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약
옆지기가 한 주쯤 아무 일을 하지 말고 어디 나들이를 가서 푹 쉬라고 이야기를 한다. 아버지는 너무 힘든 나머지 이런 말을 들으면서도 무어라 대꾸를 하지 못한다. 저녁을 먹으며 조금씩 기운을 차리면서도 아무런 대꾸를 못한다. 그야말로 그냥 쓰러져야 하는데, 살붙이 셋이 고단히 잠든 깊은 저녁, 옆지기 말을 되새기면서 조금 더 잠을 미루어 보기로 한다. 오늘은 저녁밥을 차리기 앞서 왼손목이 다시 아프며 아무것도 집을 수 없었으나, 아프더라도 집일을 안 하면 누가 하겠느냐 생각하면서 둘째 기저귀를 빨고 밥을 차리며 설거지를 했다. 손목이 참말 대단히 아팠지만, 그래 아파서 어쩌겠니 생각하며 비눗물과 함께 흘려보냈다.
저녁을 다 먹고 나서 둘째가 잠투정을 할 때에 한 번 안기도 한다. 그렇지만 손목이 몹이 아프니까 옳게 안지 못한다. 옆지기가 아기를 이리 안으면 어쩌냐고 말하지만, 왼손목이 너무 아프니까 옳게 안을 수 없다. 조금 앞서 첫째가 쉬가 마렵다며 끙끙대며 깨어나기에 얼른 바지를 내려 오줌그릇에 앉힌다. 오줌을 다 눈 다음 오늘은 처음으로 첫째를 품에 안아서 한동안 토닥이고 나서 자리에 눕힌다. 왼손목이 또다시 맛이 갔기에 아이를 안으면 몹시 엉성한 매무새가 될 뿐 아니라 아프다. 전기가 벼락처럼 온다. 그렇지만 옆지기한테 하루 내내 아이를 돌보라 할 수 없을 뿐더러, 옆지기가 아이들을 씻기도록 할 수 없다.
저녁을 하면서 생각했다. 이렇게 힘들고 괴롭다 하더라도 밥을 하는 자리에서도 이러한 마음이라면 이러한 마음이 스며드는 밥을 먹으면 살붙이들 마음이 좋을 수 없다고.
감자와 무와 당근과 호박과 버섯과 양파와 시금치를 채 썰면서 몇 번이나 손을 자를 뻔했다. 아차 하고 겨우 손가락이나 손톱을 안 베었으나, 밥을 하는 사람으로서 도마질 소리가 그닥 듣기 좋지 않았다. 그러나, 옆지기가 들려준 말을 자꾸자꾸 다시 생각하고 거듭 돌이켰다. 나보고 쉬라고? 나한테 이레나 말미를 주겠다고?
말로라도 들려주면 좋을 노릇이리라. 아니, 말로라도 들려주기에 고마운 노릇이다. 나하고 옆지기가 서로 달라, 내가 옆지기처럼 몸과 마음이 많이 아파 아무 집일을 못하는 형편이라면, 나부터 내 옆지기한테, 여보 모쪼록 좀 쉬어요 어디 좀 바람 좀 쐬고 와요, 하고 이야기했으리라 생각한다. 내 옆지기 몸과 마음을 돌이킬 때에 아무런 집일이든 아이돌보기이든 하기 힘들 테지만, 이렇게 말할밖에 없겠다고 느낀다.
옆지기가 걱정스레 마음을 쓸 만큼 나 스스로 내 하루를 옳게 건사하지 못했다. 내가 남자라서 그럴까. 남자는 집일을 도맡을 때에 참답거나 착하기 어려울까. 앤서니 브라운 님 그림책 《우리 엄마》를 읽으면, ‘우리 엄마’는 ‘사장님이 될 수 있었지’만 사장님이 안 되고 ‘우리 엄마가 되었다’고 한다. 그러면, 나는 어떠한가. 나는 내 두 아이한테 ‘우리 아빠’가 되는 사람인가, 잔소리꾼이나 꾸지람쟁이가 되는 사람인가.
첫째만 있었을 때에, 또 첫째와 둘째를 집에 두고 읍내에 혼자서 장마당 마실을 다녀올 때에, 두 아이는 퍽 제 어머니 말을 잘 듣는다고 느낀다. 여느 때와 달리 한 사람이 둘을 맡아 돌보는 줄을 어떻게든 느끼지 않느냐 생각한다. 또한, 어머니가 집을 비우고 아버지 혼자 두 아이를 돌볼 때에도 두 아이는 아버지 말을 참 잘 듣는다.
착한 첫째가 제 어버이 힘든 짐을 잘 나누어 맡는다고 느낀다. 귀여운 둘째도 어머니이든 아버지이든, 어떻게 저를 예뻐 하는지를 잘 받아들이는구나 싶다. 그러나, 아버지는 이레이든 고작 하루이든 혼자 말미를 얻어 집일을 잊고는 푹 쉬고프지 않다. 옆지기한테 집일을 도맡기면서 쉴 생각이 없다. 옆지기가 들려준 이야기를 그저 보약으로 삼는다. 옆지기가 들려준 말을 곰삭이는 동안, 아프고 저려 움직일 수조차 없던 왼손목이 용케 움직이고 힘이 들어간다. 빨래도 설거지도 짐 들기도 못할 줄 알았더니, 보약을 먹고 나서 다시금 움직일 수 있다.
보약은 딱 한 번만 듣는다. 보약은 꼭 한 번으로 끝이다. 이제 하루를 잘 자고 새 하루를 맞이하고부터는 첫째 아이를 꾸짖지 말자고 다짐한다. 잠든 아이 등을 쓸어내리면서 이듬날부터는 너를 나무라지 않겠다고 말한다. 보약을 먹은 아버지는 이 보약 기운이 얼마나 갈는 지 모를 노릇이지만, 참말 우리 두 아이한테 바라고 빌며 꿈꾸듯, 나부터 스스로 착하고 참다우며 곱게 이 집에서 살아가자고 생각한다.
이제 마지막으로 생각한다. 내가 아픈 사람으로 지낸다 할 때에, 나는 내 고운 옆지기한테 보약을 줄 만한 그릇이 되는 어버이였을까. (4344.7.20.물.ㅎㄲㅅ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