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읽기 삶읽기 사람읽기 6
― 사진을 배우러 떠나다
적잖은 분들이 사진을 배우러 길을 떠납니다. 어떤 이는 고등학교 적부터 사진을 배우다가 대학교 사진학과에 들어갑니다. 어떤 이는 미국이나 프랑스나 독일이나 영국 같은 나라로 사진을 배우러 떠납니다. 사진을 배우러 떠나는 이들이 일본으로 가는 일은 꽤 드문데, 곰곰이 살피면 한국땅에 머물면서 사진을 배우겠다고 하는 사람은 훨씬 드뭅니다.
사진이라는 갈래는 프랑스에서 만들었다고 합니다. 프랑스에서는 사진 특허를 사들였을 때에 몇몇 사람이 홀로 차지하며 권리를 누리도록 하기보다는 누구나 마음껏 사진을 즐기면서 사진꽃이 피기를 바라며 ‘특허권을 없앴다’고 합니다. 참말 프랑스라는 나라는 사진뿐 아니라 그림이든 연극이든 영화이든 남다른 나라요 남다른 빛깔과 숨결과 소리가 넘치는 나라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프랑스 같은 나라로 사진을 배우러 길을 떠나서 여러 해 프랑스 숨결을 들이마시는 이들은 한국으로 돌아와서 한국 사진꽃을 한결 흐드러지게 피우도록 이끌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미국으로 사진을 배우러 간 이들이든, 독일이나 영국으로 사진을 배우러 간 이들이든, 일본으로 사진을 배우러 간 이들이든 마찬가지입니다. 저마다 다 다른 길을 걸으며 저마다 다 다른 사진을 배우려고 하는 사람 모두 훌륭하며 아리따운 사진밭을 일구리라 생각합니다.
이제 이 지구별에서는 한국이라는 작은 나라에서만 사진을 하거나 예술을 하기에는 무대가 참말 좁다 할 만합니다. 온누리에 선보이며 온누리에 이름을 떨칠 사진이나 예술을 한다면 더욱 빛난다 할 만합니다. 어차피 품는 꿈이라면 더욱 크며 더 예쁘게 보듬을 만하겠지요.
나라밖으로 사진을 배우러 가든 경제학을 배우러 가든 철학을 배우러 가든 노래나 춤을 배우러 가든, 나라안에서는 내가 바라거나 뜻하는 대로 배우기 힘들기 때문에, 돈과 품과 겨를을 들여 비행기를 타고 길을 나섭니다. 낯설고 물선 나라에서 밑바닥부터 바둥거리든, 내 어버이한테 돈이 많아 돈 걱정 없이 복닥이든, 나라밖에서 무엇인가를 배우는 이들은 언제나 새로운 사람과 새로운 이야기를 마주합니다.
사진이든 예술이든, 내가 걷는 사진길이나 예술길은 ‘남이 걸어간 길을 따라 걷는 길’이 될 수 없습니다. 나는 나 스스로 내 길을 걸어가면서 내 뜻과 꿈을 이룰 뿐 아니라, 내 밥벌이 또한 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나라밖으로 배움나들이를 가려 하는 까닭이란, 이 작은 나라에서는 ‘남이 걷지 못한 내 새 길을 찾기 힘들다’고 느끼기 때문입니다. 새로운 눈을 트도록 도움을 받거나 깨우치거나 생각문을 열고자 나라밖으로 나들이를 가곤 합니다.
그런데, 나라밖으로 애써 배움나들이를 떠났으나 막상 아무것도 못 보는 사람이 어김없이 있습니다. 외려 외롭거나 힘들거나 지치면서 몸과 마음이 늙은 채 돌아오는 사람이 있습니다. 때로는 겉멋이 들거나 ‘한국이란 참 어설프고 못났지’ 하며 콧대가 높아지는 사람이 있습니다.
나는 곰곰이 생각해 봅니다. 사진은 남한테서 배울 수 없습니다. 삶은 남한테서 배우지 않습니다. 문화이든 예술이든 남한테서 배워 내 문화나 내 예술을 꽃피우지 않습니다. 언제나 내 안에서 샘솟는 사진이고 삶이며 문화랑 예술이라고 느낍니다. 내 몸을 내 마음에 따라 내 손발을 놀려 움직이는 동안 찬찬히 일구는 사진이거나 삶이거나 문화이거나 예술이라고 느낍니다.
어떤 사람은 벽만 바라보고 가만히 앉아서 깨달음을 찾으려 합니다. 어떤 사람은 돈 한 푼 없이 빈몸으로 뚜벅뚜벅 걸어서 이 나라 곳곳을 돌아다니며 깨달음을 얻으려 합니다. 어떤 이는 여러 날 밥굶기를 합니다. 어떤 이는 높은 산을 오릅니다.
어떻게 무엇을 어디에서 하든, 모두 내 마음속을 들여다보면서 내 마음결을 다스리려고 합니다. 그러니까, 사진을 배우든 철학을 배우든 정치를 배우든, 누구한테서 무엇을 배워야 깨닫거나 알아채는 사진이나 철학이나 정치가 아닙니다. 누구한테서 따로 배우지 않더라도, 또 어떤 대단한 책이나 교재를 들여다보지 않더라도, 내 가슴속에 고운 사랑씨나 삶씨나 사진씨나 배움씨가 있을 때에 나 스스로 내 사랑이나 삶이나 사진이나 배움이 일어선다는 소리입니다.
사람들이 으레 나라밖으로 배움나들이를 떠나는 까닭은 내 가슴속에 깃든 사진씨를 나라안에서는 좀처럼 건드리지 못할 뿐 아니라 잠을 깨우지 못한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더 큰 자극’이나 ‘더 센 자극’이나 ‘더 남다른 자극’을 받아 내 넋이 알을 깨어 우뚝 일어서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사진을 배우는 나들이를 생각하는 분이라면 이 대목을 먼저 짚어 주면 좋겠습니다. 알을 깨어 나올 병아리는 늘 제힘으로 알을 깨야 합니다. 어미가 부리로 알을 조금이라도 깨 주면 병아리는 얼마 못 살고 죽습니다. 병아리가 무슨 힘이 있다고 그 크고 단단한 알을 그 여린 주둥이로 깨고 나오겠습니까마는, 참말 그 여린 주둥이와 그 여린 힘으로도 크고 단단한 알을 스스로 깨고 일어서야 병아리는 제 목숨을 고맙게 선물받은 그대로 살아낼 수 있습니다.
나라밖으로 배움나들이를 떠날 생각이라면 그야말로 단단히 마음을 먹어야 합니다. 나라밖 배움나들이에 드는 돈과 품과 겨를이란 몹시 큽니다. 내 어버이한테 돈이 많아 돈 걱정이 없달지라도 내 어버이는 내가 배움나들이를 떠난다고 할 때에 배움삯을 대려고 허리가 휩니다. 나 때문에 허리가 휠 어버이를 떠올리면서 ‘큰짐을 짊어졌다는 무게’가 아닌 ‘이 고마운 선물을 흐뭇하며 신나게 누려서 내 삶을 알차게 일구어야겠다는 보람’ 으로 되새길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나는 한 가지를 더 곰곰이 헤아립니다. 나는 내 곁에서 함께 살아가는 사람을 내 값싸며 자그마한 사진기로 노상 들여다보고 단추를 찰칵찰칵 누르면서 내 사진길을 나 스스로 배우며 살아왔다고 곰곰이 헤아립니다. 참말, 저는 따로 누구한테서 사진을 배운 적이 없고, 사진학교나 사진강좌나 사진학과 같은 데를 다닌 적이 없습니다. 어떤 교재나 책을 읽어 사진찍기나 사진읽기를 배우지 않았습니다. 혼자서 사진길을 걸었고, 나중에 사진책을 이것저것 사서 읽으며 내 사진길 곁에서 또다른 사진길을 걷는 숱한 사진동무를 느꼈습니다. 나한테는 사진스승이란 없습니다. 오로지 사진동무만 있습니다. 브랏사이라 하든 브레송이라 하든 이해선이라 하든 임응식이라 하든 모두 내 사진동무일 뿐입니다. 저마다 다른 삶을 저마다 다른 손길로 사랑하며 사진을 붙잡은 어여쁜 사진동무일 뿐입니다.
모두들 목돈을 모아 여섯 달이든 한 해이든 몇 해이든 사진 배움길을 떠나려고 하는데, 애써 모은 목돈으로 나라밖 사진책 장만하는 데에 쓴다면, 그러니까 사진책 장만하는 데에 삼천만 원이든 오천만 원이든 쓰면서 나 스스로 사진책을 읽거나 살피거나 헤아리는 눈길을 기르는 데에 여섯 달이든 한 해이든 여러 해이든 써 보는 사람이 다문 하나라도 있으면 어떠하랴 싶어요. 똑같은 배움길이 아니라 새로운 배움길을 찾으면서 즐거우리라 봅니다. 내 나름대로 스스로 할 만한 배움길을 찾아보아도 퍽 즐거우리라 생각합니다. 누군가는 자전거 한 대를 장만해서 한 해 동안 자전거로 우리 나라 곳곳을 찾아다니면서 또다른 틀에서 사진 배움길을 거닐 수 있어요.
좋은 책은 좋은 벗입니다. 좋은 사람은 좋은 사랑입니다. 좋은 삶은 좋은 꿈입니다. 목돈을 모아 나라밖 배움나들이를 다녀와도 즐겁고, 목돈으로 한국땅 곳곳을 오래오래 누비면서 내 겨레말을 함께 쓰는 사람들 삶과 하나로 녹아들면서 배움삶을 누려도 기쁩니다. 한국에서 한국말을 하는 한국사람으로 살아가며 한국사진을 하기 때문에 꼭 한국땅 곳곳을 누비며 한겨레 이웃을 마주해야 하지는 않습니다. 한국에서 한국말을 하는 한국사람으로 살아가며 한국사진을 하더라도 얼마든지 일본에서건 미국에서건 사진을 배우고 돌아와도 됩니다. 내 넋이 참말 내 넋이면서 내 뜻이고 내 길이어야 합니다. 내 사진길은 내 사진길이지, 남한테 기대거나 남 뒤꽁무니를 좇는 사진길이 될 수 없습니다. (4344.3.27.해.ㅎㄲㅅ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