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넋과 책읽기


 제 넋이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한테 ‘좋은 책’ 하나란, ‘훌륭한 책’ 하나란, ‘아름다운 책’ 하나란, ‘즐거운 책’ 하나란, ‘맑은 책’ 하나란 무슨 뜻이나 값이 있으려나요.

 옆지기 외할머니랑 외할아버지 살아가는 인천 용현1동 골목집으로 먼 마실을 옵니다. 아침부터 집에서 부산을 떨고, 낮 한 시 반에 길을 나서니, 저녁 일곱 시가 다 되어 드디어 닿습니다. 자가용 있는 요즈음 사람들이라면 두어 시간이면 닿을 길인지 어떠한 길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자가용 없이 살아가는 우리 살붙이는 시골버스와 시외버스와 전철과 택시를 갈아타며 몸에 지치고 절며 외할머니랑 외할아버지 댁에 닿습니다. 퍽 작다 할 만한 외할머니 외할아버지 댁은 퍽 작다 할 만하기 때문에 작은 방에며 작은 마루에며 온 살붙이가 도란도란 둘러앉습니다. 차곡차곡 붙어 앉습니다. 어느 방에 있건 부엌일 소리가 온 방으로 울려퍼집니다. 작은 목소리 하나이든 큰 목소리 하나이든 서로서로 나눕니다. 좋은 소리이든 궂은 소리이든 모두 얼싸안습니다.

 시골버스를 타고 음성 읍내에 닿아 시외버스를 기다렸습니다. 자리 번호가 없는 표만 팔기에 줄을 섭니다. 줄을 잘못 섰다가는 세 사람이 따로따로 앉을 수 있거든요. 오늘은 아기 표까지 한 장 삽니다. 다섯 살까지는 표를 끊지 않고 한 자리를 얻어 타도록 하는 이 나라 법이지만, 막상 명절날처럼 사람들 붐비는 때에는 어느 버스기사도 이러한 법을 지키지 않습니다. 다섯 살까지는 표를 팔지 않으면서(팔지 않으니 살 수도 없고), 어른들 앉을 자리가 모자란다 싶으면 아이는 엄마나 아빠 무릎에 앉히라 윽박지릅니다. 아이 키우는 어버이들은 누구나 겪는 짜증스러운 윽박지름이기에, 헛돈을 써야 하는 줄 뻔히 알면서 ‘표 없는 아기 몫’ 표까지 끊습니다. 이래저래 여쭈면, 초등학교에 드는 예닐곱 살까지는 표삯을 안 내고 타도록 한다지만, 막상 표삯을 안 내고 타면 자리 하나 내주지 않습니다. 이럴 바에는 아기들한테도 표삯을 받고 자리를 주어야 올바를 텐데, 이런 일이 날마다 곳곳에서 숱하게 되풀이되지만 정책 다루는 이들이든 공무원이든 거들떠보지 않습니다.

 시골에서 서울로 가는 시외버스 일꾼은 표를 받으면서 ‘손님 표’를 잘라서 돌려주지 않습니다. 내가 차에 타면서 스스로 잘라서 ‘회사 표’를 건네야 합니다. 반드시 ‘손님 표’를 챙깁니다. 나중에 “자리 없는데 아이 무릎에 앉혀요!” 소리를 안 들으려면 손님 표를 꼭 챙겨 놓아야 합니다.

 동서울역에 닿습니다. 동서울역 뒷간은 아름다운 뒷간이라나 뭐라나 하는 상을 받았다지만, 이 아름답다는 뒷간에는 어린이가 똥오줌을 눌 수 있는 자리는 한 칸조차 없습니다. 한국땅에서는 어디에서나 어린이는 사람 몫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습니다. 아이하고 여러 해 복닥이며 움직이는 동안 이 나라가 얼마나 어린이를 깡그리 짓밟는지 새삼스레 돌아봅니다. 몸소 아이를 낳아 키운다 하더라도 더 잘 알지는 못할 터이나, 몸소 아이를 낳아 키우지 않는 숱한 진보 목소리들 가운데 이러한 대목을 짚을 줄 아는 목소리는 얼마나 될까 궁금합니다. 아니, 진보와 보수를 넘어, 나 스스로 옳고 바른 사람이라면 이러한 대목을 얼마나 제대로 짚을 수 있으려나요.

 전철을 탔습니다. 명절날인 터라 아이를 안거나 이끌며 다니는 사람이 많지만, 이들 가운데 빈자리를 얻는 사람은 몹시 드뭅니다. 아이가 여느 때보다 많아 그럴는지 모르지요. 여느 때이든 명절 때이든 누구나 다리가 지치기 때문일 테지요. 어느 할머니는 제 손자가 귀여운 나머지 이리 안고 저리 안으며 놀다가 그만 우리 아이 머리를 당신 할머니 손자 발로 걷어찬 셈이 되지만 미안하다는 말도 없을 뿐더러 돌아보지도 않습니다. 그 할머니네 손녀는 우리 아이를 그냥 밀치면서 놉니다. 그 할머니이든 그 아이네 어버이이든 그 아이이든, 나쁜 사람이라고는 여기지 않습니다. 그저 제 넋이 없는 사람입니다.

 생각없는 사람을 탓할 만큼 기운이 남지 않았기에 옆 칸으로 옮겼습니다. 옆 칸에는 손자를 안은 할아버지가 있습니다. 손자는 할아버지 무릎에 안겨 영어로 뭐라뭐라 쏼라쏼라합니다. 내릴 때까지 이리 뛰고 저리 달리며 영어로 떠듭니다. 용산역에 닿아 주안역으로 가는 빠른전철을 갈아탑니다. 갓난쟁이 안은 젊은 아빠가 빈자리 없이 한쪽 구석 벽에 기댑니다. 처음으로 자리를 얻어 앉은 나라도 일어나 줄까 싶으나, 내 코가 열 자 백 자인 터라 차마 자리에 앉으라는 말은 못합니다. 다른 사람들도 그저 모르거나 못 본 척입니다. 갓난쟁이가 전철이 퍽 힘든지 끄응끄응 울 즈음 비로소 할머니 한 분이 앉으라고 자리를 내줍니다.

 주안역에서 내리고, 붐비는 사람숲을 헤치고 밖으로 나와서, 가방을 싣고 아이를 안고 택시에 타니 비로소 호젓한 한때를 맞이합니다. 용남시장 들머리에 문을 연 과일집에 들러 능금이랑 귤이랑 감이랑 사들고 골목집으로 찾아갑니다. (4344.2.5.흙.ㅎㄲㅅㄱ)
 

(최종규 .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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