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으로 보는 눈 114 : 우리에 갇힌 책

 그젯밤 눈이 펑펑 쏟아지는 모습을 보면서 골목길 사진을 찍으러 나가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눈 내리는 밤길을 조용히 거닐며 이곳저곳에 깃든 모습을 담아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렇지만 새벽부터 밤까지 아이하고 어울리고 씨름을 하면서 기운이 다 빠진 터라 마음은 있어도 몸이 따르지 않습니다. 한동안 누워서 허리를 편 다음 두어 시쯤에 일어나자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아이가 네 시 반에 똥을 누면서 깨어났기에 똥 치우고 기저귀 빨며 씻기느라 함께 깰 때까지 그예 곯아떨어집니다. 하루하루 고되고 벅차구나 하고 새삼 헤아리면서, 아이가 없던 때에는 밤 두 시이건 새벽 네 시이건 홀로 바지런히 밤골목 마실을 하던 일을 떠올립니다. 그렇지만 아이하고 함께 살아가는 동안 아이 모습을 벌써 여러 만 장 사진으로 담았습니다. 웃고 울고 까불고 놀고 책을 읽고 잠을 자고 밥을 먹는 숱한 모습을 사진으로 하나둘 담는 동안, 나와 옆지기가 어릴 때에 어떠했을까를 돌아보고, 그무렵 우리들 어버이 되는 분들은 어떤 마음이었을까를 되새깁니다. 아이와 함께 지내면서 틀림없이 여러 가지를 잃는 삶이면서 어김없이 여러 가지를 새롭게 얻는 삶입니다.

 프랑스사람 조슬린 포르셰 님과 크리스틴 트리봉도 님이 함께 쓴 《우리 안에 돼지》(숲속여우비,2010)라는 책을 읽었습니다. 고작 112쪽짜리 책이니 금세 덮을 수 있었지만, 이야기가 쏙쏙 와닿으면서 가슴으로 잘 스며들은 까닭에 금세 덮고 다시금 찬찬히 돌아보고 있습니다. “쥘리앙 말이 돼지가 움직이지 못해야 몸집이 빨리 크고, 그럴수록 돈을 더 많이 벌 수 있는 거라고 하더군요(30쪽).” 같은 대목은 요즈음 웬만한 사람들이라면 다 알고 있을 법한 이야기라고 느낍니다. “축사에서 놀라운 건 거기서 일하는 사람들이 하루 종일 동물들과 몸을 부대끼며 일을 하면서도 마치 동물이 기계인 듯 대한다는 점입니다. 돼지의 기분은 중요하지 않습니다(86쪽).” 같은 대목은 어느 만큼 생각있는 사람이라면 헤아릴 만한 이야기라고 봅니다. 그러면 “사실 돼지 축사 건물 전체가 자연과 차단된 구조랍니다(55쪽).” 같은 대목을 살갗 깊숙하게 느끼는 분은 얼마쯤 될까요. 돼지우리에 갇힌 돼지만 자연이 사라진 곳에서 살집만 하루 빨리 불리도록 내몰리고 있을 뿐 아니라, 사람들이 일하거나 살아가는 곳에서도 더 빨리 돈만 벌도록 내몰리고 있는 ‘자연이 자취를 감춘’ 곳임을 깨닫는 분은 얼마나 되려나요. 우리는 우리가 즐겨먹는 고기와 푸성귀를 키우는 곳에서만 짐승과 푸나무를 기계처럼 다룰 뿐 아니라, 우리 스스로를 목숨이 깃든 사람이 아닌 돈벌이 기계로 여기고 있지 않습니까.

 며칠 앞서 헌책방에서 김수미 님 산문모음을 두 권 보았습니다. 이 가운데 《그리운 것은 말하지 않겠다》(샘터,1987)를 먼저 읽고 있습니다. 김수미 님이 책을 낸 줄은 진작 알았으나 이제까지 이분 책을 읽은 적이 없다가 몹시 새삼스럽다고 느끼며 쥐어들어 읽는데, 당신 나이 마흔을 앞두고 처음으로 책을 쓰셨더군요. 세월과 삶과 눈물콧물과 웃음이 고이 스민 책을 펼치면서 김수미 님 지난날 마음하고 오늘 제 나이를 곰곰이 짚어 봅니다. 스물세 해 앞서가 아닌 오늘 읽기에 비로소 내 마음밭으로 스미는 이 책을 곱게 쓰다듬으면서, 우리에 갇히는 삶이 아닌 보금자리를 일구는 삶이란 무엇인지 가만히 되뇌어 봅니다. (4343.2.19.쇠.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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