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리카에도 곰이 있을까요? - 크레용그림책 23
이치카와 사토미 지음 / 크레용하우스 / 2000년 7월
평점 :
절판




 우리가 하는 말도 몰라요
 [다 함께 즐기는 그림책 18] 사토미 이치카와, 《아프리카에도 곰이 있을까요?》(크레용하우스,2000)



.. 처음 보는 사람들이 와서 인사를 했어요. 얼굴색이 다르고, 옷도 이상했어요. 아주아주 먼 나라에서 여행 온 가족인가 봐요. 근데 무슨 말을 하는지 하나도 모르겠지 뭐예요. 우리가 하는 말을 모르는 것 같았어요. 우리보고 자꾸 ‘카메라 카메라’ 하면서 신기하게 생긴 물건을 쳐다보래요 ..  (6쪽)


 아이를 키우는 어버이는 누구나 통역자가 됩니다. 아이와 이웃 어른 사이에서 말을 이어 주는 사람 노릇을 합니다. 아주 어린 당신 아이가 옹알거리는 말을 둘레 어린이나 푸름이나 어른한테 알리는 몫을 맡습니다.

 할머니 할아버지 이모 삼촌이 살아가는 일산집에 아이랑 아이 엄마랑 함께 마실을 왔습니다. 아이는 시골집에서는 찾을 길이 없는 ‘아쪼끄림’ 맛을 보고는 자꾸자꾸 ‘아쪼끄림’을 달라고 칭얼댑니다. 밥을 먹어야 준대도, 밥 한 술을 뜨고 먹으래도 그저 ‘아쪼끄림’ 타령입니다. 도시에서 살아가자면 아이를 옳게 이끌기 참 힘듭니다. 할머니와 할아버지와 이모와 삼촌이 칭얼거림을 받아들이는 줄 환히 알며 더 멋대로 칭얼거립니다. 아쪼크림이란 얼음과자입니다.

 ‘할아버지’를 ‘아지’라 줄여 일컫는 아이가 “할모니 할모니 할모니” 하는 소리를 잇달아 욉니다. 마치 노래를 부르는 듯합니다. 아침 여덟 시가 안 되어 일어나 낮잠을 건너뛰며 투정대던 아이는 제발 한숨 자고 다시 일어나 놀라 해도 듣지 않더니 밤 열한 시 무렵에서야 할머니 품에서 잠이 듭니다. 일산집에 오면 할머니가 제 투정을 모조리 받아들여 주는 줄 뻔히 알기 때문일 테지요. 할머니는 아이 말마디를 모두 알아듣지는 못하지만 말마디를 못 알아들어도 몸과 마음으로 잘 챙겨 줍니다. 생각해 보면, 말귀를 잘 알아듣는 아이 아빠나 아이 엄마라 해서 아이가 하고픈 대로 늘 찬찬히 받아들여 주지는 않습니다.

 둘레에서 우리 딸아이를 곧 어린이집이나 유치원에 넣어야 하지 않느냐고 걱정해 줍니다. 집에서 엄마 아빠하고만 있으면 심심할 테고 다른 아이와 견주어 ‘못 배우며 뒤처질’ 수 있다고 근심해 줍니다. 아이가 어린이집이나 유치원에 다닐 무렵이면 돈이 어마어마하게 들 테니 이제라도 제대로 된 돈벌이를 하며 살아야 하지 않느냐고 끌탕해 줍니다.

 그림책 《아프리카에도 곰이 있을까요?》를 펼치며 생각합니다. 아프리카 작은 시골마을에서 살아가는 ‘메토’라는 아이는 늘 염소를 보듬거나 돌보면서 식구들하고 살아갑니다. 메토네가 지내는 작은 시골마을에는 아주 마땅히 어린이집이나 유치원이 없습니다. 학교는 있을는지 모릅니다. 어쩌면 글을 가르칠는지 모르고, 책을 읽힐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메토네 어머니나 아버지, 또 어머니나 아버지를 낳아 기른 어머니나 아버지 …… 들은 따로 배움집에 다니지 않았습니다. 굳이 배움집을 드나들어야 할 까닭이 없었습니다. 작은 시골마을 둘레 숲이며 들판에서 살아가는 들짐승인 키보코(물뚱뚱이), 심바(사자), 템보(코끼리), 트위가(기린) 들이 바로 좋은 벗이면서 스승이거든요. 맨발로 밟는 흙이 벗이면서 스승입니다. 땅에서 얻은 풀에서 자아내는 실로 지은 천이 옷이 되는데, 이렇게 옷이 되어 주고 밥이 되어 주며 집이 되어 주는 모든 자연이 벗이면서 스승이에요. 물뚱뚱이한테 말을 걸 줄 알고, 사자와 말을 섞을 줄 알며, 코끼리하고 말을 나눌 줄 안다면 아프리카 시골 삶자락에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들은 한국땅이라는 데에서 살아가야 하기 때문에 돈을 더 많이 벌어야 한답니다. 대학교 가방끈을 더 길고 단단히 붙잡아야 한답니다. 크고 빠르며 비싼 자가용에다가 돈 되는 아파트를 마련하며 노상 양복 차림으로 지내야 한답니다. 집에 텔레비전 들여놓아 갖가지 연속극과 운동경기와 연예인 풀그림에 빠삭해야 하는데다가, 돈이 좀 모이면 땅을 사든 주식을 사든 펀드를 사든 뭐를 하든 해야 한답니다.


.. 아, 어쩌면 좋아! 여자 아이가 작은 동물을 두고 갔어요. 얼마나 슬퍼하고 있을까요? ..  (12쪽)


 시골서 살던 사람은 웬만하면 도시로 몰려나왔습니다. 벌써 예전부터 시골에는 아이 울음소리가 멎었다고들 했습니다. 시골 초·중·고등학교는 읍에 한 군데씩 남기 일쑤이고, 이곳마저 얼마나 오래 버틸는지 모릅니다. 시골마을이나 작은 도시에 깃든 대학교에 다녀서는 일자리 얻기 힘드니까 서울 안쪽에 있는 대학교를 다녀야 한다고 온 나라가 들끓습니다.

 우리 세 식구는 서울과 맞닿은 인천 골목동네에서 지내다가 시골로 살림을 옮겼습니다. 시골 가운데에서 가까운 이웃집하고도 제법 떨어져 있어 십 분 넘게 걸어가야 겨우 몇 집 보이는 멧기슭에 살림집이 있습니다. 충청북도 충주시와 음성군 사이에 살짝 붙은 우리 살림집에서 서울로 마실하러 나오자면 대여섯 시간은 넉넉히 듭니다. 서울에서 부산까지 세 시간이 안 되어 기차가 다닌다지만, 우리는 서울로 가자면 대여섯 시간, 부산으로 가자면 예닐곱 시간을 써야 합니다.

 아이를 무릎에 앉히고 그림책 《아프리카에도 곰이 있을까요?》를 펼칩니다. 책에 적힌 글을 읽고 그림으로 나오는 모습을 손가락으로 짚으며 하나하나 새 이야기를 붙입니다. “물에 사는 뚱뚱이라서 물뚱뚱이네. 사자들은 코 자고 있네. 우리 벼리도 코 자면 좋을 텐데. 얘네들은 엉덩이가 빨간 원숭이네.” 아이가 흙바닥에 떨어져 있는 곰인형 그림을 보며 “넘어졌어.” 하고 또박또박 말합니다. “그래, 곰인형이 넘어졌어.” 유럽나라에서 아프리카 여행이나 취재로 찾아왔을 사람들네 아이가 떨어뜨리고 간 곰인형을 아프리카 작은 마을 아이가 알아보고는 부리나케 달려가며 돌려줍니다. 책 겉하고 속에 까만 살결 아이가 곰인형을 두 팔로 번쩍 들고 보여주는 대목이 있습니다. 까만 살결 아이는 사내인지 계집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저로서는 아프리카 사람들 말을 모르고 생김새 또한 잘 모르니까요. 아프리카 사람들이 하얀 살결 사람들을 볼 때에도 비슷할 테지요. 서로서로 얼마나 잘 안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아이한테 이 그림을 짚으며 “오빠네.” 하다가는 “언니네.” 하다가는 “오빠인지 모르고 언니인지 모르겠네.” 하고 말합니다. 아이는 아빠가 들려주는 말과 손짓을 따르며 책을 두 번 함께 넘깁니다. 두 번씩 함께 보고 나서는 아이한테 혼자 스스로 넘겨서 보라며 책을 건넵니다. 이제 스물여섯 달을 지나는 아이는 혼자 스스로 책을 넘길 줄 알며, 퍽 잘 해 냅니다. 저녁을 먹을 때에 둘레 어른들이 다 젓가락질을 하니 저도 젓가락질을 하겠다기에 일부러 왼손은 쓰지 말고 젓가락 쥔 오른손만 쓰도록 하며 차근차근 밥거리를 잡아내어 스스로 먹도록 해 줍니다. 꼭 네 번 잘 따라 주며 밥거리를 집어먹습니다. 네 번 집어먹고는 또 뛰어다니며 놀겠다고 아빠 무릎에서 내려옵니다.


.. 엉엉 울고 있던 여자 아이가 달려왔어요. 난 작은 동물을 여자 아이한테 쭈욱 내밀었지요. “와! 내 곰이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곰이야! 정말 고마워.” 여자 아이는 머리에 매고 있던 빨간 끈을 풀어서 나한테 주며 “매애애애! 매애애애!” 했어요. 아하! 빨간 끈을 내 염소한테 매 주라는 말인가 봐요 ..  (27쪽)


 일산집에서 사흘을 묵었고, 나흘째 아침에 슬슬 짐을 꾸려 우리 시골집으로 돌아가려 합니다. 이렇게 할머니 할아버지 이모 삼촌하고 어울린 다음 집으로 돌아가면 한동안 투정 어리광 칭얼로 시달립니다. 그러나 달리 생각하면, 아이로서는 제 마음대로 신나게 뛰고 놀며 클 수 있는지 모릅니다. 아이 옆에 꼬박꼬박 붙어 지내며 통역자 노릇하고 심부름꾼 구실을 하다가는 너무 고단하여 애 아빠는 방에 들어가 한동안 쉽니다. 이제 아이는 스스로 제 두 다리로 얼마든지 돌아다닐 수 있고, 오줌이 마려우면 “쉬!”라고 말해서 곁에 있는 어른이 오줌그릇에 앉히면 되며, 모처럼 어울리는 살붙이들하고 더 붙어 있고픕니다. 앞으로 한 달 두 달 한 살 두 살 더 나이를 먹고 몸이 자라면 제 엄마 아빠하고 붙어 있는 때보다 떨어져 있는 때가 한결 늘 테지요.

 아이는 집에서 제 엄마 아빠가 하는 말을 고스란히 따라합니다. 제 엄마 아빠가 하는 양을 고스란히 따라합니다. 틀림없이 오늘날 어린이집이나 유치원에다가 초등학교와 중학교와 고등학교는 잘 짜여 있는 배움집입니다. 이 나라 거의 모든 아이들이 이러한 배움집을 다니니까 우리 아이가 이러한 배움집을 다니지 않는다면 따돌려지거나 동떨어질 수 있습니다. 그러면 아이가 이러한 배움집들을 다닐 때에 아이로서는 무엇을 배우거나 따라하거나 물려받거나 이어받으며 아이 삶을 북돋울 수 있는지요.

 우리 아이한테는 우리 아이 삶이 있어요. 우리 아이 스스로 살아내고 살아갈 나날이 있습니다. 우리 아이는 아이 스스로 제 말을 찾고 제 넋을 키우며 제 삶을 보듬을 때 가없이 아름다우며 착하고 참되리라 생각합니다. 어버이 된 두 사람은 아이가 더 많은 지식을 더 일찍 머리에 집어넣기보다는 한결 따스한 사랑과 한껏 푸른 믿음을 고맙고 너그러운 살붙이와 이웃과 동무 품에서 물려받거나 이어받을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지식이 많거나 가방끈이 길거나 돈이 많으면 어디에 쓰나요. ‘우리가 하는 말’을 모른다면 무슨 보람이 있나요. 우리가 하는 말에 어떤 빛깔과 내음과 소리와 느낌이 깃들었는가를 깨닫지 못한다면 무슨 뜻이 있으려나요. 염소를 품에 안으며 따스함을 나누는 아프리카 작은 시골마을 아이와 곰인형을 품에 안으며 따뜻함을 함께하는 유럽나라 도시마을 아이가 주고받는 마음처럼 우리 아이 또한 말과 넋과 삶 모두 한결같이 따사로운 길을 뚜벅뚜벅 씩씩하고 튼튼하며 슬기롭게 걸어갈 수 있도록 곁에서 좋은 길동무로 나란히 살아가고 싶습니다. (4343.10.4.달.ㅎㄲㅅㄱ)


― 아프리카에도 곰이 있을까요? (사토미 이치카와 글·그림,사과나무 옮김,크레용하우스 펴냄,2000.7.25./7000원)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