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만들기
이기원 / 눈빛 / 1995년 3월
평점 :
품절



 ‘무엇 또는 누구’를 찍을까 걱정하지 말자
 [따순 손길 기다리는 사진책 11] 이기원, 《세상 만들기》


 사회사진연구소를 꾸리던 이기원 님은 《그날 이후》(1990), 《노동자, 강철과 눈물의 빛》(1991), 《답하라, 전세계 노동자》(1993) 같은 사진책을 함께 내놓은 다음 새로운 사진책 《세상 만들기》(1995)를 우리 누리에 내놓습니다. 이기원 님이 아니고도 이 나라 공장 일꾼 삶과 이야기를 사진으로 담은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기원 님 앞으로나 뒤로나 공장 일꾼 삶과 이야기를 사진으로 알뜰히 담은 사람은 퍽 드뭅니다. 아니, 거의 없다고 할 만합니다.

 사진을 찍는 적잖은 이들은 이 나라에서 무척 많은 사람이 몸담고 있는 공장을 사진감으로 삼지 않습니다. 공장을 비롯해 여느 회사 사무실을 사진감 무대로 다루지 않습니다. 사진찍기를 즐기는 교사가 제법 많습니다만, 당신 일터인 학교와 학교에 다니는 아이들을 사진감으로 맞아들이는 일이란 퍽 드뭅니다. 어쩌면 아예 없거나 거의 없다고 해도 틀리지 않습니다.

 사진을 찍는 적잖은 이들은 프랑스 파리를 돌아다닌다든지 에스파냐 산티아고를 걷는다든지 일본 도쿄를 거닌다든지 티벳이나 네팔 산기슭을 오르내린다든지 인도나 아프리카 땅을 떠돌고 있습니다. 사진을 찍는 이 나라 적잖은 이들 작품은 으레 이와 같은 곳 삶을 스치거나 부대낀 이야기에 맴돕니다. 스스로 태어나서 자라며 복닥인 우리 누리 우리 터전을 오래도록 스스럼없이 살피거나 받아들이는 일이란 좀처럼 찾아보지 못합니다.

 사진책 《세상 만들기》는 그리 잘 찍은 사진을 담지 못합니다. 사진책 《세상 만들기》는 이 나라 중공업 일꾼을 담습니다만, 몇몇 중공업 일꾼을 다룰 뿐, 조금 작은 공장 일꾼이나 더 작은 공장 일꾼을 다루지 못합니다. 중공업 일꾼은 다루지만 경공업 일꾼이라든지 옷 만드는 공장 일꾼이라든지 자전거 만드는 공장 일꾼은 다루지 못합니다. 아니, 다루려고 생각을 해도 다루지 못했거나, 다룬다고 해 보아도 책으로 엮어 줄 출판사를 만나기 힘들지 않으랴 싶습니다.

 세바스티앙 살가도 님은 《Workers》라는 이름으로 온누리 일꾼들 삶을 사진 이야기로 적바림했습니다. 말 그대로 ‘일하는 사람’이니까 ‘일꾼’이라는 이름을 붙입니다. 이기원 님은 《세상 만들기》라는 이름으로 우리 누리 일꾼들 삶을 사진 이야기로 갈무리했습니다. 말 그대로 이 땅 일하는 사람들은 ‘세상을 만들고 있’으니까 ‘세상 만들기’라는 이름이 걸맞습니다.

 그렇지만 아쉽습니다. 왜 ‘세상 만들기’는 “이기원이 찍은 한국이 중공업 노동자들”에서 첫머리이자 마지막이 되어야 했을까요. 다른 공장 일꾼 삶을 담아내어 ‘세상 만들기’를 잇달아 보여주어야 하지 않았을까요. 우리가 날마다 먹는 밥을 일구어 베풀어 주는 농사꾼들 삶을 사진으로 담아 ‘세상 만들기’라는 또다른 이야기를 엮어야 하지 않았을까요. 우리들이 어른이 되기까지 진자리 마른자리 가리지 않고 눈코 뜰 사이 없이 돌보고 어루만져 온 어버이들 삶을 사진으로 보듬어 ‘세상 만들기’란 여느 자리 여느 살림집 여느 아버지와 어머니한테서 언제나 엿볼 수 있음을 나누어야 하지 않았을까요.

 곰곰이 생각해 보면, 사진쟁이 이기원 님 한 분한테만 ‘우리 나라 숱한 세상 만들기’를 사진으로 담으라 말할 수 없습니다. 이기원 님은 이기원 님 당신이 할 수 있는 힘을 다 쏟아내어 “중공업 일꾼 삶”을 담았을 테니까요. 이기원 님 둘레에서 사진을 찍는 벗들이 다른 일꾼 삶을 들여다보며 담아내야 하며, 이기원 님 사진책을 즐겁게 마주한 뒷사람이 우리 둘레 숱한 일꾼 삶을 마주보며 실어내야 합니다.

 그나저나 사진책 《세상 만들기》는 “중공업 일꾼”한테조차 좀더 가깝고 살가우며 따스하게 다가서지는 못했다고 느낍니다. 꼭 살가도 님 사진책을 빗대어서 말한다기보다, 일하는 사람을 다루는 작품이라 한다면, ‘일하는 사람 손’과 ‘일하는 사람 몸’과 ‘일하는 사람 옷’과 ‘일하는 사람 터’를 좀더 오롯이 넓고 깊으며 차분히 보여줄 수 있어야 할 텐데요. 중공업 일꾼이 일하는 자리가 어떠하며 중공업 일꾼이 어떤 장비를 쓰며 어떻게 일하는가를 내보이는 사진으로는 퍽 괜찮다 여길 만하지만, 정작 ‘그래, 중공업 일꾼을 보여주어서 뭘 어쩔 텐데?’ 하는 물음을 풀지 못합니다. 본 대로 담는다고 사진이 아니요, 느낀 대로 찍는다고 사진이 아닙니다. 보았으니 본 이야기를 사진으로 되삭여야 하고, 느꼈으니 느낀 삶을 사진으로 다시 태어나도록 일으켜야 합니다. 이기원 님은 이제까지 어느 사진쟁이도 제대로 하지 않거나 아예 하지 않던 뜻깊은 일을 굵은 땀방울 흘리며 일구어 냈습니다만, 가까스로 뗀 아장걸음에서 하나하나 튼튼하게 나아가는 매무새로 잇지 못했습니다.

 사진쟁이 이기원 님은 당신 사진책 《세상 만들기》 끝자락에 “끝으로 이 사진집이 눈빛 출판사에 손해나 끼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말을 붙입니다. 다른 때도 아닌 1995년에 공장 일꾼 사진책을 내놓는다는 일이란 참 힘들고 팍팍합니다. 자칫 국가보안법이니 뭐니 하는 그물에 걸릴 수 있습니다. 2010년이 된 오늘날까지 국가보안법 쇠사슬과 쇠그물이란 아주 단단하거든요. 이 나라에 공장이 수두룩하게 있을 뿐 아니라 공장에서 물건을 끝없이 만들지 않는다면 서울이고 부산이고 큰도시뿐 아니라 대한민국이라는 나라가 버틸 수 없으나, 정작 공장 일꾼 삶을 다루는 글이나 그림이나 사진이나 연극이나 연속극이나 영화는 몇 가지나 있는가요. 아니, 있기나 있습니까. 더욱이 농사꾼 삶을 다루는 글이나 그림이나 사진이나 연극이나 연속극이나 영화는 몇 가지나 나오며, 이런 문화와 예술이 팔리기나 합니까.

 공장 일꾼을 담는 사진은 ‘노동자 권리를 지켜 주려 한다는 정당’ 사람만 하는 일이 아닙니다. 공장 일꾼이면 누구나 할 수 있는 사진찍기입니다. 논밭에서 땀흘려 일하는 사람을 담는 사진은 ‘농업 운동’을 하는 사람만 하는 일이 아닙니다. 텃밭을 일구는 사람이든 논밭을 사랑하는 사람이든 누구나 할 수 있는 사진찍기입니다.

 이리하여, 아이를 키우는 어버이는 아이 사진을 담고 애 아빠가 애 엄마 사진을 담으며 애 엄마가 애 아빠 사진을 담으며 ‘(집안에서) 일하는 어버이’ 삶을 알알이 엮을 수 있습니다. 여느 살림집 할매와 할배 삶을 곁에서 지켜보며 담는 가운데 ‘일하는 할매와 할배’ 삶을 알뜰히 엮을 수 있습니다. 즐겨찾는 동네 구멍가게 일꾼 삶을 사진으로 엮을 수 있겠지요. 단골 책방 일꾼 삶을 사진으로 엮을 수 있습니다.

 사진감이란 먼 데에 있지 않습니다. 틀림없이 먼 데에도 좋은 사진감이 있는데, 어김없이 가까운 데에도 훌륭한 사진감이 있습니다. 아니, 어김없이 가까운 데에 있을 뿐 아니라 바로 내 곁에, 그러니까 내 삶 한복판에 깃든 아름다운 사진감을 꾸밈없이 느끼며 받아들이어 사진으로 담을 줄 알지 못한다면, 머나먼 데에 있는 좋으며 애틋하고 거룩한 사진감을 이러한 좋음과 애틋함과 거룩함 그대로 담아낼 수 없는 노릇입니다. 우리 어머니 우리 아버지 우리 살붙이 우리 아이 우리 이웃 …… 들을 사랑하는 마음이 살며시 이어지면서 우리 동무와 우리 짝꿍을 사랑하는 마음이 됩니다. (4343.8.25.물.ㅎㄲㅅㄱ)


― 세상 만들기 (이기원,눈빛,1995.4.10./2만 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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