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기
보름쯤 앞서부터 내 디지털사진기가 오락가락했다. 이제 이 디지털사진기가 목숨을 다해 숨을 거두는가 하는 느낌이 들었는데, 이렇게 간당간당하면서도 그럭저럭 사진을 찍을 수 있었다. 그러더니 오늘 저녁 드디어 숨을 거두었다. 수리점에 맡겨 보아야 알기는 하겠으나, 이제는 이 사진기 하나로는 사진을 찍을 수 없다. 여태껏 사진기 한 대만 갖고 가까스로 사진을 찍어 왔는데, 오늘부터는 아예 사진을 못 찍고 마는 셈이다.
고마운 분이 필름사진기를 한 대 빌려 주어 필름사진을 찍고 있기는 하지만, 필름을 더 장만할 돈이 없어 아주 힘겹게 필름사진을 찍고 있는 한편, 그나마 애써 찍은 필름사진들은 현상하지 못한 채 모아 놓고만 있다. 필름사진은 필름사진대로 막혀 있고 디지털사진은 디지털사진대로 막다른 길에 몰렸다. 그렇다고 선뜻 누구한테 전화를 걸어 사진기 새로 사야 하는데 돈을 빌려 줄 수 있나요 하고 여쭐 수 없다. 지난해에 몇 차례 이곳저곳 이 사람 저 사람한테 알아보면서 보았던 쓴맛이 생각나서 도무지 전화를 걸 수 없다. 괜히 사진기 새로 장만할 돈을 꾸려고 전화를 걸었다가 전화 받은 분이 어려워 한다면, 서로 서먹서먹해지면서 그동안 괜찮았던 사이가 흐리멍덩해져 버릴 수 있으니까 고단하다.
살림집이 빠지고 시골로 옮기면, 살림집 보증금 300만 원을 받아 이 가운데 100만 원은 짐차 부르고 이것저것 뭐 하고 저거 하느라 나갈 테고 200만 원이 남아 이 돈 가운데 100만 원을 사진기 값으로 돌리고 100만 원은 살림 꾸리는 돈으로 쓸 수 있기는 한데, 살림집 옮기는 날까지는 인천 골목길 사진을 찍을 수 없다. 앞으로 골목길 모습을 사진으로 찍기 어려울 수밖에 없기에, 살림집 옮기기 앞서까지 짐을 꾸리다가 바람을 쐬러 살짝살짝 마실하면서 찍는 사진조차 더 담을 수 없고야 만다.
그나마 벼랑 끝으로 사진기를 장만하는 길이라면, 어찌 되었든 맞돈이 아닌 카드로 사진기를 장만하는 길이 하나 있다. 사진기 값 결재를 일시불이 아닌 석 달쯤으로 나누어 갚도록 하면서, 석 달 사이에 내 책이 좀더 많이 팔려 주어 제발 처음으로 글삯이라는 돈을 받는다면 카드빚이 생기지 않게끔 할 수 있겠지. 그저 꿈일는지 그예 꿈일는지 모르겠다. 참으로 까마득하기는 까마득하다. 그러나 까마득하면서 괴롭거나 슬프지는 않다. 이제는 괴로움도 슬픔도 없다. 다만 허전하다. 멍하다. 글쟁이한테서 종이와 볼펜을 빼앗듯 사진쟁이한테서 사진기와 필름(또는 메모리카드)을 빼앗는다면 어떻게 살아남거나 버틸까. 한숨은 나오지 않으나 한숨을 쉬지 못할 만큼 팍팍한 살림에 어찌할 바를 모른다.
젊은 전태일은 대학생 벗이 하나 있으면 좋겠다고 꿈을 꾸었으나 꿈을 이루지 못했는데, 나는 맞돈 100만 원을 빌어(그냥 달라는 돈이 아닌 빌렸다가 갚을) 사진기를 장만하든 책을 내든 책을 사든 할 만한 든든한 벗이 하나 있으면 좋겠다는 꿈을 꾸지는 않으나, 오늘만큼은 이러한 꿈을 꾸고 싶다. (4343.6.23.물.ㅎㄲㅅ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