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파트에 미치다 - 현대한국의 주거사회학
전상인 지음 / 이숲 / 2009년 2월
평점 :
절판




 아파트에 미친 한국? 아파트에 길들고 매인 한국!
 [잠깐 읽기 28] 전상인, 《아파트에 미치다》


- 책이름 : 아파트에 미치다
- 글 : 전상인
- 펴낸곳 : 이숲 (2009.2.25.)
- 책값 : 12000원



 (1) 집, 삶, 돈


 한국땅에서 가장 큰 도시인 서울은 ‘걷는’ 도시였습니다. 나라안에서 지하철과 버스가 가장 촘촘히 있어 어디를 가든 엉덩이 느긋하게 앉히며 다닐 수 있는 도시이기도 했지만, 산동네 비탈길까지 마을버스가 탈탈거리며 오르는 도시이기도 했지만, 두 다리로 걷지 않으면 다닐 수 없는 골목이 곳곳에 많은 도시였습니다.

 서양과 일본이 이 나라로 쳐들어오며 인천과 서울 사이에 철길을 놓기는 했습니다만, 철길을 타고 다닌 사람보다는 걸어서 인천과 서울을 오간 사람이 많았습니다. 그리고, 걷는 시간을 아깝다고 여기지 않았습니다. 버거운 짐바리를 이고 지고 안고 메고 하면서도 한나절이든 하루든 들여 걷는 일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넓디넓은 서울이라지만, 동쪽 끝에서 서쪽 끝, 북쪽 끝에서 남쪽 끝까지 걸어서 오가는 데에는 네 시간이면 넉넉합니다. 버스와 지하철보다 느리다 하겠으나, 사람이 걷는 두 다리는 온 동네를 두루 거치며 몸으로 느끼고 눈으로 보고 코로 맡게 했습니다. 다 다른 동네에서 다 다르게 사는 사람을 마주치며 이렇게 다르구나 생각하는 한편, 모두 똑같은 사람이기도 함을 헤아리도록 했습니다.

 이제 서울은 ‘걷는’ 도시가 아닙니다. ‘타는’ 도시입니다. 탈거리 가운데에서도 자전거를 타는 도시가 아니라 자가용을 타는 도시입니다. 한 집에 두 대씩 굴리는 자가용은 흔한 일이요, 자가용 없는 집이 없다고 할 만한 도시입니다. 그러나 서울만 이러하다고 느끼지 않습니다. 다른 도시도 비슷하며, 다른 도시도 똑같이 ‘타는’ 도시가 되었으며, 시골 또한 ‘걷는’ 시골이 아닌 ‘타는’ 시골로 탈바꿈했습니다.


.. 아파트 위주의 주거문화가 보편화되는 과정에서 주택의 가치는 쉽게 계량화되었고, 그것이 재산증식 수단으로서의 주택수요와 겹치면서 주택의 과소비 현상이 만연하게 되었다. 그 결과, 우리 나라의 아파트 가격은 한마디로 ‘미쳤다’고 표현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비싸졌다. 지금 현재 우리 나라는 한 개인이 살아가는 과정에서 자신의 힘으로, 그리고 정상적인 방법으로 주거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해진 상태다. 자산이 아닌 소득을 통해 주택을 소유하는 일이 보통사람들에 무망해진 것이다. 게다가 주택 임대시장마저 우리 나라는 외국에서 찾아보기 힘든 특수성을 갖고 있다. 바로 전세 제도다. 그리하여 임대주택에 입주하는 것조차 자력으로는 버거운 곳이 바로 우리 나라인 것이다 … 2008년 11월 현재 서울시 전역에 걸쳐 시가 1억 원 미만의 아파트 가구 수는 겨우 592개만 남았다고 한다. 이른바 저가 아파트 가격이 뛰기 시작했던 2006년 9월 대비, 98.8%가 감소한 것이다 … 강북과 강남을 불문하고 이젠 고가의 아파트만 즐비한 세상이 되고 있는 것이다 ..  (178∼181쪽)
 





 서울 나들이를 할 때면 예전에 살던 셋집 둘레를 스쳐 지나가기도 합니다. 아직 그 셋집이 그대로 있는가 궁금하여 슬그머니 길을 에둘러 가노라면, 높고 빽빽한 빌라들 사이에 옹크리고 있는 옛날 적산가옥 나무집이 빠꼼히 들여다보입니다. 용하다 싶으면서 반가워, 고개를 꾸벅 숙여 인사를 한 다음 지나가곤 합니다. 그러나 앞으로 몇 해 지나지 않아 종로구 평동 둘레는 광화문 둘레와 마찬가지로 비죽비죽 하늘을 찌르는 아파트로 바뀌어 가리라 봅니다.

 지난날 신문을 돌리며 살던 이문동과 회기동과 석관동 둘레를 거닐기도 하지만, 넓지 않은 골목을 쉴 새 없이 싱싱 내달리는 자가용들이 찾아드는 새 아파트 숲을 올려다보면서, 이곳도 머잖아 아파트 아닌 데를 찾아볼 길이 없게 될 테며, 동네 문화며 자취며 깡그리 바뀌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다 문득, 새로 지어진 이 아파트 숲에 살고 있는 사람은 ‘집에 사는’ 사람이 아니라, ‘아파트에 사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문동에 사는 사람이 아니라 ‘무슨무슨 아파트’에 사는 사람이라는 생각입니다. 대방동에 사는 사람이 아니라 ‘어느어느 아파트’에 사는 사람이라는 생각입니다. 등촌동이나 화곡동이나 신도림동이나 성수동이나 한강로나 구산동이나 삼양동에 사는 사람이 아니라 ‘이런저런 아파트’에 사는 사람이라는 생각입니다. 자기 몸을 누이는 동네다운 다름을 느끼거나 나누면서 사는 사람이 아닌, ‘어떠한 아파트 이름’에 따라서 살고 있는 사람일 뿐이라는 생각입니다.

 서울 아닌 데에 사는 사람이라고 다르지 않다고 느낍니다. 어떠한 아파트 이름을 내거는 데에 보금자리를 틀어, 어떠한 마트 이름을 내거는 데에서 물건과 먹을거리를 장만하며, 어떠한 이름을 내거는 일터에서 숫자로만 셈해지는 돈벌이에 모든 시간을 바치고 있습니다. 아이들이 다니는 학교는 한 사람으로서 오롯이 서고자 하는 됨됨이를 익히는 터전이 아닙니다. 어떠한 이름이 내걸리는 대학교 졸업장을 따기까지 경쟁을 익히는 곳, 아니 경쟁에 길들고 물드는 곳입니다. 좀더 빠르고 좀더 세고 좀더 흔들림없는 시험성적을 정년퇴직하는 그날까지 고이 이어나가도록 다그쳐지는 훈련마당입니다.


.. 대한주택공사는 2009년까지 경상북도 울릉군 울릉읍 저동리에 처음으로 국민임대아파트 71채를 공급할 예정이라고 한다. 이는 ‘독도 지키기’ 운동의 일환이라고 주장되는데, ‘아파트의 나라’ 대한민국에서 아파트는 마치 주권의 상징이라도 되는 모양이다 … 동경올림픽을 주최하면서 일인당 국민소득이 4000달러 정도에 이르렀던 1964년경 일본의 경우, 가구당 주거공간 평균 면적은 12∼15평 내외였다 … 우리 나라에서 아파트는 높은 지위를 과시하는 상징이기에 그것의 외형과 외관은 각별히 중요하다. 그리하여 무엇보다도 부자가 사는 고급 아파트일수록 눈에 잘 띄는 것이 필수적이다 … 그들의 지위 과시욕망은 스스로 세상을 내려다보고 싶게 하고, 남들로 하여금 자신을 높이 올려다보고 싶게 만드는 것이다. 사는 사람들의 신분에 걸맞게 아파트는 일단 높을수록 좋은 것이 우리 나라의 현실이다 … 중산층 혹은 상류층이 주로 입주한 전자의 경우에는 낯선 외국어 사용이나 다언어 혼용이 많고, 아파트 이외의 특별한 범주 이름을 사용하는 일이 흔하다. 예컨대 왕족이나 귀족 거주지라는 의미의 팰리스, 하임, 스위트, 카운티, 캐슬 등을 쓰는 일이 많다 ..  (24, 70, 75∼76, 80쪽)


 아이나 어른이나 고마운 밥 한 그릇을 받아들지 않습니다. 배를 채우는, 아니 혀를 즐겁게 하는 밥술을 뜰 뿐입니다. 아이나 어른이나 마음에 반가운 책 하나를 펼쳐들지 않습니다. 마음밭을 따뜻하게 덥히는 책이 아닌, 지식을 늘리고 처세를 잘하여 돈 잘 벌게 되는 길을 찾는 부적을 갖출 뿐입니다. 자동차를 몰아도, 어느 곳으로 즐겁게 간다거나 짐을 거뜬히 나른다든가 하는 데에 쓰지 않습니다. 제 몸값을 높이며 남 앞에서 뽐내는 치레일 뿐입니다.

 환경 문제뿐 아니라 1회용품 문제이든 전기와 물 문제이든 석유 문제이든, 온갖 사회 잘잘못 이야기가 나돌아도 어느 한 가지 달라지지 않습니다. 어느 한 가지 우리 스스로 고치지 않습니다. 어느 한 가지 기꺼이 소매 걷어붙이고 나서게 되는 일이란 없습니다.

 중학교에 들어간 처남 시간표를 들여다보니, 도덕이 한 주에 두 시간 있는 ‘주 5일 수업 시간표’인데, ‘미술’과 ‘역사’ 수업은 보이지 않습니다. 모두 아홉 반인 다른 반 시간표를 죽 훑으니 ‘미술’ 수업이 있는 반에는 ‘음악’ 수업이 없습니다. 그래도 ‘체육’ 수업은 모두한테 있습니다. 그러면서 ‘기가’와 ‘창재’라는 이름이 붙은 수업이 있고 ‘컴퓨터’가 한 주에 두 번씩 들어 있습니다. 거의 모든 수업은 ‘영어ㆍ수학ㆍ국어’에 몰립니다. 하루에 여섯∼일곱 시간만 수업을 한다니, 그지없이 꿈만 같은 시간표인데(저는 하루 여덟 시간 정규수업으로 빡빡히 채운 다음, 새벽과 저녁으로 보충수업과 자율학습이 가득 찼었기 때문입니다), 과목 숫자는 줄었으되 이러한 수업이 중학교 다니는 아이들한테 어떤 삶과 생각과 슬기를 가꾸게 될는지 궁금해집니다. 남은 시간은 스스로 알아서 학원에 가라는 뜻인지, 날마다 이만큼만 학교에서 배우면 된다는 뜻인지, 앞으로 사회살이를 할 때에 이만큼 익히면 넉넉하다는 뜻인지, 실습이나 체험이란 도무지 보이지 않는 우리네 시간표는 언제까지나 그 모습 그대로 이어가야 한다는 뜻인지, 아리송하면서 적잖이 슬픕니다. 배우는 아이들만큼이나 가르치는 어른들은 학교에서 어떤 보람과 즐거움을 안고 있을지 근심과 걱정입니다.


.. 서구에서처럼 국가의 재정적 지원에 의한 사회주택 혹은 영구적 임대주택 공급이 우리 나라에서는 어렵다고 판단한 정부는, 국가가 기업적 방식으로 주택건설 사업을 추진하기 위한 목적으로 대한주택공사를 설립했다. 이는 우리 나라의 주택정책이 사회복지 차원이 아니라, 건설사업의 성격으로 시작되었음을 의미한다 … 서울과 같은 거대도시의 아파트만 놓고 1인당 주거면적을 따져 보면, 우리 나라가 결코 좁고 불편하게 사는 나라가 아닐 것이다. 주거문화의 질적 향상은 물론 필요하다. 하지만 그것을 주거면적의 양적 확대에서 주로 찾는 일은 토건국가와 건설자본의 입장에 치우친 측면이 있다 ..  (38, 71쪽)


 아침 일찍 똥을 눈 아기를 씻기고, 빨래를 하고, 옆지기와 처제와 제가 먹을 카레를 끓이고, 아기 손톱을 깎고, 아기 잠든 옆자리를 지키면서, 슬슬 인천집으로 돌아갈 준비를 합니다. 짐을 꾸려 끙차 하고 가방을 메고 버스정류장으로 나아가서 전철역까지 가는 버스를 잡아탄 다음, 전철을 타고 멀디멀리 돌아가는 길에서 또 책을 바지런히 읽겠구나 싶습니다. 버스 타는 데까지 가는 길은 걸어가는데 거님길 한복판에 나무가 심겨져 있어 혼자 걸어도 요리조리 비켜 걸어야 합니다. 큰길로 나오면 거님길 절반은 자전거길로 나뉘어 있으나, 가게마다 차를 버젓이 세워 놓고 있습니다. 환경을 걱정한다는 친환경엘피지 버스가 나날이 늘어나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그처럼 환경을 걱정한다면 모든 버스를 바꾸어야 하지 않느냐 생각하게 되지만, 갈 길이 멀고 고단하니 잠깐 생각했다가 잊습니다. 전철로 서울을 꼭 거쳐서 빙 도는 길이 아닌, 자전거로 가까이 달릴 수 있는 길이면 얼마나 좋으랴 싶지만, 자가용 아니면 인천과 일산을 짧게 오갈 수 없는데, 전철 빈자리 얻어 앉아 하품을 하다가 잠들면 이런저런 생각은 이내 잊힙니다.

 밟고 치고 미는 바쁜 사람들 가득한 전철 틈바구니에서 벗어나면 후유 하고 한숨을 돌리면서, 왜 그렇게들 바쁜 사람이 되었는지 슬픈 마음이 일어나지만, 내 한몸 건사하기에도 고단한데 그런 데까지 더 생각할 힘이 어디 있느냐 싶어 곧바로 털어냅니다. 도원역이나 동인천역에서 내려 삼십 분이나 한 시간쯤 골목을 휘 돌아 사진 몇 장 찍고 집으로 돌아오면 몸은 파김치가 되어 가방을 내려놓고 옷가지를 벗으면 바닥에 풀썩 주저앉게 됩니다. 따로 더 무엇을 헤아리거나 되돌아볼 마음이 들지 않습니다. 손발을 씻고 자리에 드러누워 천장을 바라보면 스르르 눈이 감기고 어느새 깊은 잠에 빠져드는데, 깜짝 놀라듯 퍼뜩 깨어 일어나 앉아 책을 잠깐 만지작거리다가는, 아무리 무쇠 같은 사람이라도 지치고 힘들고 고달프면 책이고 뭐고 생각이고 뭐고 착함이고 뭐고 빛줄기고 뭐고 어디에 있겠느냐 싶어집니다.

 다른 사람들은, 또 내 동무들은, 아무 생각 없이 텔레비전 단추를 누르고, 언제나처럼 옷가지는 세탁기에 던져 넣으며, 저절로 냉장고 문으로 손이 가다가는, 손전화 단추 빅빅 누르면서 또 하루가 지나가겠구나 싶습니다.


.. 골목에서는 도시문화의 대표적인 풍경인 ‘걷기’가 만보나 산보의 형태로 활발했지만, 아파트 숲과 엘리베이터 안에서는 그러한 행위가 통째 사라져 버렸다. 대신 간혹 눈에 띄는 것은 운동을 목적으로 하는 ‘뛰기’ 혹은 속보 정도다 … 닭장 같은 아파트라고 해서 사람들이 모래알처럼 흩어져 사는 것은 아니다. 아파트촌은 나름대로 삶의 공동체이다 … 예컨대 국내 최고가 아파트 가운데 하나인 타워팰리스에서는 입주민들 간의 인적 네트워크가 활발하다고 한다. 가장 활성화된 것이 각종 동호회 활동이라고 하는데, 골프 모임만 해도 30개 이상이며, 외국대학을 포함한 대학동문회도 자주 열린다고 한다 ..  (90, 102∼103쪽)
 





 모두들 똑같아지는 삶이 아닌가 싶습니다. 모두들 똑같은 곳(병원)에서 태어나 똑같은 먹을거리(가루젖)를 먹고, 똑같은 곳(학교)에서 똑같은 지식을 머리에 집어넣으며 젊고 푸른 나날을 보내는데, 사내아이면 군대에서 사람 죽이는 재주를 배우게 되고, 공부를 잘하건 못하건 대학교 들어가도록 채근을 받으며 겨우겨우 대학생이 되고, 대학생인 동안과 대학생을 마치고 나서도 영어 공부를 학원 다니며 하고, 회사에 들어가면 연봉과 혼인과 아이 낳아 기르는 데로 생각이 뻗으며 아주 자연스럽게 아파트 한 채 얻어 살게 되는 흐름으로 녹아들리라 싶습니다. 다 다른 사람이지만 다 같은 삶이고, 다 다른 목숨이었으나 다 같은 아파트에서 다 같은 지식을 안고 다 같은 차를 몰고 다 같은 월급쟁이로 꾸리는 삶이 됩니다. 보람? 즐거움? 기쁨? 아름다움? 거룩함? 착함? 글쎄……. 자연? 나무? 흙? 풀? 논밭? 바다? 산들? 구름? 무지개? 글쎄……. 돈과 함께 세상에 나와, 돈으로 세상을 누린 다음, 돈과 함께 세상을 떠나는 우리 모두가 되어 있지 않은가 싶습니다.


 (2) 엉뚱한 마무리로 이끌며 스스로 무너진 책


 “불과 한 세기 동안 한국사회가 식민지와 건국, 전쟁, 산업화, 독재와 민주화, 지구화 등을 연이어 숨차게 경험하다 보니, 세상을 움직이는 것은 무언가 거시적인 과정, 어딘가 구조적인 요인, 아니면 모종의 집단적인 동력이라고 생각하는 데 시나브로 익숙해져 왔는지 모른다. 그리하여 소소한 개인의 일상이나 주변의 생활세계에 대해서는 눈길이 별로 가지 않았을(머리말)” 것이라면서, 우리 둘레에서 가장 흔하게 보고 부대끼는 ‘아파트’ 이야기를 다루는 《아파트에 미치다》를 읽습니다. 글쓴이는 오늘날 사회학자들이 “한국의 사회과학을 상당히 재미없게 만들었다(머리말)”고 이야기하면서, 당신이 내는 이 책은 ‘재미있게’ 읽을 수 있도록 썼다고 밝힙니다. 책을 덮고 나서 곰곰이 되짚고 되읽는 동안, 글쓴이 말마따나 여느 인문사회과학 책하고 견주면 ‘가볍게 쓴’ 글투임이 틀림없다고 느낍니다. 따분하거나 재미없거나 지루하게 느껴지지 않도록 무척 마음을 쏟았음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네 인문사회과학 책들이 가볍게 쓰지 않아서 재미가 없었을는지, 아니면 ‘너무 큰 이야기만 해대’어 재미가 없었을는지 아리송합니다. 가볍게 쓰지 못한 탓도 있으며, ‘살아가는 자잘한 이야기’를 헤아리지 못하는 아쉬움은 어디에나 있기는 하지만, 정작 아쉽고 안타까운 대목은 ‘왜 그런 크고작은 이야기’를 하려 했는지가 아닌가 싶습니다. ‘그런 크고작은 이야기를 하면서 어떻게 하겠다’는 다짐을 제대로 밝히지 못한 탓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런 크고작은 이야기를 머리속 생각을 갈무리한 책으로만 엮어내고, 정작 자기 몸뚱이를 움직여 세상을 차근차근 고쳐 나가려고 하지’ 못하는 지식그릇에 머무는 데에 있지 않느냐 싶습니다. 이를테면, 사회 얼거리를 흔드는 잘잘못을 비판한다고 할 때에, 남들한테 참거짓을 들려주기 앞서, 자기 스스로 참을 북돋우고 거짓을 다스리려고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보여주지 못하는 한편, 참을 북돋우려고 하는 일이 없는데다가 거짓을 몰아내려 애쓰지 않고 이론으로만 길게 떠든다고 하면 부질없는 산울림으로 그치고 맙니다.

 이런 테두리에서, 《아파트에 미치다》라고 하는 인문학 책 하나는 얼마나 ‘자기 실천’이 뒤따르는 책이 되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을 훑는 눈썰미를 넘어서는 몸짓이, 속으로 깊고 넓게 파헤치려는 몸부림이, 얼마나 차곡차곡 나타나고 알뜰살뜰 보여지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 냉장고나 텔레비전은 가족의 일부가 되는 데 비해 진짜 ‘이웃’은 ‘사촌’처럼 가까워지지 않는 것이 바로 아파트 거주문화의 단면인 것이다. 요컨대 아파트는 본질적으로 이웃의 문제와 사회적 관심사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주거형태다 … 신식 문화주택에 입주한 한국인 샐러리맨 혹은 회사원들은 그것이 제공하는 가족주의에 안주하고 탐닉하는 태도를 보였다. 말하자면, 그들은 그 시대가 일제 식민지 치하라는 사실을 망각한 채, ‘부르주아 프라이버시’라는 가상공간을 만들고 피아노나 축음기 등의 문화적 상징을 소유함으로써, 상층계급에 진입하는 행복한 환상에 사로잡혔던 것이다 … 아파트에서 사람들은 문화생활을 하거나 문화생활을 한다고 믿음으로써 자신을 중산층으로 여기는 경향이 있다 ..  (126, 132∼133쪽)


 글쓴이 전상인 님은, 몇 해 앞서 프랑스 학자가 내놓은 《아파트 공화국》(발레리 줄레조,2007)을 ‘그리 잘 쓴 책’이 아니라고 꾸짖습니다. 여러모로 살피면 《아파트 공화국》은 아쉬움이 많이 남는 책입니다. 그러면, 아쉬움이 남는다는 《아파트 공화국》에서 밝히지 못한 이야기를, 한국 학자 전상인 님은 어떠한 눈길과 눈높이와 눈매로 다루었을까요. 아파트란 한국땅에서 어떠한 곳이며, 아파트 나라가 되어 버린 한국은 얼마나 아름다운 나라이며, 아파트에서 살아가는 수많은 이 나라 사람들은 얼마나 올바르고 슬기롭게 살아간다고 할 수 있는가요? 자그마한 책 《아파트에 미치다》에서는, 한국땅과 한국사람과 한국정부가 어떻게 아파트에 ‘미치게’ 되었고, 이 ‘미친’ 흐름이 얼마나 옳거나 그르며, 이런 흐름이 앞으로 어떻게 나아가야 하는지를 어느 자리에서 보여줄까요?

 전상인 님 스스로는 아파트에서 사는지 아닌지를, 전상인 님 스스로는 아파트를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전상인 님 스스로는 아파트를 어떻게 받아들이거나 껴안는지 궁금합니다. 그런데, 이런 궁금함은 첫 쪽부터 마지막 쪽까지 한 줄도 읽어낼 수 없습니다. 글쓴이 전상인 님은 따로 이러한 ‘자기 삶’을 조금도 밝히지 않기 때문입니다.


.. 실제로 한국의 화이트칼라는 1987년 노동자 대투쟁 당시 한국사회의 이념적 좌경화를 막는 결정적인 방파제 역할을 했다. 그러나 반군부독재 민주화를 향한 물꼬를 트는 데에도 그들의 역할이 결정적이기는 마찬가지였다. 결국, 한국의 아파트 중산층 계급은 권위주의적 산업화 과정의 수혜자이면서 동시에 민주화의 견인차이자 파수꾼의 역할도 함께 담당했다고 보면 좋을 것이다 … 이와 같은 (아파트) 문제는 궁극적으로 우리 사회 전반에 걸쳐 좌파 진보 평등주의 이데올로기가 쉽게 파급될 수 있는 온상을 제공한다. 성공한 대한민국 건국 60주년을 아무리 자화자찬하면 뭐하는가, 당장 내 평생 내 힘으로 내 집 하나 마련할 꿈이 아스라이 멀어지고 있는데 말이다. 결국, 가족관계를 인격적으로 정상화하기 위해서라도, 미래세대의 밝은 인생관과 건전한 세계관을 고무하기 위해서라도, 그리고 좌파 포뮬리즘의 득세를 막아 대한민국 체제의 안정적 확대재생산을 담보하기 위해서라도 우리 나라의 주택정책은 조만간 확실히 달라질 필요가 있다 ..  (136, 183쪽)


 그러면서 책 사이사이에 ‘좌경화’니 ‘좌파 진보 평등주의 이데올로기’니 ‘좌파 포뮬리즘’이니 하는 이야기를 들먹입니다. 아파트하고 ‘좌파’가 어떻게 맺어져 있기에? 한국땅에서 ‘좌파’가 어떠했기에? 곳곳에 뜬금없이 나타나는 ‘좌파 = 한국을 망치는 이들’이라는 느낌 짙은 글월을 읽으며, 이런 생각을 바탕에 깔고 펼치는 이야기책이, 아니 인문학 책이 ‘재미있게 읽을’ 만한 책이 되는가 하고 고개를 갸웃거리게 됩니다. ‘좌파들이 쓰는 인문학 책’은 따분하고 재미없기에, 당신 스스로 좌파를 꾸짖으면서 ‘제대로 아파트를 이야기하는 책’을 펴낸다고 생각하는지 알쏭달쏭해집니다.

 좌파든 우파든, 잘못을 했으면 잘못을 따지면서 올바른 길로 접어들도록 다스려 주어야 합니다. 잘못하지 않고 잘하고 있으면 기꺼이 북돋우고 토닥거리면서 어깨동무를 할 노릇입니다. 왼날개이면 모두 나쁘고 오른날개이면 반드시 좋다는 법이 어디에 있습니까. 거꾸로, 오른날개이면 모두 나쁘고 왼날개이면 반드시 좋다는 법이란 없습니다. 어느 날개이느냐가 아닌, 어떻게 살아가느냐입니다. 어느 집에 사느냐(아파트이냐 골목집이냐 다세대이냐)가 아닌, 참다운 사람 삶을 꾸리느냐 못 꾸리느냐에 따라 우리 세상이 아름다운지 아름답지 않은지가 갈립니다.
 





.. 대입수능시험이 그러하듯이 아파트는 주거수준에 관련하여 전 국민을 획일적으로 서열화시킨다 ..  (172쪽)


 글쓴이 스스로 좀더 ‘정부 아파트 정책’을 돌아보고 꿰뚫는 눈을 길렀으면 얼마나 좋았으랴 싶습니다. 온나라를 들끓게 하는 재개발 정책이 얼마나 우리 모두를 헤아리는 일인지를 차분히 살피고 곱씹었으면 얼마나 좋았으랴 싶습니다.

 ‘아파트에 살 권리’만큼 ‘아파트 아닌 집에 살 권리’가 있습니다. ‘자가용을 몰 권리’만큼 ‘자가용 없이 대중교통만 타거나 두 다리로 걷기만 하거나 자전거로만 다닐 권리’가 있습니다. ‘돈이 많이 즐겁게 쓸 권리’가 있다면 ‘가난하고 찢어지게 못 살아도 똑같은 한국사람으로 대접받을 권리’가 있습니다.

 아파트를 둘러싼 사회 흐름이 어디로 치닫는가를 더 속깊이 들여다보았다면, 책이름 그대로 왜 “아파트에 미치다”라고 할 만한가를 우리 마음속으로 파고들도록 이야기를 건넬 수 있었다고 느낍니다. 아파트를 앞세워 ‘돈 없으면 아파트고 뭐고 아예 살 수도 없게 되는 한국땅’이 어이하여 이 모양이 되었는가 하는 고갱이를 잡아채면서 우리 머리를 일깨우는 슬기로움을 나눌 수 있었다고 느낍니다. 모든 재개발과 재건축이 어김없이 ‘아파트 아니면 안 된다’고 하는 까닭이 무엇인지를 샅샅이 알아보고 다루었다면, ‘우리가 아파트든 다른 무엇에든 미치지 않고 웃음으로 즐길 살가운 길’이란 무엇인가를 톺아보도록 하는 훌륭한 마음결을 찾을 수 있었다고 느낍니다. (4342.3.17.불.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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