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하고 영화 보기


 어머니나 아버지가 셈틀 앞에 앉으면 아이는 영화를 보고 싶어 한다. 일이 바쁘면 아이가 영화 노래를 부르더라도 안 된다고 끊을 수밖에 없지만, 아이한테 영화 보자면서 셈틀 화면 한쪽 창에 영화를 띄우면 나 또한 이 영화를 함께 보고야 만다. 아이가 볼 영화를 켤 때에는 내 일이란 조금도 할 수 없다. 아니, 머리를 써서 생각하는 일이라든지 마음을 움직여 글을 쓰는 일은 하지 못한다. 열 번 스무 번 서른 번 본 영화이더라도 다시금 영화에 빨려든다.

 아이 스스로 열 번이고 스무 번이고 서른 번이고 빨려드는 영화일 때에만 아이 스스로 좋아한다. 한 번 보면서 재미없다고 여기는 영화는 보다가 자꾸 딴짓을 하거나 아버지 무릎을 떠나 방에서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논다. 볼 때마다 새롭게 좋은 영화는 자꾸자꾸 다시 보고 싶어 한다.

 아이는 그림책을 볼 때에도 스무 번 마흔 번 예순 번을 거듭 보면서 재미있는 그림책을 다시 본다. 백 번 이백 번 다시 넘길 만한 그림책이 아니라면 아이는 처음부터 따분하다고 느끼는구나 싶다. 그런데 아이만 따분하다고 느끼지 않는다. 아버지인 나 또한 아이가 따분하다고 느끼는 그림책을 재미있다고 느낄 수 없다. 아이가 따분하다고 느끼는 그림책은 참말 따분하다고 느낄밖에 없는 아쉬운 구석이 곳곳에 드러난다.

 어린이책은 어린이 눈높이에 맞추어야 한다. 참 마땅한 소리이다. 어린이 눈높이란 ‘어린이한테 발맞추어 유치하게 만드는’ 일이 아니다. ‘어린이부터 즐겁거나 재미나거나 신나게 읽으며 언제라도 다시 보도록 이끄는’ 일이다. 그러나 푹 절거나 꽁꽁 사로잡히도록 해서는 안 되지. 꿈에서 내 자리로 돌아오고, 내 자리에서 꿈으로 나아가며, 다시 꿈에서 내 자리로 돌아오다가는, 거듭 내 자리에서 꿈으로 걸어가도록 해야 한다고 느낀다. 꿈에서 삶을 보고 삶에서 꿈을 본다.

 쉰두 가지 이야기로 이어지는 만화영화 〈플란다스의 개〉를 아이하고 함께 본다. 누군가 고맙게 옛 만화영화 동영상을 올려놓기에 볼 수 있다. 열넷째 이야기하고 열다섯째 이야기를 보면, ‘네로’가 그림그리기에 푹 빠져 지내는 이야기가 나온다. 가난한 네로한테는 ‘종이 = 사치스러운 물건’이다. 종이에 그림을 그리고 싶으나 종이를 쓸 수 없기 때문에, 흙바닥이든 나무판자이든 가리지 않고 그림을 그린다. 마음속으로 수없이 그림을 그린다. 네로 스스로 발을 디디며 살아가는 터전과 네로 스스로 마주하며 사귀는 사람을 사랑스레 느끼기에, 이 사랑스레 느끼는 결 그대로 그림을 그리고 싶어 한다.

 네로가 그리는 사랑스러운 그림이 얼마나 사랑스러운가를 느끼는 사람은, 네로와 마찬가지로 착하며 사랑스레 살아가는 사람들뿐이다. 그러나 네로처럼 착하며 사랑스럽게 살아가지 않는 사람이더라도 네로가 그린 놀랍도록 착하며 사랑스러운 그림을 들여다보면 가슴 한켠이 쿡 찔리는 듯 놀라워 하기는 한다.

 착한 마음을 이길 마음이란 없다. 왜냐하면 착한 마음이란 누구하고 싸울 마음이 아니요 누구하고 싸움박질을 해서 우악스레 밟거나 이기려는 마음이 아닐 뿐더러 누구를 아프게 하려는 마음이 아니니까. 착한 마음은 언제나 착하기만 할 뿐이다. 칼도 총도 무기도 없으며, 거친 말도 욕지꺼리도 없다. 사랑스러운 마음 또한 오로지 따스한 사랑일 뿐, 차가운 미움이라든지 매몰찬 등돌림이라든지 무시무시한 등처먹기 따위란 깃들지 않는 마음이다.

 나는 착한 영화가 좋다. 나는 사랑스러운 책이 좋다. 나는 착하지 않은 영화는 싫다. 나는 사랑스럽지 않은 책은 따분하다. (4344.3.26.흙.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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