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늘 속을 걷다 우리 시대 젊은 만인보 2
김담 지음 / 텍스트 / 2009년 3월
평점 :
품절


 



 ‘위인전’ 아닌 ‘살아온 이야기’ 한 자락
 [잠깐 읽기 33] 김담, 《그늘 속을 걷다》



- 책이름 : 그늘 속을 걷다
- 글 : 김담
- 펴낸곳 : 텍스트 (2009.3.30.)
- 책값 : 9000원



 (1) 그늘 자리에서 살아온 길


 ‘책이야기를 하는 잡지’ 〈텍스트〉가 있습니다. 띄엄띄엄 나오고 있으나 아무런 사람줄과 학교줄과 돈줄에 얽매이지 않고 오로지 ‘책이야기만 꾸밈없이 수수하게’ 펼치는 작은 매체입니다. 이 잡지를 정기구독 하고 있었는데 어느 날부터 집에 오지 않았습니다. 무슨 일이 생겼나 알쏭달쏭했는데, 이태쯤 지나고 나서 이야기를 들으니, 일터에 도둑이 들어 정기구독자 주소가 든 셈틀을 훔쳐 가는 바람에 보내 줄 수 없었다고 합니다.

 조그마한 출판사에까지 들어가는 도둑이라면 먹고살기가 얼마나 어려운 사람이었을까 궁금한데, 그 조그마한 출판사에서 훔칠 만한 물건은 아무래도 셈틀이었는가 봅니다. 그런데 조그마한 출판사로서도 그 셈틀이야말로 둘도 없는 재산입니다. 셈틀이 비싸고 값싸고를 떠나, 출판사 한 곳을 꾸리며 이루어 온 모든 자료가 깃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 4월 초에 전학했을 때 내가 받은 반 번호가 67번이었지만 그 뒤로도 쉬지 않고 전학생들이 들어왔다. 전학을 오는 반 동무들의 고향도 경향 각지였으나 무슨 이유로 전학을 왔는지는 다들 뚜렷하게 밝히지 않았다. 월요일 애국조회라도 할라치면 사람멀미가 났다. 지루한 조회가 끝나고 각자 자기 반으로 향하는 행렬은 처음과 끝을 가늠할 수 없을 지경으로 길디길었고 운동장에는 온통 흙먼지가 보얗게 일어났다 ..  (13∼14쪽)


 ‘책이야기를 하는 잡지’ 〈텍스트〉에서 올 3월에 낱권책 세 권을 한꺼번에 펴냈습니다. 곧 두 번째로 세 권을 더 펴낸다 하고, 앞으로도 세 권씩 꾸준하게 펴낸다 합니다. 이참에 나온 세 권과 다음참에 나올 세 권, 또 앞으로 꾸준히 세 권씩 나올 낱권책은 “우리 시대 젊은 만인보”라는 이름이 붙습니다. 쪽수로 치면 200쪽 안팎이고 책값은 모두 9000원입니다. 주머니에 쏙 들어가는 판크기는 아니지만, 단출하게 들고 다닐 만큼 가볍고 수수하게 엮는 손바닥책이라 할 수 있습니다. 1권은 《신호등 건너기 게임》(신민영 글)이라는 이름이 붙고, 2권은 《그늘 속을 걷다》(김담 글)라는 이름이 붙으며, 3권은 《키보드워리어 전투일지 2000-2009》(한윤형 글)라는 이름이 붙습니다. 이 가운데 둘째 책을 골라서 읽습니다.

 책끝에는 ‘릴레이 인터뷰’가 퍽 길게 실립니다. “우리 시대 젊은 만인보”를 쓰는 젊은 글쓴이들이 서로가 서로를 만나 이야기를 나누는 자리입니다. 2권 《그늘 속을 걷다》에는, 1권을 낸 신민영 님이 2권을 낸 김담 님을 만나서 나눈 이야기가 실립니다. 이 자리에서 김담 님은 “이제는 돈이 먼저가 되는 거죠. 아이를 위해서 돈을 벌기 시작했던 게 전도돼 버린 현상들이 생기잖아요. 돈을 버는 목적을 잊어버리고, 돈이 신이 된 거죠. 아이를 위해서 돈을 벌기 시작한 건데, 돈을 벌다 보니까 피곤해져서 아이에게 짜증을 내요 … 옛날에는 사람이 돈을 썼는데, 지금은 돈이 사람을 쓰죠.(190쪽)” 하고 이야기합니다.

 그늘 속을 걸었다는 김담 님 이야기에다가, 요즈음 사람들 살림살이를 짚은 한 마디를 곱씹으면서, 어쩌면 앞으로도 이 굴레는 걷히지 않겠다는 느낌이 듭니다. 아이를 생각해서 버는 돈이 아니요, 나를 생각해서 버는 돈이 아니며, 식구와 동무를 생각하며 버는 돈이 아닌 오늘날 삶이 그예 굳어 버리면서, 우리 마음과 넋과 살림새마저 딱딱하고 메마르게 굳어 버리지 않을까 싶습니다.


.. 시골에서는 할머니가 참빗으로 아침마다 물을 묻혀 착착 머리카락을 빗겨 손질해 주었으나 도시로 이주한 뒤로는 그런 알뜰한 손길을 기대하는 것조차 어려웠을 뿐만 아니라, 이제는 끼니마저 직접 챙기고, 때로는 밥까지 지어야 했다 ..  (25쪽)


 김담 님 말마디는 이어집니다. “도시에서는 공부를 안 하고 건들거리면서 놀아도 일단 보고 듣는 게 있고 즐길 만한 문화가 있죠. 하지만 여기는 아무것도 없어요. 집에 와서 하는 거라곤 기껏 게임밖에 없어요.(197쪽)”

 곰곰이 생각해 봅니다. ‘도시’라고 했지만, 낱말을 ‘서울이나 부산’쯤으로 고쳐써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또는 ‘서울’이나 ‘서울처럼 큰 도시’나 ‘서울과 부산 같은 도시’라고 해야 옳다고 느낍니다.

 틀림없이 ‘작은 도시’에도 즐길거리나 놀이거리가 있기는 있습니다. 작은 극장이 있는 읍이나 군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와 같은 읍이나 군은 도심지라는 곳이 아주 짧아 몇 분 거닐면 끝입니다.

 제가 태어나 사는 인천을 떠올려 봅니다. 서울사람은 인천에 오면 ‘갈 데가 없’고 ‘할 일이 없’으며 ‘즐길 놀이가 없’다고 입을 모읍니다. 저야 골목마실을 하고 책방마실을 하지만, 인천에 남아 있는 책방 숫자는 새책방과 헌책방을 통틀어 열 몇 곳밖에 안 됩니다. 아예 없는 동조차 있습니다. 연수동이나 관교동이나 송도 같은 데에는 오로지 아파트뿐이요, 뭔가 사람이 갈 만하다 싶게 만든 자리에는 오로지 술집이 그득차 있습니다. 가느니 술집이요 하느니 술마시기입니다. 이름이 도시일 뿐이라 사람이 더 많아 술집 또한 좀더 많이 있을 뿐이라고 할까요. 공연문화든 출판문화든, 공연예술이든 출판예술이든 하나도 없다 하여 틀린 말이 아닙니다. 지역 문화재단이 있고, 지역문화 활동가가 있으며, 저 또한 지역문화를 한몫 맡는다는 소리를 듣지만, 언제나 고개를 갸우뚱하곤 합니다. 너나 없이 서울로 빠져나가는 곳에 어떤 ‘지역’과 ‘문화’가 있겠느냐고. 새벽바람으로 일하러 서울로 빠져나가, 밤바람으로 잠만 자러 인천으로 돌아오는 판에, 이곳에 무슨 삶이 깃들겠느냐고.


.. 내가 다닌 여자중학교는 여자고등학교와 같은 재단 소속으로 교문을 함께 썼으며 중교 선도부 학생들이 교문 좌우로 벌리고 서서 등교하는 학생들을 감시, 적발하고 벌까지 내렸다. 아침 조회시간이면 무슨무슨 일을 하지 말라고 시작하여 종례 시간 또한 무슨무슨 일을 하지 말라고 끝냈으나 우리들은 교문만 벗어나면 그런 주의사항 같은 것은 까맣게 잊었다 … 고등학교 교복은 일본과 자매결연 맺은 일본 학교의 교복과 같았다. 청소시간이면 앞치마와 머릿수건을 반드시 써야 했으며 금지사항이며 주의사항을 외려 들면 숨이 가빴다. 소지품 검사 또한 예고 없이 불쑥 시행되는 일 가운데 하나였다. 책가방 속을 홀라당 털어 열어 보이는 일이 아무렇지도 않게 실시되었다. 소지품가방 속에 바늘쌈지, 손거울 등은 필수품이었다. 몸을 지켜야 한다는 순결주의의 강조는 순혈주의와 내통하고 있었다. 시나브로 현모양처의 여성상이 자리잡아 갔다 … 학교도 병영과 다를 바 없었으며 학급의 반장은 곧 담임선생님을 대리했다. 아무도 그것을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평등한 것이 어떠한 것인지 알지 못했다 … 북한도 사람 사는 곳이라고 일러 준 선생님은 아무도 없었다 ..  (34∼36, 41∼42, 72쪽)


 김담 님은 거듭 이야기합니다. “무엇보다 저는 시골을 떠나와 성남에서 적응하는 데 힘들었어요. 일단 마당이 없잖아요. 골목이 쭉 있고, 거기에 집들이 빽빽하게 들어서 있고. 아유, 숨이 안 막히나요?(204쪽)”

 가만히 생각에 잠깁니다. 옆지기는 우리 아이를 걱정해서라도 우리가 새로 얻어 살 집에는 ‘작더라도 마당이 있으면’ 좋겠다고 했습니다. 아무리 넓고 시설이 괜찮다 하여도 빌라 같은 데는 우리 삶하고 맞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옆지기 말이 아니더라도 우리 살림에 맞는 집을 알아보러 다니며 이 빌라 저 빌라에 들어가 보는데, 그곳에서 알뜰살뜰 살림 잘 꾸리는 분들이 많기는 하나, 하나같이 너무 어둡고 어수선했습니다. 3층이나 4층쯤 되면 햇살이 살짝 비추지만, 1층이나 2층은 한낮에도 집에서 불을 켜야 합니다. 인천은 그나마 반지하 집은 거의 없다 할 만하기는 한데, 반지하가 아님에도 한낮에 불을 켜야 한다면 사람이 사람다이 살기 어려운 데가 아닌가 싶습니다. 돈이 없으니 그런 데에서라도 살아야지 한다면 할 말이 없습니다. 그렇지만, 돈이 없으니 더더욱 사람다움을 찾거나 느끼면서 살 작은 방 한 칸을 얻어야 한다고 느낍니다. 햇볕 한 줌과 바람 한 점을 먹으면서 살 방 한 칸이 있어야 한다고 느낍니다.


.. 한완상 교수가 쓴 《민중과 지식인》을 통해 처음 민중이라는 낱말을 접했다. 알 수 없는 말이었다. 국가나 사회를 구성하는 일반 국민으로서 민중이라면 부모를 비롯하여 나 또한 민중일 테지만 쉽게 납득할 수 없는 낱말이었다. 계급과 계급의식 또한 그러했다. 아버지 직업란에 건설현장에서 날품을 파는 아버지의 직업을 ‘건설업’이라고 기재했던 기억은 또렷했다 … 선배들은 철학책을 권했지만 받아들이지 않았다. 일본어로 번역된 것을 다시 한글로 번역하여 출간한 책들은 내 깜냥으로는 무슨 말인지를 알아들을 수 없었다. 몇 번 읽다 구석에 처박아 두었다 ..  (77, 82쪽)


 김담 님은 당신 책 《그늘 속을 걷다》 머리말에서 이야기했습니다. “세월이 바뀐 이제는 일상다반사였던 이런 일들이 일회성 이벤트 행사로 진행되거나 아니면 무슨무슨 축제라는 이름을 달고 희번드르르하게 진행되는 경우가 수두룩했다. 과거는 다시 돌아갈 수 없거나 추억할 수 있을 때 과거일 테지만 그러한 까닭에 각색되거나 조작되는 경우 또한 없지 않을 것이었다. 우파들이 과거를 악용, 남용하는 것과 같이……(6쪽)”

 제 삶을 돌이켜봅니다. 저는 ‘추억’을 싫어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추억에 잠길 겨를이 없습니다. ‘오늘’이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삶’이 있기 때문입니다. 곁에는 아홉 달짜리 갓난쟁이 아기가 있고, 둘레에는 어미 잃은 눈도 못 뜨는 새끼 고양이가 있습니다. 오늘은 아침부터 ‘지역 막개발 반대 집회’에 나가야 하기에 부랴부랴 짐을 꾸려 일산에서 인천까지 새벽밥 먹고 날아가야 하며, 저녁에는 책 팔러 서울마실을 해야 합니다.

 저한테 ‘추억’이라 한다면, 하루하루 잊지 않고 땀흘려 보내는 ‘삶’입니다. 술자리에서 떠들거나 무슨무슨 잔치판에서 떠벌이는 놀음놀이가 아니라, ‘늘 새롭게 맞이하는 삶’입니다.

 그래서 김담 님이 쓴 《그늘 속을 걷다》에 나오는 이야기들은 모두 ‘김담이라는 한 사람이 가슴에 품고 있는 추억’이 아니라고 느낍니다. ‘김담이라는 한 사람이 온몸으로 부대낀 역사’라고 느낍니다. 이제까지 수많은 학자나 지식인은 ‘마을 토박이라 하는 할매 할배’를 찾아서 옛이야기를 듣고 엮고 짜고 하면서 ‘옛날엔 그랬었지’ 하는 추억을 끝없이 만들고 있는데, 정작 바로 오늘을 살아가는 내 동무요 이웃이요 후배요 선배요 아재요 아지매요 누나요 동생이요 언니요 오빠요 하는 사람하고는 만나지 못합니다. ‘오늘 우리 역사’를 바로 이 자리에서 여미지 않습니다. 꼭 세월이 흘러 자료 찾기도 어렵고 사람들마다 잊어버리기도 한 나중에서야 ‘역사 찾기’라는 이름으로 ‘추억 곱씹기’만을 되풀이합니다. 생각해 보면, 학자나 지식인은 그 옛날에도 ‘그 옛날에 현실(바로 오늘 일)이었던 때에 등을 돌리거나 못 본 체하며 책상물림’으로만 지내지 않았는가 싶습니다. 발을 디뎌야 할 자리에서 발을 안 디디지 않았으랴 싶습니다. 손을 뻗어야 할 자리에서 손을 안 뻗지 않았나 싶습니다. 그러면서 핑계를 대지요. ‘나도 한마음이기는 했으나 먹고살기 바빠 어깨동무하지 못했다’고. 그러면서 뒤늦게 옛이야기를 추억거리 삼아 찾아들으면서 말하지요. ‘이런 이야기는 중요한 역사 자료가 되기에 나라나 학교에 기금을 신청해서 책으로 남겨야 한다’고.


.. 반공글짓기, 반공그림대회. 자나 깨나 반공을 몸으로 실현했다. 때로는 남한에서 북쪽으로 보내는 삐라가 역풍을 받고 학교 운동장 가장자리 오래된 금강소나무 우듬지에 내려앉는 일도 있었다 ..  (39쪽)


 저는 ‘학자’라는 이름과 ‘지식인’이라는 이름이 무섭습니다. 아니, 무섭다기보다 소름이 돋습니다. 문화니 역사니 체험이니 추억이니 하면서 ‘예전에는 불량식품이요 나쁜 짓’으로 깎아내리고 다그쳤던 뽑기라든지 달고나라든지 딱지라든지 아폴로라든지를 되살리는 움직임들을 보면 소름이 돋습니다. 세월이 흐르면 무엇이든 ‘그리운’ 추억이 되고 ‘애틋한’ 역사처럼 뇌까리는 목소리를 들을 때면 등골이 오싹합니다.

 마땅한 노릇이지 않습니까? 달고나를 추억하는 이들은 ‘평화의 댐 성금 모으기’를 추억할 수 있습니다. 뽑기를 축제로 되살리는 이들은 ‘반공글짓기 대회’를 축제로 되살릴 수 있습니다. “아빠 어렸을 때에”니 “엄마 어렸을 적에”니 하면서, 군사독재정권이 우리를 억누르던 모습들을 즐거운 옛일이라도 되는 듯 빙그레 웃으며 아이들한테 가르칠 수 있습니다. 일제강점기 찌꺼기를 고스란히 이어온 군사독재정권 찌꺼기를 우리 아이들한테 아무렇지도 않게 보여줄 수 있습니다. 마치 ‘다시 누리고 싶은 일’이라도 되는 듯이. 꼭 ‘다시 그때처럼 우리 사회가 거꾸로 가야 옳다’는 듯이.

 자율학습과 보충수업 같은 입시지옥 또한 오래지 않아 ‘추억 스케치’가 되리라 생각합니다. 헌법으로 누리도록 해 놓은 권리인 ‘집회와 시위’를 몽둥이로 두들겨패며 깔아뭉개는 짓거리 또한 머잖아 ‘추억 만들기’처럼 다룰 날이 오리라 믿습니다.


 (2) 그늘 자리 다음을 기다리며


 어설픈 위인전이나 어줍잖은 추억 읊기가 아닌, ‘살아온 이야기’를 조곤조곤 갈무리한 《그늘 속을 걷다》를 읽습니다. 그늘 속을 걷는다는 일이란 어두운 길을 걷는다는 느낌이 짙고, 글쓴이 김담 님 발자취는 어두움을 헤맨 하루하루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그늘이란 응달지기만 한 자리는 아닙니다. 뜨거운 햇볕을 가려 주는 시원한 가림막이기도 합니다. 지치고 고단한 몸을 쉬게 하는 보금자리 노릇을 합니다. 물기를 남겨 주고 새힘을 북돋우는 샘터와 같습니다. 세상 어느 샘가도 그늘 자리에 있지, 볕바른 자리에 있지 않습니다.


.. 누구나 서울대, 연고대를 갈 수 있을 것처럼 생각했기에, 담장 옆 학교 전문대생들이 공부와는 다른 특기를 가졌다 하더라도 무언가 모자라는 이들로 폄훼하기 일쑤였던 어린 우리들은, 그런 그들이 돌멩이를 던지며 경찰들과 맞서는 일을 가당찮다고 비웃으면서도 한편으로는 매우 놀랐다. 무엇 때문에 대학생들이 데모를 하는지 여전히 오리무중이었던 탓도 있었다. 텔레비전에서는 여전히 일일연속극과 오락프로그램을 인기리에 방영하고 있었다. 아버지와 나는 녹화방송 되는 권투와 레슬링을 한 편도 빼놓지 않고 보았다. 또한 일요극장 등의 프로그램을 통해 방영되는 미국의 서부영화를 빼놓지 않고 시청했다. 우리 나라 배우들 이름은 몰랐어도 서부영화에 나오는 총잡이들의 이름은 또렷이 기억했다 ..  (43쪽)


 김담 님은 당신이 걸어야 했던 지난 삶을 하나하나 곱씹으면서 ‘내가 걸을 수밖에 없던 어두움’이 무엇인가를 또렷하게 살펴봅니다. 그리고 그 어두움을 걸어야 했기에 당신 ‘스스로 걷고 싶은 밝음’이 무엇이었는지를 환하게 깨닫습니다. 어두운 길을 걸으며 어두움에만 사로잡히는 사람이 있지만, 어두운 길을 걷기 때문에 밝음을 꿈꾸거나 찾는 사람이 있으니, 김담 님으로서는 ‘내 어둠은 어디에 뿌리를 두고 있었는가’를 찾아내어 뽑아 버리는, 또는 좋은 길벗으로 여기며 살가이 다스리려는 매무새가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 식당 종업원에게 하대를 하고 반말을 하는 것은 대체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 사람이 귀하면 그 사람을 지탱해 주는 음식물도 소중하고 귀한 것 아닐까 … (고향에서 어르신들이) 화이트칼라로 살 수 있는 조건을 갖춘 듯 보이는데, 왜 다시 내려왔느냐고 볼 때마다, 만날 때마다 되물었다 … 비육우를 대량으로 기르면서 우사(소우리)의 소들은 싱싱한 풀 대신 항생제 범벅인 사료로 연명했으며 사철을 콘크리트로 된 우사 안에서 떠나지 못했다. 돈사(돼지우리) 사정은 더욱 심각했다. 주변의 공기와 물을 오염시키는 주범이었다. 가축에서 대량 소비재로 바뀐 까닭이었다 ..  (114, 139, 165쪽)


 다만 한 가지, 김담 님은 소설쓰기를 하기 때문인지 ‘소설책에만 나올 법한 낱말과 말투’를 제법 많이 쓰고 있습니다. 문학이란 그 문학을 하는 나라나 겨레가 어떠한 말로 삶을 가꾸고 생각을 가다듬는가를 보여주는 열매라 이야기하기도 합니다만, 문학에 담는 말은 ‘우리들 말’이어야 하지 않느냐 생각합니다. 국어사전에 묻히는 말이라거나 옥편에 잠자고 있는 말은 아니지 않느냐 생각합니다. 《민중과 지식인》이라는 책을 읽을 때 ‘민중’이라는 낱말을 낯설다고 느꼈던 분이 ‘면목처량’ 같은 말을 쓴다면, ‘면목처량’은 ‘민중’이라 하는 사람한테 얼마나 ‘소설문학’다운 말로 느낄 수 있을까요. ‘몰풍스럽다’는 누가 알아들을 소리이며, ‘자심했다’는 어느 시골사람이 알아차릴 말이겠습니까.

 ‘사람들 말’이 아닌 ‘우리들 말’입니다. ‘사람들 말’을 쓰는 문학이 아니라 ‘우리들 말’을 찾을 문학입니다.

 잘못 쓰는 말이라거나 엉터리로 쓰는 말이라거나 겉멋에 휩쓸린 ‘사람들 말’이 아닌, 어깨동무하는 삶이라거나 사랑과 믿음을 담는 말이라거나 넋하고 얼을 보듬는 ‘우리들 말’로 문학을 일구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 책은 또 다른 세계에 대한 안내서였다. 책과 함께 있으면 지루한 줄을 몰랐다. 교과서는 잊고 챙기지 않는 경우가 있어도 시집을 비롯한 여타의 책들은 상비약처럼 챙겨서 다녔다. 약속한 상대가 약속시간에 늦어도 그다지 화를 내지 않았다. 손에 책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 외딴 시골에 조용히 살고 있으니 인맥, 지연, 학맥, 그런 것 없어도 사는 데 아무런 불편이 없었다. 친목회, 동창회 안 나갈 수 있으니 세상 편했다 ..  (69∼70, 153쪽)


 그렇지만 아직 “그늘 속을 걷”고 있는 김담 님이기 때문에, 오래도록 꾸준히 지켜보면서 기다려야 한다고 느낍니다. 김담 님 스스로 걷는 ‘그늘길’에 우리들을 불러올는지, 아니면 김담 님이 그늘길이 아닌 다른 길을 걸을는지, 또는 그늘길이 그늘길 아닌 자리가 되도록 할는지, 어쩌면 우리들이 미처 못 보고 있는 아름다운 그늘길을 누구나 살가이 깨닫고 받아들이게끔 두 팔을 활짝 벌리고 웃음 어린 목소리로 부를는지는 모르는 노릇이니까요. (4342.5.13.물.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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