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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투티를 기다리며
송명규 지음 / 따님 / 2010년 6월
평점 :
품절
아파트 허물어 논밭 일구면 밥이 됩니다
[환경책 읽기 27] 송명규, 《후투티를 기다리며》
- 책이름 : 후투티를 기다리며
- 글 : 송명규
- 펴낸곳 : 따님 (2010.6.15.)
- 책값 : 1만 원
(1) 흙을 안 일구는 사람이 빚는 문학
앞으로 전기를 얼마나 더 오래 쓸 수 있는지 모릅니다. 앞으로 석유를 얼마나 더 오래 쓸 수 있는지 또한 모릅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은 전기와 석유를 마음껏 씁니다. 전기와 석유를 마음껏 쓰는 만큼 우리가 살아가는 터전은 매우 더럽습니다. 온 나라 어디를 가도 비닐판입니다. 이 나라 구석구석 자동차가 흘러넘칩니다. 개신교회는 밤에도 붉은 십자가 불을 켭니다. 가게는 밤에도 불을 밝혀 광고를 노립니다.
모두들 더 돈을 벌고자 더 돈을 씁니다. 돈을 덜 벌며 돈을 덜 쓰는 길을 살피지 않습니다. 돈을 더 벌어 기름값을 대면 되고, 돈을 더욱 벌어들여 전기를 더 쓰면 됩니다. 돈을 덜 벌며 자동차하고 헤어지는 사람이란 찾아볼 수 없습니다. 돈을 조금만 벌어 전기를 적게 쓰거나 아예 안 쓰려는 사람이란 마주할 수 없습니다.
.. 나는 큰 착각을 하고 있었다. 녀석들은 비좁기는 하지만 어항 속에서 줄곧 다른 물고기들을 덮치면서 자랐다. 그래서 야생에 풀어주어도 곧 적응할 것이라고 지나치게 쉽게 생각했다 … 그러나 이런 것들은 그저 맹꽁이에 대한 나의 단편적이고 검증되지 않은 지식일 뿐이다. 맹꽁이에 대해서는 아직도 풀지 못한 의문이 너무 많다. 현재로서는 가장 궁금한 것이 올챙이의 먹이인데, 큰비로 잠시 생기는 웅덩이에 어떤 먹이가 있을 수 있는지 정말로 의아스럽다 … 사람은 도토리를 심지 않기 때문이다. 사람은 다람쥐와 도토리를 놓고 경쟁하지만 참나무숲이 울창해져서 도토리가 듬뿍 달리게 된 것이 다람쥐 덕이라는 사실은 전혀 안중에 없다 .. (21∼22, 52, 157쪽)
집에서 책을 읽으며 생각합니다. 내 마음을 건드리는 아름다운 이야기를 책으로 나누어 준 이들 가운데 전기를 헤프게 쓰거나 석유를 아무렇게나 써도 된다고 여기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돈을 더 벌어들이려고 애쓴 사람이 쓴 글은 저로서는 하나도 반갑지 않습니다. 돈뿐 아니라 이름값이나 힘을 거머쥐려고 바둥거리던 사람들 글은 제 마음을 움직이지 못합니다.
도시에서 살든 시골에서 살든 똑같습니다. 글쓴이 스스로 당신 삶을 어떻게 건사하느냐에 따라 글쓴이 글이 달라집니다. 글쓴이 스스로 아름다운 삶을 일굴 때에는 아름다운 넋으로 아름다운 글을 낳습니다. 글쓴이 스스로 껍데기 삶을 뒤집어쓸 때에는 겉보기로만 예뻐 보이는 글을 빚습니다.
나는 돈을 말하는 글은 거들떠보지 않습니다. 나는 처세와 경영 따위라는 이름이라든지 자기계발을 읊는 책은 건드리지 않습니다. 이러한 글은 글이 아니요, 이러한 책은 책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공무원시험을 치르려고 쥐는 교재는 교재이지 책이 아닙니다. 중·고등학생이 들추는 참고서와 자습서와 문제집과 교과서는 교재일 뿐 책이 아닙니다. 수험서는 수험교재라고 해야 마땅합니다. 학습서라는 이름도 걸맞지 않습니다. 학습교재만 있습니다. 아이들한테 읽히는 과학동화나 수학동화나 철학동화 또한 책이라 말할 수 없습니다. 동화면 그저 동화이지 앞에 다른 말을 붙일 때에는 ‘학습교재’ 노릇을 합니다. 아이들한테 과학 지식이나 수학 정보나 철학 능력을 키워서 무엇을 하려고요. 과학 지식을 갖춘 아이들이 이 나라에서 얼마나 착하게 살아갈 수 있겠습니까. 수학 정보를 일찍부터 익힌대서 아이들이 스스로 제 삶을 참다이 일구는가요. 철학 능력 잘 갈고닦은 어린이가 어른이 되는 동안 온누리를 옳고 바르게 바라보거나 꿰뚫어볼는지요.
책은 책이어야 하고, 삶은 삶이어야 합니다. 사람은 사람답게 살아야 하고, 삶터는 삶터다이 돌보아야 합니다. 아이들한테 책 아닌 교재만 쥐도록 내모는 어른들은 아이들한테 무슨 짓을 하는지 깨달아야 합니다. 아이들한테 삶 아닌 지식만 집어넣는 어른들은 아이들한테 무슨 끔찍한 짓을 하는지 느껴야 합니다. 아이들한테 밥하기와 빨래하기와 살림하기를 몸으로 받아들이도록 돕지 않는 어른들은 아이들한테 무슨 슬픈 짓을 저지르는지 알아야 합니다.
.. 갑자기 유람선 타기가 싫어졌다. 호수 위로, 수장된 옛 강의 얼굴이 아른거렸다. 나는 호수 아래 깊이 묻힌 옛 여울과 바위와 모래톱과 미루나무 숲과 초가집들의 영혼을 차마 유람선 위에서는 대할 수가 없었다. 그것은 그 넋들에 대한 모욕이나 다름없었다 … 부모님은 핀잔을 덧붙였다. 너는 왜 매사에 그리 삐딱하냐고. 속이 답답했다. 가족들은 진짜 절경을 모른다. 아니, 잊었다. 그것은 충주댐과 함께 세월에 묻힌 빛바랜 흑백사진 같은 촌스런 것이다. 그곳이 고향인 어머니와 외가 식구들마저 그렇게 생각하다니 … 우리 나라 대도시에서 대학생쯤 되는 젊은 여성이 한복을 입고 고무신을 신고 자전거를 타고 다닌다면 정말이지 우스꽝스럽게 보일 것이다. 모두들 무슨 이벤트 홍보 중이거나 아니면 ‘어찌 된’ 여자라고 여기고 신기하게 쳐다볼 것이다 … 우산을 쓰고 한손으로 자전거를 타는 일은 보기보다 무척 어려웠다. 그러니 일본인들의 자전거 타는 솜씨는 거의 달인 수준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들은 자전거 운전 중에도 자유롭게 휴대폰으로 통화를 한다. 아기를 둘씩이나 태운 주부가 가득 찬 장바구니를 매달고 자동차 사이를 누비는 용감무쌍한 광경도 종종 본다 .. (118, 120, 207쪽)
나이 스물은 그저 숫자로 나이 스물이 아닙니다. 나이가 차서 주민등록증을 받거나 선거권을 얻는다 해서 어른이 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혼인하여 아이를 낳아야 어른이 되지 않습니다. 나이 마흔이나 쉰이라 하더라도 모두 어른이라 할 수 없습니다.
참으로 어른이라 한다면 어른다울 때에 어른입니다. 어른답지 못한 채 나이만 먹은 사람을 일컬어 예부터 ‘철부지’라 했습니다. 때로는 ‘바보’나 ‘멍텅구리’라 했어요. 어느 때에는 ‘밥버러지’라고도 합니다.
오늘날 이 나라에서 스스로 어른이라 생각하는 사람 가운데 참으로 어른이라는 이름이 걸맞을 사람은 누가 있을까 궁금합니다. 어른다이 살아가지 않으면서 어른 노릇만 하려는 사람으로 넘치는 오늘 이 나라가 아닌가 궁금합니다.
스스로 어른이라 이름을 붙이려 한다면, 밥과 옷과 집을 제힘으로 건사해야 합니다. 스스로 살림을 꾸릴 수 있어야 합니다. 돈을 잘 버는 일자리를 얻었대서 어른이 되지 않습니다. 밥할 줄 모를 뿐 아니라, 밥을 차려서 내놓을 줄 모르거나, 밥을 치울 줄 모르는데 무슨 어른입니까.
지난날 우리 어른들은 아이한테 나이에 걸맞게 집일과 집살림을 거들도록 하면서 오롯이 한 사람이 되도록 길렀습니다. 아이 몸과 팔다리에 기운이 붙는 흐름을 살펴 자잘한 심부름부터 시켰고, 군불때기부터 장작패기와 방아찧기나 나무하기를 시켰습니다. 물긷기나 빨래하기나 밥하기는 저절로 뒤따르는 살림살이 가운데 하나입니다. 비질을 어떻게 하고 걸레질은 어떻게 하며 먼지떨이는 어찌어찌 하는가를 찬찬히 가르칩니다. 어른 앞이나 동무 앞이나 동생 앞에서 말매무새를 어떻게 다스리는가를 가만히 이르고, 먹는 풀과 못 먹는 풀을 가린다든지, 풀을 어떻게 캐거나 뜯거나 따서 어찌저찌 손질한다든지, 철에 따라 들판과 멧자락에 무슨 풀이 돋아 무슨 풀을 먹을 수 있으며, 철 따라 풀을 어떻게 다루어 밥거리로 건사하는가를 가르칩니다.
인터넷을 뒤적여 가장 값싼 데를 알아본다든지 더 값싸게 여럿이 함께 사는 일에 목매달지 않습니다. 무엇이든 스스로 할 수 있도록 이끌거나 돌보았어요. 어버이가 맡은 몫이란, 또 마을 어른이나 집안 어른으로서 맡은 몫이란, 한 사람이 한 사람으로 살아가는 길을 물려주는 데에 있습니다.
.. 가방을 팽개치고 허겁지겁 차 속에서 쌍안경을 꺼내들었다. 렌즈 한켠에 달걀처럼 생긴 검은 물체가 아른거렸다. 떨리는 두 손을 진정시키며 가까스로 초점을 맞췄다. 부엉이가 아니었다. 그것은 가지에 걸린 채 햇빛을 반사하며 바람에 나부끼고 있는 까만 비닐봉지였다. 나는 무엇에 엊어맞은 듯 한참을 그 자리에 멍하니 서 있었다. 나는 내가 사는 시대를 착각했다. 나는 현대인이다. 그리고 현대는 미루나무에 부엉이 대신 비닐봉지가 앉아 있는 게 자연스러운 시대다 … 농업 근대화의 첨병인 화학약품은 논에서 쓸모없는 것들을 모조리 내몰았다. 살충제는 개구리와 뜸부기는 물론 반딧불과 메뚜기와 물방개와 물뱀과 온갖 고기를 쓸어냈고, 제초제는 사초와 골풀은 물론 그 예쁜 가래와 물옥잠까지 모두 말려 죽였다 .. (126, 138쪽)
전기와 석유를 쓸 수 없을 앞날에 이 나라에서 스스로 어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이 나라 어린이하고 푸름이한테 무엇을 물려줄는지 궁금합니다. 아마, 끔찍하게 더러워진 물과 바람을 물려줄 텐데, 끔찍하게 더러워진 물과 바람은 오늘날 어른한테도 괴롭습니다. 파란하늘 아닌 잿빛하늘을 물려주는 못난 모습을 못 깨닫고, 푸른들이 아닌 시멘트아파트덩어리를 이어주는 어수룩한 모양새를 못 느낀다면 삶은 삶이 아니라 죽음입니다. 산 주검입니다. 살아숨쉰다 말할 수 없고, 살림을 꾸린다 이야기할 수 없습니다.
삶이 없는 이야기만 가득한 책이 날마다 쏟아지고, 사람들은 ‘예전보다 책을 안 읽는다’ 하지만 ‘예전이든 오늘이든 책다운 책을 알뜰히 찾아서 읽으려 애쓰는 사람’은 참으로 적습니다. 책을 안 읽는 일이 슬플 수 없습니다. 책다운 책을 쓰지 못하는 글쟁이가 슬프고, 책다운 책을 찾아서 읽으려는 사람이 드문 삶자락이 슬픕니다.
백 권 천 권 만 권에 이르는 책을 읽어야 똑똑할 수 없습니다. 참과 착함과 고움을 슬기롭게 담아 사랑스레 펼치는 믿음직한 책 하나면 넉넉합니다. 굳이 책이 아니더라도 내 몸뚱이로 참답고 착하며 곱게 살아갈 수 있으면 내 삶이 곧 책입니다.
(2) 흙을 밟지 않는 사람이 하는 환경사랑
몇 해 앞서까지 온 나라 도시나 시골마다 ‘첨단과학기술도시’가 되겠다고 목청을 높였습니다. 그런데 요즈음은 온 나라 도시나 시골마다 ‘그린도시’라든지 ‘녹색도시’라는 이름을 높직하게 내겁니다.
읍내 장마당 마실을 하거나 다른 시골을 지나갈 때면 으레 ‘그린’과 ‘녹색’이라는 말을 적은 큼지막한 걸개천을 곳곳에서 볼 수 있습니다.
푸른도시나 푸른시골은 공무원 걸개천 글월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푸른도시나 푸른시골이 되려 한다면, 논밭을 뒤엎거나 산을 깎아 공장을 닦는 일을 멈추어야 합니다. 앞에서는 푸른도시나 푸른시골이라고 외치면서, 뒤에서는 새 고속도로를 낸다며 논밭마다 높은 시멘트말뚝을 박아 으리으리한 고속도로를 고가도로처럼 닦아 산과 산 사이를 반듯하게 잇는 짓을 그만두어야 합니다. 푸른도시나 푸른시골이 되려 한다면, 모든 발전소를 닫아야 합니다. 집마다 알맞게 전기를 쓰도록 작은 발전시설을 들여야 합니다. 햇볕을 받아들이든 빗물을 받아서 쓰든 바람힘을 껴안든, 집집마다 조그맣게 마련해서 쓰는 발전시설을 두어야 합니다.
전봇대를 박거나 전깃줄을 드리우거나 송전탑을 세우거나 고압전류탑을 만드는 데에 돈을 쓸 까닭이 없습니다. 원자력발전소는 고작 35%만 전기로 만들고 나머지는 쓰레기로 버려야 하는데, 65%를 버리는 돈과 65% 때문에 망가지는 우리 터전과 35%를 때서 기나긴 전깃줄로 집집마다 잇는 아까운 일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전깃줄을 타고 전기가 흐르는 동안 또 얼마나 많은 전기가 하늘로 날아가며 둘레 논밭이나 푸나무나 사람들한테 나쁘게 될까요.
나는 수학자나 경제학자가 아니기 때문에 오늘날 발전시설을 집집마다 스스로 전기를 만들도록 바꾸면 돈을 얼마나 아끼거나 줄일 수 있는지 잘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 스스로 작은 빨래는 손으로 하고 텔레비전을 보지 않으며 냉장고 크기를 줄이는 한편 에어컨을 되도록 조금만 쓴다면, 아파트 살림이든 연립주택 살림이든 전기 쓸 일이 얼마 안 됩니다. 스스로 전기 씀씀이를 줄이면서 ‘쓰레기 안 나오고 지구자원 안 먹는’ 작은 발전시설을 누구나 집에서 돌보도록 한다면, 이웃 일본에서 원자력발전소가 터지는 일이 생기든 안 생기든 걱정할 일이 없습니다.
.. 놈들은 진눈깨비가 내려 습기를 머금은 시래기가 먹기 좋게 부풀어 올랐을 때를 노린다. 양식이 떨어진 겨울철에 놈들의 식욕은 거의 무한에 가깝다. 그래서 놈들은 이파리 부분은 모두 쪼아먹고 흰 줄기만 앙상하게 남긴다. 할머니는 늘 직박구리에게 시래기를 몽땅 털리고 마는데, 그래도 해마다 같은 곳에 시래기를 거시는 것을 보면 본래부터 새들에게 보시하는 것이 목적인가 보다 … 나는 그곳을 일 주일에 고작 한두 번 들를 뿐이지만 그(뱀)는 한시도 그곳을 떠난 적이 없다. 거기서 얻는 오이가 없어도 나는 굶주리지 않지만 그는 그곳을 잃으면 목숨을 잃는다. 그곳은 내게 객지지만 그에게는 고향이다 … 요즈음의 내 기분은 거의 그날의 날씨에 좌우된다. 밝은 햇살을 받으며 출근하는 날에는 베란다에 남아서 봄의 따사로움을 만끽하고 있을 선인장 생각에 하루가 즐겁다. 그러나 뿌연 황사가 모처럼의 햇빛을 가로채면 나는 봄을 약탈당하고 있다는 생각에 울화가 치민다. 그래서 조그마한 자극에도 숨겨져 있던 공격적인 본성이 여지없이 드러나 주변의 많은 사람들이 영문도 모르는 피해자가 된다 .. (32, 39, 142∼143쪽)
지자체마다 ‘자전거길 새로 만들기’를 꾸준히 합니다. 자전거만 타면 환경사랑이라도 되는 듯 여길 뿐 아니라, 꽤나 많은 돈을 들여 찻길 한쪽을 덜어 자전거길로 만듭니다. 그러나 시내이든 읍내이든 모든 찻길 한쪽을 덜어 자전거길을 만들지 않습니다. 시늉으로만 보여주듯 몇몇 곳만 자전거길을 만듭니다.
모든 길이 자전거로 이어지지 않는다면 자전거를 탈 수 없습니다. 몇 군데 예쁘장하게 마련한 자전거길을 다닐 수 있다 하더라도 다른 찻길에서는 자전거길이 없으면 자전거를 어찌 타겠습니까. 자가용 짐칸에 자전거를 실어서 자전거길 있는 데까지 타고 온 다음, 자전거길만 자전거를 달리면 될는지요.
살을 빼자는 자전거이든, 동아리 사람하고 어울리는 기쁨을 누리는 자전거이든, 돈있다고 뻐기는 자전거이든, 다 좋습니다. 그러나, 참으로 자전거삶을 사람들이 곱게 받아들이도록 힘쓰려 한다면, 여느 자리 여느 길이 자전거로 오가기에 즐거우며 넉넉하고 걱정없어야 합니다.
자동차가 골목길로 접어들지 못하도록 막아야 합니다. 자동차를 길가에 세우지 못하도록 막아야 합니다. 이삿짐이 아니라면 수레에 짐을 싣고 나르도록 해야지, 길가에 차를 세우고 짐을 부려서는 안 됩니다. 무엇보다 사람들 스스로 자가용하고 헤어져야 합니다. 여느 사람들이 자가용하고 헤어지도록 하기 앞서 정치꾼과 공무원과 지식인과 기자 같은 사람들이 자가용하고 헤어져야 합니다. 평화운동을 하든 진보운동을 하든 사회운동을 하든 정치운동을 하든 교육운동을 하든 자가용을 멀리 떠나 보내야 옳습니다. 차를 타야 할 때에는 택시를 불러야 합니다. 짐을 날라야 할 때에는 짐차를 불러야 합니다. 큰 모임이라면 함께 쓰는 차를 하나 두고 사람이 많이 움직이거나 짐을 많이 옮겨야 할 때에 쓸 수 있겠지요. 써야 할 때에만 쓰는 자동차가 되어야 하고, 여느 때에는 누구나 자전거를 타거나 두 다리로 걸어야 합니다. 어린이를 태우는 수레를 자전거에 붙이고, 어르신을 모시는 수레 또한 자전거에 달아야 합니다.
평화에도 진보에도 사회에도 정치에도 교육에도 눈길을 안 둔다는 사람들이 자가용하고 헤어지든 안 헤어지든, 평화나 진보나 사회나 정치나 교육이나, 여기에 환경을 사랑하거나 아낀다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스스럼없이 자가용하고 헤어져야 하고, 이렇게 헤어지며 자전거와 두 다리로 예쁘게 살아가는 터전을 다스리는 흐름을 살려 ‘찻길 하나를 덜어 자전거길로 바꾸는’ 정책을 펼쳐야 자전거삶이 제대로 자리잡습니다. 평화운동 하는 이들 스스로 자전거를 사랑하지 않는데, 평화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사람들이 자전거를 사랑할 수 없습니다. 진보운동 하는 이들부터 먼저 자전거를 아끼지 않는데, 진보를 달가이 여기지 않는 사람들이 자전거를 아낄 수 없습니다. 아이들을 옳고 바르게 가르치려 힘쓰는 사람들이 먼저 자가용하고 헤어지며 자전거하고 사귀지 않는데, 입시지옥이건 말건 대학바라기와 학교끈으로 꽁꽁 이어진 사람들이 자전거하고 예쁘게 사귈 수 없어요.
.. 야생에서 토종 자리공을 마주친 사람은 매우 드물겠지만, 이 서양 자리공은 보지 못한 사람이 없을 것이다. 물론 대부분 무심히 지나쳤을 테지만 … 알덩이들이 떠 있는 논바닥 웅덩이는 너무 얕다. 그래서 약간만 가물어도 올챙이들은 모두 말라죽게 된다. 필요할 때마다 비가 와 준다고 해도 모내기철이 다가오면 사방에 제초제가 뿌려진다. 그 위로 트랙터가 지나다니며 땅을 짓밟고 으깬다. 트랙터 뒤에는 온갖 농약과 비료 세례가 기다린다. 설령 그런 지옥에서 살아남는 올챙이가 있다고 해도 물이 얕고 숨을 곳이 없기 때문에 조만간 찾아올 백로들의 예리한 부리에 남김없이 희생될 것이다 … 교토 시내에 반딧불이 산다는 것은 커다란 충격이었다. 어떻게 대도시 한복판을 흐르는 강물에 우리 나라에서 천연기념물로 대접받고 있는 반딧불 같은, 오염에 그렇게도 민감한 생명체가 살 수 있다는 말인가? .. (56, 102, 189쪽)
환경사랑이란 삶사랑입니다. 삶사랑이란 사람사랑입니다. 사람사랑이란 사람이 태어나서 돌아가는 흙을 사랑하는 일입니다. 사람을 사랑한다 할 때에는 사람이 숨이 붙는 동안 디디고 선 흙을 사랑한다는 뜻입니다.
흙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사랑이란 거짓입니다. 흙사랑을 바탕에 두지 않고서야 환경사랑이 되지 않습니다. 걸개천을 수없이 건다 한들, 푯말과 알림말을 도시 곳곳에 붙인다 한들, 일본말 ‘綠色’이든 중국말 ‘草綠’이든 영어 ‘green’이든 우리 말 ‘푸른’이든 갖다 붙인다 한들, 슬기로우며 즐거이 환경사랑을 할 수 없습니다.
내가 먹는 밥이 어느 흙에서 어떻게 나오며, 내가 먹은 밥이 똥오줌이 되어 흙으로 돌아가야 할 때에 어떻게 돌려보내는가를 살펴야 합니다. 내 밥과 내 똥오줌이 얼마나 고마운가를 깨달아야 합니다. 밥쓰레기나 똥쓰레기가 나와서는 안 됩니다.
.. 거대한 댐이 낙동강 끝자락을 단단히 틀어막고, 경지정리가 게으른 논둑과 도랑들을 시멘트로 발라 영원한 차렷 자세로 벌을 세운 이후로는 뱀장어들도 양식장으로 쫓겨났다 … 친구들한 한참 열을 올리며 친환경농업 운운하는 나를 어이가 없다는 듯 쳐다보다가 가차없이 말문을 막았다. “농약 없이 무슨 농사가 돼!” … 운전사가 몹시 야속했다. 이왕 쉴 것이면 사람들로 북적대는, 매연에 찌든 휴게소나 터미널이 아니고 방금 지나간 그런 곳에서 쉴 것이지! 일이십 분만이라도 멈춰 주었다면 평생을 간직하게 될 숨막히는 풍경들을 마음속에 실컷 담을 수 있었을 텐데! .. (133, 137, 171쪽)
매미도 나비도 벌도 개구리도 뱀도 흙에 깃들지, 시멘트나 아스팔트에 깃들지 못합니다. 작은 풀싹은 시멘트나 아스팔트조차 뚫고 자라지만, 시멘트나 아스팔트에서 뿌리내리지는 못합니다. 아니, 풀싹은 시멘트와 아스팔트를 차츰차츰 흙으로 바꿉니다. 더디 걸리지만 열 해 스무 해를 지나고 백 해 이백 해를 지나는 동안 풀싹은 시멘트와 아스팔트를 흙으로 돌립니다.
한 사람은 백 해 이백 해를 살지 못합니다. 나무는 즈믄 해를 거뜬히 살아냅니다. 사람들이 떠나고 없는 자리에서 나무는 즈믄 해를 거뜬히 살아내면서 사람들이 남긴 쓰레기를 천천히 삭여 흙으로 돌립니다. 숱한 풀싹은 해마다 새로 나고 지면서 사람들이 버린 쓰레기를 천천히 곰삭여 흙으로 바꿉니다. 다만, 풀싹이든 나무이든 백 해나 오백 해나 즈믄 해에 걸쳐 어여쁜 흙터를 일굽니다. 지구별을 망가뜨리는 목숨은 사람이지만, 지구별을 살리는 목숨은 풀과 나무, 곧 푸나무입니다.
환경사랑이란 사람 스스로 푸나무처럼 살아가자는 뜻이며, 사람 스스로 푸나무처럼 살아내면서 흙을 아끼거나 사랑하자는 이야기입니다. 하루아침에 이룰 수 없는 환경사랑이고, 하루아침에 이루려 하는 환경사랑이란 모두 거짓말이거나 눈속임입니다.
(3) 《후투티를 기다리며》라는 환경책 하나
환경책 《후투티를 기다리며》를 읽습니다. 《후투티를 기다리며》는 굳이 환경책이라 하지 않아도 되지만, 애써 환경책이라는 이름을 붙여 봅니다. 《후투티를 기다리며》는 여느 수필책이나 문학책이라 해야 걸맞습니다만, 일부러 환경책 갈래로 넣고 싶습니다.
글쓴이가 환경사랑을 말하기 때문에 환경책이라 일컫지 않습니다. 책에 담은 줄거리가 환경사랑으로 가득하대서 환경책으로 넣지 않습니다.
사람을 사랑하는 길을 좇으며 흙을 사랑하는 길을 조용히 걸어가기 때문에, 이 책 《후투티를 기다리며》는 환경책이로구나 하고 느낍니다. 주먹 불끈 쥐며 외치는 말이 아니라, 몸으로 살아내는 이야기를 조곤조곤 들려주기 때문에, 이 책은 즐거이 나누며 함께 읽을 환경책이라고 느낍니다.
.. 올림픽 개막식이 아무리 찬란하고 국군의날 퍼레이드가 세상 없이 웅장하다고 해도 엄청난 무리의 동물들이 대자연을 무대로 각본 없이 펼치는 야생의 드라마만큼 장려한 것은 없다 … 우리는 내심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아이들도 이 광경을 보아야만 하는데 … 어린아이에게 반딧불에 대한 이론적 설명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실물을 보여주면 간단한 것을! .. (76, 95, 187쪽)
같은 말을 되풀이하는 셈이요, 같은 말을 되풀이할밖에 없으나, 환경책은 지식책이 아닙니다. 환경지식을 다루는 책은 조금도 환경책이 될 수 없습니다. 환경지식을 보여주는 책은 지식책입니다. 이러한 책은 인문책조차 아닙니다. 환경책은 지식이 아닌 삶을 다루는 책이요, 환경책은 지식이 아닌 삶을 일구는 내 이야기를 펼치는 책이며, 환경책은 나 스스로 착하고 참다우며 어여삐 살아가고픈 꿈과 사랑을 나누려는 책입니다.
.. 우렁이농법은 유기농법일 수는 있으나 결코 친환경농법은 아니다 … 집집마다 자동차가 있고 사람마다 개인 전화기를 갖고 다니는 풍요 속에서 우리의 정신세계는 그런 작은 배려조차 외면할 만큼 각박해지고 말았다 … 환경단체들의 끈질긴 반대운동이 내린천을 일반대중에게 널리 알리는 계기가 되고 말았다. 그 전까지만 해도 강원도 산골짜기의 거의 알려지지 않았던 냇물이 갑자기 전국적인 명소로 떠올랐다 … 일본은 땅값이 비싸서 그런지 특히 시내에 있는 쇼핑센터는 우리의 상식과는 다르게 자동차 주차장이 전혀 없는 것도 있다. 반면, 어디를 가든 자전거 주차장만은 널찍하다 … 가장 기본적이고 가장 중요한 교통수단은 걷는 것이고, 그 다음은 자전거다. 특히 에너지와 환경 위기의 시대에는 더욱 그렇다. 우리가 걸을 수가 없다면 자동차나 전철은 아무란 쓸모도 없는 물건일 뿐이다 .. (151, 164, 176, 208∼209쪽)
날이 갈수록 우리 터전이 무너집니다. 나날이 환경재앙이 커집니다. 만화영화나 만화책 〈바람골짜기 나우시카〉를 보면, 지구별에 살아남는 사람은 몇 없습니다. 사람 스스로 지구별을 무너뜨려, 사람 스스로 거의 모조리 사라집니다. 만화책이나 만화영화 〈우주소년 아톰〉을 보아도 사람들이 지구별을 얼마나 더럽히며 엉터리로 짓밟는가 하는 이야기가 잘 나타납니다. 그렇지만, 사람들은 ‘내가 사는 동안 더 망가진대 보았자 얼마나 더 망가진다구?’ 하고 생각할 뿐입니다. 곧 죽어도 돈이나 다이아몬드나 금을 손에 쥐고파 합니다. 수수한 밥상보다 금조각을 더 사랑합니다. 그런데, 금은보화 가득 담긴 궤짝을 손에 쥐면 뭐 하나요. 어느 누가 금을 먹으며 살아갈 수 있나요. 돈을 씹으며 목숨을 잇는 사람이 있는가요. 가장 흔하디흔한 밥 한 그릇이 없으면 사람은 죽습니다. 참 너르디너른 물 한 모금 마시지 않으면 사람은 죽어요. 영화 〈말괄량이 삐삐〉에 나오는 해적은 삐삐네 보물 두 궤짝을 가로채서 처음에는 좋아라 춤추지만, 외딴섬에 갇힌 채 보물궤짝만 가지고서는 그저 죽을 수밖에 없는 줄을 깨닫고는 보물궤짝하고 도끼 한 자루를 바꿉니다. 아마 천 원짜리 밥그릇 하나하고 보물궤짝을 통째로 바꿀 만하다고 할 수 있겠지요. 몇 억에 이르는 자동차이든, 아무리 그럴싸하다는 이름값이든, 제아무리 힘센 천하장사라 하든, 또는 권력자하고 맞닿은 줄타기라 하든, 끼니를 굶으면 다들 죽어야 합니다.
밥을 쫄쫄 굶으면서 몇 억짜리 자동차에 기름을 넣을 사람은 없습니다. 배고파 쓰러질 판에 주식쪼가리를 손에 쥐어 만세 부를 사람은 없습니다. 물 한 모금 마실 수 없으면서 비싼 옷을 걸친들 무엇하겠습니까. 깨끗한 바람이 없는 수십 억짜리 아파트나 빌라에서 무슨 삶을 이을 수 있는가요.
바다를 메우거나 갯벌을 메워 공장을 짓거나 아파트를 올린다 한들 경제성장이 될 수 없습니다. 땅이 너무 모자라면 네덜란드처럼 바다를 메워 논밭으로 일굴 수 있어요. 그런데 우리는 왜 바다와 갯벌을 메우는가요. 이 나라에 논밭이 모자라나요. 있는 논밭은 아파트나 공장이나 고속도로로 바꾸면서, 애먼 바다와 갯벌을 논밭으로 바꾸면 이 나라 터전은 어찌 되지요. 바다와 갯벌을 없애면서 무슨 조개를 먹고 무슨 쭈꾸미를 먹으며 무슨 게장을 담근답니까.
인천에서 살던 때, 골목동네 할매와 할배는 빈집이 헐려 쓰러질 때에 돌을 손수 치워서 집터에 텃밭을 일구곤 하셨습니다. 젊은 사람은 아무도 빈 집터 돌을 골라 텃밭 일구기를 하지 않습니다. 늙은이들만 텃밭 일구기를 합니다. 그런데 돌을 골라 처음 씨를 뿌려 거두는 푸성귀부터 놀랍도록 잘 자랍니다. 수십 해나 백 해 남짓 집자리에 눌린 흙이었을 텐데, 고작 처음으로 해를 보며 물을 머금고 거름을 받은 흙이 고맙게도 싱싱하고 살진 푸성귀를 선물해 줍니다.
.. 반면에 (일본) 아라시야마의 홍수는 깨끗하기 때문에 차라리 아름답다. 드넓은 수면에 지푸라기 하나 떠내려가지 않는다면 상상이 가겠는가? .. (213쪽)
공무원이나 정치꾼이나 개발업자는 논밭을 갈아엎어 아파트를 세워야 돈이 된다고 말하겠지요. 틀린 말은 아닙니다. 논밭을 갈아엎어 아파트를 세우면 돈이 됩니다. 그런데 돈만 되지 밥은 안 됩니다.
아파트를 허물어 논밭을 일구면 돈이 안 됩니다. 그렇지만, 아파트를 허물어 논밭을 일구면 밥이 됩니다.
아직까지는 돈으로 밥을 사서 먹는다지요. 그러나 언제까지 돈으로 밥을 사서 먹겠습니까. 앞으로는 밥을 얻으려고 아파트를 헐거나 공장을 치우겠지요. 머잖아 자동차공장 따위 걷어치워서 널따란 논밭을 일구겠지요.
나는 자동차공장 따위 모조리 쫄딱 무너지기를 바랍니다. 자동차공장 일꾼들이 하루아침에 실업자가 되는 일은 슬픕니다만, 자동차공장 일꾼은 자동차 만드는 일을 해서 돈을 벌어서는 안 됩니다. 똑같이 땀흘려 일할 사람이라면, 자동차 만지는 일이 아니라 흙을 만지는 일을 해야지요.
널따란 자동차공장을 모두 갈아엎어 흙을 되찾아야 합니다. 자동차 만드는 기계는 낫과 쟁기와 호미로 바꾸어야 합니다. 보습을 만들고 헛간을 지어야 합니다. 두레와 품앗이로 논밭살림을 일구어야 합니다.
자동차 더 팔아 경제성장 이루거나 딸아들 학원 보내야 한다면서 눈물 흘리지 말아야 합니다. 자동차 그만 만들고 그만 팔며 흙을 손에 쥐면서, 돈 아닌 밥을 내 손으로 마련해야 합니다. 학교에서는 지식인이나 공무원이나 회사원 만드는 교과서를 내려놓고, 아이들 스스로 제 살림을 몸소 일구는 살림꾼이 되도록 교사와 학생이 함께 배우며 가르치도록 바꾸어야 합니다. (4344.3.14.달.ㅎㄲㅅ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