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 우리말 착하게 가꾸기 ㉨ 살려쓰면 좋은 우리말 : 겨레말


 새로 태어난 아이한테 이름을 지어 줄 때, 몇 해 앞서부터는 아버지 성씨만이 아니라 어머니 성씨를 붙일 수 있도록 법이 바뀌었습니다. 첫째는 아버지 성씨를 붙일 수 있고, 둘째는 어머니 성씨를 붙일 수 있어요. 그렇지만 새로운 성씨를 만들어 쓰지는 못합니다. 아버지나 어머니 성씨 가운데 하나만을 쓰도록 법으로 못박아요. 가만히 따지면, 어머니 성씨라 하더라도 ‘어머니를 낳은 아버지 성씨’이니, 이러거나 저러거나 늘 ‘아버지 성씨’만 쓸 수 있는 셈입니다. 아버지와 어머니 성씨를 함께 쓰는 분들이 있습니다만, 밑바탕을 따지면 ‘아버지(남자) 성씨 두 가지’를 함께 쓰는 모습이에요.

 아버지한테든 어머니한테든 우리들은 이름이나 돈이나 지식이나 이름값이나 권력 따위를 물려받지 않습니다. 어버이한테서 물려받으려 한다면 따스한 사랑과 너른 믿음과 아름다운 넋과 즐거운 삶이어야 한다고 느낍니다. 말사랑벗들이 돌아볼 때에는 어떠할까 모르겠는데, 제가 보기에 이 나라에서는 아름다운 넋을 물려주는 어버이는 몹시 드물고, 힘들여 버는 돈이나 집 같은 재산만 물려주면 된다고 여기지 싶습니다.

 돈이 나쁘다 할 수는 없으나, 돈만 살핀다면 나쁩니다. 돈이 있어야 먹고산다지만 돈으로만 먹고살지는 않아요. 큰 도시에서는 텃밭이든 무논이든 일굴 땅이 없으니 모조리 사다 먹어야 하지만, 우리 식구 밥상에 올릴 푸성귀라면 조그마한 꽃그릇에 심어 알뜰살뜰 길러 먹을 수 있습니다. 도시에서도 집안 한쪽에 거름통을 마련해 내 똥오줌을 거름으로 삭혀 쓸 수 있어요. 도시사람 스스로 애쓰거나 마음쓰지 않아서 그렇지, 골목동네 할매랑 할배 들은 조그마한 텃밭을 아기자기하게 일구곤 합니다. 흙을 사랑하는 넋이 바로 우리 겨레 넋이고, 손수 땀흘리는 몸가짐이 우리 겨레 몸가짐입니다.

 우리 집 첫째 딸아이 이름은 ‘사름벼리’ 넉 자입니다. 법으로는 새 성씨를 지을 수 없지만, 우리 살붙이끼리는 딸아이 성씨를 ‘사름’으로 삼고 이름을 ‘벼리’로 삼습니다. 요즈음 거의 모든 한국사람 이름이 ‘한 글자 성씨’에 ‘두 글자 이름’이니, 우리 아이는 이름만으로도 꽤나 남달라 보이고 맙니다. 의료보험증에는 네 글자까지만 찍히는 터라 ‘최 사름벼’까지만 찍히고 이름 한 글자가 잘려요. 이름을 길게 지어 붙인 사람은 아예 생각조차 않는다 할까요.

 이름을 두 글자, 때로는 한 글자로 짓는 틀은 지난날 ‘한문으로 살며 한자로 이름을 지어 붙이던 양반 삶자락’에서 비롯합니다. 농사짓는 여느 사람들은 이름을 한자로 지을 일이 없습니다. 농사짓는 여느 사람들은 한문으로 살지 않을 뿐더러, 한문을 배울 까닭이 없기도 하지만, 농사짓는 여느 사람한테 한문을 가르치지도 않았어요. 한문이란 양반 권력과 계급을 누리는 사람만 배울 수 있었고, 한자를 따져 짓는 이름 또한 양반만 붙이는 이름이었습니다. 말사랑벗이 학교에서 역사 공부를 하며 배울 텐데, 조선 나라가 막바지에 이를 때 양반 계급이 크게 흔들리거나 무너지면서 ‘돈으로 양반 신분을 사는’ 일이 흔히 생겼고, 이무렵부터 한자 성씨를 쓰거나 한자 이름을 쓰는 사람이 부쩍 늘었어요. 족보 없이 얼마든지 넉넉하거나 아름다이 살아오던 이들이 하루아침에 우지끈 뚝딱 하면서 족보를 만들었어요. 한문으로 권력을 누리던 사람들 등쌀에 너무 고달팠고 참으로 힘들었기 때문이겠지요.

 아마 고등학교부터 ‘고전문학’이라는 이름으로 먼 옛날 한겨레가 누리거나 즐겼다는 문학을 배우는 줄 압니다. 고전문학을 가만히 살피면, ‘고전문학을 일군 사람’은 모조리 양반이나 사대부 계급입니다. 농사짓거나 고기잡는 여느 사람들이 일군 문학은 고전문학으로 배우지 않아요. 왜냐하면 농사짓거나 고기잡던 여느 사람들은 ‘글을 배울 수 없’었고 ‘배운 글이 없으니 종이에 글을 쓸 수 없’었어요.

 농사짓거나 고기잡거나, 여기에 장사하던 사람들은 입으로 문학을 했습니다. ‘입 문학’이라 할 텐데, 한자로 붙이는 이름으로 ‘구비문학’입니다. 달리 보자면, ‘입’으로는 ‘이야기’를 나누니까 ‘이야기문학’이라 할 수 있어요. 일을 한다든지 쉬엄쉬엄 쉰다든지 아이들이 마을에서 어울려 논다든지 하면서 입으로 흥얼흥얼 노래를 부릅니다. 하루 일을 마치고 잠자리에 들 무렵 할아버지나 할머니가 당신 딸아들인 어른하고 당신 딸아들이 낳아 기르는 아이들을 둘레에 앉히든 함께 짚신을 삼든 집일을 마무리짓든 하면서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이른바 ‘옛이야기’나 ‘옛날이야기’입니다. 심청전이나 흥부전 같은 판소리 이름은 들어 보았을 텐데, 이들 판소리란 여느 농사짓고 고기잡으며 장사하던 사람들이 입에서 입으로 물려주면서 나누던 옛이야기를 ‘판소리를 하던 사람들이 그러모으거나 갈무리한’ 문학입니다.

 ‘한문이라는 글을 배우지 못했고 배우지 못하도록 가로막혔던’ 여느 사람들이 펼친 문학은 책으로 적바림되지 않았습니다. 여느 사람들이 즐기는 노래 또한 책에 적바림되지 않았어요. 일제강점기에 일본 인류학자나 문화학자가 비로소 책으로 받아적다가 뒤늦게 한국 인류학자나 문화학자에다가 국어학자가 책으로 받아적습니다. 이제는 골골샅샅 뒤져 보아도 입에서 입으로 문학과 문화를 물려주던 어르신을 만날 수 없습니다. 이름을 남기지 않았고 이름을 남길 까닭 없이 살던 한겨레 놀이삶과 일삶이란 송두리째 사라졌어요. 이러면서 이러한 자리에 텔레비전 연속극이 스며들고, 저나 말사랑벗 누구나 쓰는 ‘한자 성씨’하고 ‘한자 이름’이 남습니다.

 ‘우리말 착하게 가꾸기’라는 이름을 걸고 ‘살려쓰면 좋을 우리말’을 이야기해 왔는데, 착하게 가꿀 우리말이란 ‘글을 배울 수 없으나 글이란 없어도 즐겁게 살아오던 여느 농사짓고 고기잡으며 장사하던 사람들’이 즐겁게 나누던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생각하는 토박이말이란 농사꾼 말이랑 고기잡이 말이랑 장사꾼 말이에요. 한문을 배워 이름을 떨친 양반이나 사대부나 임금님이나 권력자들 말이 아닙니다. 이들 양반과 권력자들 말이란 한문이고 한자말입니다. 우리 겨레는 신분과 계급이 또렷하게 갈린 채 오래도록 살았는데, 신분과 계급이 있다는 사람은 5%가 채 안 되었고, 신분과 계급이 없다는 사람이 95%가 넘었어요. 글 없고 신분 없으며 계급 없으나, 흙을 사랑하고 논밭을 아끼며 바다와 냇물과 멧구비를 돌본 여느 사람들이 주고받은 말마디가 곧 겨레말이라고 느껴요.

 겨레말은 ‘돕다’나 ‘거들다’입니다. ‘협동(協同)’이나 ‘협조(協助)’는 겨레말이 될 수 없다고 여깁니다. ‘상부상조(相扶相助)’ 또한 겨레말이 될 수 없다고 생각해요. 겨레말은 ‘두레’나 ‘울력’입니다. ‘서로 돕기’와 ‘어깨동무’가 겨레말입니다.

 겨레말은 ‘말’입니다. ‘언어(言語)’는 도무지 겨레말이 될 수 없습니다. 겨레말은 ‘쓰다’입니다. ‘사용(使用)’이나 ‘이용(利用)’은 참말 겨레말이 될 수 없구나 싶습니다. 겨레말은 ‘물고기’이지 ‘생선(生鮮)’이 아닙니다. 겨레말은 ‘해오라기’입니다. “하얀 새”를 일컫는 ‘해오라기’ 옛말은 ‘하야로비’인데, 이를 한자말로 담아 ‘백조(百鳥)’라 해서는 겨레말이 될 수 없습니다. 겨레말은 ‘밥’이지 ‘식사(食事)’가 아니에요. “진지 자셔요”가 겨레말입니다. “살펴 가셔요”가 겨레말이요 “잘 계셔요”가 겨레말입니다. ‘안녕(安寧)’이나 ‘바이바이(byebye)’를 사람들이 아주 흔히 자주 쓴달지라도 겨레말이 될 수 없어요. 말버릇으로 굳었으면 말버릇이지 겨레말이 아닙니다. 다들 쓰는 말이면 다들 쓰는 말일 뿐 겨레말은 아닙니다. 편가르기나 금긋기가 아닙니다. 서로를 옳게 살피고 서로서로 쓰는 말을 제대로 깨달으면서 서로 다른 삶임을 곱게 받아들여 좋은 목숨붙이로 함께 살아야 할 뿐입니다. 겨레말은 겨레말대로 옳게 새기고, 바깥말은 바깥말대로 제대로 알며, 우리말은 우리말대로 슬기롭게 가다듬을 노릇입니다. 영어는 영어대로 참답게 살피어 쓰고, 일본말이나 중국말은 일본말 결과 중국말 무늬를 헤아리면서 알맞게 쓸 노릇이에요. 왜냐하면 우리는 한국땅에서 한국사람으로 살아가며 한국말로 한국넋을 나누는 겨레이니까요.


1. 눈물 : “눈에서 나오니 눈물인가 누운물(눈:물)인가”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제 말사랑벗은 긴소리와 짧은소리를 따로 안 배울 텐데, 제가 중·고등학교를 다닐 무렵 학교에서는 막 ‘긴소리랑 짧은소리 안 가르치기’를 했습니다. 입으로 읊는 말과 들짐승 말은 소리값이 달라요. 사람 몸에 붙은 눈이랑 하늘에서 내리는 눈 또한 소리값이 다르고요. 아마 저를 낳은 어버이가 한창 젊은 나이일 1960년대 무렵부터가 아닌가 싶은데, 해방 뒤부터 이무렵까지 ‘우리말에 있던 높낮이’가 사그라들었습니다. 제 또래가 국민학교를 다니고(1980년대) 중·고등학교를 마칠(1990년대) 무렵에는 길고 짧은 소리값이 사그라들고요. 우리말에는 소리와 모양이 같은 낱말이 제법 있습니다만, 이 낱말은 모두 높낮이와 소리값으로 나누었어요. 영어나 서양말을 배울 때에는 이들 높낮이와 소리값을 꼼꼼히 가르지요? ‘억양’이나 ‘악센트’나 ‘장단음’이라고들 하면서. 아주 마땅히 우리말에도 이들 높낮이와 소리값이 있습니다만 이 말결은 아주 사라지고 된소리만 남습니다. 국어학자나 국어교사가 오늘 우리 겨레말에서 짚거나 살피는 대목이란 “‘자장면’이 옳으냐 ‘짜장면’이 옳으냐”라든지 “‘장마비’가 맞느냐 ‘장맛비’가 맞느냐”에 그칩니다. 눈물나는 말삶이요, 눈물겨운 겨레말이며, 눈물로 얼룩진 사람들입니다. 


2. 질그릇 : 진흙으로 구운 그릇이 질그릇입니다. 나날이 그릇으로 구울 진흙은 줄어들고, 진흙으로 애써 굽기보다 석유에서 뽑아낸 플라스틱으로 값싸게 찍어내는 플라스틱 그릇이 넘칠 뿐입니다. 깨지면 흙으로 돌아가고, 오래오래 살뜰히 건사하며 쓰던 질그릇입니다. 가볍게 쓰다 버리고, 버리면 쓰레기가 되는 플라스틱입니다. 플라스틱과 석유 문명은 삶뿐 아니라 말까지 플라스틱 냄새가 나게 바꿉니다. 


3. 고운손 : 이제는 제법 많다 싶을 만큼 온갖 문방구가 나옵니다. 온갖 회사에서 온갖 이름을 달고 공책이나 연필이나 지우개 들을 만들어요. 예전에는 ‘바른손’하고 ‘모닝글로리’ 두 회사가 첫째와 둘째를 겨루곤 했습니다. 오른손을 일컫는 다른 이름이 ‘바른손’이기도 하지만, 참다우거나 아름다운 결이 바른손이기도 합니다. ‘모닝글로리’란 ‘나팔꽃’을 가리키는 영어 이름입니다. 영어를 쓰는 사람들한테는 ‘모닝글로리’가 아주 어여쁜 이름이겠지요. 영어를 쓰는 나라에서는 외려 ‘나팔꽃’이라는 한국 꽃이름을 예쁘게 여겨 공책 이름으로 쓸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아직까지 한겨레 회사이름이든 공책이름이든 무슨 이름으로도 찔레꽃이니 진달래꽃이니 감자꽃이니 원추리꽃이니 봉숭아꽃이니 나리꽃이니를 붙이는 모습을 보기 어렵습니다. 바른손이 있기에 고운손도 있고 예쁜손이나 멋진손이나 착한손이나 살진손이나 믿는손이나 좋은손이나 빠른손이나 따순손이나 하얀손이나 푸른손이나 기쁜손도 있을 법하나, 싱그러우면서 살뜰히 가지뻗기를 하지는 못합니다. 


4. 흙 : 흙은 흙빛입니다. 나무는 나무빛입니다. 잎은 잎빛입니다. 가을에는 가을빛이고 겨울에는 겨울빛이에요. 사람은 사람빛이 나고 고양이는 고양이빛을 뿜습니다. 시골은 시골빛일 테고 도시는 도시빛이겠지요. ‘창백(蒼白)’한 얼굴이 아닌 ‘파리한’ 얼굴을 놓고 ‘사색(死色)’이라고도 하지만, 우리말은 ‘흙빛’입니다. 땡볕을 받으며 구슬땀 흘리는 사람은 얼굴이며 살결이며 구리빛이 됩니다. 구리빛이란 흙빛이기도 합니다. 흙에서 흙처럼 일하며 흙빛이 되는 사람들입니다. 한국사람이든 미국사람이든 필리핀사람이든, 흙에서 일하는 사람은 한결같이 흙빛 살결입니다. 


5. 두레 : 이제 이 나라에도 곳곳에 ‘생활협동조합’이나 ‘협동조합’이 차츰 태어납니다. 나라에서 펼쳐 주는 복지나 문화를 바라는 손길이 아니라, 조그마한 내 손길을 하나둘 그러모아 서로 돕는 협동조합(協同組合)이에요. 협동조합은 이탈리아가 아주 훌륭하다고 합니다. 한국 생협은 일본 생협에서 많이 배웠습니다. 우리로서는 끔찍하게 아픈 역사가 있는 터라 우리 스스로 예부터 익히 이어오던 삶을 송두리째 빼앗겼으니 일본한테서도 배우고 이탈리아한테서도 배워야 하겠지요. 밑뿌리를 내 삶에서 찾으려 한다면, 우리 땅 두레와 울력을 깨달을 테고, 우리 땅 우리 옛사람 슬기와 얼을 받아들인다면, 앞으로는 ‘두레모임’이나 ‘울력바탕’도 태어나리라 생각합니다. “두레를 하는 모임이나 모둠”을 한자말로 옮겨적을 때에 ‘협동조합’이 됩니다.

(최종규  . 2011 - 10대와 통하는 우리말 바로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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