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나기 무네요시 다시읽기
여러 해 만에 야나기 무네요시 님 책을 다시 읽는다. 이번에는 《조선을 생각한다》(학고재,1996)를 다시 읽기로 한다. 야나기 무네요시 님 넋을 가장 잘 간추렸다고 하는 책이지만, 정작 이 책은 출판사에서 더 찍지 않는다. 더 안 팔리니까 더 찍기 어려울 테지.
지난 2007년에 《야나기 무네요시의 두 얼굴》(지식산업사,2007)이라는 책이 나온 적 있다. 야나기 무네요시라는 사람을 찬찬히 읽으려 하지 않고 ‘죽은 자료’를 들추어 내는 한편 ‘집안 발자국’을 살피기까지 하는 책이라고 한다. 나로서는 이런 책은 굳이 읽고프지 않다. 내가 옳게 살아가며 옳게 바라본다면, 야나기 무네요시 님이 쓴 책을 읽으면서 얼마든지 이이 삶과 넋과 말이 거짓인지 참인지 바른지 그른지 착한지 궂은지 고운지 미운지를 깨닫는다. 나 스스로 옳게 살아가지 않거나 옳게 생각하지 않는다면 제아무리 따끔하거나 찬찬하다 싶은 비평이든 논설이든 비판을 읽는달지라도 제대로 삭이거나 받아들이지 못한다.
우리가 읽을 글이란 ‘어느 한 사람이 온마음을 쏟아 내놓은 첫마음’ 담은 글이다. 야나기 무네요시라는 한 사람이 쓴 모든 글을 두루 읽을 수 있는 가운데 《야나기 무네요시의 두 얼굴》 같은 책을 함께 읽을 수 있다면 더 널리 헤아리거나 돌아볼 수 있기도 하겠지. 그러나, 정작 《조선을 생각한다》라든지 《공예문화》라든지 《다도와 일본의 미》 같은 책을 찾아볼 수 없다면 우리로서는 무엇을 생각하고 무엇을 살피며 무엇을 얻을 수 있겠는가.
아쉽다면 《조선을 생각한다》는 더 찾아 읽을 수 없으나 《다도와 일본의 미》(1996)는 아직 찾아 읽을 수 있다. 《미의 법문》(2005)이나 《수집 이야기》(2008)도 찾아 읽을 수 있다. 《조선과 그 예술》(2006)이라는 이름으로 새로 나온 책도 하나 있다. 2006년에 신구문화사에서 다시 찍은 《조선과 그 예술》이 앞으로 언제까지 새책방 책시렁에 자리잡을 수 있을까 모르겠는데, 우리 삶과 문화와 발자취를 곰곰이 되새기고자 마음쓰는 이라면 헌책방마실을 꾸준히 하면서 야나기 무네요시 님 예전 책이든 다른 좋은 책이든 넉넉히 찾아서 읽으리라 본다. 내가 읽을 책은 ‘산 야나기’이지 ‘죽은 야나기’가 아니니까.
《조선을 생각한다》는 2000년에 읽었으니 열 해 만에 다시 펼친다. 열 해 뒤에 책을 다시 펼치니 가슴으로 새롭게 와닿는 대목이 있다. 아니, 열 해에 걸쳐 내 삶은 굵든 짧든 구비구비 헤치며 흘렀으니, 이만큼 새롭게 볼 눈길을 길렀다 할 만하리라. 이를테면, “조선에 대해 경험과 지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의 사상이 조금도 현명하지 않고 깊이도 없고 또한 따뜻함도 없다는 것을 알고(14쪽)” 같은 대목을 새롭게 읽는다. 나로서는 이 글월에서 “따뜻함도 없다”라는 대목이 눈에 걸린다. 잇달아, “이웃과의 사귐은 오직 사랑이 맺어 주는 것이다. 군정이나 압박이 사람과 사람을 이어준다고 누가 생각할 수 있겠는가(15쪽)”를 읽으며 가만히 되짚는다. 참말 사랑 아니고 무엇을 하겠는가. 참말 따뜻함 없이 무슨 일을 하거나 무슨 글을 쓰겠는가. 따뜻한 사랑을 담아 쓰는 글이 아니라면 나부터 이런 글을 되읽기 싫다. 내가 쓴 내 글을 나부터 기쁘게 되읽을 만해야 내 글을 사람들 앞에 내놓는다. 아니, 나는 내가 쓴 글을 나 스스로 한 해 뒤이든 열 해 뒤이든 되읽으며 내 삶을 일구고 싶지, 누구한테 내보이거나 선보일 생각으로 글조각만 붙잡을 마음이 없다. 내가 쓰고픈 글은 따뜻한 사랑을 담는 글이요, 내가 읽고픈 책은 따뜻한 사랑을 담은 책이다.
“고분을 파헤쳐 옛 예술품을 모은 사람은 있을지 모르겠지만, 그것을 통해 조선에 대한 사랑을 실천한 사람은 한 사람도 없는 것 같다(15쪽)” 같은 대목을 차분히 곱씹는다. 이는 지식인을 이르는 대목이다. 지식인들은 수많은 책을 읽어 지식을 쌓지만, 이 지식을 어떻게 펼쳐야 하는 줄을 헤아리지 않기 일쑤이다. 수많은 논문이 있고 또다른 책이 쏟아지지만, 정작 이 나라에서 살아가는 여느 사람들 수수한 삶에는 눈길을 안 두기 일쑤이다. 가난한 사람이나 아픈 사람을 사진으로 담는다는 다큐멘터리 사진쟁이는 가난한 사람이나 아픈 사람들하고 어떻게 어깨동무를 하고 있나. 몸으로 부대끼며 함께 살아가는 지식인은 얼마나 될까. 환경운동을 말하면서 내 몸 깊이, 아니 내 삶으로 환경사랑 자연사랑을 잇는 일꾼은 얼마나 있다 할 만한가. 지식과 구호와 논문과 논설로 4대강사업하고 다부지게 맞선다 하는 분들은, 당신 삶을 얼마나 ‘4대강사업을 몰아낼 만한 눈높이’로 가꾼다 할는지 궁금하다. 목소리만 내어서는 아무 일을 하지 못한다. 목소리는 내지 않더라도 몸으로 살아내고 마음으로 삭일 수 있어야 한다. 농사짓는 사람들 마음이 되어야 하고, 아이한테 젖을 물리는 어머니 마음이 되어야 하며, 아이를 품에 안고 살가이 보듬는 어버이 마음이 되어야 한다.
“승리하는 것은 그들의 아름다움이지 우리의 칼이 아니다(17쪽)”나 “칼의 힘은 결코 현명한 힘을 낳지 않는다(18쪽)” 같은 대목은 잘 읽어야 한다. 뭐랄까, 제대로 읽어야지. 야나기 무네요시 님은 일본 군벌이 조선을 식민지로 삼은 일만 놓고 슬퍼 하거나 아파 하지 않는다. 불쌍한 사람은 식민지 조선사람뿐 아니라 총칼을 앞세운 일본 군인과 권력자이기까지 하다. 아니, 식민지 조선사람보다 총칼을 앞세운 일본 군인과 권력자가 훨씬 불쌍하다. 얼마나 덧없고 부질없으며 값없는 삶을 보내는 군인과 권력자인가. “사람들은 일본의 사상을 심으려고 했지만 그들의 마음을 살리려고는 하지 않았다(20쪽)”고 하듯, 일본 권력자와 한국 권력자는 일제강점기에 더 큰 잇속을 챙기려 했을 뿐이다. 이리하여 참으로 크나큰 잇속을 챙긴 두 나라 권력자이다. 일본 권력자만 잇속을 챙기지 않는다. 한국에도 똑같은 권력자가 있다. 그런데, 이런 권력자가 있든 저런 권력자가 있든 밑바닥에서 짓눌리는 사람들은 내 삶을 버리지 않는다. 지식인들은 갖은 일본말과 중국말과 미국말을 주워섬기는데, 이 나라에서 이 나라 말과 글을 지키거나 건사한 사람이란 누구인가. 바로 여느 사람, 수수한 사람, 가난한 사람, 지식 없는 사람 들이다. 이 나라 지식인들은 아직까지도 ‘일본 제국주의 물이 짙게 밴 일본 한자말과 일본 말투’를 아무렇지 않게 쓴다. 게다가, 당신들 지식인 스스로 이런 얼토당토않은 말에 젖어들어 있는 줄 못 깨닫기까지 한다. 일제강점기를 꾸짖으면서 정작 일제강점기 일본 제국주의자들 말투와 낱말로 이야기를 한다면, 이 얼마나 슬프고 딱한 노릇인가.
지식에 앞서 삶이고, 지식이 아닌 사랑이어야 한다고 느낀다. 다른 사람들이 이러거나 저러거나 나는 고등학생 때부터 야나기 무네요시 님 책을 꾸준히 읽고 되읽어 왔다. 내가 읽는 야나기 무네요시 님은 중국사람 노신 님하고 한동아리이다. 연변땅 김학철 님하고도 한동아리이다. 남녘땅 리영희 님이라든지 일본땅 오다 마코토 님하고도 한짝이라고 느낀다. 남녘에서는 일찍이 1976년에 송건호 님이 야나기 무네요시 님 책을 《한민족과 그 예술》(탐구당)이라는 이름으로 옮긴 적이 있다. 이때 옮긴이 말에 송건호 님은 “일본에는 아직도 옛날의 식민주의적 잔몽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우리를 업신여기거나 재진출을 꾀하는 층이 있음에 비추어, 그들에게 저자세로 영합하는 친일행위는 용서할 수 없다. 한편 일본에는 옛날이나 지금이나 두 나라의 참된 우호를 위해서는 실로 우리 민족을 이해하고 협조를 아끼지 않는 양심적 인사들이 많다는 점에서, 일본을 무조건 증오하고 배격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 일본의 대한 태도에 있어 무엇을 경계하고 무엇을 환영하고 고맙게 받아들여야 할지를 분명히 식별할 줄 알아야 한다”고 적었다. 일본에서 살아가며 옳은 삶 옳은 넋 옳은 말로 사랑을 나누는 사람이 있는 한편, 한국에서 살아가며 슬픈 삶 그릇된 넋 못난 말로 미움을 쏟아붓는 사람이 있다. 우리는 ‘식민지 조선 무렵 일본사람’ 야나기 무네요시가 아니라 ‘참삶을 사랑하고 아낀’ 야나기 무네요시를 읽어야 한다.
생각해 보면, “금전이나 정치로는 마음과 마음이 서로 맞닿을 수 없다(23쪽)” 같은 말을 1919년에 일본사람이 읊은 대목을 못마땅해 할는지 모르겠다. 아마, 무척 못마땅하다고 느낄 만하다. 그렇다면 이무렵 한국사람은 무슨 이야기를 읊었는가. 뒷날 시인 신동엽 님은 〈껍데기는 가라〉 같은 시를 읊기도 했는데, “향기로운 흙가슴만 남고 그 모든 쇠붙이는 가라”라는 대목이나 “이웃 간에 영원한 평화를 구하려고 한다면, 우리의 마음을 사랑으로 깨끗이 하고 동정으로 따뜻하게 하는 길밖에 없다(22∼23쪽)”라는 대목이나 서로 한 흐름이고 한 넋이다.
야나기 무네요시 님이 쓴 〈조선사람을 생각한다〉라는 글이 요미우리신문에 실렸다 해서 말썽거리가 많다는 사람이 많기도 한데, 1970∼80년대에 글 하나 써서 내놓으려면 조선일보나 동아일보에 싣지, 어느 신문에 실었을까. 동아투위니 무어니 하고 이야기하는데, 조선일보이든 동아일보이든 이무렵에 어떤 글투로 어떤 이야기를 신문에 담았는가. 더군다나 요즈음 한겨레신문 기사를 돌아보건대, 나로서는 한겨레신문이 참으로 안타깝고 슬프다. 2200년이나 2500년쯤에 살아갈 뒷사람들한테는 한겨레신문이 진보 목소리를 지켜 주는 매체라 여길는지 모르나, 2010년을 살아가는 내 눈썰미로는 한겨레신문은 진보 목소리를 앞세워 장사를 한다고 느낀다. 조선일보나 동아일보 같은 매체는 보수라든지 안보라든지 경제 목소리를 내세워 장사를 한다고 여긴다. ‘진보 목소리’가 아니라 ‘진보’라 한다면, 한겨레신문에는 주식시세표나 방송편성표나 골프 기사나 재벌회사 광고 따위는 실어서는 안 된다. 더욱이 국민주 신문이라 한다면 광고 하나 없는 신문으로 나아갈 길을 찾아야지, 더 많은 몹쓸 광고를 실으며 신문사 살림을 꾸리는 일이란 얼마나 두동진 모습인가. 〈조선사람을 생각한다〉라는 글이 어느 신문이나 매체에 실렸든 하나도 돌아볼 만한 값어치가 없는 대목이다. 이 글이 어떠한 글인가를 읽어야 한다. 이 글이 무슨 뜻과 넋을 실었는가 헤아려야 한다.
삶을 읽는 책이어야지 지식을 갈무리하는 책이 되어서는 안 된다. 삶을 사랑하는 글이어야지, 지식을 우러르는 글이 되어서는 안 된다.
올 3월에 읽은 《훔치다 도망치다 타다》(유미리 산문,2000)를 엊그제 다시 끄집어 내어 읽다 보니, “진상을 폭로해 버릴까 싶기도 하지만, 진상 따윈 들을 귀가 없을 것이다(40쪽)” 같은 대목이 있다. 피식 웃음이 나면서 서글퍼 눈물이 난다. 왜 우리한테는 들을 귀가 없을까. 왜 우리한테는 읽는 눈이 없을까. 왜 우리한테는 아로새기는 가슴이 없을까. 왜 우리한테는 부둥켜안는 몸이 없을까. 유미리 님은 거듭 이야기한다. “여성은 어디서든 아름다움을 찾아낸다. 눈썹, 복사뼈, 엉덩이 사이에서도.” 하고.
그래, 야나기 무네요시 님, ‘유종열’ 님은 어머니 같은 눈길과 손길로 글을 썼고 사람을 사귀었다. 어떤 이들은 야나기 무네요시 님을 정치나 군사나 종교나 문화 따위에 써먹으려고 휘두르기도 했겠지. 어머니한테서 돈을 울궈낸다든지 시골집 논밭을 팔아 대학교를 다닌다든지 하는 딸아들이 얼마나 많은가. 어머니는 제 뼈와 살과 피를 아이한테 내어주는데다가 젖까지 먹인다. 나중에 무럭무럭 자라도록 밥을 차리고 빨래를 하며 옷을 입힌다. 잘 자라며 자장노래까지 부른다.
사람들이 어머니 넋을 읽거나 어머니 사랑을 깨닫거나 어머니 슬기를 알아챈다면, 야나기 무네요시 님을 새로우면서 옳게 삭일 수 있으리라 믿어 본다. 믿어 보련다. 믿고 싶다. 한 해 가운데 내가 가장 좋아하는 12월을 맞이하면서 아름다운 삶과 사람과 사랑을 헤아리고 싶었는데, 자꾸만 슬프며 아픈 삶과 사람과 사랑만 되뇌고 마는구나. (4343.12.1.달.ㅎㄲㅅ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