삐삐는 어른이 되기 싫어 시공주니어 문고 2단계 17
아스트리드 린드그렌 지음, 햇살과나무꾼 옮김, 롤프 레티시 그림 / 시공주니어 / 2000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어른 아닌 좋은 사람 되고픈 삐삐
 [책읽기 삶읽기 9] 아스트리드 린드그렌, 《삐삐는 어른이 되기 싫어》



 ‘삐삐’를 생각하면 ‘말괄량이’라는 이름이 퍼득 떠오른다. 삐삐 하면 척 하고 “말괄량이 삐삐”가 된다. 스물여섯 달이 거의 차고 스물일곱 달째 함께 살아갈 우리 집 딸아이를 볼 때면 으레 ‘말괄돼지’라는 낱말이 튀어나온다. 언제나 딸아이 스스로 하고픈 대로 하려 들고, 주는 밥은 안 먹으려 하기에. 신나게 노래부르며 춤추는 녀석은 밥 안 먹는 돼지요 마음껏 뛰노는 말괄량이이다.

 대한민국 이 나라에는 스웨덴말을 가르치는 대학교가 있다. 나는 다섯 학기를 다니다 그만두었으나 네덜란드말을 가르치는 대학교 학과 또한 있다. 이탈리아말과 포르투갈말과 체코말과 유고말 또한 함께 가르친다. 그러나, 이탈리아말 학과를 나와 이탈리아 문학을 번역하는 사람은 더러 보았으나, 스웨덴말 학과를 나와서 스웨덴 문학을 우리 말로 옮기는 사람은 아직 못 본다. 버젓이 포르투갈말 학과가 있으며 포르투갈말 학과 교수들이 있는데에도 포르투갈 문학을 포르투갈말로 된 책에서 옮기지 못한다. 이는 네덜란드 문학이라 해서 다르지 않다. 네덜란드말-한국말 사전이 있으면 무엇하나. 네덜란드말 학과 교수가 있으나 무엇이 다른가.

 삐삐 이야기를 쓴 분은 스웨덴사람이다. 그렇지만 1982년에 종로서적에서 나온 《말괄량이 삐삐》(김인호 옮김) 말고는 스웨덴말에서 한국말로 옮긴 책이 더 없다. 아스트리드 린드그렌 님 다른 문학도 똑같다. 이분 문학을 스웨덴말에서 한국말로 옮기는 번역쟁이는 찾아보지 못한다. 예나 이제나 ‘스웨덴말에서 독일말로 옮긴 책’을 바탕으로 옮길 뿐이다.


.. 스웨덴에 그림같이 멋진 작은 마을이 있었다. 판판한 돌이 깔린 거리에 마당 있는 작은 집들이 늘어서 있는 마을이었다. 이 마을을 찾아온 사람이면 누구나 조용하고 평화로워서 참 살기 좋은 곳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관광객이 볼 때, 볼거리가 많은 마을은 아니었다 ..  (9쪽)


 나는 꿈을 꾼다. 누군가 네덜란드말 학과를 마친 젊은이 가운데 ‘안케 드브리스’ 문학이나 ‘안니 M.G.슈미트’ 문학이나 ‘리타 페르스휘르’ 문학을 네덜란드말로 된 책에서 우리 말로 옮겨 주기를. 하다못해 《안네 일기》라도 네덜란드책에서 우리 말로 옮기기를. 그리고 제발 아스트리드 린드그렌 님 어린이문학을 스웨덴말을 배우는 학생과 스웨덴말을 가르치는 교수가 힘과 슬기를 모두어 스웨덴말로 된 책에서 우리 말로 옮겨 내기를.

 그러고 보면 덴마크사람 한스 안데르센 문학을 덴마크말에서 우리 말로 옮긴 적이란 없다. 노르웨이 문학이 되어도 마찬가지일 테지. 핀란드 문학은 어떻고.

 이디쉬말을 쓰는 사람들 문학은 어떻게 옮기는가. 베트남 문학은, 라오스 문학은, 스리랑카 문학은, 티벳 문학은 …… 우리는 어떠한 말로 된 책을 바탕으로 한국말로 옮겨서 읽는 셈일까.


.. 아니카는 삐삐를 아주 좋아했기 때문에 누가 삐삐한테 화를 내는 것이 싫었다 ..  (30쪽)


 모르는 노릇이지만 내가 살아 있는 동안에 말괄량이 삐삐 이야기를 제대로 옮겨 낸 판으로 읽기는 힘들겠다고 느낀다. 우리 딸아이가 무럭무럭 자라 아가씨가 되고 아줌마가 되며 할머니가 될 때까지도 말괄량이 삐삐는 노상 독일책에서 옮겨서 읽을밖에 없는 이 나라일 뿐이라고 느낀다.

 삐삐 이야기책을 내놓아 그렇게 많이 팔고 돈을 많이 번 출판사는, 이제라도 독일책이 아닌 스웨덴책을 바탕으로 다시금 새롭게 옮길 마음이 있을까. 스웨덴말 학과가 있는 대학교는 누구보다 아스트리드 린드그렌 님 같은 분들 문학을 대학교 돈이라든지 나라에서 얻는 돈이라든지 들여 이제라도 꼼꼼하며 알차게 새롭게 옮기도록 땀을 흘릴 뜻이 있을까.


.. 삐삐는 토미와 아니카를 즐겁게 해 주려고 사다리를 내려갈 때 항상 물구나무를 서서 내려갔다 ..  (78쪽)


 《삐삐는 어른이 되기 싫어》를 읽는다. 서울 혜화동에 자리한 인문책방 〈이음책방〉에 마실을 갔다가 이 책이 눈에 번쩍 뜨여 집어들어 읽는다. 첫판은 1996년 6월 15일에 나왔고, 고침판은 2000년 11월 15일에 처음 냈으며, 내가 산 판은 2010년 4월 10일 45쇄이다. 고침판은 45쇄인데 첫판으로는 얼마나 많이 찍었을까. 헌책방을 찾아가도 이 책은 어렵잖이 살 수 있다. 그러나 〈이음책방〉이 잘 되기를 빌면서 부러 이 책을 〈이음책방〉에서 7000원을 꼬박 치르며 장만한다.

 1982년 종로서적판 《말괄량이 삐삐》를 읽고 나서 1996년에 시공주니어에서 내놓은 《내 이름은 삐삐 롱스타킹》을 겹쳐 읽다가 참말 갑갑해서 두 번째와 세 번째 삐삐 이야기를 장만하여 읽을 생각을 오래도록 접고 지냈다. 독일책에서 옮겼기 때문에 번역이 떨어진다 할 수는 없다. 삐삐 책은 나라안에서 손꼽는 번역모임에서 우리 말로 옮겼다. 이분들이 번역을 못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너무 틀에 매여 있다. 이분들이 옮긴 책은 어느 책이나 어슷비슷하다. 글을 쓴 사람에 따라 다른 넋과 삶과 말이 보이지 않는다. 하이타니 겐지로 책이라면 하이타니 겐지로 맛과 냄새가 나야 하고, 아스트리드 린드그렌 책이라면 아스트리드 린드그렌 맛과 냄새가 나야 한다. 삶과 삶터와 삶자락이 다른데 우리 말로 옮겨진 글월 매무새는 거의 똑같다.


.. 토미와 아니카네 반 친구들이 모두 부두로 나와서 친구가 떠나는 것을 아쉬워하며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부러움도 섞인 눈물이었다. 내일이면 친구들은 평소처럼 학교에 가야 한다. 게다가 하필이면 지리 숙제가 남태평양의 섬들을 죄다 공부해 가는 것이었다. 토미와 아니카는 한동안 숙제를 할 필요가 없게 되었다 ..  (96쪽)


 나는 아름다운 외국 문학을 아름다운 번역으로 읽고 싶다. 이 아름다운 외국 문학 하나에 온마음을 쏟은 따뜻하고 넉넉하여 사랑스러운 책을 가슴에 안고 싶다. 낱말 하나하나를 더 살뜰히 고르는 번역문학을, 말투 하나하나를 더욱 살가이 어루만지는 번역문학을 마주하고 싶다.


.. 토미와 아니카의 엄마가 지금 두 아이를 본다면 얼마나 깜짝 놀랄까? 둘의 창백했던 얼굴은 온데간데없었다. 까무잡잡하게 그을린 피부와 건강한 모습뿐이었다 ..  (100쪽)


 씁쓸한 번역 이야기는 이제 집어치우자. 아름다운 어린이문학 《삐삐는 어른이 되기 싫어》를 이야기하자. 그러나 한 가지를 더 짚을 수밖에 없다. 삐삐 이름은 ‘삐삐 긴양말’이지 ‘삐삐 롱스타킹’이 아니다. 삐삐는 ‘영어를 모르’는 북쪽 나라(스웨덴) 어린이이다.


.. 이윽고 삐삐가 꿈을 꾸듯이 말했다. “얘들아, 파도 소리 좀 들어 봐. 내가 전에 ‘쿠르쿠르두트 섬이 너무 좋아서 영원히 살고 싶어질지도 몰라’라고 했던 말 기억나?” ..  (110쪽)


 《삐삐는 어른이 되기 싫어》에 나오는 삐삐는 쿠르쿠르두트 섬에서 함께 놀다가 물에 빠진 토미를 살리며 상어를 번쩍 들며 말한다. “(상어를 보며) 부끄럽지도 않니(122쪽)?” 토미를 뭍에 건져 놓고는 엉엉 울며 이렇게 말한다. “아니. 상어가 아침도 못 먹고 배고파할 것이 가엾어서(123쪽).”

 ‘뒤죽박죽 별장’에서 삐삐랑 함께 노는 토미와 아니카는 “난 어른이 되고 싶지 않아(173쪽).” 하는 말을 절로 내뱉는다. “그리고 어른들은 놀지도 않아. 후유, 어른이 되는 건 너무 끔찍해(174).” 하는 말을 한숨과 함께 뱉어 낸다.

 1948년에 나온 어린이문학 《삐삐는 어른이 되기 싫어》인데, 온누리에 손꼽히는 문화복지 나라 스웨덴조차 어른들은 따분하고 답답하며 재미없다는구나. 2010년 스웨덴은 1948년 스웨덴과 견주어 좀 즐거워졌을까. 좀 홀가분해졌는가. 좀 재미있어졌나.

 2010년 대한민국하고 1948년 대한민국은 어떠할는지 궁금하다. 경제성장에 목을 매는 이 나라는 차츰차츰 살기 좋을 뿐 아니라 즐거운 나라라 할 만한지 궁금하다. 삐삐와 토미와 아니카가 살아가는 작은 마을은 ‘관광지’가 아닐 뿐더러 ‘관광할 만한 유적이나 박물관’조차 변변하게 없으나 “그림같이 멋”지며, “조용하고 평화로워서 참 살기 좋”다고 했다. 이 작은 마을에서는 더 많은 돈이나 더 높은 이름값이나 더 센 힘이란 부질없다. 이 작은 마을에서는 착하거나 참되거나 고운 삶이 빛난다.

 누가 누구보다 돈을 더 많이 벌어야 할 까닭이 없다. 누가 누구보다 큰 집에서 살아야 할 까닭이 없다. 누가 누구보다 잘난 대학교에 들어가야 할 까닭이 없다. 학교를 안 다니고 빵집에서 일꾼으로 지내더라도 손가락질할 사람이 없다. 구멍가게를 어버이한테서 물려받아 이어간다 하더라도 나무랄 사람이 없다. 교사나 경찰이나 공무원이나 시장쯤 되어야 무언가 뜻을 이루었다고 하지 않는다. 곰셉을 잘하건 못하건 그리 대수롭지 않다. 모두들 아름다운 삶을 바란다. 다들 사이좋은 이웃을 생각한다. 다만, 어린이일 때에는 그토록 신나게 뛰어놀면서 막상 어른이 되면 뭐 그리 바쁘고 힘든지 아이들하고 놀 겨를을 못 낼 뿐 아니라 어른들끼리도 제대로 놀지 못하고 만다.


.. “삐삐가 아주 외로워 보여. 아, 토미. 지금이 아침이면 좋겠어. 그러면 당장 삐삐한테 달려갈 텐데!” ..  (180∼181쪽)


 삐삐는 외롭다. 그리고, 삐삐가 외로워 보인다고 느끼는 사람은 아니카뿐이다. 삐삐는 제 한삶을 신나며 알차게 보내고 싶지만, 삐삐처럼 내 한삶을 신나며 알차게 보내고픈 동무나 이웃이 몹시 드물기 때문에 외롭다. 다들 돈·이름·힘(재산·명예·권력)에 얽매여 참된 내 삶을 껴안거나 어루만지지 못하니까 삐삐는 쓸쓸하다.

 그러나 삐삐 곁에는 토미와 아니카가 있으니까. 쿠르쿠루두트 섬 아이들이 있으니까. 거의 모든 아이들과 어른들은 다람쥐 쳇바퀴에 갇혀 있으면서 다람쥐 쳇바퀴인지 안 느끼면서 바보걸음을 한다지만, 마음을 나누며 사랑과 믿음으로 어깨동무하는 동무가 있어 삐삐는 외롭거나 쓸쓸하지만 또다시 기쁘게 웃으며 새 하루를 맞이하니까.

 어른이 되기 싫은 삐삐는 틀림없이 어른이 안 되겠지. 삐삐는 어른이 아닌 좋은 사람이 되겠지. 좋은 사람이 되고 좋은 벗이 되며 좋은 이웃이 되는 삐삐일 테지. 좋은 사랑을 나누고 좋은 믿음을 베풀며 좋은 웃음과 눈물로 얼싸안는 삐삐로 살아갈 테지. (4343.10.13.불.ㅎㄲㅅㄱ)


― 삐삐는 어른이 되기 싫어 (아스트리드 린드그렌 글,롤프 레티시 그림,햇살과나무꾼 옮김,시공주니어 펴냄,1996.6.15./7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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