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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멀미 ㅣ 사진이 있는 에세이 2
차은량 지음 / 눈빛 / 2009년 5월
평점 :
꽃을 보며 열매를 못 맺고 멀미가 난다면
[책읽기 삶읽기 61] 차은량, 《꽃멀미》(눈빛,2009)
사진을 찍는 아버지하고 함께 살아가는 아이는 사진찍기를 놀이처럼 즐깁니다. 아무 손전화나 아이 손에 집히면 사진기 노릇을 합니다.
사진찍기 놀이를 즐기는 아이는 사진찍기를 문화나 예술로 여기지 않습니다. 심심할 때에 갖고 노는 사진기로 여기고, 아버지가 찍은 사진을 들여다보는 사진기로 생각합니다. 때때로, 망가져서 못 쓰는 필름사진기를 들고 사진찍기 놀이를 합니다. 아이로서는 사진을 찍어 어떤 그림을 맺어야 사진이 되지 않습니다. 사진기를 쥐어 함께 놀 수 있으면 좋을 뿐입니다.
아이한테 자그마한 디지털사진기를 사 줄까 어림해 보지만, 선뜻 장만하지 못합니다. 곧장 살림돈부터 팍팍하기 때문입니다. 아이가 오래도록 갖고 놀 만한 작은 사진기 한 대를 선뜻 장만할 만큼 살림이 넉넉하지 못합니다. 사진찍기를 하는 아버지 또한 필름사진을 찍을 때에 쓸 필름값을 대기 벅차 쉬엄쉬엄 찍습니다. 필름사진 한 장을 찍을 때마다 돈이 얼마나 드는가를 느낍니다.
디지털사진을 찍으면서 메모리카드 걱정을 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디지털사진을 찍은 뒤에는 셈틀을 차지하는 파일을 헤아립니다. 앞으로 얼마나 더 찍을 수 있는가를 곱씹고, 셈틀 저장장치가 다 차면 새로 마련할 일을 근심합니다.
.. 아끼던 카메라를 바꿨다. 흔히들 하는 것처럼 업그레이드를 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몇 단계 다운을 시켰다. 작은 카메라 두 대를 거쳐 급기야는 내 처지에 과분한 카메라를 장만한 날부터 일 년 하고도 수 개월이 지나는 동안 카메라의 노예가 되어 간다는 생각을 좀처럼 떨쳐 내지 못했다. 한 개의 렌즈만으로 버티겠다던 애초의 생각은 생각으로만 그치고 여유돈만 생기면 렌즈를 사들였다. 카메라 가방은 점점 덩치가 커지고 가방을 멘 어깨는 장비의 무게로 한쪽이 기울어졌다 .. (28쪽)
사진찍기를 하거나 사진찍기를 하려는 이들은 사진기와 렌즈를 장만합니다. 누군가는 여러 해에 걸쳐 돈을 조금씩 그러모아 장만하고, 누군가는 하루아침에 카드를 긁어 장만합니다. 장만한 장비를 이내 팔고 다른 장비를 갖추기도 합니다. 사진기 회사에서 새로 내놓은 장비로 갈아타기도 합니다. 사진기 몸통과 렌즈를 여럿 갖추기도 합니다.
누군가는 몸통하고 렌즈를 하나만 갖추고, 누군가는 몸통하고 렌즈를 회사에 따라 숱하게 갖춥니다. 몸통과 렌즈를 하나만 갖춘대서 사진을 못 찍거나 잘못 찍거나 엉터리로 찍지 않습니다. 몸통과 렌즈를 숱하게 갖추었기에 사진을 잘 찍거나 훌륭히 찍거나 사랑스레 찍지 않습니다.
사진은 너그러운 사랑입니다. 사진은 내 너그러운 사랑을 담는 그릇입니다.
시를 쓰는 사람한테는 시가 너그러운 사랑이고, 너그러운 사랑을 담는 그릇 노릇을 합니다. 수필을 쓰는 사람한테는 수필 한 꼭지가 사랑이 되고, 너그러운 사랑을 담는 그릇 구실을 합니다.
시를 백 꼭지 쓰자고 다짐하면서 백 꼭지를 써내지 못합니다. 사진을 백 장 찍자고 다짐하면서 백 장을 찍지 못합니다. 부피로 시 백 꼭지를 채우거나 사진 백 장을 채우는 일은 어렵지 않아요. 다만, 내 마음을 드러낼 사랑스러운 시나 사진은 하루아침에 만들지 못해요. 내가 살아가는 결에 따라 차근차근 풀어내기만 합니다.
.. 내게는 사진 실력의 향상을 위해 바쳐야 하는 노력보다 카메라와 렌즈의 무게가 더 견뎌 내기 힘들었다 … 열다섯 살 즈음이었나 보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소리’에 어떤 소리들이 있을까 하는 문제로 단짝 친구 복희와 서로의 의견을 논한 적이 있었다. 노랫소리, 새소리, 물소리, 아가의 옹알이 소리에 이어 장난기가 발동한 내가 ‘엄마가 용돈 주시려고 돈 꺼내는 소리’라고 말하자 복희는 ‘엄마가 밥상 차리는 소리’라고 응수했다. 복희의 말이 끝나는 순간 나는 나의 저속하기 짝이 없는 대답을 물리고만 싶었다. 복희 못지않게 나도 밥상 차리는 소리를 좋아한다는 생각이 뒤늦게 머리를 쳤던 것이다. .. (29, 66쪽)
시를 쓰는 솜씨는 키우지 못합니다. 소설이나 수필을 쓰는 재주 또한 북돋우지 못합니다. 사진을 찍는 솜씨라든지 그림을 그리는 재주 또한 살찌울 수 없어요.
때로는 손재주를 부려 멋들어져 보이는 시나 소설이나 수필이나 사진이나 그림을 얻기도 합니다. 누군가는 빼어난 손놀림으로 그럴듯해 보이는 작품을 빚기도 합니다.
그런데, 멋들어져 보이는 작품을 시라고 일컬어도 될까 궁금합니다. 멋스레 보이는 작품이라 하면 사진이라 할 만한지 궁금합니다.
사진과 수필을 엮은 이야기책 《꽃멀미》(눈빛,2009)를 읽습니다. 사진을 찍고 글을 쓴 차은량 님은 당신 삶결에 따라 사진을 찍고 글을 씁니다. 더 잘난 사진이 아니고 더 못난 글이 아닙니다. 돋보이려 하는 사진이 되지 않고, 내보이려 하는 글이 되지 않습니다.
.. 고춧가루도 있고, 파·마늘도 있고, 마침 지난 조치원 장날 도가에서 사다 놓은 새우젓도 있으니 부추만 있으면 되겠다. 텃밭의 부추는 웃자란 순을 얼마 전 베어 낸 뒤로 아직 먹을 만큼 자라지를 못했다. 휑하니 차를 몰고 면소재지로 나가 부추 한 단을 사면서 김장을 담근다는 소문을 내고 왔다 .. (114쪽)
차은량 님은 당신이 살아온 결을 찬찬히 풀어놓기 때문에, 차은량 님이 사랑스레 살아온 나날을 사랑스러운 글과 사진으로 만날 수 있습니다. 좁쌀뱅이나 꽁생원처럼 보낸 나날은 좁쌀뱅이나 꽁생원다운 글과 사진으로 마주할 수 있습니다.
차은량 님이 자전거를 타면 자전거 이야기가 사진과 글로 녹아들겠지요. 차은량 님이 두 다리로 천천히 걸어다니기를 좋아하면 걷기 이야기가 사진과 글로 스며들겠지요. 차은량 님이 자가용을 씽 몰아 휭 오고간다면 자가용 이야기가 사진과 글로 배어들겠지요.
책을 덮으며 생각합니다. 텃밭을 일구고 김치를 담그며 살림도 돌보는 차은량 님인데, 조치원 장날에 시골버스나 자전거를 타고 오간다면 《꽃멀미》라는 사진수필은 어떤 모양새였을까 궁금합니다. “휑하니 차를 몰고 부추 한 단을 사”는 삶이 아니라 부추가 없으면 텃밭 둘레에서 다른 풀을 뜯거나 멧자락에 들어서 멧나물을 뜯어서 나물김치를 담그는 삶이라면, 《꽃멀미》라는 책이 아니라 ‘꽃소리’나 ‘꽃·새·메’ 같은 책을 내놓았을 수 있겠구나 느낍니다.
스스럼없을 만큼 수수한 사진과 글이지만, 자가용을 휑하니 타고다니는 사람으로서 수수할 뿐입니다. 시골사람다운 수수함이나 살림하는 일꾼다운 수수함이 짙게 드리우지 못한 사진과 글입니다. (4344.6.4.흙.ㅎㄲㅅㄱ)
― 꽃멀미 (차은량 글·사진,눈빛 펴냄,2009.5.20./12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