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을 찾아 먼길 떠나는 발걸음
― 김찬삼, 《끝없는 여로, 세계일주무전여행기》



- 책이름 : 끝없는 여로, 세계일주무전여행기
- 글·사진 : 김찬삼
- 펴낸곳 : 어문각 (1962.1.10.)



 1960년대 사람들 눈길로 1960년대 우리 나라를 돌아보는 가운데, 1960년대 나라밖 여러 사람들을 굽어살피는 《끝없는 여로》를 읽습니다. 어느덧 쉰 해나 흐른 오늘날 헤아린다면, ‘《끝없는 여로》에서 김찬삼 님이 나무라는 일본사람 모습’이란 바로 ‘한국사람 오늘날 모습’이기도 하며, 구태여 일본을 손가락질하기 앞서 우리네 삶자락부터 찬찬히 되씹을 노릇이라고 느낍니다.

 해방된 지 열대여섯 해 즈음인 1962년에 생각하는 일본이라는 나라는, 한국사람으로서 얼마나 못마땅하려나요. 그런데 못마땅한 모습은 못마땅한 모습이지만, 일본사람이 땀흘리거나 애쓰는 삶은 이러한 삶대로 바라보는 가운데, 모자라거나 구슬픈 모습은 모자라거나 구슬픈 모습대로 삭여야지 싶어요.

 남 눈치를 볼 일이 없기도 하지만, 남이 잘하거나 못하거나 할 때에 추켜세우거나 깎아내리기보다는 나부터 내 삶을 얼마나 아름답거나 알차게 일구는가를 살필 노릇이니까요. 남들이 미역국을 먹든 김치국을 먹든 내 밥상에 무슨 국을 올리는가를 살필 일입니다.


.. 파리서 만난 일본 어느 상업 미술가가 무대배경 진열 강좌의 밑천이 떨어져 왔노라고 하던 것이 생각났다. 이렇듯 일본은 창조라기보다 모방의 밑천을 줍는 것인가 하고 일본에 대한 인식을 새로이 했다. 그리고, 세이론에서 사귄 독일 여성이 독일제 물품이 일본제 때문에 타격을 받으며, 일본 제품은 값은 싸지만 실질적인 것이 못 된다고 하며, 독일제는 결코 눈속임으로 만들지 않는다고 하던 말이 옳아 보였다. 그러고 보니, 현재는 일본 물건이 판을 치고 있지만, 유럽을 따르기는 어려우며, 더구나 일본사람들의 생활 수준이 유럽을 따르려면 아직도 멀 것만 같았다. 일본 출판물을 보면 외국 못지않게 꾸몄으며, 독서들도 많이 하지만, 일반 생활용어엔 상소리가 많은 것으로 보아 문화민족이라고는 볼 수 없지 않을까! 게다가 건축미술 수준은 더욱 그렇다. 최근에 지었다는 도오쿄오의 빌딩도 수백 년 전의 프랑스 샨제리제를 감히 따라가지 못하니 말이다. 그러나, 구미에선 사고방식이 기계화되었으며, 남이 뭘 하든 참견하지 않으며 냉정한데, 일본은 인구 과잉인지 사람들이 친절하며 심지어 사람이 없어도 되는 에스칼레타에까지도 여자가 달려 있어 친절히 인사하는 것이다 ..  (358쪽)


 김찬삼 님은 쉰 군데 넘는 온누리 여러 나라를 돌면서 갖가지 일을 겪습니다. 아프리카땅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는 인종차별을 겪으며 소리높여 다투지만 살갗 하얀 신문기자도 목사도 온통 살갗 까만 사람들한테 숱한 문화와 문명을 심으며 도와주었는데 고마워할 줄 모른다는 말만 되풀이한다고 적습니다.

 사랑스러운 사람들을 많이 만났다는 ‘칠리(칠레)’에서는 어느 여학교에 초대되어 사회생활과 시간에 들어가서 한국을 소개하는 사진을 보여주고 이야기를 들려주었더니, “그러면서 역사에 남긴 것이 무엇이냐고 물을 때는 정말 적면赤面할밖에 없었다. 내가 갔을 때는 마침 칠리의 독립기념일(9.18.)이 며칠 남지 않은 때라 학교에서도 그 행사준비가 한창이었다(161쪽).”는 이야기를 적습니다.


.. 이번 여행을 돌이켜보건대, 새로운 세계의 모습을 보는 기쁨도 그지없었읍니다만, 그 반면에 눈물 흘린 때도 여러 번 있었읍니다. 내가 곤궁에 빠졌을 때가 아니라, 낯선 나라 사람끼리 민족의식을 초월하여 세계의 비극에 공감하고 서로 사랑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지상의 모든 사람은 분명 사랑에 굶주리고 있다는 것을 새삼 느꼈읍니다 ..  (9쪽)


 1962년 1월에 1쇄를 찍은 여행책 《끝없는 여로》는 1965년 6월에 자그마치 16쇄를 찍습니다. 사람들은 오래된 책을 헌책방에서 사거나 팔 때에 으레 ‘첫판’을 높이 치거나 여기지만, 저는 첫판보다 2쇄나 3쇄나 10쇄 같은 책을 좋아합니다. 아니, 몇 쇄로 찍은 책이건 그리 따지지 않습니다. 책을 읽으며 밑줄을 긋거나 빈자리에 이 생각 저 마음 끄적이기 때문에, 되도록 깨끗하거나 밑줄이 없는 책을 좋아합니다. 꽤 묵은 책들이면서 첫판이면 으레 값이 비싸지만, 첫판이 아니라면 제법 값이 눅곤 합니다.

 첫판을 더 높이 사기도 하지만, 쇄가 많은 책은 많이 찍어 많이 팔린 만큼 조금 더 쉬 만날 수 있다 할 만하니 값이 눅을 수 있겠지요. 그런데 첫판 아닌 책들은 내가 찾으려는 묵은 책이 지난날 몇 쇄나 찍어 얼마나 사랑받았는가를 헤아리는 잣대가 되곤 합니다. 이제는 문닫고 사라진 출판사라면 어느 책 하나를 몇 부 찍었는가 도무지 알 수 없기도 하지만, 아직까지 튼튼히 선 출판사일지라도 서류를 제대로 건사하지 않았다면 몇 부나 팔렸는가 모를 수 있어요. 헌책방에서 마주하는 책들 간기를 보며 얼마쯤 되겠거니 어림합니다.


.. 스토크호름(스톡홀름)엔 운하가 많다. 문화 수준이 높으며, 국왕도 도보로 호위 없이 걸으니 얼마나 민주적인 나라인가! 이 서울의 인구는 700만인데, 법률 없이도 살 수 있는 국민 같다. 그들의 어진 얼굴을 들여다보면 그렇게 느끼게 된다 ..  (339쪽)


 이제 세계여행은 누구나 손쉽게 할 수 있을 뿐더러, 딱히 땡전 한 푼 없이 맨몸으로 온누리를 밟아 보려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온누리 삶터가 많이 바뀌기도 했을 테지만, 제아무리 사람들과 삶터와 나라가 바뀌었달지라도 내 모두를 훌훌 털면서 밑바닥부터 복닥이고자 애쓰는 사람이 몹시 줄거나 거의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마음씨 따스한 사람은 예나 이제나 따스하고, 마음결 차가운 사람은 이곳에서나 저곳에서나 차갑습니다. 지난날 김찬삼 님은 더 많은 나라를 더 오래오래 다니려는 발걸음이라기보다, 이 나라에도 넉넉히 있는 따스한 사랑을 이웃한 나라에서도 넉넉히 마주하고픈 꿈을 꾸며 길을 나섰으리라 느낍니다. 좋은 넋과 좋은 꿈이라면 나부터 좋은 사람으로 거듭나면서 좋은 동무를 사귑니다. (4344.1.4.불.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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