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쉿, 조용히! - 풋내기 사서의 좌충우돌 도서관 일기
스콧 더글러스 지음, 박수연 옮김 / 부키 / 2009년 6월
평점 :
절판
풋, 도서관 사서가 땡땡이치며 글을 썼구나
[애 아빠가 오늘 읽은 책 3] 스콧 더글러스, 《쉿, 조용히!》
오늘은 여느 때보다 조금 일찍, 십 분 남짓 앞당겨 집에서 길을 나섭니다. 일곱 시 십 분이 될 무렵 가방을 메고 나오는데, 아까부터 깨어 있던 아기가 아빠한테 와서 안깁니다. 어쩌는 수 없이 아기를 안고 엉덩이를 토닥이다가는 옆지기한테 넘겨주려고 하는데, 아기가 엄마 얼굴을 안 보고 홱 고개를 돌립니다. 아빠한테서 떨어지기 싫다는 뜻입니다. 아침에 아기가 자고 있을 때 길을 나서야 하는데, 그만 깨고 말아 어쩔 수 없는 노릇입니다. 조금 더 어르며 안고 있다가 살그머니 엄마한테 넘겨줍니다. 아직 졸음기가 있으나 뚱한 얼굴입니다. 아까 깨어났을 때에는 씻는방에서 빨래를 몇 점 했는데, 아기는 빨래하는 아빠 옆에 바싹 붙어 쭈그려앉은 채 말끄러미 비빔질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러더니 빨래를 헹구려고 작은 대야에 담은 물에 제 조그마한 손을 담그더니 얼굴에 묻힙니다. 제 손으로 낯을 씻겠다는 소리입니다.
“헤!” 하면서 입을 벌리고 혀를 살짝 내미는 모양이 재미있습니다. 아빠가 헹굼질을 끝낼 때까지 아기는 옆에서 낯을 씻는 시늉입니다. 아직 낯씻기를 제대로 하지 못할밖에 없으니, 아빠가 큰손으로 목덜미와 겨드랑이까지 씻겨 줍니다. 아기는 얌전하게 가만히 있습니다. 이렇게 아빠가 씻겨 주던 하루하루를 아기는 오래도록 마음으로 받아들이면서 이 손길이 무엇이었다고 떠올릴 수 있을까요.
엄마 품에 안겨 손을 흔드는 아기를 따라, 차츰 멀어지는 아빠도 왼손을 머리 위로 길게 뻗친 채 골목이 끝나는 데에까지 흔듭니다. 골목 안쪽으로 아빠가 사라진 다음에도 아기는 손을 흔들고 있었을까요. 다시 칭얼거렸을까요. 그러다가 엄마젖을 물고 밀린 잠을 마저 자려고 할까요.
걸음을 재촉하며 걷다가 아침햇살을 받고 있는 분꽃과 나팔꽃을 그냥 지나칠 수 없어 사진 두 장 찍어 놓습니다. 아침 또는 새벽에 나팔꽃을 사진으로 담을 때면 언제나 ‘모닝글로리’라는 문구회사가 떠오릅니다. 저는 중학교 1학년(1988년)이었을 때부터 이 회사 공책을 썼는데, 이때에는 영어를 처음 배우던 때라 ‘모닝글로리’가 ‘나팔꽃’을 가리키는 줄을 교과서에 나와 있지 않아도 배우면서 재미있어 했습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토박이말로 이름을 붙인 ‘바른손’팬시 이름도 참 좋다고 생각했습니다. 다만, 아직 철이 덜 들던 때라 ‘바른손’ 다음에 ‘팬시’라고 붙인 대목을 깊이 헤아리지 못했으며, ‘모닝글로리’라는 곳이 왜 ‘나팔꽃’이라는 좋은 이름을 안 쓰려 했는지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 뒤로 열 해쯤 지나 국제통화기금 일이 터질 무렵 ‘모닝글로리’는 회사이름이 영어로 되어 있어 나라안 회사가 아닌 나라밖 회사인 줄 사람들이 잘못 알고 몹시 힘들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러면 이 회사가 이름을 토박이말로 바꾸려나? 다른 회사는 하나같이 영어로 이름을 바꾸지만, 이 회사는 토박이말로 이름을 바꾸며 새로운 모습을 보여주려나?’ 하고 꿈을 꾸었는데, 모닝글로니는 그예 모닝글로리로 남았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영어로 지은 회사이름을 모조리 잊어버렸습니다.
이른아침부터 학교 가는 발걸음이 바쁜 아이들을 돌아봅니다. 동인천역에 들어서니, 지하상가 철거에 반대하는 분들이 쳐 놓은 천막이 보입니다. 이곳에서 오랫동안 장사한 분들이 한뎃잠을 자며 버티고 있으나, 시에서는 딱히 어떤 대책이나 이야기가 들려오지 않습니다. 동인천역 건물에 깃들던 다른 가게는 모두 나간 지 오래이고, 동인천역 건물 바깥은 ‘공사중’을 알리는 커다란 그물을 몇 해 동안 그대로 뒤집어쓰고 있습니다.
표를 끊고 타는곳에 들어섭니다. 여느 날보다 십 분 남짓 일찍 집에서 나오니 전철을 탈 때에 앉을 자리가 납니다. 제가 타는 전철역은 인천 맨끝이라 그럴 테지만, 맨끝 역이라 해도 7시 32분 차를 타면 자리를 얻기 아주 힘듭니다. ‘앞으로는 오늘보다 5분 더 일찍 나와 볼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모처럼 느긋하게 앉아서 책을 읽겠구나 생각했으나, 제 옆에 앉는 양복쟁이 남자 어른은 팔짱을 낀 채 자려고 해 제 옆구리를 찌르고 아주머니 또한 팔짱을 끼고 몸을 부풀리며 앉느라 오늘도 여러모로 고달픈 출근길이 됩니다. 어느 누가 전철길에 고달프지 않으랴만, 스스로 고달프다고 느낄 때에는 다른 이도 고달플 터이니 다리 벌리기나 팔짱 끼며 ‘내 자리 더 넓히기’는 안 해 주면 좋으련만.
.. 지난달 우리는 폐관을 위한 행사를 기획했다. 지역사회 주민들이 거의 오십 년 동안 배우고, 읽고, 사랑하게 된 이 작은 건물에 대한 기억을 공유하고픈 사람들이 모일 수 있는 기회였다. 나이든 이용자들은 이 도서관 이름이 된 초대 사서를 개인적으로 어떻게 알게 되었는지 이야기했고, 십대들은 자신들이 첫 걸음마를 겨우 뗄 무렵 동화 낭독을 들으러 왔던 기억을 공유했다. 누구나 추억이라는 이름의 이야기를 하나쯤 품고 있었다. 그 한 달 내내 모든 기억들이 모였다. 누구도 도서관이 문을 닫게 된다는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다들 떠올리고 싶어 하지 않았다. 모두가 사실을 담담하게 받아들였다. 더 나아지기 위한 폐관이라는 것을 모두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이 건물은 그들만의 도서관이었다. 와서 배우고 성장한 그들만의 공간이었다. 그 공간이 지금 없어지려고 하는 것이다 .. (198쪽)
신길역에서 갈아타고 서대문역에서 내립니다. 오늘도 여느 날과 다름없이 사람들이 붐빕니다. 그리고, 이렇게 붐비는 사람 가운데 자동계단 아닌 돌계단을 타고 오르려는 사람은 보이지 않습니다. 어쩌다가 한 사람쯤 돌계단을 밟고 올라가는데, 서대문역쯤 되는 깊이라면 모두들 ‘걷지 않으려’고 합니다.
서대문역이나 이대역이나 신금호역 같은 곳은 계단이 깊기도 깊다 하지만, 장애인이 아닌 사람이라면 이만한 계단은 그리 힘들지 않습니다. 걸을 만합니다. 그리고, 이만큼은 걸어 주어야 하지 않느냐 싶습니다. 도시에서 살아가는 숱한 회사원과 학생들이 ‘하루 동안 걸을 일’이 참 드물거든요. 밥을 먹어 몸에 기운을 얻으며 살아가는 우리들이라지만, 정작 몸을 움직이며 살아 있음을 느끼고 서로 어울리는 일이란 퍽 드물거든요. 운동이 모자라 헬스클럽을 다닌다든지 주말에 어디를 다닌다든지 하는 일도 나쁘지 않으나, 여느 때에 두 다리로 걷고 계단도 성큼성큼 디딜 수 있으면 그리 걱정되지 않습니다. 집에서 세탁기를 돌려도 그릇되지는 않으나, 웬만한 빨래는 손으로 빨고 걸레도 손으로 빨아서 무릎 꿇고 방다닥을 슥슥 문질러 훔치면 운동이 모자랄 일이 없습니다. 아이를 키우면 아이하고 신나게 놀고, 아이가 많이 자라 어린이나 젊은이가 되었다 하더라도 함께 어울리는 자리를 꾸준히 마련하면서 어깨동무하면서 나들이를 다니고 한다면, 이 또한 운동이 모자랄 까닭이 없습니다.
.. 도서관을 만드는 것은 사람들이다. 이용자들이 도서관을 도서관답게 만든다. 그들이 없으면 신성함도 사라진다. 그저 책이 있는 건물에 불과하다 … 이삿짐 센터 사람들은 짐을 함부로 다뤘다. 도서관 안에는 한 번도 들어와 본 적이 없는 막노동꾼들 같았다. 그들은 책을 다룰 줄 몰랐다. 그들은 책을 상자에 넣기 위해서 함부로 던지고 책에 낙서를 했다 … 그동안 본 적도 없는 백인들이 양복을 말쑥하게 차려입고 와서 관심 있는 척하고 있었다. 나는 시장을 바라봤다. 그의 입은 움직이고 있었지만 그 입에서 나오는 말들은 정치 선전에 불과했다. 그는 한 번도 도서관에 온 적이 없었다. 물론 이 남자를 위해 도서관이 필요한 건 아니다. 그는 읽어야 할 책이 있다면 다른 도시에서 사다가 읽을 것이다. 그는 이 도서관에서 수 킬로미터 떨어진, 이 도시의 부촌에 있는 대저택에 살고 있다 .. (210, 214쪽)
오늘 아침은 여느 날보다 조금 일찍 길을 나섰지만, 새벽 여섯 시 사십 분에 깨어나는 바람에 밥을 못했습니다. 전철역 앞에서 김밥 파는 아주머니한테서 김밥 석 줄을 삽니다. 3900원입니다. 김밥을 가방에 넣습니다. 일하러 나온 길에 읽은 책도 가방에 넣습니다. 그제와 어제와 오늘 아침까지 해서 즐겁게 읽은 책은 이제 마감합니다.
도서관에서 사서로 일하며 보고 듣고 겪은 이야기를 꾸밈없이 적어내려간 《쉿, 조용히!》라는 책인데, “도서관 사서가 들려주는 도서관 이야기”라기보다는, “도서관에서 일한 수수한 한 사람이 내 삶과 이웃 삶을 돌아본 발자취”라는 느낌이 짙습니다. 도서관 공무원으로 있으며 ‘용케 땡땡이 잘 치며 글도 재미나게 썼네?’ 하는 느낌이 듭니다. 그러나 이렇게 ‘도서관에서 일할 때에 일 안 하고 도서관 이야기를 글로 쓴’ 모습이 밉지 않습니다. 도서관에 책손이 뜸하며 조용할 때에는 도서관 사서라 하더라도 책에 앉은 먼지를 털거나 책만 읽기보다는, 이러한 짬에 스스로 내 삶 이야기를 적바림한다면 더없이 즐겁기도 하고 아름답기도 할 수 있으니까요.
생각을 열려고 하면 눈길이 열리고, 마음을 열려고 하면 따순 손길을 두루 뻗칠 수 있겠지요. 눈길을 열면서 우리 둘레 삶터를 한결 넉넉하게 바라보면서 글 한 줄로 담아낼 수 있고, 따순 손길을 두루 뻗치면서 좀더 사랑스러운 말 한 마디를 나눌 수 있겠지요. 우리 나라 도서관 사서로 일하는 공무원이 이야기책을 하나 쓴다면 어떤 모양새가 될까 궁금합니다. 아니, 우리 나라 도서관 사서로 일하는 공무원들은 땡땡이를 칠 때에 무엇을 할는지 궁금합니다. (4342.9.17.나무.ㅎㄲㅅㄱ)
┌ 《쉿, 조용히!》(스콧 더글러스 씀,박수연 옮김/부키,2009)
└ 책값 : 135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