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나 있는 그대로 바라보며 사진을 찍습니까
 [따순 손길 기다리는 사진책 15] 공병우, 《백도》



 집에서 아이 삶자락을 사진으로 담든, 좋아하는 헌책방을 찾아가서 책을 살피며 사진을 찍든, 제가 나고 자란 터전인 인천 골목동네에서 마실을 하며 사진을 즐기든, 늘 되새기거나 생각합니다. 첫재, “어디에서 무슨 모습을 사진으로 담습니까.”를 되새깁니다. 둘재, “얼마나 있는 그대로 바라보며 사진이나 글로 엮습니까.”를 생각합니다.

 사진찍기 아닌 살림하기에서도 매한가지입니다. 오늘 하루 이 시골집에서 우리 옆지기하고 아이랑 어떠한 삶을 일구는가를 되새깁니다. 우리 살붙이를 저부터 얼마나 있는 그대로 바라보며 껴안으려 하는가를 생각합니다.

 책을 읽을 때에도 똑같습니다. 오늘 하루 제가 쥐어드는 이 책을 줄거리로 살피려 하느냐, 가슴으로 받아안으려 하느냐를 되새깁니다. 꼭 이 책을 읽어야 하는지를 생각하고, 이 책보다 아이와 옆지기 얼굴을 한 번 더 들여다보면서 꼬옥 껴안으면 어떤가 하고 생각합니다.

 한국땅에서 사진책은 따순 손길을 기다립니다. 한국땅 숱한 사진쟁이한테 사진을 찍히는 사람들 또한 따순 손길을 기다립니다. 마구 찍어대는 손길이 아니라, 따순 이웃으로 찾아와 너른 품을 내미는 따순 손길을 기다립니다. 이런저런 작품이나 요런그런 상품을 빚는 사진찍기가 아닌, 이웃으로서 밥 한 끼니 같이 먹는다든지 막걸리잔 부딪힌다든지 하는 삶나누기를 기다립니다.

 헌책방마실을 하면서 ‘공병우 사진책’을 드문드문 만납니다. 공병우 님은 당신 일터인 ‘공안과’에 사진부를 두었고, 사진부에는 당신이 사진마실을 다닐 때에 곁에서 심부름을 해 주던 젊은이가 함께 있었구나 싶습니다.


- 우리가 탄 배는 통통 울리면서 계속 움직이고 있었기 때문에, 절경은 순식간에 형형색색으로 변하였다. 연속 나타나는 절경의 모습을 광각, 표준, 망원, 줌 렌즈들이 달린 4대의 카메라로 번갈아 바쁘게 찍었다. 필름을 갈아끼워 주는 조수는 더욱 바빴었다. 이런 경우는 250장박이 필름과 와인다나, 모터드라이버가 달린 카메라를 사용한다면, 한층 더 좋은 앵글을 잡았을 것이라고 생각되었다. (《백도》에 실은 이야기)》


 공병우 님(1906∼1995) 같은 분한테는 심부름꾼이 있어야 한다고 느낍니다. 나이는 나이대로 많이 자셨고, 기운은 기운대로 많이 떨어졌으며, 보고픈 모습과 담고픈 모습이 아주 많으니, 당신 스스로 필름을 갈아끼운다든지 이런저런 장비를 홀로 챙겨 들 수 없습니다. 씩씩하고 튼튼하며 손빠른 심부름꾼 젊은이가 꼭 곁에 있어야 해요.

 얼마 앞서 사진찍는 윤주영 님을 뵈었습니다. 윤주영 님은 1928년에 태어났습니다. 2011년 나이로 여든셋입니다. 당신은 걸음조차 제대로 걷기 힘듭니다. 곁에서 어깨를 잡아 주는 젊은이가 한 사람 있으며, 당신을 자동차에 싣고 움직여 주는 운전수가 한 사람 있습니다. 짧은 동안 이야기를 나눈 뒤 헤어지는 자리에서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생각합니다. 제가 여든셋 나이까지 살아갈 수 있을는지 모르나, 그무렵까지 사진길을 사랑한다면 저 또한 틀림없이 곁에서 제 어깨를 붙잡아 줄 젊은이가 있어야 할는지 모르겠구나 싶습니다.

 먼 앞날을 곰곰이 짚으니, 제 곁에서 제 잔일을 해 주어야 할 사람한테 참 고마우며 미안합니다. 그러나 잔일을 거드는 이는 잔일을 거들면서 꾸리는 삶이 있고, 이렇게 꾸리는 삶에 따라 무엇인가를 배웁니다. 홀로 마음껏 어디이든 나다니면서 사진마실을 할 때에도 틀림없이 이 나름대로 삶을 꾸리고 배우면서 사진을 얻겠지요. 내 사진기는 쥘 겨를 없이 누군가가 쥐어야 할 사진기를 들고 다니면서 바지런히 필름을 갈아끼운다든지 세발이를 세운다든지 한다면, 이 일만으로도 진땀 구슬땀 빼야 할 테지요.

 우리 나라에 ‘도제 기사’ 틀이 아직 있는지 이제 사라졌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지난날에는 이름깨나 힘깨나 돈깨나 있는 사진쟁이들이 도제를 거느리면서 젊은 풋내기 사진쟁이를 때리기도 하고 함부로 부려먹는데다가 돈은 안 챙겨 주고 사진기 단추는 만지지 못하게 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이렇게 뒹굴면서 겨우 홀로서서 사진길을 걸을 때에 ‘나는 이렇게 도제는 안 한다’고 다짐하는 사람이 있을 테지만, ‘내가 받은 대로 나도 한다’고 되뇌는 사람도 있습니다. 군대에서 폭력이 끊이지 않는 까닭은, 군대가 워낙 사람 죽이는 솜씨를 길들이는 곳이기도 한데다가 주먹다짐이 되물림되는데, 얻어맞은 사람으로서는 마음풀이를 할 곳이 똑같은 새내기 병사한테 손찌검하는 데밖에 없습니다. 또는 사회로 돌아와서 여자나 어린이한테 폭력을 휘두릅니다.

 마음이 깊거나 너르거나 따스한 사람은 슬픈 곳에서 구르더라도 깊거나 너르거나 따스한 삶을 이으면서 깊거나 너르거나 따스한 사진을 이룹니다. 마음이 얕거나 좁거나 차가운 사람은 좋은 곳에서 어울리더라도 얕거나 좁거나 차가운 사진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 지난 (1980년) 9월 15일에 나는 임석제 님을 모시고, 서울을 떠나서 여수에서 1박 하고, 16일에 배로 거문도에 도착하여 1박 하고, 17일에 똑딱선으로 약 2시간만에 백도에 도착하여, 배를 타고 섬을 돌면서 4시간 동안 백도의 사진을 찍었다. 그날 거문도로 돌아와서 다시 1박 하고, 이튿날 아침에 떠나, 도합 4박 5일의 왕복여행을 끝냈다. (《백도》에 실은 이야기)》


 공병우 님 사진책 《백도》를 봅니다. 제가 헌책방에서 찾아내어 살핀 《백도》는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무지개빛 사진으로 된 얇은 책자입니다. 다른 하나는 까망하양 사진으로 된 얇은 책자인데 무지개빛 사진보다는 조금 도톰합니다. 두 가지 《백도》는 사진책이라기보다 ‘사진 안내책자’라 할 수 있으나, 제가 보기로는 두 가지 모두 사진책입니다. 작으면서 얇은 사진책입니다.

 사진책이란 100쪽이든 200쪽이든 300쪽이든 부피가 있어야 하지 않습니다. 어떤 사진책은 500쪽짜리 1000쪽짜리로 이루어질 수 있고, 어느 사진책은 8쪽이나 12쪽으로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쪽수로 따지는 사진책이 아니라, 담은 사진에 서린 삶에 어떤 이야기가 깃들었는가로 살필 사진책입니다. 누구하고 나누려 하는 사진이요 사진책인가를 돌아보아야 합니다.

 어떠한 넋과 얼로 사진기를 쥐었느냐를 보여줄 사진책입니다. 어떠한 삶을 사랑하고 꾸리면서 사람들과 마주했는가를 나타낼 사진책입니다. 내 하루 삶은 어떠했고, 내 하루 삶을 보내는 동안 사귄 사람들 이야기를 드러낼 사진책입니다.

 사람은 사람으로 보아야 합니다. 골목은 골목으로 보아야 합니다. 헌책방은 헌책방으로 보아야 합니다. 아이는 아이로 보아야 합니다. 시골은 시골로 보고, 도시는 도시로 보아야 합니다. 서울은 서울로 보아야 비로소 서울 사진책입니다. 백도는 백도로 볼 때에 바야흐로 백도 사진책입니다. (4344.1.27.나무.ㅎㄲㅅㄱ)


― 백도 (공병우 글·사진,돈화문 공안과 사진부,1980.9.28.)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