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계의 린네 1
다카하시 루미코 지음 / 학산문화사(만화) / 2010년 7월
평점 :
품절




 삶을 읽는 멋, 만화 읽는 맛
 [만화책 즐겨읽기 9] 다카하시 루미코, 《경계의 린네 (1∼2)》


 길을 걷다가 반가운 벗이나 이웃을 만나면 그만 길에 우뚝 서고 맙니다. 이 길에 다른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데에 걸림돌이 되지만, 스스로 걸림돌이 되는 줄 느끼지 못하면서 인사를 나누고 안부를 묻다가는 이야기꽃을 피웁니다. 자주 마주하는 반가운 벗이나 이웃하고도 스스럼없이 즐겁게 이야기꽃을 피우지만, 오랜만에 마주하는 반가운 벗이나 이웃이라면 더 오래 더 길게 더 애틋하게 이야기꽃을 피웁니다.

 반가운 벗이나 이웃이랑 나누는 이야기란 하나도 새삼스럽거나 남다르지 않습니다. 반가운 벗이나 이웃하고 주고받는 이야기란 조금도 대단하지 않고 하나도 훌륭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저 그대로 좋습니다. 오붓하게 나누는 이야기라서 좋고, 재미나게 웃을 수 있는 이야기라서 기쁩니다.

 이런 뜻 저런 값 그런 보람이 없달지라도, 삶을 읽는 멋입니다. 삶을 나누는 즐거움입니다. 삶을 이루는 수수하면서 고운 이야기예요.

 아이 키우는 이야기라든지, 아이가 얼마나 자랐느냐는 이야기라든지, 아이가 어떻게 뛰고 놀며 크느냐는 이야기라든지, 아이가 밥은 어떻게 먹고 동무는 어찌 사귀느냐는 이야기라든지, 아이 이야기만 하더라도 끝이 없습니다. 아이를 안 낳은 사람하고든 아이를 여럿 낳은 사람하고든 아이 이야기만 나누면서도 하루 해를 꼴딱 새울 만합니다. 정치 이야기라든지 사회 이야기라든지 문화 이야기라든지 운동경기 이야기라든지 하나도 모를지라도 얼마든지 우리 살아가는 품으로 온갖 삶 흐름을 읽고 나누며 꽃피웁니다.


.. “이 녀석 봐라. 학교에서 지정한 체육복도 안 샀어?” “훗. 내가 그런 사치스런 물건을 사면, 지옥에 풀어져요.” “응? 너희 집이 그렇게 가…….” “지옥에 떨어져요.” “그, 그래. 알았다. 미안하다, 로쿠도.” “네, 다신 그런 소리 마세요.” ..  (1권 48∼49쪽)


 새 작품을 내놓을 때마다 한껏 무르익으면서 한결 구수한 맛을 베푸는 만화쟁이 다카하시 루미코 님 《경계의 린네》 1권과 2권을 읽습니다. 얼마 앞서, 그러니까 올 2010년 7월에 《이누야샤》 이야기를 56권으로 마무리지은 다카하시 루미코 님인데, 어느새 새 만화를 그려서 내놓습니다. 자그마치 열 해 가까이 그린 《이누야샤》임을 생각한다면, 좀 쉬면서 새 힘이나 넋을 가다듬거나 추스를 만하건만, 다카하시 루미코 님은 언제나 힘이 넘치게 만화를 그린다고 느낍니다. 게다가 다카하시 루미코 님 만화는 짧지 않습니다. 늘 꽤 길게 그리는 만화입니다. 그러나 퍽 길게 그리는 만화이면서 지루하게 늘어뜨리지 않습니다. 굵고 긴 만화이고, 단단하며 야무진 만화입니다.

 함께 만화를 즐기는 집식구가 어느 날 얼핏 이야기해 주어 새삼스레 깨닫기도 했는데, 다카하시 루미코 님은 ‘여학생 치마를 들춰 속옷이 보이도록 하는 그림’을 그리지 않습니다. ‘소년물’이라 일컫는 만화들은 으레 이런 그림을 ‘독자 서비스(?)’라는 이름을 내세워 사이사이 끼워넣지만, 다카하시 루미코 님만큼은 이런 그림을 도무지 안 그립니다. 주인공이 짧은치마 교복을 입은 채 하늘을 날든 하늘에서 떨어지든 치마가 말려올라가는 일이란 없습니다. 늘 허벅지에 찰싹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는달까요.

 이런 이야기를 하면, 어떤 이들은 지난날 《란마 1/2》은 뭐냐고 물을 만합니다. 그런데, 제대로 살피는 눈길이라면, 《란마 1/2》에서도 엉큼하거나 어리석게 여학생 치마 들추는 그림은 그리지 않았어요. 《란마 1/2》에서는 ‘대놓고(?)’ 젖가슴과 알몸 그림을 그렸습니다. 그러나 엉큼한 뜻이나 얄궂게 훔쳐보기 하려는 그림이 아닌 다카하시 루미코 님입니다. 자연스러운 흐름으로 알몸이나 젖가슴 그림을 그립니다.

 아름다운 사랑을 아름다운 결로 담아내고픈 넋을 보여주는 《이누야샤》이기에, 우리로 치면 열대여섯에서 열예닐곱 나이에 이르는 이야기를 그리는 동안 서로 따스하게 손을 잡고 마지막에 이르러 어여삐 입맞춤을 합니다.

 이번에 새로 그리는 만화 《경계의 린네》에서도 이런 맛을 살포시 느낍니다. 이제 막 1권과 2권을 그렸을 뿐이니, 어쩌면 이 작품 또한 50권 넘게 그릴는지 모르며, 어쩌면 100권까지 그릴는지 모르기 때문에 이야기 흐름이 어떻게 나아갈는지는 참 아리송하지만, 다카하시 루미코 님 만화 밑바닥에 흐르는 ‘고운 사랑’ 이야기를 알뜰히 여미리라 봅니다.


.. “이봐요, 아가씨.” “네?” “아가씬 그렇게 젊은데, 아무런 미련도 없수?” “그래, 우리는 이제 여한이 없으니 됐지만.” “응, 여한이 없어.” ‘어라, 가만히 보니 ……. 할아버지 할머니들뿐이네. 다들 무척 만족스러워 보이고, 나도 어쩐지 즐겁다.’ “젊은 나이에, 정말 미련이 없어?” “네! 그냥 이제 됐다 싶네요.” ..  (1권 113쪽)


 사람을 사랑하고, 사람을 생각하며, 사람을 살피는 이야기를 그립니다. 사랑을 다루고, 사랑을 어루만지며, 사랑을 보듬는 이야기를 펼칩니다. 삶을 아끼고, 삶을 벗하며, 삶을 일구는 이야기를 선보입니다.

 아무래도 문학이라 한다면, 또 만화로 이루어 내는 문학이라 한다면, 으레 사람과 사랑과 삶을 보여주는구나 싶습니다. 우리들이 가장 눈길을 두면서 가장 마음을 쏟거나 가장 땀을 들이는 일이란 바로 사람과 사랑과 삶이 아닌가 싶습니다. 사람을 보고 사랑을 느끼며 삶을 붙잡는 가운데 모든 일과 놀이가 이루어지는구나 싶어요.


.. “악마가 무슨 거짓말로 속여넘겼는지 몰라도, 너무 바보 같지 않니?” “저, 저기 스즈 선배.” “정말 질색이야! 다신 문병도 안 갈 거야.” ..  (2권 115쪽)


 군더더기를 그리지 않는 다카하시 루미코 님 만화입니다. 흐름이 몹시 빠르다 할 만합니다. 그러면서 한 꼭지를 마치고 다음 꼭지로 넘어서면서 아쉽다고 느끼지 않습니다. 아쉬움이 없는 만화, 곧 시원한 만화입니다. 모든 꼭지가 끝날 때마다 후련하다고 느낍니다. 《란마 1/2》에서는 이런저런 아쉬움을 느끼곤 했지만, 이때에 느낀 아쉬움이란 왜 주인공들이 더 마음을 활짝 열지 못하면서 툭탁질을 하느냐 싶은 아쉬움이었지, 만화 얼거리나 줄거리나 짜임새에서 느끼는 아쉬움은 아니었어요.

 《도레미 하우스》이든 《경계의 린네》이든 이런 줄기는 곧게 이어갑니다. 짧은만화로 그린 《P의비극》이었든 이번 《경계의 린네》이든 만화로 빚어서 나누는 문학인 다카하시 루미코 님 작품에는 한결같은 목소리가 서립니다. 삶을 읽는 멋으로 만화를 읽는 맛을 느끼자는 예쁘장한 눈웃음이 어립니다.


.. “범인은, 모릅니다.” ‘로쿠도, 왜 감싸는 거야?’ ‘린네 군?’ “너는, 부정입장자로군.” “네, 입장료와 파손된 물건의 수리비는, 제 친구가 내줄 겁니다.” “친구?” “정말 모르나? 위조지폐범을 고발하면 그 대신, 입장료와 수리비를 면제해 줄 수 있는데.” “아, 그렇구나! 그럼.” “제가 내죠.” ..  (2권 184∼185쪽)


 일본 만화쟁이 카루베 준코 님 작품을 읽을 때면 노상 ‘예쁜 만화’라고 느낍니다. 오자와 마리 님 작품을 읽을 적에는 언제나 ‘착한 만화’라고 느낍니다. 다카하시 루미코 님 작품을 읽는 동안에는 늘 ‘밝은 만화’라고 느낍니다. 사람과 사랑과 삶을 한결같이 밝은 빛깔과 밝은 목소리와 밝은 손길과 밝은 몸짓과 밝은 눈망울과 밝은 다리품으로 알뜰히 여미어 이야기 한 자락 베푼다고 느낍니다.

 이 나라 예쁘고 푸른 넋들이 좋은 ‘밝음’을 아리땁게 맞아들이면서 한결 푸르며 싱그러운 삶을 너그럽고 포근히 북돋울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4343.11.27.흙.ㅎㄲㅅㄱ)


- 경계의 린네 (1∼2) (다카하시 루미코 글·그림,학산문화사 펴냄,2010/4200원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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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피 2010-11-27 23: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경계의 린네를 보셨네요.저도 이 작품을 받지만 무척 재미 있지요.생각의 차이겠지만 다카하시 루미코가 야한 그림을 그리지 않았다고 볼수는 없지요.뭐 야한 그림의 정도문제 겠지만 앞서 말한 란마 1/2의 벗은 그림이 한국에서 청소년 음란물로 19금이겠지만 일본에서는 초등학생도 볼수있는 만화니까요.
전 개인적으로 작가가 나이를 먹고 나름 대가가 되면서 그런 장면을 더 이상 그리지 않나 싶습니다.사실 초기 작품인 도레미 하우스(전 이 작품이 무척 좋은데 당최 헌책으로도 구할길이 없네요)나 제목이 기억나지 않는 sf만화의 경우 란마 못지않게 훌렁 훌렁 벗고 나오는데 이건 일본 소년물에서 기본이니까요^^

숲노래 2010-11-28 06:55   좋아요 0 | URL
도레미하우스에서 그런 그림들이 있고, 시끌별녀석들도 비슷하다 할 텐데, 루미코 님은 '엿보기 그림'이 없답니다. 늘 '통째로 다 보여주기'예요.

루미코 님한테서는 '엿보기'가 없기 때문에, 이러한 그림은 '야한' 그림하고는 사뭇 다르답니다. 만화를 예술로 보는 눈길에서 그리는 다른 멋이지요. 여자가 여자를 그려서 다르기도 하다 할 만하지만, 루미코 님 만화는 자연스러움과 싱그러움과 꾸밈없음이라 할 수 있어요..

zlp2 2010-11-28 06: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경계의 린네 3권이 발매됬습니다... 발매된 날에 1,2권만 사신게 아닌지 염려(?)스러워 댓글답니다~

숲노래 2010-11-28 06:53   좋아요 0 | URL
3권이 언제 나오나 기다리다가 이 글을 쓰고 나니 나왔더군요 ㅠ.ㅜ
이 글은 1권이 나와서 읽은 7월부터 쓰려고 하다가 이제서야 썼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