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 일공일삼 6
페터 헤르틀링 지음, 페터 크노르 그림, 박양규 옮김 / 비룡소 / 1999년 3월
평점 :
절판




 한 사람으로 오롯이 우뚝 서기
 [푸른책과 함께 살기 69] 페터 헤르틀링, 《할머니》(비룡소,1999)



- 책이름 : 할머니
- 글 : 페터 헤르틀링
- 옮긴이 : 박양규
- 펴낸곳 : 비룡소 (1999.3.10.)
- 책값 : 6500원



 (1) 집식구로 살아가는 나날


 집에서 둘째를 낳으면 내 나이 마흔이 될 무렵 이 아이가 네 살이 되는구나 하고 깨닫습니다. 첫째가 올해에 네 살이니, 첫째는 세 해 뒤에 일곱 살이 되겠지요. 일곱 살이 될 첫째는 집일을 얼마나 도우면서 제 어버이 어깨짐을 덜 수 있을까 어림합니다. 아이가 어버이 몫을 떠맡는 짐꾼이나 심부름꾼은 아닙니다. 그렇지만 아이가 집일을 찬찬히 거들지 못한다면 어버이로서 몹시 고단하거나 힘들밖에 없겠다고 느낍니다. 나이를 먹는 일, 나이를 먹으며 몸을 쓰는 일, 나이를 먹으며 아이와 부대끼는 일을 새삼스레 뒤돌아봅니다.

 여느 아버지들은 집일을 잘 모릅니다. 오늘날뿐 아니라 앞날까지도 이 나라 여느 아버지들은 집일을 잘 모를 수밖에 없습니다. 예전에는 어떠했을까 궁금합니다. 양반이나 사대부나 임금님 같은 사람들 말고, 땅을 일구며 조그맣게 조용히 살아가던 여느 살림집 아버지들은 어떠했을까 궁금합니다. 짚을 얹은 작은 흙집에서 온식구 복닥이며 지내던 곳에서 여느 아버지는 집일을 얼마나 돌보거나 알거나 챙겼을는지 궁금합니다. 예나 이제나 아버지들은 모든 집일을 그저 어머니한테만 맡기면서 바깥일만 했을는지 궁금합니다.

 집식구가 걱정없이 지내거나 느긋하게 지내거나 즐겁게 지내자면 집일을 잘 다스리고 집살림을 잘 꾸려야 합니다. 일과 살림을 알뜰히 북돋아야 합니다. 밥은 밥대로 챙기고 옷은 옷대로 건사하며 집은 집대로 돌봐야 합니다. 사람이 집안을 이루며 살아갈 때에는, 무엇보다 밥·옷·집을 옳게 거느려야 합니다.

 돈을 번대서 집일을 하거나 집살림을 하는 삶이 아닙니다. 돈을 버는 일은 그저 돈벌이입니다. 돈을 벌기에 집일이나 집살림을 어느 한 사람한테 떠넘기는 일은 집식구로 함께 살아가는 모습이 아닙니다. 오로지 돈벌이에만 마음을 쏟는 나머지, 정작 돈을 버는 까닭과 뜻을 잃는 슬픈 모습이에요.

 안타깝게도 참으로 많은 아버지들이 돈벌이에만 매달리며 막상 집일과 집살림에 등돌리거나 잊습니다. 아버지가 되는 날까지 아들을 키운 어버이들 또한 사내아이한테 집일과 집살림을 옳게 물려주거나 가르치지 못한 탓도 있을 테지만, 사내아이 스스로 집일과 집살림을 가만히 들여다보면서 받아들이거나 배우려 하지 못한 탓도 큽니다.


.. 할머니는 돈이 없다는 것에 대해, 그리고 당신의 몇 푼 안 되는 연금과 아무것도 남기지 않고 돌아가신 할아버지에 대해 가끔 불평을 했다. 그러나 사실 할머니는 불평하기보다 언제나 즐겁게 사는 편이다 … (칼레 어머니와 아버지가 교통사고로 함께 돌아가시자) 할머니만은 그러지 않았다. 금세 눈물을 거둔 할머니는 칼레가 없는 사이 삼촌들과 숙모들에게 단호히 말했다. 어쩔 거냐? 살아 나가야지. 어쨌든 살아야 해. 칼레는 내가 데리고 가겠다. 같이 살면 돼. 삼촌 가운데 한 명이 말했다. 하지만 어머니 연세에요! 그러자 할머니가 그 삼촌을 비웃으면서 호통을 쳤다. 그럼 네가 칼레를 키울 거냐? 마음에 없는 소리 하지도 마라! … 관심 없기로는 나도 마찬가지야. 하지만 옷값이 그렇게 비싸니 내가 어떻게 테니스를 칠 수 있겠니? ..  (7, 10∼11, 78쪽)


 남자와 여자, 또는 여자와 남자가 만나서 이루는 사랑이란 서로를 깊고 넓게 헤아리면서 따사로이 보듬는 일입니다. 보드라운 살결을 쪼물딱쪼물딱한대서 사랑이 되지 않습니다. 마음을 기울이고 마음을 쓰며 마음을 쏟을 때에 사랑이 피어납니다.

 첫눈에 반하는 일은 사랑이 아닙니다. 그저 ‘첫눈에 얼굴이나 겉모습이나 느낌이나 생김새에 반한’ 일일 뿐입니다. 첫눈에 반한 뒤로 사랑이 싹틀 수 있으나, 첫눈에 반했대서 착하거나 참다운 사랑으로 흐르지는 않아요.

 슬픈 노릇이지만, 오늘날 퍽 많은 사람들이 착하거나 참다운 사랑에 따라 짝을 찾거나 사귀지 못하기 때문에, 두 사람이 한 집안을 이루어 제금나거나 새 보금자리를 꾸린다면서 집일이나 집살림을 어떻게 건사해야 좋으냐를 놓치거나 아예 모르는구나 싶습니다. 집일만 알거나 집일을 조금 거든대서 집살림이 되지는 않는데, 그나마 집일에조차 손을 놓는 사람이 너무 많아요. 스스로 삶을 일구지 못하고, 내 손으로 삶을 가다듬지 못하며, 서로서로 삶을 북돋우지 못하는 셈입니다.

 사람으로 태어난 아이들은 지식과 정보를 머리에 쌓는 시험기계로 클 노릇이 아니라, 사람으로 태어난 만큼 사람값을 하도록 삶을 깨닫고 살림을 배우며 집일을 거드는 튼튼한 어른으로 클 노릇이라고 생각해요. 무나 양파를 썰 줄 모르면서, 김치를 썰 줄 모르면서, 파나 마늘을 다질 줄 모르면서, 감자나 당근을 갈 줄 모르면서, 미역국이나 된장국 하나 끓일 줄 모르면서, 죽이나 밥을 할 줄 모르면서, 볶음이나 조림을 할 줄 모르면서, 학교에서 시험성적 잘 받으면 무슨 보람이 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스스로 걸레를 빨아 집안을 치울 때에 일을 거들 뿐 아니라, 제 잠자리는 제 손으로 치우고 깔며, 제 옷가지는 어버이 손에 맡길 노릇이 아니라 저 스스로 빨고 개어 건사할 줄 알아야 씩씩한 푸름이가 되고 어른이 된다고 느낍니다.


.. 칼레가 할머니를 도우려고 물건을 하나하나 꼼꼼히 들여다보면 가게 주인들은 화를 냈다. 더러운 손으로 오이를 자꾸 만지지 말아라. 그러면 할머니는 점잖게 한 마디 쏘아붙였다. 저 오이를 칼레 손만큼 자주 씻어 주었나요? 할머니는 이렇게 멋진 유머를 할 줄 알았고, 그 점이 칼레 마음에 쏙 들었다 … 칼레는 할머니가 부모님보다 가난하다는 것을 차차 알게 되었다. 만약 네 고아 연금을 받게 된다면 형편이 조금 나아질 텐데. 공무원들이 일처리에 늑장을 부리니 말이야. 그 사람들은 우리 같은 사람들 생각은 통 안 한다니까… (복지과 아동 상담원이) 두 달에 한 번씩 찾아오고 싶고, 또 필요한 게 있으면 돕고 싶다고도 했다. 할머니는 조금 화가 풀려 친절하게 대답했다. 아가씨, 지금까지 아무도 우리를 도와주지 않았어요. 그러기엔 이젠 너무 늦었어요. 칼레도 이제 미운 일곱 살이 아니니 괞찮아질 거요 ..  (19, 21, 68∼69쪽)


 아이들은 ‘좋다 하는 책’을 읽을 수 있으면 좋으리라 생각합니다. 아이뿐 아니라 어른들부터 ‘좋다 하는 책’을 가까이할 수 있으면 더 좋으리라 생각합니다. 아이한테 좋다 하는 책을 읽히려는 어버이라면 어버이부터 좋다 하는 책을 가까이할 노릇이라고 느낍니다. 아이가 받아들이거나 받아먹을 좋은 마음밥이라면 어버이 또한 어머니와 아버지 두 사람이 나란히 먼저 받아들이거나 함께 받아먹을 일이라고 느껴요.

 좋다 하는 책을 아이한테 쥐어 주거나 읽어 주는 어른이라면, 좋다 하는 책이 왜 좋은가를 가슴으로 느낄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좋다 하는 책은 ‘이 책에 담긴 알맹이를 쓰거나 그리거나 엮거나 일군 사람’부터 스스로 좋다 할 만한 삶을 일구어야 태어납니다. 좋다 할 만한 삶에서 좋다 할 만한 앎이요, 좋다 할 만한 앎을 좋다 할 만한 넋과 좋다 할 만한 손길로 보듬어 좋다 할 만한 이야기로 빚습니다. 좋다 할 만한 이야기를 좋다 할 만한 땀방울을 들여 좋다 할 만한 책으로 엮어 내놓습니다.

 좋다 할 만한 책이라면, 이러한 책을 장만해서 즐기려는 사람들 또한 좋다 할 만한 삶을 꿈꾸면서 스스로 좋다 할 만한 사람으로 살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스스로 좋다 할 만한 사람으로 살 때에 ‘좋다 할 만한 이야기’를 좋다 할 만한 넋으로 아로새기면서 나부터 좋다 할 만한 사람으로 거듭나는 한편, 내 아이와 이웃 아이한테 좋다 할 만한 사랑을 나눌 수 있을 테니까요.

 책은 지식으로 머리속에 가둘 수 없어요. 책은 오직 내 삶으로 받아들일 뿐입니다.


.. 전쟁이 끝나기 직전, (칼레 아버지는) 공군 보조병으로 전선에 불려 갔지. 그러곤 폭탄을 터뜨려야만 했어. 그토록 어린 아이들이 대포를 쏘아야 했다니! 야, 재미있었겠다. 칼레가 불쑥 말했다. 재미라고? 너희들은 장난감 총을 들고 전쟁놀이를 하기 때문에 진짜 전쟁이 재미있겠다고 하는 거냐? 그래도 진짜 전쟁을 좋아하는 아이는 없을걸. 전쟁이 나면 아이들이 가장 힘들어지니까 ..  (35∼36쪽)


 아이한테는 돈을 더 물려주다고 해서 사랑이 싹트지 않습니다. 아이한테는 사랑을 물려주어야 사랑이 싹틉니다.

 고운 옆지기한테도 돈을 더 벌어 준대서 사랑이 싹트지 않습니다. 돈을 더 벌어 주면 돈이 싹틉니다. 사랑이 싹트자면 사랑을 나누어 주어야 합니다.

 돈이 없거나 모자란 살림살이라 하지만 알콩달콩 오순도순 복닥복닥 재미나게 살아가는 사람들은 ‘돈을 못 물려주’지만 ‘사랑을 아낌없이 물려주’는 삶이에요. 돈이 많거나 넉넉한 살림살이라 하지만 따분하고 메마르며 썰렁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은 ‘돈은 실컷 물려주’지만 ‘사랑은 조금도 못 물려주’는 삶이겠지요.

 돈이 넉넉해서 예쁜 옷도 입고 자가용도 몰며 맛나다는 밥을 마음껏 사다 먹는다 해서 아이나 어른이 모두 즐거울는지는 잘 모르겠어요. 돈이 늘 쪼들려 바깥밥은 엄두를 못 내고 밥상 반찬 가짓수 또한 몇 안 된다지만 밥상머리에서 실컷 이야기꽃을 피운다면 아이나 어른이나 나란히 즐거우리라 생각해요.

 서로서로 집식구로 사랑할 노릇이에요. 다 함께 집식구로 집일을 거들어야지요. 나란히 어깨동무하면서 집살림을 알뜰히 꾸리는 나날입니다.


 (2) 할머니와 살아가는 아이


 이야기책 《할머니》(비룡소,1999)를 읽으면서 생각합니다. 《할머니》라는 이야기책에는 할머니 한 사람과 어린이 한 사람이 나옵니다. 아버지와 어머니를 함께 잃은 ‘칼레’라는 어린이는 할머니하고 함께 살아갑니다. 다른 피붙이들은 칼레라는 어린이를 건사하려는 마음이라기보다 칼레라는 짐덩이를 어떻게 다루어야 할까를 놓고 걱정했습니다.

 할머니는 나이도 있고 몸도 있기에, 어린아이 하나를 내내 돌보며 건사하기 힘듭니다. 그렇지만 할머니한테는 돈이나 몸(체력·건강)은 없어도 마음(사랑·믿음)이 있습니다. 할머니는 당신한테 없는 돈이나 몸으로 아이를 맡아서 돌보려 하지는 않습니다. 당신한테 알뜰히 있는 마음으로 아이를 아끼며 보살피고 싶습니다.


.. 할머니는 학교 들어가기 전에 칼레를 다시 유치원에 보내지 않기로 했다. 우리 둘이 집에서 서로 적응하는 편이 더 낫다. 칼레는 처음에는 아쉬운 마음도 들었지만 곧 괜찮아졌다. 할머니와 함께 하루를 보내노라면 항상 새로운 일이 일어났다 … 칼레는 할머니가 옛날얘기만 하는 것을 이해할 수 없었다. 어제 일어난 일에 대해서는 관심도 없으면서 이십 년 전, 혹은 사십 년 전에 겪은 일은 지금도 생생히 기억한다. 처음 기차를 탔을 때나 결혼식 때 어떤 옷을 입었는지, 잔치 음식으로 무엇이 나왔는지도 훤히 알고 있다 … 할머니는 이미 본 옛날 영화들은 꼭 다시 보려고 한다 ..  (17∼18, 34, 104쪽)


 할머니는 아이한테 책을 읽어 주지 못합니다. 할머니는 아이한테 책을 사 주지 못합니다. 할머니는 아이한테 자가용을 태워 주지 못합니다. 할머니는 아이한테 자전거를 사 주지 못합니다.

 할머니는 오로지 이야기꽃만 피울 수 있습니다. 할머니는 늘 당신 몸으로 ‘살림하며 꾸리는 삶’을 보여줄 수 있습니다. 할머니는 노상 당신 손으로 빚은 밥을 차려서 내놓고, 당신 손으로 아이 옷을 빨아서 입힙니다.

 아이는 이제 처음으로 ‘돈이 아닌 사랑’으로 이루어진 ‘무언가 다른 날’을 시나브로 맞아들입니다. 영화 〈아이 앰 샘〉에 나오는 계집아이는 ‘돈으로는 채울 수 없는 사랑’을 알기 때문에 ‘몸이 아픈’ 아버지 품에 안기고 싶어 해요. 지능이 늘 제자리에 머물어 이제 나(딸아이)보다 지능이 낮고 만 아버지인 줄 진작에 알아채지만, 제 아버지가 잠자리마다 읽어 주는 ‘닥터 수스 그림책’을 무척 재미나게 들으면서 좋아합니다. 제 아버지는 저한테 더없이 큰 사랑을 나누는 멋진 집식구이거든요.


.. 칼레는 삼 학년이 되었다. 그런데 학교 생활이 순조롭지 않았다. 할머니가 숙제를 도와주기는 했지만 가끔은 설명을 못할 때도 있었다. 이런 엉터리 같은 것 때문에 머리가 다 아프네. 뭣 땜에 이런 것을 배워야 하지. 불쌍한 녀석들. 칼레도 동감이었다. 칼레는 할머니에게 숙제를 도와 달라는 말도 많이 하지 않고, 숙제도 반 정도만 하기로 결심했다 … 칼레야, 열 살이면 벌써 생각할 줄 아는 나이지. 나이에 비해 넌 많은 것을 겪기도 했고. 할미가 지금 하는 말을 잘 생각해 봐. 난 이미 일흔이 넘었어. 아무도 내 나이를 그렇게 보는 사람은 없지만, 너보다 내가 예순 살이 더 많다는 걸 상상할 수 있겠니? 아니오. 칼레는 깜짝 놀라 대답했다 ..  (62, 121쪽)


 이야기책 《할머니》에 나오는 할머니는 그야말로 할머니입니다. 할머니한테도 이름이 있을 테지만, 칼레한테든 다른 사람한테든 학교 교사한테든 공무원한테든, 할머니는 그저 할머니입니다.

 아마 오늘날이나 지난날이나 앞날에 이르기까지, 여느 살림집에서 어머니는 늘 어머니이겠지요. ‘칼레 할머니’이듯 ‘아무개 어머니’일 테지요.

 학교에서 교사는 교사입니다. ‘어른 아무개’가 아닌 ‘교사 아무개’이거나 ‘무슨 과목 교사 아무개’입니다.

 학교에서 교사 노릇을 하는 이들은 ‘저마다 맡은 교과서로 아이들한테 교과서 지식을 물려주는’ 몫을 맡습니다. ‘교과서에 담긴 지식이 다 다른 아이들 삶에 어떻게 스며들거나 파고들어 다 다른 아이들 삶을 북돋울까를 헤아리는’ 몫은 맡지 않습니다.

 맨 처음부터 학교라는 곳이 사랑보다 지식으로 세워졌는지 알쏭달쏭하고, 맨 처음부터 교사라는 사람이 사랑보다 지식으로 꽁꽁 얽매였는지 아리송합니다. 왜 학교에서는 ‘지도’를 하고 ‘교육’을 하며 ‘학습’을 시키고 ‘평가’를 할까요.

 밥먹기에는 지도나 교육이나 학습이나 평가란 없습니다. 밥을 더 잘 먹거나 맛나게 먹는 길이란 없습니다. 흙을 일구어 벼를 거두든 감자를 거두든 꽃을 보든, 더 잘 일구거나 멋지게 일구는 길이란 없습니다. 흙을 일구는 일이란 겨루기(실적 경쟁)가 아니니까요.

 다달이 300만 원을 버는 일자리가 다달이 250만 원을 버는 일자리보다 더 나은 일자리인지 알쏭달쏭합니다. 다달이 200만 원을 버는 일자리가 다달이 150만 원을 버는 일자리보다 더 좋은 일자리인지 아리송합니다. 다달이 100만 원을 버는 일자리가 다달이 50만 원을 버는 일자리도 더 아름다운 일자리인지 궁금합니다. 다달이 50만 원을 버는 일자리가 다달이 버는 돈이 없는 집살림보다 더 사랑스러운 일자리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아니, 돈을 버는 일자리가 되어야 좋은 삶인지 고개를 갸웃갸웃합니다. 돈을 벌지 않는 삶자리는 좋지 않은 삶이거나 어여쁘지 못한 삶인지 고개를 기우뚱해 봅니다.


.. 칼레는 이제 늙은 사람들이 두렵지 않았다. 비록 답답하기도 하고 자기와는 아무 상관도 없는 곳이지만, 양로원도 세상의 한 부분이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할머니와 칼레는 서로 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잠시 뒤 할머니가 말문을 열었다. 우리에 모아 놓은 가축처럼 살아야 하다니, 끔찍한 일이야. 모두들 저렇게 늙어서 … 나도 그 노인들과 다를 바 없어. 단지 양로원에 살지 않고 내 집에서 손자와 함께 산다는 것만 다를 뿐이지. 그래서 나이든 것도 달라 보이는 거야. 나이든 사람들끼리만 살면서 삶을 더 이상 볼 수 없다면 나이 먹은 게 끔찍하지 ..  (101, 102쪽)


 이야기책 《할머니》는 여러 가지 이야기를 보여줍니다. 여러 가지 삶을 다루며 여러 가지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할머니를 섬기거나 좋아하자는 이야기라든지, 어버이를 잃었다는 불쌍한 아이 이야기를 담은 《할머니》는 아닙니다. 저마다 다 다른 삶이 있다고 속삭이면서, 저마다 다 다른 삶은 이대로 예쁘고, 기쁜 결대로 사랑하며 꾸리는 길을 즐거이 찾아 돌보자는 이야기를 담는 《할머니》입니다.


 (3) 한 사람으로 오롯이 우뚝 서기


 누구나 한 사람으로 오롯이 우뚝 서야 합니다. 망아지이든 새끼 사슴이든 송아지이든, 갓 태어난 날부터 제 다리로 씩씩하게 일어섭니다. 새끼 짐승은 갓 나는 자리부터 네 다리를 툭툭 털며 비틀비틀 걷습니다.

 ‘새끼 사람’이라 할 아기는 갓 날 적부터 걷지 못합니다. 참 오래도록 돌보고 아끼며 사랑해야 합니다. 겨우 걸음마를 떼었다지만 어른 말을 주고받을 수 없습니다. 또 오래도록 말을 가르치고 옹알이를 알아들어야 합니다. 새끼 짐승이든 새끼 사람이든, 제 어미나 어버이가 보여주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면서 고스란히 따릅니다. 새끼를 낳은 짐승이라면 새끼가 찬찬히 보고 배울 수 있도록 어미답게 살아갑니다. 아기를 낳은 어른이라면 아기가 천천히 보며 익힐 수 있게끔 어버이답게 살아가야 합니다. 아이들은 책으로 배우지 않거든요. 아이들은 ‘좋은 책’으로 배우지 않거든요. 아이들은 텔레비전이나 영화로 배우지 않거든요. 아이들은 노상 ‘내 어버이 삶’을 바라보며 배우거든요.


.. 할머니는 의자를 뒤로 밀치며 벌떡 일어섰다. 여보슈, 당신은 내 연금이 얼만지 알 거요. 거기 적혀 있을 테니까. 아이 하나가 하루에 얼마나 먹어대는지, 바지나 양말은 얼마나 잘 떨어지는지, 아이 밑에 들어가는 것은 또 얼마나 많은지 알기나 하시오? 내가 재벌이나 공장 주인이라도 된다는 말이오? 아니면 뭐요! … (텔레비전에) 아이와 함께 사는 연금 생활자의 얘기라든가 고아 연금에 대한 얘기는 눈을 씻고 봐도 없는데 내가 왜 이렇게 열심히 보고 있지? ..  (31, 106쪽)


 공무원이 되면 다 똑같아진다고 합니다. 군인이 되어도 다 똑같아집니다. 경찰이 되건 국회의원(정치꾼)이 되건 다 똑같아집니다. ‘보고 배울 웃사람이나 이웃’ 삶자락을 고스란히 따르기 때문에 똑같아집니다.

 집에서 일과 살림을 거뜬히 즐길 뿐더러 아름다이 살아가는 어버이라 한다면, 아이는 제 어버이 결을 따르면서 살아갑니다. 꽃을 사랑하는 어버이 곁에서 꽃을 사랑하는 아이입니다. 흙을 북돋우는 어버이 곁에서 흙을 북돋우는 아이입니다. 책을 좋아하는 어버이 곁에서 책을 좋아하는 아이예요.

 살아가는 대로 살아갈 아이입니다. 살아가는 대로 받아들이는 아이예요. 어버이 되는 사람은 더 넓은 집이나 더 높은 이름값이나 더 많은 돈이 아닌, 어버이 두 사람이 서로 사랑으로 맺으며 활짝 웃을 만한 보금자리에서 아름답게 살아야 합니다. 아이는 책이나 돈이나 지식이나 아파트나 자가용이나 학력을 물려받을 때에 즐거울 삶이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들판과 멧자락에서 지저귀는 새가 무슨 새인지 모르는 어버이 곁에서는 새소리를 모르는 아이가 자라날 뿐입니다. 바람소리를 느끼지 못하고 구름하늘을 올려다보지 못하는 어버이 곁에서는 날씨와 자연을 모르는 아이가 클 뿐입니다.

 아이가 일찍부터 영어를 썩 잘 한다든지, 무슨무슨 고등학교나 대학교에 들어갔대서 기뻐할 수 없습니다. 아이한테 착하거나 참답거나 어여쁜 넋과 마음밭이 살찌우지 않는다면, 하나도 기뻐할 수 없습니다.


.. 사람들은 가끔 할머니와 같이 사는 게 어떤지 물었다. 칼레는 이 바보 같은 질문에 대답할 수 없었다. 칼레는 할머니와 같이 사는 생활 말고는 다른 어떤 생활도 알지 못한다. 어쩌다 할머니와 싸우기도 하지만 칼레에게는 할머니가 최고였다 ..  (46쪽)


 어른은 어른대로 한 사람으로서 오롯이 우뚝 서야 합니다. 아이는 아이대로 한 사람답게 오롯이 우뚝 서야 합니다. 저마다 슬기롭고 아리따운 꿈과 땀을 누려야 합니다. 서로서로 따뜻하며 너그러운 품으로 껴안아야 합니다.

 사랑은 돈으로 이루지 못하고, 돈은 사랑을 꽃피우지 못합니다. 돈이 없으면 굶는다지만, 사랑이 없으면 메마르고 맙니다. 돈이 없으면 동냥을 할 수 있으며, 돈이 없으니까 이웃한테서 밥을 얻을 수 있습니다. (4344.4.23.흙.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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