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미니크 - 생활 팬터지 익사이팅북스 (Exciting Books) 22
윌리엄 스타이그 지음, 서애경 옮김 / 미래엔아이세움 / 2006년 5월
평점 :
절판



 사랑과 꿈을 가슴에 품고 있나요
 [푸른책과 함께 살기 67] 윌리엄 스타이그, 《도미니크》



- 책이름 : 도미니크
- 글·그림 : 윌리엄 스타이그
- 옮긴이 : 서애경
- 펴낸곳 : 아이세움 (2003.1.30.)
- 책값 : 7500원


 (1) 이웃을 사랑하는 삶


 온누리에는 책이 참으로 많이 나와 있습니다. 이 가운데에는 짓궂거나 못나거나 볼썽사나운 책이 제법 있으나, 훌륭하거나 거룩하거나 아름다운 책이 참 많습니다. 짓궂은 책만큼 훌륭한 책이 많고, 못난 책만큼 거룩한 책이 많으며, 볼썽사나운 책만큼 아름다운 책이 많습니다.

 잘 팔리는 책이면서 훌륭한 책이 있습니다. 잘 팔리지만 짓궂은 책이 있습니다. 널리 알려진 책이면서 거룩한 책이 있습니다. 널리 알려졌으나 못난 책이 있습니다. 두루 손꼽히는 책이면서 아름다운 책이 있습니다. 두루 손꼽히기는 하나 볼썽사나운 책이 있어요.

 책을 마주하는 매무새는 삶을 마주하는 매무새하고 닮습니다. 나로서는 참 훌륭하거나 거룩하거나 아름답다고 여기는 삶을 붙잡으며 씩씩하게 걸어간다고 생각할는지 모르나, 정작 내가 걷는 이 길이란 더없이 짓궂거나 못나거나 볼썽사나울 수 있습니다. 나 홀로 못 느낄 수 있어요. 이와 마찬가지로, 더할 나위 없이 짓궂거나 못나거나 볼썽사나운 책을 즐겨읽으면서 이 책이 얼마나 짓궂거나 못나거나 볼썽사나운지를 못 깨달을 수 있습니다.

 아는 만큼 책을 찾아 읽지 못해요. 내가 살아가는 만큼 책을 찾아 읽어요.


.. 한 번도 가 보지 못한 낯선 세상에 나가면 자기 앞에 무슨 일이 닥칠지 알고 싶었던 것이다. 그 일이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상관없었다 … “나도 내 운수에 관심이 많습니다만, 무슨 일이 일어날 때마다 그때그때 맞혀 보는 게 더 재미있을 것 같은데요.” … 도미니크에게 도전은 기쁨이었다. 살면서 맞닥뜨리는 일은 무엇이든 한 생명의 재주와 능력에 대한 이런저런 시험이었다 ..  (11, 13, 26∼27쪽)


 내가 아는 대로 책을 읽지 못하는 얼거리 그대로, 내가 아는 대로 이웃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 내가 아는 대로 이웃을 사랑해 준다지만, 내 이웃은 내가 보내는 사랑이 싫거나 못마땅하거나 껄끄럽거나 괴롭거나 힘들 수 있습니다. 나로서는 사랑을 보낸다며 보내지만, 내 사랑을 받는 쪽에서는 못 견뎌 할 수 있어요, 겉으로 드러내지 않으나 속으로는 앓거나 아파할 수 있답니다.

 참말로 사랑이라 한다면 ‘보내는 사랑’이기 앞서 ‘받는 사랑’이어야 합니다. 보내는 내가 ‘나로선 할 만큼 하는’데 ‘저이는 왜 이렇게 못 받아들이느냐’고 투덜댄다면, 이는 사랑일 수 없습니다. 받는 사람이 ‘저이가 사랑을 보냈나?’ 하고 느끼지 못할 만큼 찬찬히 스며들 때라야 비로소 사랑입니다. ‘내가 이만큼 해 주었다’고 하면서 우쭐거리는데 무슨 사랑이겠습니까. 이런 마음씀이란 권위이거나 권력이라는 이름이 붙는 못난 짓입니다. 흔히 이웃사랑이라는 이름을 내걸며 ‘불우이웃돕기’ 같은 일을 벌이는데, 이웃을 돕겠다면 그냥 ‘이웃돕기’를 해야지 ‘불우이웃’을 돕는다는 일은 말이 안 됩니다. ‘불우’란 무엇이며, 누가 ‘불우’한 삶인가요(더 살핀다면 이웃‘돕기’라는 이름도 어울리지 않습니다. 돕는다니 뭘 도와? 돈푼 좀 보탠다고 돕는 셈인가?). 나한테 돈이 조금 더 있다고 나보다 돈이 더 적은 이를 섣불리 ‘불우’하다고 깔볼 수 없습니다. 내가 돈 좀 보태 줄 수 있다면서 나한테서 돈을 얻는 이를 얕볼 수 없어요.

 사랑이라 한다면, ‘사랑을 받아 주는 쪽’이 훨씬 거룩하며 아름답습니다. 사랑을 받아 주는 가슴이 얼마나 넓고 깊은지를 ‘사랑을 베푼다는 쪽’은 으레 못 느끼거나 못 알아채거나 못 깨닫곤 합니다.


.. 두 시간 전만 해도 바솔러뮤 배저 노인은 살아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저 세상으로 가고 없었다 … 많은 이들이 지금 도미니크가 하듯이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놓고 질문을 하겠지. 새로운 목숨들의 세상이 오면 도미니크의 세상은 끝나 있을 것이다. 많은 이들이 지금 이 시간을 과거로 생각하겠지. 그때가 되면 미래는 현재가 될 테고 … 슬픔이 밀려들자 그 아름다움도 빛을 잃었다. 슬픔이 물러가면 아름다운 세상이 다시 얼굴을 드러내겠지 ..  (50, 51, 52쪽)


 천주교나 기독교 같은 서양 종교를 믿는 한국사람이 참으로 많습니다. 이 서양 종교를 밝히는 성경책에는 ‘내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며 아끼라 이야기하는 한편, 이런 이야기를 노래로 지어 자주 부릅니다.

 곰곰이 생각해 봅니다. 내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여길 수 있을 때에 비로소 사랑이라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들은 내 이웃한테 사랑을 베푼다 할 때에 내 이웃이 ‘불우’해질 때까지 기다릴 수 없습니다. 내 배가 고프면 금세 알지요? 하루에 한 끼니만 걸러도 배가 고프며 기운이 딸리지 않습니까? 그러면 내 이웃이 하루 내내 배를 곯는다든지 살림돈이 모자라 몇 달째 허덕인다든지 대물림을 하듯 가난을 대물림하고 있다면 어찌해야 하나요? 나중에 내 이웃이 파산신고까지 하고 나서야, 달삯방조차 얻지 못해 길바닥에서 구르고 있을 때라야, 라면 몇 상자와 쌀 몇 봉지와 연탄 몇 장 가져다주면 사랑이 되겠습니까.

 지난날, 굳이 이웃사랑이라는 이름을 붙이지 않으며 이웃으로 지내던 이들은 ‘쌀이 없지만 티를 내지 않으려고 가마솥에 불을 끓이며 굴뚝에 연기를 내보내는지, 참말 밥을 하며 굴뚝에 연기를 내보내는지’ 알아챘습니다. 왜냐하면 밥을 하면 밥냄새가 나잖아요. 숟가락 딸그락거리는 소리가 날 테고요. 오늘날처럼 자동차가 드글드글대지 않던 지난날에는, 흙으로 벽을 바른 자그마한 이웃집에서 내는 조그마한 소리조차 다 들리곤 했습니다. 구태여 숟가락 숫자가 몇인지 세지 않아도 뻔히 아는 살림입니다.

 요즈음은 이웃을 돕고자 돈을 내어놓기보다, 내 살림을 지키고자 감시카메라 마련하여 달아 놓는 데에 돈을 씁니다. 이웃하고 오순도순 나누고자 돈을 덜기보다, 내 자동차를 더 크고 빠른 녀석으로 바꾸는 데에 돈을 씁니다.

 이런 이야기들은 어른한테만 할 이야기는 아니라고 느낍니다. 어른들이 이와 같이 살아간다면, 푸름이와 어린이도 이와 같이 살아간다고 느낍니다. 어른들 이야기를 하나하나 따질 때에 우리 푸름이와 어린이 앞날을 하나하나 톺아보는 셈이라고 느낍니다. 우리 푸름이와 어린이 들이 학교에서 시험을 치를 때에 옆 짝꿍 시험지를 훔쳐보거나 어딘가에 쪽글을 적바림해 놓고 몰래 베낀다 한다면, 어른들이 이런 짓을 하니까 푸름이와 어린이가 따라하지, 푸름이와 어린이 스스로 새로 만들어서 못된 짓을 일삼지 않아요. 푸르거나 어린 넋이 새로 만드는 못난 짓이란 없습니다. 구지레한 짓을 일삼는 어른이 푸르거나 어린 넋을 못난 사람으로 물들입니다.

 내가 착하게 살고 싶으면 내 이웃도 착하게 살도록 손을 내밀어야 합니다. 내가 사랑스레 살고 싶다면 내 이웃 또한 사랑스레 살도록 어깨동무를 해야 합니다. 내가 즐겁게 살고 싶을 때에는 내 이웃이 언제나 즐겁게 살도록 마음을 기울여야 합니다.


.. 착한 이들하고만 행복하게 살 수 있다면 그보다 기쁜 일이 어디 있겠는가. 하지만 이 세상 누군가가 악당과 싸우고 있는 한, 착한 이들과 함께 있다고 마냥 행복해 할 수만은 없는 일이었다 ..  (182쪽)


 (2) 살붙이 사랑하는 삶


 어제 낮, 스물일곱 달째 함께 살아가는 딸아이가 똥을 누고 나서 밑을 씻기고 머리를 감기며 몸을 씻어 줄 때에 좀 미지근한 물로 씻겼습니다. 미리 보일러를 돌려 물을 덥혔어야 했는데 보일러를 늦게 돌리는 바람에 따뜻한 물을 쓰지 못했습니다. 아이는 몸을 말끔히 씻은 다음 덜덜 떱니다. 여느 때에는 양말을 벗는다느니 바지를 한 벌만 입겠다느니 웃옷을 얇게 입겠다느니 그러더니, 어제는 어머니 품에 꼭 안기며 이불을 뒤집어쓴 채 꼼짝을 안 합니다. 저녁이 되니 몸이 후끈거립니다. 여느 때에는 말괄량이인 아이가 아주 얌전합니다. 고단한 아버지가 자리에 이불을 뒤집어쓰고 드러누워 아이를 부릅니다. 아이를 눕히고 그림책을 읽습니다. 아이는 이불을 폭 쓴 채 그림책을 너덧 권 함께 봅니다. 그런데 아이 눈에 눈물이 송글송글 맺히더니 또르르 구릅니다. 이런, 아이가 참으로 몹시 아프구나.


.. 도미니크는 생각했다. 만약 만물을 창조하는 일이 자기에게 주어졌다 해도, 만물을 하나도 똑같지 않게 만들었을 것 같았다. 나뭇잎마다 꼭 알맞은 자리에 있었다. 자갈, 돌멩이, 꽃, 이 모든 것들이 꼭 있어야 할 자리에 있었다. 물은 흘러야 할 곳으로 흘렀다. 하늘은 꼭 알맞게 푸르렀다. 모든 소리는 조화로웠다. 모든 것들이 알맞은 냄새를 풍기고 있었다. 도미니크는 자기 자신의 주인이었고, 세상과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  (33쪽)


 아이를 일찍 재우려 하지만, 아이는 일찍 잠들려 하지 않습니다. 일찍 안 자려 하는 모습은 아플 때에도 마찬가지로군요. 하는 수 없이(?) 아이 아버지는 일찌감치 쓰러집니다. 이내 아이도 잠자리에 듭니다. 아주 고맙게. 아이는 자는 내내 아버지 곁에서 “쫀!” 하면서 아버지보고 손을 달라 하며 붙잡습니다. 아이 어머니는 잠들고 나서 잘 깨어나지 못하거든요. 아니, 깨어나지 못한다기보다 몸이 무거워 머리는 깨었어도 몸을 못 움직입니다. 이리하여, 지난주부터 어젯밤까지 밤새 아이하고 아이 아버지는 잠을 못 잡니다. 잠들라 치면 아이가 “아부지, 쫀!” 하면서 손을 달라 합니다. 조금 잠이 들어 쉴라치면 어느새 기저귀에 오줌을 누고는 “젖었어!” 하고 외칩니다. 새벽 네 시 사십오 분까지 어영부영 버티다가는 조용히 큰방으로 건너와 셈틀을 켜고 글쓰기를 하자니, 또 다섯 시 반까지 이렇게 복닥복닥합니다. 그나마 후끈 달아오르던 아이 몸이 많이 가라앉았습니다.

 아이하고 함께 살아가며 늘 내 어머니하고 내 아버지를 떠올립니다. 내 어머니하고 내 아버지는 내가 우리 아이만 한 나이였을 적에 나를 어떻게 돌보았을는지 궁금합니다. 내 몸은 그리 튼튼하지 않아요. 어릴 적에 늘 갤갤거렸습니다. 우리 아이는 꽤 씩씩하고 튼튼해서 어버이한테 걱정을 끼치는 일이 드뭅니다. 어쩌다 한 번 이렇게 몸앓이를 해요. 그렇지만 아이 아버지인 저는 어릴 적에 자주 몸앓이를 했는데, 이때마다 내 어머니하고 아버지는 어떤 마음 어떤 느낌 어떤 생각이었을까요. 저처럼 밤새 잠을 이루지 못하며 고단해야 했을 텐데 어떻게 받아들여 주었을까요.

 아이를 낳아 기른다고 모두 어른이 된다고는 느끼지 않습니다. 아이를 낳아 기른다지만 아이하고 보내는 겨를이 몹시 짧거나 거의 없는 어버이가 이 나라에 얼마나 많습니까. 나이 서른 마흔 쉰이 된다고 어른이지 않습니다. 아이를 하나 둘 셋 넷 낳아 기른다고 어른이지 않아요. 삶과 넋과 말이 오롯이 어른이어야 해요. 삶과 넋과 말을 오롯이 아이하고 부대끼면서 살아내야 어른으로 자리잡아요.


.. 도미니크는 호락호락 물러나지 않았다. 보물을 지키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도미니크는 어떤 종류의 악한 짓도 증오했다 ..  (57쪽)


 집일을 남자가 하는 집은 썩 많지 않습니다. 예전보다는 늘었다 하겠으나 집일은 으레 여자가 합니다. 또는 밥어미를 두겠지요. 아니면 할머니를 모시고 산다 하면서 집일을 할머니한테 맡기든지요.

 아무리 몸이 힘들다 할지라도 그날그날 저녁을 먹은 다음 설거지를 하면서 이듬날 아침에 새로 밥을 할 쌀이나 곡식(콩이나 옥수수나 다른 곡식)을 씻어서 불려야 합니다. 누런쌀이라면 저녁에 불려놓고 이듬날 아침에 하고, 흰쌀이라면 새벽에 씻어서 불린 뒤 아침에 밥을 지으면 됩니다. 이래저래 손이 많이 가며 품을 많이 들입니다. 그나마 저는 살림을 잘하는 사람이 아닌 터라, 밑반찬은 거의 안 하고 찌개 하나를 끓입니다. 그런데 이렇게만 하는 데에도 얼마나 많은 품과 땀과 틈을 들여야 하는지요. 밑반찬을 꼬박꼬박 새로 만들거나 도시락을 싸는 이 나라 수많은 어머님들은 집살림에 아주 온삶을 바치는 셈입니다. 이 나라 남자들은 이 나라 여자들 땀과 품과 틈으로 먹고산달 수 있어요. 이른바 ‘가사노동’은 돈이 나오지 않는다 하고, 돈으로 따지지 않으며, 아예 노동으로 안 치기까지 합니다. 죽은 전태일 열사는 생각하지만 산 이소선 어머님은 생각하지 못해요. 그나마 이소선 할머님이 오래오래 살아가니까 이소선 ‘어머님’을 기리거나 모시는 이들이 있지, 당신이 일찍 숨을 거두었으면 ‘(남자) 노동자’만 돌아볼 뿐, ‘(여자) 살림꾼’은 돌아보지 않습니다. 그나마, 이소선 할머님을 떠올릴 때에도 으레 ‘전태일 어머니’라고만 여기지, ‘집살림을 하는 여자’로는 살피지 못합니다.


.. 혈맹파 패거리가 세상을 파괴하는 온갖 짓을 일삼는 동안, 말 못 하는 나무들은 한 폭의 그림처럼 둘러서서 아무 행동도 하지 못하고 꾹 참고 있었다. 하지만 그 모든 일을 지켜보면서 분노와 슬픔과 모욕감을 차곡차곡 쌓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이제 나무들이 사랑하는 개 도미니크는 나무들 가운데서, 숲의 심장 한가운데서 목숨을 잃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나무들은 오랜 침묵을 깨뜨리고 뜻을 전하기 위해 스스로 가지를 꺾고 분질렀다. 도미니크는 그 소리를 듣고 잠에서 깨어나 모든 상황을 알아차렸다. 악당들은 무기를 높이 쳐든 자세를 하고 있었지만 두려움에 몸이 뻣뻣하게 굳어 있었다. 바로 그 순간 나무들이 악당들을 향해서 몸을 굽히고 말했다. “부끄러운 줄 알아라!” ..  (187쪽)


 날마다 밥을 새로 하고 설거지를 잔뜩 하며 이불을 털고 방바닥을 쓸고닦는데다가 빨래를 해서 털고 널고 걷고 개면서 생각합니다. 아이를 안고 어르며 놀면서 생각합니다. 새벽에 졸립고 지친 몸을 일으켜 글을 쓰면서 생각합니다. 빛나는 옛 어르신은 하루라도 책을 읽지 않으면 목구멍에 가시가 돋힌다 말씀하셨는데, 저로서는 하루라도 밥을 하지 않거나 걸레질을 하지 않거나 손빨래를 하지 않거나 아이하고 복닥이지 않으면 온몸에 두드러기가 돋습니다. 사람이 사람다이 살아가는구나 하고 느끼지 못합니다. 나이를 먹을수록 손빨래가 퍽 고단하다고 느끼지만 빨래를 기계한테 맡길 수 없습니다.

 아직 힘이 있어 할 만한지 모르지만, 서두르지 않으며 차근차근 나누어 하면 손빨래를 얼마든지 할 만합니다. 밥하기이든 쓸고닦기이든 이불털기이든 매한가지입니다. 아이하고 놀 때에도 신나게 놀다가 드러누워서 “얘야, 좀 쉬면서 놀자.”고 말할 수 있으며, 아이 스스로 다른 놀이를 하도록 놀잇감이나 책을 내어 주고서는 한동안 등허리 펴자며 드러누울 수 있습니다. 아이가 이것저것 잔뜩 늘어놓거나 어지른다면 한숨이 절로 나오지만, 아이가 스스로 치울 수 있게끔 잘 타이르며 가르치면 됩니다. 어쩌면, 아이가 이것저것 늘어놓기 때문에 차곡차곡 갈무리하도록 가르칠 수 있습니다.

 돈으로 살 수 없을 뿐더러, 이름값이나 권력으로 지키거나 누릴 수 없는 사랑입니다.


 (3) 나를 사랑하는 삶


 이야기책 《도미니크》를 읽습니다. 이야기책 《도미니크》를 이끄는 주인공은 멍멍이인 ‘도미니크’입니다. 도미니크는 새로운 삶을 찾아 고향마을을 떠나기로 하며 이야기 첫머리를 엽니다. 도미니크는 길디긴 모험을 해 보고자 합니다. 낯선 땅으로 찾아가 낯선 사람을 만나며 낯선 삶을 부대끼는 가운데 낯선 일을 만나고 싶어 합니다. 멍멍이 도미니크는 한창 젊은 나이이거든요. 이대로 고향마을에서 눌러 지내도 좋을는지, 다른 무슨 일을 찾아야 좋을는지, 이제껏 모르던 꿈이 있는지를 알아보고자 먼 나들이를 떠납니다.


.. “내 나이는 올해로 백 살이네. 내가 살아온 이야기를 전부 다 하려면 백 년이 걸릴 걸세.” ..  (40쪽)


 도미니크가 만난 돼지 할아버지는 백 살이랍니다. 백 살치 이야기는 백 해에 걸쳐 해도 다 못할 수 있어요. 그러면 도미니크는? 글쎄요. 아마 며칠쯤 하다 보면 금세 동이 날는지 모릅니다. 도미니크가 살아온 햇수가 스무 해라 할지라도 스무 해치 이야기를 ‘어떻게 어느 만큼 어찌어찌’ 풀어내면 즐거울는지를 도미니크 스스로 아직 모르거든요.


.. “세상 모든 것은 있는 그대로 참 아름답습니다. 나는 그것을 있는 그대로 그려서 살아 있는 것들에 경의를 표하지요.” … “나는 아주 위대한 예술가인 코끼리의 작품을 알고 있어요. 하지만 코끼리는 섬세한 그림을 그리지 못해요. 그럴 능력도 인내심도 없지요.” … “온 세상이 눈에 뒤덮여 있을 때면 나뭇잎을 볼 수 있소? 쓸쓸한 한겨울에 봄이 오기를 학수고대하고 있다면, 내 그림에서 수선을 보고 봄이 눈앞에 있으니 다시 돌아온다는 것을 확신하게 될 것이오. 여름 무더위에 고생하고 있다면, 맨프레드 라이언이 그린 차가운 겨울 풍경을 보고 기운을 차릴 수 있을 거요. 내가 그린 초상화를 보고 곁에 없는 친구나 사랑하는 이랑 함께 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을 수도 있을 거요.” ..  (113, 114, 115쪽)


 도미니크는 짓궂은 사람을 만날 때이든 반가운 사람을 만날 때이든 ‘내가 만난 사람이 나한테 들려주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입니다. 들을 만한 이야기이든 들을 만하지 않은 이야기이든 어찌 되든 귀담아듣고 봅니다. 그런 다음 받아들일 만하다 싶으면 받아들이고, 아니다 싶으면 손사래를 칩니다.

 왜냐하면, 바로 도미니크는 도미니크로 지내는 ‘내 삶’을 사랑하기 때문이에요. 다만, 도미니크는 내 삶을 사랑하기는 사랑하는데, 무엇을 사랑하는지 모르고, 어떻게 사랑해야 할는지 모르며, 어느 만큼 사랑하는지조차 모릅니다. 모름투성이입니다. 알쏭달쏭투성이요, 아리송투성이예요.

 앞으로 도미니크 삶이 어떻게 이어갈는지 알 길이 없습니다. 모험을 하러 떠났다가 하루 만에 숨을 거둘 수 있고, 두어 해쯤 살다가 저승사람이 될는지 모릅니다. 부자가 될 수 있으며, 가난뱅이가 될 수 있겠지요. 어찌 되든 좋습니다. 도미니크는 ‘도미니크다운 도미니크 삶’을 누리고 싶을 뿐입니다. 도미니크로서 도미니크 삶을 꾸릴 수 있다면 부자라고 더 기쁘지 않으며 가난하다고 더 슬프지 않아요. 스스로 알차게 여미는 삶을 붙잡을 수 있고, 스스로 힘차게 일구는 삶을 다스릴 수 있습니다.

 《도미니크》를 쓴 윌리엄 스타이그 님은 멍멍이 도미니크를 빌어 이야기 한 자락 풀어놓습니다. 내 삶에 걸맞게 내 길을 걸어가자고. 내 삶을 사랑하면서 내 이웃 삶을 사랑하자고. 내 삶을 즐기면서 내 살붙이와 어우러지는 하루하루를 고맙게 받아들이자고. 도미니크는 모험가이기 앞서 젊은이이고, 이 책에서는 영웅이기 앞서 수수한 한 사람입니다. 밥 한 그릇을 고맙게 받아들이고, 나무 한 그루를 사랑스레 보듬을 줄 아는 따스한 목숨붙이입니다. (4343.11.5.쇠.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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