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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먼(Human) 14 ㅣ 최민식 사진집 휴먼(Human) 14
최민식 지음 / 눈빛 / 2010년 10월
평점 :
흑백사진도 아름답다
[찾아 읽는 사진책 8] 최민식, 《HUMAN·14》(눈빛,2010)
쉰두 해째 사진 한길을 걷는 최민식 님 새 사진책 《HUMAN·14》을 장만해서 읽습니다. 쉰두 해에 걸쳐 사진 한길을 걷기란 만만하지 않을 뿐더러 수월하지 않습니다. 쉰두 해 내내 사진 한길을 걸어온 발자국이란 얼마나 길디길으며 굵디굵을까요.
잠자리에서 사진책을 펼칩니다. 이불을 무릎에 덮고 옆에 나란히 앉은 아이가 흘끔 사진책을 돌아봅니다. 사진책에 ‘어린이’ 모습 담은 사진이 나오니 가까이 다가오며 손가락으로 가리킵니다. 아이는 이내 책을 뺏아 듭니다. 조그마한 손으로 제법 큰 책을 휘릭휘릭 넘깁니다. 아이한테 언니나 동무나 동생 되는 모습이 나오면 가만히 들여다봅니다. 어떤 모습으로 있는가를 아이가 아는 대로 말합니다.
아이가 여러 번 보고 나서 사진책을 받아듭니다. 처음부터 다시 차근차근 넘깁니다. 첫머리 즈음 2010년 부산 골목동네를 담은 사진이 새삼스럽습니다. 2010년이라는 숫자를 옆에 달아 놓았으니 2010년 모습인지 알 만할 뿐, 숫자를 달아 놓지 않는다면 1957년으로 볼 수 있고, 1977년이나 1967년이나 1987년으로 볼 수 있습니다.
빛살을 잘 살렸고 빛느낌이 고이 내려앉은 사진이라고 느낍니다. 이 사진들을 흑백으로 곱게 여민 모습이 아름답다고 느끼는 한편, 이 사진들에 빛깔을 넣으면 어떠한 아름다움일까 궁금합니다. 1957년이나 1967년이나 1977년에는 빛깔 담은 사진을 찍기 어려웠으리라 봅니다. 그러나 1987년이나 1997년이나 2007년이라면, 또 2010년이라면 빛깔 넣은 사진을 일구어 볼 만하겠지요. 또한, 2010년 오늘 빛깔 넣은 사진으로 담고, 다가올 2020년과 2030년에도 빛깔 있는 사진으로 담는다면 어떠한 멋과 맛일는지 궁금합니다. 흑백으로 담은 2010년 부산 골목동네 모습은 ‘흑백이라는 빛느낌’하고 맞물리며 마치 2010년이 아니라는 느낌이요, 지난 쉰두 해에 걸쳐 언제나 똑같은 삶터라는 느낌입니다.
.. 다큐멘터리 사진은 인간의 삶을 포착하는 작업이며, 대중에게 진정한 삶의 경험을 전달합니다. 저는 사진에서 인간적인 접근과 태도가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오랜 사진작업을 통해 배웠습니다. 사진은 제게 ‘삶이 무엇이냐’는 의문에 대한 답을 제시함과 동시에 인생 전체에 영향을 주었습니다 .. (머리말)
사진쟁이 최민식 님은 지난 쉰두 해에 걸쳐 다 다른 사람들을 다 다른 삶자리에서 다 다른 모습으로 담아 왔습니다. 다 다른 사람들 다 다른 삶은 다 다른 사진마다 돋보입니다. 그러나 사진에 담긴 사람들은 다 다르지만, 다 다른 사람을 찍은 최민식 님은 늘 같은 마음과 매무새입니다. ‘삶이 무엇이냐’와 ‘사람은 무엇이냐’를 생각하는 최민식 님 마음과 매무새를 고스란히 담은 《HUMAN·14》입니다. 《HUMAN·14》뿐 아니라 《HUMAN·1》도 최민식 님 마음과 매무새를 고스란히 담습니다. 《HUMAN·1》 이야기는 《HUMAN·14》 이야기하고 맞물립니다. 《HUMAN·14》 모양새는 《HUMAN·14》에서도 곱게 이어집니다. 《HUMAN·1》을 이루는 넋은 《HUMAN·14》를 이루는 넋하고 같습니다.
한결같이 살아가는 사람들을 한결같은 눈매로 바라보아 사진으로 옮깁니다. 가난하면 가난한 대로 한결같이 살고, 가난하면서도 사랑스러우며 즐겁게 살아가는 사람들을 가난하면서도 사랑스러우며 즐거운 모습대로 한결같이 사진으로 옮깁니다.
다큐멘터리 사진이란 최민식 님 말마따나 “사람 삶을 잡아채어 담아 놓는 사진”입니다. “살가이 다가서며 따사롭게 껴안는 사진”일 때에 비로소 다큐멘터리 사진이라 할 수 있습니다. 다큐멘터리 사진 하나로 사람들한테 따스함과 아름다움과 슬픔과 고마움을 이야기 한 자락으로 들려줍니다.
그런데, 가난하면서 가난을 기꺼이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한테는 다큐멘터리 사진이란 부질없습니다. 가멸찬 살림이면서 가멸찬 살림을 넉넉히 나누지 못하는 사람한테도 다큐멘터리 사진이란 덧없습니다. 스스로 사람다이 살아가는 사람한테 바야흐로 따사로우며 너그러이 스며드는 다큐멘터리 사진입니다. 내 삶을 단단히 붙잡거나 여미는 사진쟁이들이 붙잡는 다큐멘터리 사진이면서, 내 삶을 튼튼히 가다듬거나 다스리는 살림꾼들이 즐기는 다큐멘터리 사진입니다. 여느 대중은 다큐멘터리 사진을 알아볼 수 없습니다.
.. 제 삶은 이 사진 컬렉션을 통해 재해석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저의 열정, 사상, 우리 삶의 비판적인 관찰을 대변해 주고 있습니다. 사진은 농사를 짓는 것과 유사합니다. 새싹이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돋아나지 않듯이 사진도 갑작스레 창조되는 것이 아닙니다. 농부가 땀과 고된 노동 끝에 낟알을 수확하듯이 사진도 사진가의 땀과 노력으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 (머리말)
최민식 님은 ‘사람들 얼굴을 담은 사진’으로, 이 얼굴마다 깃든 다 다른 삶결을 보여줍니다. ‘사람들 모습을 담은 사진’으로, 이 모습에 밴 다 다른 삶무늬를 알려줍니다. 어디 먼 나라 사람들 얼굴이 아닙니다. 어느 딴 나라 사람들 모습이 아닙니다. 사진을 찍는 최민식 님하고 이웃하는 사람들 삶이 드러나는 얼굴입니다. 사진기를 쥔 최민식 님 둘레에서 올망졸망 부대끼는 사람들 몸짓이 나타나는 모습입니다. 최민식 님은 스스로 다큐멘터리 사진을 찍는다고 말씀하지만, 깊이 따지고 보면 최민식 님 사진은 딱히 다큐멘터리 사진이라 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냥 ‘사진’이라 하면 되고, 사진 하나로 ‘삶읽기’를 한다고 말하면 됩니다. 내가 살아가는 모습을 내 이웃 삶 모습에서 느끼고, 내가 살아낸 자국이 배인 얼굴 모습을 내 이웃 얼굴 모습에서 깨닫는 셈이니까요.
다큐멘터리 사진이기에 더 대단하거나 훌륭하거나 놀랍거나 좋거나 거룩한 사진이 아닙니다. ‘사진’이기 때문에 더 빼어나거나 아름답거나 멋지거나 괜찮은 문화나 예술이 아닙니다. 사진은 사진 그대로 좋고, 삶은 삶 그대로 즐겁습니다. 가난하다고 더 나은 삶이 아니요, 가멸차다고 더 못난 삶이 아닙니다. 사진 하나 즐기는 마음하고 농사짓기 즐기는 마음은 곱게 맞닿습니다. 사진 하나 나누는 마음하고 곡식 한 알 나누는 마음은 살뜰히 이어집니다.
새싹은 어디에서나 스스로 돋습니다. 사진 또한 누구나 스스로 얻습니다. 풀싹은 어느 곳에서나 스스로 뿌리를 내립니다. 사진쟁이 또한 누구나 스스로 깨우쳐서 사진밭을 이룩합니다.
농사꾼이 논밭에서 씨앗을 심거나 뿌려 곡식을 일구기도 하지만, 갖은 풀과 나무는 처음부터 스스로 씨앗을 내어 흙으로 녹아듭니다. 이 씨앗은 스스로 온힘을 내어 뿌리를 내리고 싹을 틔워 줄기를 올리려고 애씁니다. 사진쟁이들 누구나 사진을 누구한테서 배운다 할 수 있지만, 누가 가르쳐 준대서 깨닫거나 깨우치는 사진이 아닙니다. 스스로 온힘을 짜내어 뿌리를 내리려 할 때에 오랜 나날에 걸쳐 차츰차츰 이룩하는 사진이에요.
최민식 님은 최민식 님이 살아온 대로 사람들과 사귀며 사진을 찍습니다. 최민식 님은 최민식 님이 살아가는 대로 사진밭을 일구면서 사진 이야기를 내놓습니다. 삶 이야기가 사진 이야기로 마무리되고, 삶 무늬가 사진 무늬로 아로새겨집니다. 최민식 님이 사진으로 담은 사람들 얼굴이나 모습이 아름답다고 느낄 수 있으면, 최민식 님이 하루하루 꾸리는 삶이 아름답다고 느낄 만하다는 소리라고 생각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HUMAN·14》을 읽으며 어느 모로 보면 아쉽다 할 만한 사진이 있을 때에는 최민식 님 삶 한자락이 어느 모로 보면 아쉽다 할 만하다는 소리라고 봅니다.
다큐멘터리 사진을 하는 분들이 흑백사진을 즐기는 까닭은 여럿일 텐데, 흑백사진으로 삶을 담을 때에는 눈길이 흩어지지 않습니다. 이 구석 저 구석 찬찬히 차분히 바라보도록 이끕니다. 빛깔사진을 찍을 때에는 더욱 마음을 쏟지 않으면 눈길이 이리저리 흩어집니다. 사진을 찍는 사람이나 사진을 보는 사람이나 속알을 살피지 못하고 맙니다. 그러나, 흑백사진이든 빛깔사진이든 때와 곳과 날씨와 철과 삶에 알맞게 다룰 수 있다면, 어느 사진으로 다큐멘터리를 엮든 사람 살아가는 내음을 아리땁게 엮어 냅니다. 빛깔사진이기 때문에 1957년과 1977년과 1997년이 서로 다른 삶자락을 읽도록 이끌지는 않습니다. 흑백사진으로도 얼마든지 다 다른 나날을 읽도록 이끌어 낼 수 있습니다. 사진을 찍는 사람 스스로 이 사진은 언제 적 누구 이야기를 풀어낸 사진이라고 생각하며 살아갈 때에는 사진 한 장으로 삶과 나날과 누리와 넋을 읽도록 이끕니다.
흑백사진도 아름답고, 빛깔사진도 아름답습니다. 다만, 다큐멘터리 사진을 하는 분 가운데에는 빛깔사진 또한 아름다운 다큐멘터리 사진임을 보여주는 분은 좀처럼 태어나지 못합니다. 아름다운 빛깔 다큐멘터리 사진으로는 도무지 다가서지 못합니다. 삶 이야기를 들려주는 사진을 하는 분 가운데 흑백사진으로도 아름답겠지만 빛깔사진으로도 아름다운 삶을 나누어 주는 분은 무척 드뭅니다. 빛깔 있는 삶을 빛깔 있는 이야기에 따라 빛깔 있는 사진으로 일구기란 너무 힘든 노릇인지 모릅니다.
이이한테는 이 빛깔이 있고, 저이한테는 저 빛깔이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 삶을 사진으로 영글어 놓고자 할 때에는 빛깔사진을 함께 찍을밖에 없습니다. 삶 사진을 일구려 하면서 흑백사진으로만 이야기를 엮는다면 사진 한 장에는 내 이야기 한 자락만 깊이 배어듭니다. 최민식 님 목소리를 듣는 《HUMAN·14》도 즐겁지만, 《HUMAN·14》에 담긴 사진에 나오는 사람들이 살아가는 목소리도 조곤조곤 즐겁게 듣고 싶습니다. (4343.11.18.나무.ㅎㄲㅅㄱ)
― HUMAN·14 (최민식 사진,눈빛 펴냄,2010.10.27./45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