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을 걷는 마음


 즐겁게 길을 걷습니다. 내 걸음이 누구보다 빨라 가장 앞장서서 걸을 수 있지 않더라도 즐겁게 길을 걷습니다. 내 걸음이 누구보다 느려 가장 뒤처져 걸을지라도 즐겁게 길을 걷습니다. 내가 걷는 이 길에는 사랑하는 짝꿍이랑 아이가 함께 있습니다. 짝꿍이랑 손을 잡고 걷든 어깨동무를 하며 걷든 혼자 걸을 때보다 한참 더디 걸어야 합니다. 때로는 오래도록 한 자리에 머물거나 아예 며칠을 지내거나 때로는 그예 눌러살아야 합니다. 아이하고 손을 잡고 걷든 아이를 품에 안고 걷든, 아이 빠르기와 결을 살펴야 합니다. 더욱이, 아이가 힘들면 새근새근 잠들도록 바람 안 불고 따스한 보금자리를 찾아들어야 합니다.

 글을 쓰는 길을 걷습니다. 자전거를 타는 길을 걷습니다. 사진을 찍는 길을 걷습니다. 집살림을 도맡으며 집식구를 돌보는 길을 걷습니다. 조그마한 몸뚱이 하나로 버티기란 버겁습니다. 언뜻 보기에는 튼튼하다지만, 알고 보면 퍽 여린 몸뚱이로 이 숱한 일을 해내자니 벅찹니다. 그런데 용케 죽지 않고 살아갑니다. 어쩌면, 다가올 밤에 잠든 채 다시는 못 일어날는지 모릅니다. 그래도 하루하루 고맙게 다시 눈을 뜨며 새날을 맞이합니다. 새날을 맞이하며 새롭게 글을 쓰고 새롭게 사진을 찍으며 새롭게 아침을 마련하고 설거지를 하며 빨래를 합니다. 글과 사진은 날마다 새롭게 빚는데, 빨래랑 밥 또한 날마다 새롭게 보듬어야 합니다. 아이랑 어제 하루 신나게 놀았으니 오늘은 아이 혼자 내버릴 수 없습니다. 엊저녁 옆지기 다리를 주물렀으니 오늘은 못 본 척하며 지나칠 수 없습니다.

 요즈음은 시골에 사람이 크게 줄어 시골길을 거닐 때에 사람을 마주치기 어렵습니다. 그래도 드문드문 할매랑 할배를 마주칩니다. 시골길을 거니는 동안 사람보다 자동차를 훨씬 자주 마주칩니다. 그래도 도시처럼 어마어마하게 많은 자동차를 부대껴야 하지 않습니다. 고즈넉한 시골길을 걷는 동안 바람소리를 듣고 새소리에 귀를 기울입니다. 구름이 흐르는 소리와 해가 기우는 소리를 가만히 고개를 갸웃하면서 느껴 봅니다.

 걷다 보면 땀이 나고, 땀이 나면서 가방을 멘 등허리가 쑤시고, 아이가 힘들어 할 때에는 아이를 안느라 팔다리가 몹시 결립니다. 때때로 도시로 마실을 나와 시내를 걸어야 하면 아이는 잠들지 못합니다. 시끄럽기도 시끄럽지만, 아이 눈을 사로잡는 가게 불빛이며 온갖 모습이 번쩍거리기 때문입니다. 시골길이나 골목길을 거닐 때에는 조용하기도 조용하지만, 시골자락과 골목자락이 보드라이 아이를 품어 줍니다. 아이는 시골길이나 골목길 마실을 할 때에 아빠 품에 안기거나 엄마 등에 업혀 새근새근 잠들곤 합니다.

 도시에서 살아간다면 더 자주 책방마실을 하고 더 많이 책을 사들일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도시에서는 우리처럼 가난뱅이 식구는 조그마한 집을 빌려도 달삯을 많이 치러야 합니다. 밑돈(보증금)을 거의 못 내는 살림이니까요. 도시에서는 밑돈 꾸랴 달삯 벌랴 눈썹 휘날리도록 휘둘리며 바빠야 하고, 쓰기 싫은 글이나 찍기 싫은 사진을 뽑아내려고 돈을 벌어야 합니다.

 기계처럼 글과 사진을 뽑아낼 때에도 아름다운 열매를 거둘 만합니다. 그러나, 나 스스로 착하고 참다이 내 삶을 사랑하는 가운데 아름다운 열매를 거두고 싶습니다. 아이가 아빠 품에 안겨 조용히 잠들면서 바람결을 볼따구니로 느끼는 삶자리에서 일하며 땀흘리고 싶습니다. 더 많이 쏟아내어 더 많이 읽힐 글도 나쁘지 않겠지요. 더 빨리 달리는 자동차로 음성 읍내가 아니라 충주 시내로 다녀오면서 더 값싼 먹을거리나 살림살이를 장만해도 나쁘지 않겠지요. 그래도, 저랑 옆지기랑 아이로서는 읍내 조그마한 롯데리아 몇 백 원짜리 얼음과자로도 즐겁습니다. 그냥 작은 구멍가게 막대얼음과자로도 기쁩니다. 장마당 500원짜리 어묵꼬치를 우물우물 냠냠해도 신납니다. 빨래하느라, 밥하느라, 설거지하느라, 방바닥 쓸고닦느라, 이불 털고 빨고 말리느라, 아이랑 놀고 아이한테 그림책 읽어 주느라, 하루가 몇 해나 되는듯 아침부터 밤까지 등허리 펼 겨를이 없는데, 이런 삶이지만, 이런 삶밖에 안 되지만, 이냥저냥 즐거이 내 길을 걷습니다. 저녁나절 잠자리에 일찌감치 드러누워 아이를 부릅니다. 아이가 안 오고 놀겠다면 그냥 놀라 하고 아빠는 이동안 책이라도 몇 줄 읽으려고 합니다. 이러면 아이는 으레 “아빠 책 읽어 줘.” 하면서 달려옵니다. 그냥 너 혼자 더 놀다 오지 하고 속으로 생각하다가는, 아이가 책을 읽어 달라 하는데 안 읽어 주는 못된 어버이가 될 수 없는 노릇입니다. 잠자리맡에 늘 놓아 두는 그림책을 집고 아이는 아빠 오른팔 베개로 눕히며 그림책을 읽습니다. 그림책에 적힌 글은 ‘어린이 눈높이에 걸맞지 않게 잘못 쓴 말투와 어려운 낱말이 잔뜩 깃들었’기에, 아빠는 이 말투를 모조리 고쳐서 새로 읽습니다. 아이는 눈알을 초롱초롱 빛내고 웃으면서 이야기를 듣습니다.

 우리 아버지나 어머니도 이렇게 나한테 그림책을 읽어 준 적이 있을까 궁금합니다. 어쩌면 안 읽어 주었는지 모릅니다. 뭐, 못 읽어 주었다고 해야 옳습니다. 먹고살기에 빠듯하고, 돈을 벌랴 집살림 꾸리랴 등허리가 휘셨으니까요. 출퇴근에 네 시간이 걸리고 아침부터 저녁까지 서서 아이들을 가르치다 돌아오는 평교사 아버지는 집에 들어오면 그대로 뻗어서 쓰러지고 형이랑 나는 날마다 아버지 다리와 허리를 주물렀는데 아버지가 우리한테 그림책이건 동화책이건 읽어 줄 틈이 어디 있겠어요. 학교에서 학교 아이들한테는 읽어 주겠지만요.

 참말 돈은 못 벌고, 살림을 꾸린다지만 꽤 엉터리로 꾸리는데, 이럭저럭 어설프며 어줍잖은 하루하루라지만, 짝꿍이 있고 아이가 있기에 시골집에서 내 길을 내 깜냥껏 더디더디 걷습니다. (4343.12.22.물.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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