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나누는 기쁨 ㉥ 사진기와 사진장비
― 사진길 못 찾는 사람한테 찾아드는 장비병
돈이 있으면 ‘더 좋은’ 사진기하고 사진장비를 갖춘다고 이야기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참말 그렇습니다. 돈이 있으면 돈을 더 치러 ‘사진을 한결 잘 찍을 만한’ 기계를 갖출 테지요. 다만, 돈이 없을 때에는 내가 갖고프거나 쓰고픈 장비를 장만하려고 돈을 모으면 됩니다. 하루아침에 떡하니 살 생각은 접고, 두고두고 목돈을 마련하여 장만할 노릇입니다. 돈이 많은 사람들이야 하루아침에 한 번에 장만할 일이지, 돈이 없거나 적은 사람은 차곡차곡 모아서 장만해야지요.
구구단을 금세 외우는 아이가 있으나 한 달이 걸려도 못 외우거나 한두 해가 지나서 비로소 외우는 아이가 있습니다. 길눈이 밝은 사람이 있고 길눈이 어두운 사람이 있습니다. 똑같은 사람이란 없습니다. 사진기 다루는 솜씨가 빼어나야 사진찍기를 할 수 있지 않고, 사진 작품 읽는 눈매가 날카롭거나 글재주가 뛰어나야 사진읽기를 할 수 있지 않아요. 다 다른 사람은 다 다른 삶결에 맞추어 사진기를 장만하고, 사진을 찍으며, 사진을 읽습니다.
사진을 한다는 분들 가운데 ‘장비병’에 걸린 이가 꽤 많습니다. 참 슬픕니다. 왜 장비병에 걸려야 하나요. 무엇하러 장비병을 앓으며 어리석은 짓을 하는가요.
저는 장비병에 걸린 적이 없습니다. 그렇다고 돈이 많거나 넉넉하지 않습니다. 맨 처음 사진기를 쥐던 1998년 여름에는 후배한테서 미놀타 엑스700을 빌려서 썼습니다. 신문사지국에서 먹고자며 대학교를 한창 다니던 때였는데, 이무렵 신문사지국에 도둑이 들어 후배한테서 빌린 사진기를 잃었습니다. 어떡해야 할지 몰라 숨통이 조이다가, 우체국에서 30만 원을 빌었습니다. 한 달 십육만 원 벌이에 구만육천 얼마를 우체국적금으로 부었기에 이만 한 돈을 빌었어요. 헌 물건 파는 가게로 가서 미놀타 엑스700보다 한 단계 낮은 엑스300을 십삼만 원에 샀습니다. 엑스700을 살 돈이 안 되었고 살림돈이 모자랐습니다. 두 해쯤 걸려 돈을 푼푼이 모아 엑스300을 팔고 엑스700을 겨우 되사면서 후배한테 돌려주고, 대학교를 그만둔 다음 출판사에 일자리를 얻어 한 달 육십이만 원을 받으면서 우체국 빚을 갚고 캐논 에이 1번을 새로 장만합니다.
요사이는 수동사진기로 니콘 에프엠3에이 기종을 씁니다. 이 사진기는 고마운 사진벗이 빌려주었습니다. 열 차례째 사진기를 잃어 더는 되사지 못하겠다 싶을 때에 고맙게 빌려주었어요. 사진기가 제 손에 없거나, 가까스로 쓰던 사진기는 목숨을 다해 못 쓰고 말 무렵, 이제 사진은 더 못 찍는가 하고 생각했습니다. 이를테면, 다른 사람들은 장비병에 걸린다지만, 마땅하거나 변변한 사진기 하나 얻어 쓰기 벅찬 살림으로는 어떠한 녀석이라도 좋으니 사진기만 있어도 좋다는 마음이었어요.
그렇지만, 살림이 가난하다 해서 아무 사진기라도 좋다는 마음은 아닙니다. 어떠한 사진기를 내 손으로 쥐어 사진을 찍든, 사진기마다 다 달리 갖춘 기능을 잘 살려서 내 눈길과 손길과 마음길을 필름 한 장에 앉히면 좋은 사진을 즐길 수 있다고 느꼈어요. 사람들이 장비병에 걸리는 까닭이라면, 스스로 좋은 사진을 즐기지 못하기 때문이요, 스스로 좋은 사진을 사랑하기보다는 남 앞에서 그럴듯하게 내보이려는 잘난 사진을 바라기 때문이라 하겠어요.
자동사진기면 어떻고 한 번 쓰고 버리는 사진기면 어떻겠어요. 우리들은 ‘사진을 찍으면’ 됩니다. ‘사진을 찍을 때’에 즐겁습니다. ‘사진을 찍어’ 나와 내 이웃하고 오붓하게 나눌 좋은 이야기를 빚으면 넉넉합니다.
돈이 있어 더 좋아 보인다는 장비를 갖추는 일은 나쁘지 않습니다. 내 사진이 한 걸음 더 나아가도록 힘쓰는 모습이니 반가우며 흐뭇합니다. 돈이 있을 때에는 거리낌없이 한결 낫다 싶은 장비를 갖출 노릇입니다. 돈이 적거나 없으니 내 살림에 걸맞게 장비를 갖출 일입니다. 이렇게 한 다음, 저마다 다 다른 자리와 살림과 터전에 알맞춤하게 사진을 즐기면 돼요.
아파트에서 살아가면 아파트숲을 사진으로 담을 수 있습니다. 가난해서 달동네에서 살아가면 달동네 터전을 사진으로 찍을 수 있어요. 아파트숲을 찍는다고 볼썽사나운 사진이 되지 않아요. 골목동네 가난한 사람들 모습을 찍어야 비로소 다큐사진이 되지 않습니다. 우리 식구들 복닥이는 삶을 담으면 됩니다. 내가 일하는 터전에서 일동무들하고 어깨동무하는 모습을 찍으면 돼요. 내 아이 사랑스러운 모습을 담고, 내 짝꿍 믿음직한 매무새를 찍으면 됩니다. 애써 비정규직 일터나 공사판을 찾아가야 뭔가 내놓을 만한 사진이 나오지 않습니다. 내가 자가용을 타고 돌아다니든 자전거를 타고 움직이든 두 다리로 걷든, 집과 일터 사이를 오가는 동안 신나게 사진을 일구면 됩니다. 어떤 이는 택시기사로 일하며 ‘택시 창문 밖으로 보이는 모습’을 찍어 사진이야기를 빚었습니다. 자전거마실을 하는 이야기를 사진이야기로 다시 태어나도록 할 수 있겠지요. 걷는 동안 바라본 삶터를 사진이야기로 길어올릴 수 있고요.
사진기가 사진을 이루지 않습니다. 사진장비로 사진을 꽃피우지 않습니다. 사진 갈래에 따라 어떠한 사진기를 써야 하거나 어떠한 사진장비가 있어야 할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수많은 사진기와 사진장비가 있습니다. 그러나 사진기이든 사진장비이든 때와 곳에 따라 쓸모와 값어치가 다르지, 이 사진기들과 사진장비들을 모든 사진쟁이가 똑같이 갖추어야 하지 않아요. 북극에서 북극곰을 찍는 사람하고 달동네에서 동네이웃을 찍는 사람하고 똑같은 장비를 쓸까요. 광고에 넣을 밥그릇과 시계를 찍는 사람하고 딸아이가 집에서 조용히 책 읽는 모습을 찍는 사람하고 똑같은 사진기를 써야 할까요. 아직 ‘손전화로 담은 사진으로 사진책 마련한 사람’은 거의 없지 않나 싶은데, 화소수가 떨어지는 손전화라 할지라도 얼마든지 ‘이야기 아리따운 사진’을 빚는다면, 놀라우며 훌륭하고 멋진 사진책이 태어납니다. 안셀 아담스 님이 대형사진기를 썼다 해서 모든 이가 대형사진기를 쓴다고 안셀 아담스 님처럼 사진을 찍을 수 있지 않아요. 안셀 아담스 님한테는 대형사진기로 바라보는 눈길이 당신 사진을 일구는 데에 가장 걸맞았을 뿐입니다.
소설만 문학이 아닙니다. 수필만 문학이지 않고, 시나 희곡만 문학이지 않아요. 일기나 편지만 문학이 되란 법이 없어요. 동화도 문학이고 비평도 문학입니다. 노래도 춤도 연극도 영화도 문학이 될 수 있고, 모두 한결같은 문학입니다. 문학이며 문화요, 문화면서 삶이에요. 소설 가운데에도 짧은소설이 있고 참말 아주 짤막한 소설이 있으며, 긴소설이 있고 더없이 길디긴 소설이 있어요. 추리소설이 있고 사랑소설이 있으며 역사소설이 있습니다. 소설마다 소설을 쓰는 결이 다르며, 소설을 길어올리는 붓이 다릅니다.
사진은 숱한 갈래로 나눕니다. 숱한 갈래 숱한 사진이니, 아주 마땅히 숱한 사진기와 사진장비로 갖가지 사진을 꽃피웁니다. 저마다 다른 갈래 사진을 하니까 저마다 다른 갈래 장비를 쓰는데, 아직 내가 걸어갈 사진길이 어디인지 모르거나 갈팡질팡하는 나머지 장비병에 걸리지 않았나 돌아볼 노릇이에요. 내가 무엇을 사진으로 담을는지 잘 모른다면 누구나 장비병에 허덕이고 말아요. 내가 좋아하는 사진을 찾고, 내가 즐길 사진을 깨달으며, 내 이웃과 동무랑 살붙이하고 기쁘게 나눌 사진을 붙잡는다면 고맙겠습니다. 사진기는 사진이 아니라 사진기입니다. 사진은 사진기가 아닌 ‘사람이 살아가는 사랑’으로 이룹니다. (4344.1.5.물.ㅎㄲㅅㄱ)
(최종규 . 2011 - 사진책 읽는 즐거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