이 벌고 많이 쓰며 많이 누릴 뿐입니다.
나는 이 나라 사람들 누구나 걱정스럽지만, 누구보다 서울사람이 걱정스럽습니다. 서울사람 다음으로는 부산사람이 걱정스럽고, 다음으로는 대구사람과 광주사람과 대전사람이 걱정스럽습니다. 무엇이든 돈만 벌어 돈만 써야 하는 톱니바퀴에 얽매여 살아가느라, 사랑도 사람도 삶도 옳게 들여다보거나 느끼기 어려운 이 사람들이 걱정스럽습니다. 돈벌이와 돈쓰기에 바쁜데 무슨 꿈을 꿀 수 있으려나요.
.. “흥, 그 새끼 돼지에 비하면 네 놈들은…….” 늑대는 토끼 따위는 거들떠보지도 않고 씩씩하게 언덕 위로 올라갔어요 .. (10쪽)
그림책 《늑대의 돼지 꿈》을 읽습니다. 꿈에서 새끼 돼지 한 마리 맛나게 먹을 뻔하던 늑대는 잠에서 깬 뒤에 입맛을 다십니다. 꿈에서 새끼 돼지를 잡아먹었다 하더라도 배부를 일이 없건만, 괜히 입맛을 다십니다. 잠에서 깼으니 배가 고픈 늑대는 먹이를 찾아나섭니다. 늑대한테 먹이가 될 여린 짐승들은 멧자락에 널렸습니다. 토끼이든 사슴이든 팔만 뻗으면 닿을 곳에 널렸습니다.
늑대는 토끼이든 사슴이든 아랑곳하지 않습니다. 멀리 날지 못하는 닭이든 병아리이든 쳐다보지 않습니다. 그저 꿈에서 본 새끼 돼지 오동통한 엉덩이를 떠올리고, 살진 허벅지를 되새깁니다.
.. 그때 문득 늑대의 마음속에 어떤 생각이 떠올랐어요. “가만 있자. 아까 본 그 새끼 돼지가 이렇게 작았나?” 늑대는 고개를 갸웃했어요 .. (29쪽)
꿈을 꾸는 늑대는 아름답습니다. 배는 곯고 뱃가죽은 등짝에 들러붙지만, 꿈을 꾸는 늑대는 예쁩니다. ‘귀엽고 작은’ 짐승을 잡아먹으려는 늑대가 뭐 아름답고 어디가 예쁘냐 묻겠지요. 그렇지만, 늑대는 꿈을 꾸기에 아름다우며 예쁩니다.
바보스러운 짓을 꿈꾸지 않으니 아름답습니다. 이를테면, 범이 되겠다느니 곰이 되겠다느니 사람이 되겠다느니 하는 어리석은 꿈을 꾸지 않으니 아름답습니다. 전투기를 만들겠다느니 탱크를 만들겠다느니 기관총을 만들겠다느니 하며 얼토당토않은 꿈을 꾸지 않으니 예쁩니다.
늑대는 그예 저 고픈 배를 채울 맛난 먹이만 헤아립니다. 저 고픈 배를 채울 맛난 먹이로 흐뭇하고, 다른 어느 것도 다치게 하지 않습니다.
늑대한테 이제 이슬만 먹고 살라 바랄 수 없습니다. 늑대한테 닭을 함부로 잡아먹지 말고 다리 한 짝만 뜯어 먹으라 할 수 없습니다. 늑대는 늑대로 태어난 삶을 알맞게 꾸려야 합니다. 사람은 사람으로 태어난 삶을 아름다이 돌보아야 합니다. 오이는 오이로 태어난 삶을 사랑스레 가꾸겠지요. 뽕나무는 뽕나무답게 살면서 뽕잎을 누에한테 기꺼이 내주겠지요.
꿈을 꾸면서 아름답고, 꿈을 돌보면서 예쁘며, 꿈을 이루면서 즐겁습니다. (4344.8.26.쇠.ㅎㄲㅅㄱ)
― 늑대의 돼지 꿈 (다시마 세이조 그림,기무라 유이치 글,박이엽 옮김,현암사 펴냄,2002.4.10./12000원)
(최종규 . 20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