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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걀 한 개 ㅣ 보리피리 이야기 1
박선미 글, 조혜란 그림 / 보리 / 2006년 5월
평점 :
살아가는 이야기가 가장 즐겁습니다
[책읽기 삶읽기 21] 박선미+조혜란, 《달걀 한 개》
어린이한테 이 나라 어른들 지난 삶자락을 들려주는 이야기책 《달걀 한 개》를 읽다. 《달걀 한 개》라는 이야기책은 경상남도 밀양에 있는 작은 마을 백산에서 1970년대에 어린 나날을 보내던 한 사람이 달걀이란 먹을거리를 놓고 겪거나 부대낀 삶을 담는다. 어떤 이한테 1970년대는 까마득한 옛날일는지 모르지만, 나이 서른을 넘은 사람한테는 그다지 먼 옛날이 아니고, 나이 마흔을 넘은 사람한테는 어렵잖이 떠올릴 어린 나날일 테고, 나이 쉰이나 예순을 넘은 사람한테는 어린 동생이나 아이를 돌보며 보내는 나날일 테지. 흔히 옛날이야기라 하면 범이 담배 피워 물던 이야기라든지 고려나 조선 때쯤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하는 이야기라고 생각하기 일쑤이다. 그렇지만 바로 하루가 지난 어제 이야기만 하여도 옛날이야기가 될 수 있다. 지난해에 겪은 이야기 또한 옛날이야기라 할 만하다. 멀디멀어 아주 까마득해야만 옛날이야기가 아니다. 옛날이야기란 사람들이 이 땅에서 옹기종기 모여 오순도순 살아온 이야기이다.
살아온 이야기는 기쁠 수 있고 슬플 수 있다. 웃음이 넘치던 지난 삶일 수 있고 눈물이 가득한 지난 삶일 수 있다. 기뻐 웃음이 넘치던 삶이라 하여 아름다운 삶이라고 여길 수 없고, 슬퍼 울음이 가득한 삶이라 하여 못마땅하거나 어설픈 삶이라고 여길 수 없다. 기쁘다 하지만 몇몇 사람들 배만 부른 볼꼴사나운 이야기일 수 있고, 슬프다 하지만 뭇사람들 가슴을 저미는 촉촉한 이야기일 수 있다.
.. 병아리들은 무럭무럭 자라서, 여름쯤이면 마당이 그득해. 다른 집은 닭을 장에 내다 팔아서 돈벌이가 된다는데, 아야네는 그걸 한 마리 팔 새가 없어. 배 타는 삼촌 오면 고아 줘, 공부하러 간 오빠 오면 한 마리 잡아야지, 고모가 친정 오면 한 마리 해 먹이고, 또 돌아갈 때 보따리에 한 마리 묶어 보내야지, 큰 손 왔다고 상에 올려, 실한 놈은 키워서 씨암탉 해야지 .. (24∼25쪽)
내가 떠올릴 수 있는 1970년대는 조각조각 잘린 몇 토막 이야기이다. 다닥다닥 촘촘히 붙은 집들로 이루어진 인천 골목동네에서 놀던 일, 심부름하러 구멍가게에 달려 내려갔다가 달려 올라온 일, 겨울날 몹시 추웠다고 떠오르는 달삯집에서 네 식구가 쪼르르 모여 이불 돌돌 말아 자던 일, 어린 형하고 더 어린 내가 시멘트 담이 퍽 높구나 싶은 골목 한켠에 서 있던 일, 5층짜리 아파트 동네로 짐차를 타고 살림집 옮기던 일 ……. 고모 댁에 찾아갔을 때에 방에 다락이 있어 나무계단을 타고 다락에 올라가 먼지를 뒤집어쓰며 뒹굴던 일이 살짝살짝 떠오른다.
《달걀 한 개》를 읽으면 “아야는 흰자만 까 먹고 노른자는 사탕 녹여 먹듯이 입에 넣고 굴리면서 아껴 아껴 먹었어(44쪽).” 하는 대목이 있다. 인천 골목동네에서 살던 나도 달걀을 마음껏 먹었다고는 느끼지 않는다. 해가 갈수록 차츰차츰 좀더 자주 먹을 수 있었다고 느끼나 해를 거스를수록 드물었다고 느끼며, 충청도 시골집으로 방학 때마다 찾아올 적에는 닭장에서 한 알 고맙게 꺼내어 먹는 달걀이란 더없이 드물며 소담스러운 밥거리였다고 느낀다. 입이 짧은 나한테 외할머니가 날달걀 하나를 톡 깨서 밥에 풀어 주던 일은 오래도록 떠오른다. 이제 와 헤아리면 내 몸에는 삭인 밥거리들, 이를테면 동치미나 김치국물이나 찬국수물이 받지 않는다. 이제는 매운김치를 건드리지도 못하지만 맵지 않은 김치라 하더라도 삭인 밥거리인 만큼 잘 안 맞는다. 사람들은 으레 한국사람이 김치를 못 먹는다면 말이 안 된다 하지만, 김치처럼 삭인 밥거리가 몸에 안 맞는 사람이 없을 수 없다. 어떤 사람은 물이 목으로 넘어가지 않기도 하는데, 삭인 밥거리 못 먹는 사람이야 마땅히 있을밖에. 아주 어릴 때하고 푸름이 나이가 되었을 때부터는 나한테 찬국수를 사 주는 사람은 없었다고 느끼는데, 아마 내가 떠올리지 못해서 그렇지, 아버지가 바깥밥 먹자며 식구들이 신포시장이나 동인천으로 마실을 나와 함께 찬국수를 먹다가 내가 크게 탈이 나는 바람에 나한테는 더는 안 사 주었을는지 모른다. 나한테는 따로 만두를 사 주거나(찬국수집에서는 으레 만두를 함께 파니까) 다른 뜨거운 국물을 사 준다. 오랜 동무가 내 몸을 잘 모르는 가운데 찬국수 잘하는 집이 있어 같이 먹으러 가자고 해서 억지로 한 그릇 먹은 다음 한 주 내내 배앓이를 하며 괴로운 적이 있다.
《달걀 한 개》를 쓴 박선미 님은 달걀 노른자를 살살 녹여서 먹었다고 했다. 나도 어릴 때에 달걀 노른자를 살살 녹여서 먹었다. 박선미 님처럼 흰자를 먹을 때에는 아주 조금씩 야금야금 갉아먹었다. 어머니는 옆에서 이 꼴을 지켜보며 꾸짖었으나, 그러거나 말거나 이 맛있는 먹을거리를 금세 먹어치울 수 없는 노릇. 스물일곱 달째 함께 살아가는 어린 딸아이랑 도시로 마실을 나가면 전철간에서 으레 어르신들이 아이한테 사탕을 먹으라 건네주는데, 아이는 사탕을 받으면 늘 오래오래 낼름낼름 돌리며 녹여 먹는다. 길에서 얼음과자를 하나 사 줄 때에도 베어 먹는 법이란 없다. 얼음이 녹아 줄줄 흐르는 데에도 혀로 날름날름 핥아 먹는다. 그만큼 맛나고 좋다는 뜻일 테지.
.. 여자 아이들이 물을 이고 와서 솥에다 붓고, 달걀을 조심 조심 조심 …… 한참을 넣었어. 소금도 몇 줌 넣었나? 불을 때는 아이들은 코끝이 시커매진 것도 모르고 열심이야. 학교 밭에서 일할 때는 요리조리 빠져서 선생님한테 야단을 듣던 남자 아이들도 부지런히 삭정이를 주워 오고. 달려오다 넘어져 무르팍이 까지고 .. (40쪽)
이야기책 《달걀 한 개》에 나오는 시골학교 선생님은 몸이 퍽 여렸나 보다. 크게 병치레를 하고 일어나니까 마을사람마다 선생님 어여 몸 추스르라며 달걀을 보내 왔다는데, 선생님은 “아이구, 이 귀한 거를, 너거나 하나 더 먹이지. 엄마한테 잘 묵고 어서 낫겠다고 말씀디리라(39쪽).” 하고 얘기하더니, 얼마 뒤 아이들을 모두 모아 놓고는 “자아, 인자부터 달걀 삶아 먹는 공부를 할 끼다(39쪽).” 하면서 마을 어른들이 내어 준 달걀을 알뜰히 그러모아 한꺼번에 삶아서 아이들한테 골고루 나누어 준다. 이때 아이들 모습이 참 재미나다. 여느 때에는 개구쟁이에 말썽쟁이였다지만, 선생님이 ‘달걀 삶아 먹는 공부’를 하자니까 스스로 소매 걷어붙이고 나서면서 삭정이를 주워 오고 물을 길어 오고 불을 때며 함께 달걀 삶기를 했다지. 학교에서 아이들과 함께 하는 공부를 이렇게 아이들 스스로 신나게 할 수 있게끔 교육 얼거리를 짠다면 얼마나 좋으랴 싶다. 대학바라기가 맨 첫째로 눈길을 둘 일이라 할지라도, 아이들과 살아숨쉬는 공부를 하면서 숨돌리기를 해야 하지 않겠는가. 학교에서 함께 맛난 밥을 지어 먹기도 하고, 나무그늘에서 쉬기도 하며, 나무열매를 따먹는 날을 맞이하기도 하는 가운데, 흙과 바람과 해와 물과 풀을 가슴으로 살포시 껴안도록 이끌어야 비로소 ‘가르치는 이와 배우는 이’가 서로서로 살가이 어깨동무할 수 있지 않겠느냐 생각한다.
그나저나, 이 책에 붙은 이름은 왜 “달걀 한 개”일까. 달걀을 셀 때에는 ‘한 알’ ‘두 알’ 하고 세야 옳지 않나. 올바로 말하자면 “달걀 한 알”이다. 그나마 “계란 한 개”라 하지 않으니 낫다 할 만하지만, 다른 누구도 아닌 아이들한테 우리 어른들 살갑던 삶자락을 곰곰이 되씹도록 이끌어 주고자 하는 책이라 한다면, “달걀 한 알”이라고 책이름을 고치고, 책에 깃든 서너 대목에서도 “한 개”를 “한 알”로 고쳐야 마땅하다. 또는 “달걀 하나”라 해 볼 수 있겠지. ‘알’로 세기도 하지만 그냥 ‘하나 둘 서이 너이’ 하기도 하니까. 아니면, 책이름을 “달걀 이야기”라 해 보아도 된다. 말 그대로 달걀하고 얽힌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반드시 ‘한 알’만 갖고 풀어내는 이야기가 아니라, 달걀을 둘러싼 이야기를 그리는 만큼 “달걀 이야기”라고 책이름을 고쳐도 잘 어울린다.
왜 책이름을 따지느냐 하면, 《달걀 한 개》란 뭐 대단한 이야기책이 아닐 뿐더러, 아주 거룩한 이야기책 또한 아니기 때문이다. 《달걀 한 개》는 여느 사람들 여느 자리 수수한 이야기책이다. 이리하여 이 책에 깃든 말마디라든지 이 책에 붙이는 이름은 가장 수수한 자리를 찾아들어야 한다. 학교 문턱을 오래 밟았든 한 번도 밟지 못했든, 시골 농사꾼이든 도시 회사원이든, 똑똑한 어린이이든 시험 성적이 잘 안 나오는 어린이이든, 누구나 손쉽고 즐거우며 살가이 마주하여 읽도록 글월 눈높이를 맞출 뿐 아니라, 가장 바르면서 곱고 착한 말씨로 가다듬을 수 있어야 한다. ‘임금님 달걀’이나 ‘대통령 달걀’도 아닌 ‘시골사람 달걀’ 이야기 아닌가. 조금 더 말결을 보듬으며 가다듬는다면 좋겠다.
책끝에 ‘추천글’을 쓴 윤구병 님이 “그 입담에 스며 있는 건강한 교육관, 인생관도 퍽 대견합니다”라고 적는데, 어른들이야 윤구병 님이 박선미 님보다 나이가 훨씬 많은 줄 알며, 이렇게 말할 수 있겠거니 생각할 테지만, 이 책을 읽는 어린이한테는 둘 다 똑같은 ‘어른’이다. 한 어른이 다른 어른한테 ‘대견하다’라는 말을 쓸 수 있는가. 쓸 수 있다고 하더라도 이런 자리에서는 ‘훌륭합니다’라든지 ‘알뜰합니다’라든지 ‘아름답습니다’라고 말해야 알맞다. 어른책에서도 말 한 마디 어설피 하면 안 되지만, 어린이책이라면 말 한 마디 더더욱 곱씹고 살피면서 해야 한다. 이밖에 박선미 님 말투에서 바로잡을 대목을 한두 가지 들어 본다면, 6쪽과 14쪽과 29쪽에 ‘것’을 너무 자주 쓴다. “소리질러 대는 게 자주 들리거든(6쪽)”은 “질러대는 소리가 자주 들리거든”으로 바로잡고, “알에서 모두 잘 깨어 나온 거거든(14쪽)”은 “알에서 모두 잘 깨어 나왔거든”으로 바로잡으며, “침 삼키는 것도 조심하면서(29쪽)”는 “침 삼키기도 잘 살피면서”로 바로잡으면 좋겠다. ‘조심’ 같은 한자말이야 익히 쓰기는 하는데, 예전 어르신들은 이 말을 안 썼다. 늘 ‘살피다’라는 말을 썼다. 사람들이 어른들을 떠나 보낼 때에 요사이는 “조심해서 들어가셔요.” 하는 말을 곧잘 하는데, 예전 어르신들은 노상 “살펴 들어가셔요.”나 “살펴 가셔요.” 하고 말했다. 《달걀 한 개》같이 옛날이야기를 구수히 들려주려는 책이라 할 때에는 ‘살피다’ 같은 낱말을 잘 갈무리해 주면 좋겠다. 10쪽에서 “너무 급한 나머지”는 “너무 바쁜 나머지”로 다듬고, 25쪽에서 “실한 놈”은 “통통한 놈”이나 “살찐 놈”으로 다듬으며, 30쪽에서 “머리가 아주 복잡해”는 “머리가 아주 어지러워”나 “머리가 너무 어수선해”로 다듬어 본다. 마지막으로, 54쪽을 보면 글쓴이가 따로 적바림한 글이 있는데, 이 글에서 “어린 아야만 한 아이들과 함께 지내는 선생님이 되었어.”라고 했다. 이 대목은 아주 틀렸다. 내가 나 스스로를 일컬어 ‘선생님’이라 말할 수 없다. 내가 나 스스로를 일컬을 때에는 ‘교사’라 해야 알맞다. “어린 아야만 한 아이들과 함께 지내는 교사가 되었어”라든지 “어린 아야만 한 아이들과 함께 배우고 있어”라든지 “어린 아야만 한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어”처럼 고쳐야겠다.
알뜰하고 알찬 이야기책 《달걀 한 개》인 만큼 곁다리라 할 만한 글투와 글쓰기를 이렁저렁 짚어 본다. 이런저런 글투와 글쓰기를 더 가다듬거나 추스를 수 있을 때에 이 이야기책은 훨씬 빛이 나면서 고운 물이 들리라 생각한다. ‘입말로 생생하고 재미나게 풀어써’서 어린이문학을 한다고 생각하지 말고, ‘아이들과 즐겁게 나눌 좋으며 곱고 착한 말’을 ‘살아숨쉬는 기운을 살며시 불어넣으며 한결 따스하고 사랑스레 펼칠’ 수 있기를 바라 마지 않는다.
살아가는 이야기가 가장 즐겁다. 내가 살아가는 이야기를 나 스스로 신나게 나눌 수 있을 때에 가장 즐겁다. 남이 살아가는 이야기를 담 너머로 구경하거나 호박씨를 까는 이야기보다, 나 스스로 내 온몸 바쳐 힘차게 살아가는 이야기를 꾸밈없이 나눌 수 있으면 참으로 즐겁다. 문학이란 바로 삶에서 비롯한다. 어린이문학이든 어른문학이든, 또 판타지라 하든 공상과학이라 하든 뭐라뭐라 하든 삶에서 비롯하거나 삶에 바탕을 두지 않는 문학이란 없다. (4343.11.2.불.ㅎㄲㅅㄱ)
― 달걀 한 개 (박선미 글,조혜란 그림,보리 펴냄,2006.5.31./8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