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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 꽃 1
시무라 타카코 지음, 오주원 옮김 / 중앙books(중앙북스) / 2009년 12월
평점 :
절판
여자가 여자를 좋아하는 고운 삶
[살가운 만화 53] 시무라 타카코, 《푸른 꽃 (1)》
- 책이름 : 푸른 꽃 (1)
- 글ㆍ그림 : 시무라 타카코
- 옮긴이 : 오주원
- 펴낸곳 : 중앙북스 (2009.12.23.)
- 책값 : 7800원
(1) 다짐
.. “미안해. 말 안 해서.” .. (41쪽)
《섹시 가이 (1∼7)》(세주문화,2000∼2003)와 《방랑 소년 (1∼8. 앞으로 더 나옴)》(학산문화사,2007∼2010)이 나라안에 옮겨진 일본 만화쟁이 시무라 다카코 님 《푸른 꽃》 1권이 나왔습니다. 일본에서는 3권까지도 나와 있고 만화영화로도 나오고 있으나, 아직 우리 나라에는 1권만 나와 있습니다. 《방랑 소년》은 새로운 권이 옮겨질 때마다 띠종이에 새 말이 하나씩 붙는데, “우리들의 비밀”과 “우리들의 꿈”에 이어 8권째에는 “우리들의 결단”이라는 말이 붙습니다. 《방랑 소년》은 이야기가 마무리된 다음에 다시 찬찬히 들여다보고자 하는데, 8권째에 이르러 ‘힘들게 헤매던 아이들’이 굳게 마음을 다잡습니다. 《방랑 소년》에서 주인공인 여자아이는 중학생 2학년이 된 때에 남자 교복을 입고 학교에 가고, 또다른 주인공인 남자아이는 초등학생 때부터 단짝동무였던 여자아이가 남자 교복을 입고 학교에 온 모습을 보고 여러 날 마음앓이를 한 끝에 여자 교복을 입고 학교에 가기로 합니다.
여느 사람들이 보기에는 ‘성 정체성이 흔들리는’ 삶이라 하겠지요. 그러나 여느 사람들이란 누구를 가리킬는지 궁금합니다. 이 아이들 눈길에서는 ‘스스로 좋아하는 길을 걷고 싶은’ 삶입니다. 이 아이들 또한 여느 아이요 여느 사람이며 여느 길을 걷는 고운 목숨입니다. 다만, 이 아이들은 스스로 좋아하는 길을 걷고 싶기 때문에 갈팡질팡합니다. ‘여느’라는 이름을 앞에 내거는 어른이나 동무들은 하나같이 겉보기로만 ‘여느’이지, 알고 보면 틀에 박히거나 판에 박힌 제도권만을 쑤셔넣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나이에는 무얼 하고 저 나이에는 무얼 하며, 이때에는 무슨 옷을 입고 저 자리에는 무슨 일을 하며 …… 하면서 모든 자리 모든 때에 맞추어진 틀이 있습니다. 이 틀을 따라야 ‘여느’ 삶이라 하고, 이 틀을 따르지 않으면 ‘미친’이나 ‘얼빠진’이나 ‘바보스런’이 되고 맙니다. 좋아하는 야구단이 있어야 하고, 체육 시간에는 다 같이 뜀박질을 해야 하며, 학교에서는 공부에만 마음을 쏟아야 합니다. 이렇게 해야 비로소 ‘여느’가 됩니다. 그런데 참으로 이렇게 꾸리는 삶이 ‘여느’라 할 수 있을까요.
만화책 《방랑 소년》 8권은 주인공인 남자아이가 여자 교복을 입고 학교에 갔을 때 처음에는 아무도 알아보지 못했으나, 스스로 누구임을 밝히자 학교가 온통 뒤집어지는 이야기로 끝이 납니다. 여자아이가 남자 교복을 입고 학교에 갔을 때에는 거의 아무런 말썽이 되지 않았으나, 남자아이가 여자 교복을 입고 학교에 가니 더없이 크게 말썽이 됩니다. 그래도 일본이니까 여자아이가 남자 교복을 입어도 그렁저렁 지나가지, 우리 나라였다면 똑같이 뒤집어졌겠지요. 그리고 우리 나라에서 남자아이가 여자 교복을 입고 학교에 갔다면 아홉 시 새소식에서도 다루고 기자들이 왁자지껄 떠들고 법석을 이루지 않았으랴 싶습니다.
.. “흑……, 으…….” “또 뭔가 생각이 났구나? 울음 뚝! 밤엔 자는 거야! 알았어?” “응……. 옛날에도 이렇게 너한테 자주 혼났지.” “너네 할머니만 할까?” “그러고 보니 생각났는데 대단했지.” “난 옆집 애였는데 맞았다니까!” “그 할머니도 2년 전에 돌아가셨는데.” .. (66쪽)
곰곰이 생각해 보면, 우리 나라에서는 남자가 머리를 ‘단발머리’만큼이나마 기르는 일은 거의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요사이야 다들 흔히 머리를 기르곤 합니다만, 우리 나라는 남자이든 여자이든 머리카락을 아예 안 깎으며 살던 겨레였으며, 고작 백 해 앞서는 누구나 이렇게 살았습니다. 남자가 머리를 짧게 깎아야 한다는 사회문화는 일제강점기에 스며들었고 군사독재정권이 정부권력을 붙잡았을 때 뿌리내렸습니다. 반드시 독재정권과 ‘머리길이’ 이야기를 맞댈 수 없습니다만, 사회와 문화와 제도와 법이 차갑게 틀어막힌 나라에서는 ‘머리길이를 짧게’ 하려고 안달입니다. 자연스럽게 자라나는 머리를 자연스럽게 자라나지 못하도록 다스리고, 사람마다 다 다른 머리결을 다 다른 모양새로 손질해서 살아가지 못하도록 억누릅니다. 운동선수라 하여 머리를 다 짧게 쳐야 하지 않고, 운동선수로 뛰면서도 긴머리를 휘날릴 수 있습니다. 물에서 헤엄을 칠 때에 ‘전신수영복’을 입을 수 있고 ‘아주 짧은 헤엄옷’을 입거나 아예 알몸일 수 있습니다. 달리기 선수도 저마다 입고픈 옷을 입기 나름이고, 달리면서 흩날리는 머리결 느낌을 좋아할 수 있으며, 흐르는 땀을 머리띠로 막을 수 있는 한편, 박박 민 머리에 와닿는 바람 느낌을 즐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머리카락 길이를 우격다짐으로 틀에 박아 버립니다. 초등학생은 어떠하고 중학생은 어떠하며 고등학생은 어떠하도록. 대학교에서조차 교수에 따라 학생들 머리길이를 놓고 주절주절 이야기를 늘어놓곤 합니다. 요즈음은 얼마나 달라졌는지 궁금한데, 1994∼1998년에 대학교에 한동안 머물고 있을 무렵 저는 ‘남학생 주제에 머리가 길다고 학점이 깎이기’ 일쑤였습니다. 이제는 길거리에서 딱히 눈총을 안 받지만 2000년대를 넘어서는 때까지 고향동네 인천에서든 서울로 마실을 나올 때이든 ‘저 남자는 뭔데 머리를 길러? 미쳤나 봐?’ 하는 수군거림을 뒤에서 숱하게 들었습니다. 길 가던 할배나 전철길 할배 가운데에는 저를 붙잡고 머리를 깎으라는 소리를 늘어놓기도 했습니다. 머리카락이 자라는 대로 놔 두고 고무줄로 한 번 묶어 주었을 뿐인데에도.
하리수 님이야 성을 바꾸는 수술을 받았다지만, 성을 바꾸는 수술을 받지 않은 사람이 치마를 입고 다닌다면 틀림없이 경찰이 달려와 붙잡아 가지 않으랴 싶습니다. 영어로 ‘커밍아웃’이라는 일을 하든 스스로 ‘성 정체성 밝히기’를 하든 ‘남자가 남자 사랑하기’나 ‘여자가 여자 사랑하기’를 하든, 둘레에 있는 사람들은 등을 돌리거나 손사래를 치거나 손가락질을 하리라 봅니다.
우리한테는 꿈 같은 소리요 귀신 씨나락 까먹는 이야기라 할 수 있겠는데, 삶에서 이루어지는 일이든 만화에서만 나오는 이야기이든, 《방랑 소년》 두 주인공은 8권에서 굳게 다짐을 하고 저희들 길을 씩씩하게 걸어가고자 합니다. 《푸른 꽃》에서는 8권까지 안 가고 바로 1권부터 주인공이 ‘나(여자)는 여자를 좋아하는구나’ 하고 느끼며 이러한 마음을 스스럼없이 털어놓습니다.
(2) 사랑
.. “확실히 나무 쪽이 정취가 있지.” “후지가야(고등학교) 멋있던데요.” “그야말로 도서관이라는 느낌이랄까.” “아키라가 그 학교를 고른 이유를 알 것 같아요. 아, 아키라는 그때 있던 제 …….” “후지가야에는 ‘도서관의 그대’라는 게 있었는데.” “머, 멋있네요.” “물론 선생님은 장난으로 그렇게 부른 거였지만, 그걸 몰래 들은 학생이 있어서 소문이 났지. 그것뿐이야. …… 왜 울어?” ‥마음의 준비가 끝나지 않았는데 갑자기 딱 붙지 마세요.” “그럼 심호흡해.” “하아아아.” ‘철제 책장에 둘러싸인 도서실이 나와 선배가 처음으로 키스한 곳.’ .. (114∼116쪽)
사랑은 어떻게 느끼는 마음일까요. 사랑은 어버이한테서 물려받는 마음일까요. 사랑은 누구한테 느끼고 누구한테서 배울까요. 사랑은 어떻게 드러내거나 나타내면서 손길을 내밀까요.
어버이 된 사람들은 아이들이 느끼며 맺으려고 하는 사랑을 어떻게 받아들일까요. 아이들이 느끼며 맺으려고 하는 사랑이 철없어 보이는 짓이라 느끼기에 뜯어말려야 한다고 생각할까요. 예전에 다 겪은 어른들인 까닭에 아이들은 당신들처럼 잘못되거나 어수룩하거나 못난 길을 다시 안 밟기를 바라며 ‘한 번에 척 하고 멋진 사랑을 이루’라고 다그칠 수 있을까요. 사랑이란 누구나 맨 처음 붙잡는 사람하고 가장 아름답게 마무리할 수 있을까요.
더없이 흔히 쓰는 말마디 ‘사랑’은, 흔하고 또 흔하고 다시금 흔하게 쓰더라도 조금도 닳거나 낡지 않습니다. 오히려 쓰면 쓸수록 더욱 빛나고 고운 결로 살며시 내려앉으며 우리들 삶에 스며들지 않느냐 싶습니다. 어설프게 외치는 사랑이든, 겉발림으로 들먹이는 사랑이든, 참다이 어루만지는 사랑이든, 기쁘게 나누는 사랑이든,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함께하고자 할 때에는 맑음과 밝음이 알맞게 어우러진다고 느낍니다.
.. “괜찮은데, 그 머리. 잘 어울려.” “선배.” “응?” “저, 선배랑 같이 등교하는 거 그만둘래요.” “뭐, 그래도 괜찮긴 한데. 아! 아키라 때문이구나! 아키라한테 혼났어?” “아키라는 그런 애 아니에요.” “정리하자면 아키라와 먼저 약속했는데 나랑 마주친 거구나. 무슨 초등학생도 아니고. 그래, 또래 집단에서 따돌림이라도 당하면 큰일이지.” “죄송해요.” “등교는 아키라한테 양보할게. 하교는 나를 위해 남겨 놔. 내일부터라도 좋으니까.” “선배.” “여자애는 참 손이 많이 간다니까.” .. (126∼128쪽)
만화책 《푸른 꽃》에 나오는 아이들은 고등학생 나이로 사랑을 느끼고 말하고 아파하며 기뻐합니다. 이 나라에서 고등학생이라면 중학생 때보다 한결 모질고 끔찍하게 대입 시험에 매달리며 세상하고는 담을 쌓을 뿐 아니라 옆에 앉은 동무를 쳐다보아서도 안 되는 듯 내몰리는 가녀린 아이들입니다. 집에서 학교로, 학교에서 학원으로, 그 다음에 비로소 집인 아이들이나, 집에서 식구들하고 제대로 이야기를 나눌 겨를이 없습니다. 학교에서도 동무들하고 속을 터놓는 이야기를 나눌 틈이 없습니다. 동아리에 들어가 무언가를 할 수 있을까요. 동아리에 들어간들 꿈을 키울 수 있을까요. 모든 꿈이든 뜻이든 대학교에 들어가지 않고서는 이룰 수 없다는 듯이 짜여 있는 이 나라입니다. 옌예인이 되고자 하여도 대학 졸업장이요, 글을 쓰거나 그림을 그리거나 사진을 찍거나 하고 싶어도 대학 졸업장이며, 농구를 하거나 야구를 하거나 축구를 하거나 할지라도 대학 졸업장입니다. 농사를 짓는다든지 공장에서 기계를 다룬다든지 버스나 택시를 몬다든지 빵을 굽는다든지 물고기 살을 가른다든지 떡을 찐다든지 할 때에도 대학 졸업장이 먼저입니다. 도서관에서 일하고 싶어도 대학 졸업장입니다. 출판사에 들어가고 싶어도 대학 졸업장입니다. 신문사에 들어가고 싶은데 대학 졸업장이 없을 수 없겠지요. 법관이 되거나 판사가 되고자 한다면 아주 마땅하게도 대학 졸업장입니다. 일터에서 함께 지내면서 차근차근 배우고 몸과 머리 모두 다스리는 삶이란 아예 막혀 있습니다. 늘 졸업장을 먼저 내밀어야 합니다. 늘 사람이 아닌 서류를 봅니다. 늘 겉모습과 겉차림을 살핍니다. 늘 속마음이나 속뜻을 헤아리지 않습니다.
만화책 《푸른 꽃》에 나오는 아이들은 고등학교 1학년이건 3학년이건 스스로 꿈꾸고 바라는 길을 깊이 돌아봅니다. 연극부에 몸을 담든 도서관에서 책을 살피든, 스스로 몸을 움직이고 스스로 책장을 넘기며 스스로 생각하여 말을 꺼냅니다. 스스로 꾸리는 삶이니까요. 스스로 두 다리로 뚜벅뚜벅 걸어 전철역에 가고 전철을 타며 학교에 간 다음 스스로 귀를 기울여 수업을 듣는 삶이니까요. 스스로 찾아서 듣고 익히는 하루하루이니, 사랑을 느낄 때에도 스스로 우러나오는 마음에 따라 느낍니다. 스스로 꾸리는 삶이니, 사랑을 나누고자 할 때에도 스스로 바라는 마음결에 따라 움직입니다. 엄마한테 얘기하고 입맞춰야겠습니까. 아빠한테 말하고 손을 잡아야겠습니까.
내 힘으로 붙잡습니다. 내 넋으로 곱씹습니다. 내 말로 나타냅니다. 내 몸으로 어루만집니다. 내 눈으로 바라봅니다.
사랑이란 바로 다른 사람 눈치가 아닌 내 힘과 넋과 말과 몸과 눈을 돌아보면서 ‘이렇게 찾아왔구나’ 하고 느끼는 따스함이 아닌가 싶습니다. 사랑이란 다름아닌 나 스스로 깨달으면서 ‘이런 마음이 내 속에 있었구나’ 하고 기뻐하는 넉넉함이 아니랴 싶습니다.
(3) 한 사람이 되어 걷는 길
.. ‘(여자가) 여자를 좋아한다는 게 그렇게 이상한 건가? 내 사고방식이 너무 단순한 건가?’ …… “이쿠미, 있잖아.” “응.” “만약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여자라면 어떡할 거야?” “저, 정말?” “만약의 이야기라니까.” “아! 그래서 코우 오빠랑 안 만나는구나.” “만ㆍ약ㆍ에! 그리고 코우 오빠 문제는 이거랑 별개의 문제고!” “아, 그래? 만약이란 말이지. 만약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여자라면 어떡할래?” “응? 으응, 응원?” “고마워. 그럼 그게 최선이 아닐까?” “음.” .. (144∼146쪽)
만화책 《푸른 꽃》을 이루는 주인공 둘이 이야기를 나눕니다. 둘은 어릴 적 단짝동무입니다. 서로 열 해 만에 만났는데, 단짝동무 하나가 다른 단짝동무한테 ‘여자 선배를 좋아한다’고 털어놓습니다. 이 말을 들은 다른 단짝동무는 어떡해야 좋을까를 한참 생각하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혼자서는 풀이법을 찾지 못합니다. 학교에서 나란히 앉는 옆 동무한테 물어 봅니다. 스스로 풀이법을 찾지 못하기에 옆 동무한테 도움을 바랍니다. 옆 동무 또한 마땅한 풀이법이 없습니다. 그러나 풀이법이 없으면 없는 대로 스스럼없이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사랑이란 늘 뾰족하고 또렷한 풀이법이 있지는 않으니까요. 다가오는 대로 부딪히면서 딱지가 나고, 밀려오는 대로 부대끼면서 새살이 돋으니까요.
마땅한 노릇이지만, 사랑이라는 이름이든 우정이라는 이름이든 믿음이라는 이름이든, 늘 반갑고 기쁘고 고마운 일만 생기지 않습니다. 언제나 슬프고 괴롭고 어려운 일이 함께 생깁니다. 반가울 때에는 반가운 대로 받아들이고 슬플 때에는 슬픈 대로 받아들이면서 단단해집니다. 기쁠 때에는 기쁜 대로 껴안고 괴로울 때에는 괴로운 대로 껴안으면서 부드러워집니다. 고마울 때에는 고마운 대로 함께하고 어려울 때에는 어려운 대로 함께하면서 아름다워집니다.
.. “아침에 날 바람 맞혔더라.” “아! 그게! 그건 그 …….” “나, 어떡해야 돼?” “……” “응원,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야 될까.” “……” “……” “음, 그냥 그대로?” “아! 그대로!” .. (152∼153쪽)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부대끼고 부딪히면서 아파하고 괴로워합니다. 아파하면서 자라고, 괴로워하면서 큽니다. 아파하면서 단맛과 함께 쓴맛이 있음을 느끼고, 단맛만 있지 않고 쓴맛이 있어서 좋은 사랑이요 삶이요 사람임을 깨닫습니다. 쓴맛이 있어 단맛이 좋음을 느끼고, 단맛이 있어 쓴맛이 닥칠 줄을 내다봅니다.
그리고 우리 어른들은 누구나 아이들이었습니다. 우리 스스로 어른이라는 자리에 서기까지 아이인 때를 거쳤고, 우리 또한 오늘날 아이들과 마찬가지로 갖가지 때와 곳에서 스스로 길을 찾느라 헤매고 떠돌고 갈팡질팡하면서 내 길을 붙잡았습니다.
어쩌면 어른이라는 옷을 걸치고 있지만, 속내는 예전과 다름없이 아이인지 모릅니다. 우리보다 나이든 어른 또한 웃어른이라 하지만 우리와 마찬가지로 아이인지 모릅니다. 웃어른이라고 더 세상을 부대끼거나 겪으며 단맛 쓴맛을 고루 안다고 하기 힘듭니다. 아이라고 덜 세상을 부대꼈거나 겪었다고 하기 어렵습니다.
우리는 아이이든 어른이든 똑같은 사람으로서 세상을 부대끼거나 겪습니다. 똑같은 사람으로서 사랑을 만나고 어루만집니다. 똑같은 사람으로서 손을 내밀고 맞잡으며 쓰다듬습니다.
.. “후미, 아까부터 얼굴이 빨개.” “진짜? 그렇게 빨개?” “혹시 야한 생각하고 있었던 거 아냐?” “아냐!” “농담이야. 얼굴 빨간 건 진짜야.” …… 너무나도 작은 그 꽃은 너무나도 작아서 바로 곁에 있지만 알지 못하는, 어떻게 다뤄야 할지 모르는 그런 꽃 .. (186∼187쪽)
여자가 여자를 좋아한다고 고운 삶이지만은 않습니다. 여자가 남자를 좋아한다고 고운 삶이기만 하지 않습니다. 여자가 여자를 좋아하든, 여자가 남자를 좋아하든, 남자가 남자를 좋아하든, 남자가 여자를 좋아하든, 서로를 달뜨게 하며 기쁘게 하는 마음결이란 ‘사람이 사람을 좋아하는’ 모습일 때일 테니까요.
만화책 《푸른 꽃》은 내가 한 사람으로서 다른 한 사람한테서 아름답고 보드라운 넋을 느끼면서 좋아하는 마음을 삭트는 푸르고 풋풋한 고등학생 아이들 삶을 그려냅니다. 이러한 사랑과 믿음과 어울림은 이 만화에서 드러나듯 ‘여자가 여자를 좋아하는 고운 삶’으로 보여질 수 있고, 또다른 모습으로 그려질 수 있습니다.
호미를 쥐고 밭뙈기를 일구는 땀방울에서 ‘사람이 사람을 좋아하는 고운 삶’이 드러날 수 있습니다. 자전거 페달을 힘차게 밟으며 흘리는 땀방울에서 이 마음자락이 나타날 수 있습니다. 헌책방 책시렁을 조용히 헤아리면서 내 손길이 새롭게 탈 좋은 책 하나 찾는 땀방울에서 이 마음밭이 샘솟을 수 있습니다.
사랑이란 우리 둘레 어디에나 있으며, 사랑이란 우리 마음속 깊은 자리이든 얕은 자리이든 노상 머물고 있는 가운데, 사랑이란 우리 터전과 자연과 뭇목숨 어느 한켠에 고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어느 때 어느 곳에서 이러한 사랑을 느끼느냐요, 언제 어떻게 이와 같은 사랑한테 손을 내밀며 뜨거워지느냐입니다. (4343.2.15.달.ㅎㄲㅅ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