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잡지는 알라딘에서 안 파는가 보다. 정기구독만 받는가?)


 ‘비장애인’은 ‘장애인’ 이야기책을 참 안 읽는다
 [애 아빠가 오늘 읽은 책 4] 장애ㆍ비장애 아우르는 잡지 《함께 웃는 날》



 지난 토요일에 인천에서 서울 군자역까지 전철을 타고 갑니다. 서울사람한테 군자역은 가까운 동네일는지 아닐는지 모르겠는데, 인천에서 전철을 타고 가는 길은 까마득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길을 날마다 전철로 오가며 일터나 학교에 몸담는 분이 제법 있습니다. 날마다 지옥철에 시달리고, 언제나 고단함에 절고 저는 삶이라 할 텐데, 체력이 대단하든 견디는 힘이 대단하든 놀라운 모습이 아닌가 싶습니다.

 동인천역에서 빠른전철을 타고 아침 일찍 길을 나섭니다. 몸이 안 좋은 옆지기가 자연건강회 강의를 들어야 한다고 해서 찾아가는 길입니다. 생채식을 하려 했지만 남편이 갑작스레 서울로 일을 나가면서 아무것도 못하느라 힘에 겨운 옆지기는, 익히 책으로 읽고 스스로 알아보고 해 왔기에 잘 알고 있는 이야기가 되풀이되지만, 그래도 한번 가서 들으면 다르다고 여깁니다.

 맞는 말이지요. 지식으로 갖출 때하고 몸으로 받아들일 때는 다르니까요. 또한, 같은 길을 걷는 이웃이나 동무를 만나 이야기를 나눌 수 있고요.

 전철이 부평을 지날 무렵 길손이 부쩍 늡니다. 토요일 아침이지만 일하러 가는 분이 퍽 많은 듯합니다. 이런 아침에 전철을 타고픈 마음이 없으나 아홉 시까지 맞춰서 가야 하는 길입니다. 저는 주말이나마 지옥철에 안 시달리고 싶어 더없이 괴롭지만, 이만한 괴로움이란 참아야지 하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누구보다도 아기가 고달플 테지요. 이틀째 똥을 못 누는 아기한테는 집에서 느긋하게 쉬거나 놀지 못하게 하는 엄마 아빠가 싫을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이 녀석은 ‘오랜만에(?) 전철을 타서’ 재미있는지 소리치고 웃고 뜁니다. 참 용하구나 싶고, 아기라서 다른가 싶습니다. 아기는 스스로 많이 졸립고 힘들어도 둘레에 사람들이 있으면 같이 놀자며 눈자위가 벌개져 있어도 안 자려고 버팁니다.

 이렇게 아기를 어르고 같이 놀고 토닥이고 있는데, 어느 아주머니가 “옆으로 붙어 앉으면 한 사람 앉을 수 있을 텐데?” 하고 이야기합니다. 소리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아주머니를 바라보며, “여기는 아기 자리입니다.” 하고 조용히 말씀드립니다. 아기가 몸피가 작다지만, 틀림없이 아기 하나와 아기 엄마하고 아빠하고 한 자리씩 차지하고 앉았으니까요.

 제가 앉은 자리라도 내어 드리고 싶지만, 아기하고 이렇게 움직일 때에는 저도 되도록 자리에 앉아 있으려고 합니다. 아기한테 젖을 물릴 때에는 ‘아기 엄마는 한 자리만 차지하고 앉으면 젖을 물리기 몹시 힘듭’니다. 두 자리를 차지하면서 아기를 가슴에 안은 채로 반쯤 양반다리를 하며 아기를 받치고 있어야 하거든요. 이런 매무새로 십 분 남짓 있어야 하니 아기한테 젖을 물리는 엄마는 누구나 다리가 저리기 마련이고, 이때 옆에서 아기 아빠가 ‘다리 저린 애 엄마’를 거들거나 아빠 허벅지에 아기 머리를 올려놓으면서 다리풀기를 도와주어야 합니다. 아주머님께서 다리쉼을 하고프신 마음은 알지만, 어른은 조금 서서 가더라도 갓난아기를 세울 수는 없는 노릇이요, 갓난아기를 돌보는 엄마한테 좀더 마음을 쏟을밖에 없는 노릇입니다. 그렇지만, 나이든 분들 가운데에는 “거, 애는 엄마가 무릎에 앉히고 있으면 되지, 왜 두 자리나 차지하고 있어?” 하면서 불뚝 성을 내는 분이 많습니다. 이런 소리를 더 듣고 싶지 않아 우리 세 식구는 ‘노약자영유아보호자동반자석’이라는 이름이 길게 붙은 자리에 앉지 않으나, 사람들은 앉는 자리에 ‘영유아’뿐 아니라 ‘보호자가 동반해서 앉아’ 있으며 아이들을 돌보아야 하는 줄을 까맣게 잊습니다. 당신 스스로 갓난아기를 돌보지 않으니까 모르고, 아주머니와 할머니 들은 지난달 당신이 갓난아기를 돌보며 얼마나 고되고 벅차 했는지를 떠올리지 못합니다.


.. (장애아이) 누리가 시켜 준 특별수업의 가장 큰 수혜자는 가족들일 것이다. 나나 남편 모두 누리를 키우면서 이해의 폭이 넓어지고 평범한 아이인 나래를 대하는 것도 한결 느긋해졌다. 어느 날 갑자기 장애를 가진 아이의 부모가 되었다는 사실이 처음엔 받아들이기 고통스러웠지만, 그냥 부모 노릇 자체로만 놓고 본다면 어느 한쪽이 더 어렵다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누리를 키워 보지 않았다면 평범하게 태어난 나래에게 새삼 고마움을 느낄 일도 별로 없었을 거고, 누리보다 훨씬 복잡한 욕망과 감정이 있고, 그래서 더 괴로울 수도 있다는 사실을 담담히 받아들이기 어려웠을 것 같다 ..  (6권 8∼9쪽)


 자연건강회 강의는 아침 아홉 시부터 저녁 일곱 시를 넘길 때까지 이어집니다. 아기는 그럭저럭 견디면서 엄마젖 물고 두 번 잠들어 줍니다. 낮에는 한 번 똥을 푸지게 누기도 합니다. 강의를 듣는 틈틈이 오줌기저귀와 바지를 빨아서 걸상에 걸치고 말립니다. 종이기저귀를 쓴다면 이렇게 번거롭지 않겠지만, 조금 번거롭더라도 종이기저귀를 쓰고픈 마음은 조금도 없습니다.

 하기는. 하루일을 마치고 축 늘어진 몸으로 다시금 지옥철에 시달리며 인천으로 돌아와서 하루 내 밀린 빨래를 하고 있으면 ‘오늘 저녁 새로 쌀과 곡식 씻어서 불려 놓는 일’이 까마득하다고 느끼는 가운데, 마룻바닥과 방바닥은 또 언제 닦고, 내 글쓰기는 어떻게 하느냐는 생각이 듭니다. 돈을 벌려고 하는 일은 아니었지만, 뜻있는 일을 하면서 돈을 번다 하여도 이렇게 몸이 지쳐 버리면 내 마음 또한 지쳐서 뒤틀려 버리지 않을까 걱정스럽습니다. 





 오늘 아침 전철길에서도 새삼 느끼는데, 비오는 날 전철길은 맑은 날 전철길과 견주어 몇 곱으로 고달픕니다. 우산을 든 사람들이 오징어떡처럼 밀리고 깔릴 때에는 옆사람 우산이 내 옷이나 몸에 착 붙으며 ‘비를 안 맞았어도 몸은 빗물에 젖어’들고 맙니다. 그렇다고 이리 밀리고 저리 치이는 사람이 바닥에 우산을 내려놓을 수 없으며, 짐칸에 올려놓을 수도 없습니다. 더욱이, 오늘은 다른 사람은 아랑곳하지 않으며 당신 자리만 넓히면 그만이라는 아저씨가 한 사람 옆에 서는 바람에 훨씬 고달픕니다. 그 옆으로 서며 제 가방을 미는 아가씨는 당신 자리가 퍽 널찍하지만 당신 자리를 조금 줄이며 옆에 찡긴 사람한테 마음을 써 주지 못합니다. 제 오른쪽에 선 아가씨 둘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모두들 서로서로 너무 힘들고 고달픈 나머지 당신 몸 하나만 돌볼 뿐이요, 당신들이 고달프고 짜증나 하듯 옆사람 누구나 고달프고 짜증나게 느끼는가는 깨닫지 못합니다.


.. 지금 한창 기대를 안고 열심히 치료나 학습을 하고 있는 후배 엄마들이 듣고서 섭섭하라고 하는 얘기가 아니라, 사실 소통 능력이나 사회성은 청년이 되어서도 제한적인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데 꼭 세상 잣대에 맞게 고쳐야 하나, 그냥 그대로 받아 주면 안 되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 아이의 문제보다는 그걸 인정하고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는 사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 나는 내 아이를 가르쳤지, 치료하지 않았다. 나는 지금도 아이를 아픈 아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 아이들의 장애를 극복의 대상이 아닌 아이의 개성으로 보자. 아이의 부족한 면만을 보지 말고 장점을 보자. 어떻게 하면 아이를 사회에 적응시킬 수 있을까에 초점을 두지 말고, 어떻게 하면 아이가 행복해질 수 있을까라는 관점에서 아이를 보자 ..  (6권 27, 36쪽)


 왼쪽 오른쪽 앞뒤로 밀리고 찡기는 가운데 책 하나를 손에서 놓지 않습니다. 아니, 이렇게 찡기기 때문에 더더욱 책을 놓을 수 없습니다. 그나마 책을 펼쳐 앞사람 입김을 막을 수 있으며, 겨우겨우 한 줄 두 줄 읽는 가운데 마음을 가다듬어 봅니다. ‘하나라도 더 깨달은 사람이 좀더 이웃한테 마음을 쓰자’는 아닙니다. ‘한 줄이라도 더 읽은 놈이 더욱더 이웃 아픔을 느껴 보자’ 또한 아닙니다. 그저 이 고단함을 잊고 싶습니다. 책에 빨려드는 내 마음은, 바로 이곳에서 몸뚱이가 아프고 괴로운 내가 마치 어디에도 없는 듯 느끼고 싶습니다.

 마침 오늘은 《함께 웃는 날》이라는 잡지를 집어들었습니다. 6호부터 정기구독료를 새로 내야 하는데 깜빡 잊고 아직 안 보내고 있는데, 출판사에서는 고맙게도 6호를 먼저 보내 주었습니다. 오늘 저녁 집으로 돌아가면 얼른 한 해치 책값을 부쳐야겠습니다.

 《함께 웃는 날》이라는 잡지는 대안교육을 이야기하는 《민들레》라는 잡지에서 함께 엮고 있습니다. 《함께 웃는 날》은 ‘장애와 비장애를 넘나드는 이야기’를 담아내고 있습니다. 이 잡지를 정기구독할 때에도 느꼈지만, 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 같은 모임이 있기는 있어도, 장애인 이야기를 다루는 매체는 아주 드물고, 이런 매체에서 소식지나 책을 펴냈을 때에 제대로 알아보면서 장만하고 읽고 삭이면서 우리 스스로 우리 삶을 고쳐 나가는 사람이 대단히 드뭅니다.

 우리 나라에서 어느 ‘힘없고 권리 앗긴 사람들’ 목소리가 낮을 뿐 아니라 막대접과 푸대접이 아니겠느냐마는, ‘장애인 이야기를 다루는 잡지와 책’은 그야말로 아무런 대접을 못 받습니다. 장애 있는 아이를 키우는 어버이 스스로도, 장애 있는 사람 스스로도, 장애 없는 사람 어느 누구도, ‘장애인 이야기를 다루는 잡지와 책’은 들여다보지 않기 일쑤입니다. ‘내 일’이 되기까지는 그야말로 모르쇠입니다. 나 스스로 다치거나 망가지거나 내 식구나 동무가 다치거나 망가지지 않는다면 장애인 이야기이든 권리이든 삶이든 들여다보지 않습니다. 따로 장애가 없다지만, 비장애인한테 계단이나 거님길 턱이나 건널목이나 지하도나 숱한 교통시설과 문화시설이 ‘우리 누구나 얼마나 쓰기 좋도록 마련되어 있는지’를 돌아보지 않습니다.


.. “장애인이라고 무시당할까 봐 걱정하지는 않으세요?” “별로 걱정 안 해요. 설사 상대가 저를 무시하는 일이 보이더라도, 저도 같이 그 사람을 무시해 버리면 되니까요. 비장애인도 잘 보면 어떤 종류의 장애든 조금씩 갖고 있다고 생각해요. 절 무시하면 저도 그 사람을 무시해 버리죠.” ..  (6권 70쪽)


 《다르게 보는 아이들》 같은 책이나 《나는 아들에게서 세상을 배웠다》 같은 책은, 몸소 장애가 있거나 식구 가운데 장애 있는 사람만 읽을 책이라고 여기고 있습니다. 우리 나라에 장애인이 1/10이라고 하지만, 한두 다리 거치면 내 이웃이나 동무나 피붙이 가운데 장애인이 없는 사람이 없을 테지만, 우리 스스로 내 이웃이나 동무나 피붙이를 좀더 살뜰히 들여다보고 어깨동무하는 길을 담아내는 책을 우리 스스로 참 안 찾고 안 읽습니다. 아이들한테 학습지 안 사 주는 어버이 없고, 아이들한테 교과서와 문제집 안 읽히는 교사는 없으나, 아이들한테 삶다운 삶을 보여주는 어버이는 꽤 드뭅니다. 아이들한테 책다운 책을 읽히려는 교사 또한 더없이 드뭅니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 책다운 책하고 동떨어진 길을 걷습니다. 우리는 우리 손으로 삶다운 삶을 저버리는 쪽으로 뻗어나갑니다. 우리는 우리 두 다리로 우리가 사랑할 터전을 밟고 일구고 가꾸는 길로 걸어가려 하지 않습니다. (4342.9.21.달.ㅎㄲㅅㄱ)


 ┌ 함께 웃는 날 : ‘민들레’ 엮고 펴냄
 └ 한 해 구독 : 24000원 (http://mindle.org), 02-322-1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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