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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복호 사람들 - 김보섭 사진집
김보섭 지음 / 눈빛 / 2008년 4월
평점 :
‘고양이를 부탁해’도 인천‘사람’은 못 담는데
[잠깐 읽기 26] 김보섭 사진, 《수복호 사람들》
- 책이름 : 수복호 사람들
- 사진 : 김보섭
- 펴낸곳 : 눈빛 (2008.4.9.)
- 책값 : 2만 원
(1) 영화 〈고양이를 부탁해〉
지난주에 헌책방 나들이를 하면서 영화 〈고양이를 부탁해〉 디브이디를 장만했습니다. 단돈 2000원에 나와 있기에 낼름 장만했는데, 셈틀에 넣어 돌리니 화질이 몹시 나쁩니다. 설마, 했는데 이 디브이디는 복제판이었구나 싶고, 그래서 헌책방에서도 5000원이 아닌 2000원에 거저 주듯 팔았구나 싶습니다.
영화 〈고양이를 부탁해〉는 2001년에 개봉을 했습니다. 이 영화가 나올 무렵 〈와이키키 브라더스〉도 나왔으며, 두 가지 모두 ‘시중 개봉관’에서는 그리 사랑받지 못하고 일찍 내려졌음에도, 몇몇 신문에서 끊임없이 소개하고 알리면서 차츰 사랑받게 되었을 뿐 아니라, 시민모임에서 소매를 걷으며 영화 알리기에 나서기도 했습니다.
그무렵 여러 가지 신문기사를 얼핏설핏 읽으며 〈고양이를 부탁해〉가 얼마나 대단할까 궁금했습니다. 〈와이키키 브라더스〉는 그때 회사사람하고도 보고 술동무하고도 보며 모두 세 번 극장에서 보며 눈가가 젖었기에, 〈고양이를 부탁해〉는 언젠가 디브이디를 얻건 아는 분 집에 놀러갔을 때 텔레비전으로 보건 볼 수 있겠지 생각했습니다. 그러던 나날이 어느새 여덟 해. 영화가 나온 지 여덟 해 만에 비로소 집에서 옆지기와 아기와 나란히 앉아서 봅니다.
영화에 나오는 다섯 여학생은 ‘인천에서 가장 좋다는 여상’인 인천여상을 나옵니다. 한 아이는 서울에 있는 회사에 일자리를 얻고, 한 아이는 아버지가 하는 찜질방 일을 돈 한푼 못 받으며 거듭니다. 한 아이는 중구 북성동 판자집에서 할매 할배하고 가난하게 살면서 텍스타일을 익힙니다. 다른 두 아이는 쌍둥이인데 화교학교 앞에서 길장사를 합니다. 저마다 다 다른 자리에서 다 다르게 살아가는 아이들은 ‘고등학교를 마친 뒤’ 만날 일이 뜸해지고, 이 가운데 서울에서 일자리 얻어 살림집(자취방)까지 서울로 옮긴 아이는 더더욱 다른 네 아이 사이에 벽이 높아집니다. 인천을 고향으로 두었으나 인천을 떠나 서울에서 일자리 얻어 살아가다가 살림집도 서울에서 마련한 제 둘레 선후배 동무들 또한 하나같이 ‘영화에 나오는 이 아이’와 마찬가지였습니다. ‘인천에서 놀아 보았자 뭐 놀거리가 있느냐’ 여기고, 참말로 놀거리가 없는 인천이기도 하여 전철 타고 멀리 서울로 나들이를 가 보지만, 다시 인천으로 돌아올 전철은 저녁 열 시 반 무렵이면 끊기기 때문에 얼마 놀지 못하고 곧바로 돌아오곤 했습니다.
영화에 나오는 인천 중구 북성동 판자집과 골목길과 북성포구 들을 찬찬히 헤아려 봅니다. 이때는 2000년일 텐데, 그 뒤로 꼭 아홉 해가 된 2009년, 얼마나 많은 모습이 남아 있는지 헤아렸을 때, 웬만한 모습은 안 남아 있다는 데에 생각이 미치는 한편, 아직까지 그대로 남아 있는 곳이 제법 많다는 데에 생각이 미칩니다. 시내버스는 달라졌고, 아이들(고등학교) 옷차림과 머리 모양은 바뀌었으며, 곳곳에 새로 들어선 아파트는 그사이에 갑작스레 늘었습니다. 새 간판을 올린 가게도 많으나 예전 간판이나 처음 간판 그대로 빛바랜 채 고스란히 이어오는 곳도 많습니다.
두 시간 가까이 흐른 영화를 보고 나서 ‘이게 끝이야?’ 하는 말이 절로 튀어나옵니다. 디브이디 겉에는, 그러니까 그때 나온 영화 포스터에는 틀림없이 “스무 살, 섹스 말고도 궁금한 건 많다”고 적혀 있는데, 영화에 나오는 네 갈래 모습 아이들한테서 ‘무엇을 궁금하게’ 여기고 있는가가 거의 느껴지지 않습니다. ‘섹스 이야기’가 안 나왔을 뿐, 그러면 ‘무슨 이야기’가 나오느냐에서는 ‘글쎄?’ 하는 말밖에 나오지 않습니다.
제 마음이 메말랐기 때문일까요. 제가 영화 보는 눈이 없어서일까요. 그러나, ‘인천에서 나고 자란 아이들’과 ‘인천에서 나고 자라다가 서울로 떠난 아이들’ 삶자락은 참 잘 담아냈다고 생각합니다. 떠돌고 맴돌고 하릴없는 모습들, 힘없고 풀죽고 여린 모습들, 고등학생 때까지는 막 기운이 넘치는 듯하다가도 학교를 마친 뒤 갈 곳 모르고 할 일 못 잡으며 쓸쓸해지고 낯빛이 어두워지는 모습들은, 어쩜 이렇게 인천사람 속내를 찬찬히 그려낼 수 있으랴 싶어 놀랍니다(그러나, 임순례 감독이 이 영화를 본 느낌을 적은 글(2001년, 한겨레신문)에서도 나타나듯, 저와 제 또래와 선후배들 학교 때를 돌아보면, 영화에 나온 아이들처럼 그렇게 까르르 우하하 웃으면서 놀았던 일이나 해맑은 듯 보여진 일이 거의 없었고, 늘 무엇엔가 눌려서 어두워야 했고 학교 안과 밖에서 교사와 깡패들한테 벌벌 떨면서 살아야 했던 일들이 줄줄줄 떠오르지만). 그런데, 어쩌면 인천사람 이러한 속내를 잘 담아낸 〈고양이를 부탁해〉라기보다는, ‘풋풋하고 싱그럽던 푸른 빛깔’이 학교를 마치고 저마다 다른 곳에서 고달픈 사회살이를 하면서 칙칙하고 쓸쓸해지는 모습과 느낌을 따오려고 인천이라는 데를 빌어 오지는 않았나 하는 생각도 듭니다. 왜냐하면, 인천 동구 만석동과 화수동, 중구 북성동과 송월동 둘레는 나라안에서 몇 손가락으로 꼽을 만큼 가난한 도심지 동네이면서, 예부터 부두 노동자와 조개와 굴 까는 아주머니들이 어렵사리 판자집 살림을 이어가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예전에 《괭이부리말 아이들》이라는 동화책이 나왔을 때, 이 책을 만석동 사는 동무녀석한테 선물해 주면서, 마음이 그리 가볍지만은 않았던 일을 떠올려 봅니다. 틀림없이 인천 만석동에서 ‘기찻길옆공부방’을 꾸리던 분이 인천 만석동이라는 데를 바탕 삼아서 살뜰히 여미어 낸 동화책이기는 하지만, 외로 치우친 눈길과 마음길 때문에 읽는 내내 거북했어요. 이야기 무대가 인천일 뿐, 인천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삶자락’ 가운데 무엇을 보여주려 했는지, 이 삶자락으로 ‘이 땅 사람들 삶자락’과 어떻게 잇대어 이야기를 펼치려 했는지 갑갑했습니다. 만석동이며 화수동이며 송월동이며 송현동이며 송림동이며 창영동이며 금곡동이며 숭의동이며 관동이며 경동이며 유동이며 내동이며 전동이며 신포동이며 선린동이며 송학동이며 해안동이며 선화동이며 신흥동이며 도원동이며 화평동이며 항동이며 …… 코딱지 만하다고 할 만한 땅덩이가 조각조각 잘게 나뉜 이 오래된 동네 골목길은 ‘가난 = 어두움’만이 아니라 ‘가난하나 밝음’이 있고, ‘가난 = 괴로움’만이 아니라 ‘가난하기에 이웃과 더 나누는 마음’이 있으며, ‘가난 = 짜증 + 벗어나고픔’만이 아니라 ‘가난하면서 더 이웃사랑과 어깨동무를 하면서 이 나름대로 이곳을 사랑하고 아끼며 살아가려는 몸부림’이 있기 때문입니다.
동전에 앞과 뒤와 있다고 하듯, 골목길이라는 데에도 밝음과 어두움이 있습니다. 환함과 쓸쓸함이 있고 웃음과 눈물이 있습니다. 서러움과 흐뭇함이 있고, 반가움과 못마땅함이 있습니다. 이런 여러 테두리와 울타리와 보금자리가 있는 우리 삶터입니다. 인천이든 서울이든 부산이든 대전이든 마찬가지입니다. 애틋하며 사랑스러운 이웃과 터전이 있는 한편, 고개를 돌리고 싶거나 내버리고 싶은 얄궂은 이웃과 터전이 함께 있습니다. 그렇다면, 동화 《괭이부리말 아이들》과 영화 〈고양이를 부탁해〉는 인천이라는 데에서, 또 골목길이라는 데에서, 또한 인천 골목길에서 태어나 자라는 아이들이 다니는 자그맣고 오래된 동네 학교에서, 무엇을 보고 느끼고 얻어서 무엇을 우리들하고 나누려고 했을까요. 무엇을 나누게 되었을까요.
(2) 사진책 《수복호 사람들》
인천에서 태어나 인천사람과 인천땅 사진만 찍는 김보섭 님이 ‘인천 아닌 곳에서 전국을 무대로’ 책을 나누는 출판사에서 처음으로 펴낸 사진책 《수복호 사람들》을 봅니다. 《청관》, 《한의사 강영재》, 《바다 사진관》 같은 사진책을 펴냈으나, 거의 눈길을 못 받았는데, 그래도 어찌어찌 ‘인천 바깥’에서 눈에 뜨이어 이렇게 야무진 사진책 하나를 세상에 내어놓게 되었습니다. 지난 2008년 4월에.
궁금한 마음에 인터넷책방에 들어가 ‘판매지수’라는 숫자를 들여다봅니다. 그런데 웬걸. ‘0’이라는 대목에 그만 입이 벌어집니다. 그래도 그렇지, 나온 지 거의 한 해가 다 되어 가는 책인데, 판매지수가 ‘0’이라니. 아니, 인터넷책방 이곳에서만 판매지수가 0일 뿐, 다른 데에서는, 또 여느 동네책방에서는 사랑받고 있을지 모르는 노릇이겠지요.
영화 〈고양이가 부탁해〉가 나왔을 때, ‘〈고양이를 부탁해〉 살리기 인천시민모임’이 최원식 교수를 앞장세워 일어나기도 했다는데, 동화책 《괭이부리말 아이들》이 나왔을 때 ‘느낌표 책’으로 뽑히고 ‘기찻길옆공부방’이 전국으로 널리 알려지기까지 하며 크게 도움을 받았는데, 정작 인천이라는 데에 뿌리를 박고 인천이라는 데에서 밑바닥 삶을 꾸리던 사람들 자취가 담긴 사진책 《수복호 사람들》은 푸대접도 찬밥대접도 아닌 똥대접이라니.
〈고양이를 부탁해〉를 아꼈다는 사람들 손길이라면, 《괭이부리말 아이들》을 눈물겹게 읽었다는 눈길이라면, 《수복호 사람들》에 담긴 바닷가마을 낮은자리 사람들 이야기에 조곤조곤 말을 붙이고 쫑긋쫑긋 귀를 세우며 토닥토닥 어루만져 줄 수 있어야 하지 않을는지. 아니, 이런 생각은 나 혼자만 하는 풋생각일는지.
.. ‘조개 캐는 사람들’에 대한 기록은 1998년 인천 연수동으로 작업실을 옮기면서 시작되었다. 연수동은 갯벌을 흙으로 메워서 그 위에 만든 도시이다. 예전에는 물때에 맞춰 소달구지를 타고 나가 조개를 캐던 갯벌이었으나 삶의 형태가 바뀜에 따라 소 대신 트랙터를 타고 나가 조개를 잡던 곳이다. 인천이 고향인 나는 바닷물이 들어오기 전까지 끈으로 묶은 장화를 신고, 양은 ‘다라이’를 끌고 다니며 열심히 조개를 캐던 사람들의 모습을 기억하고, 사라지는 것들에 대한 아쉬움을 느꼈었다. 그러던 중 우연한 기회에 동구에 있는 만석동과 화수동엘 갔었다. 아직도 기찻길 옆에는 판잣집들이 남아 있고, 오래된 공장과 바다를 삶의 터전으로 살아온 서민들의 애환이 뒤엉켜 있는 곳, 그곳에는 이북 피난민들이 내려와 굴이나 조개를 캐던 생활이 아직도 계속되고 있었고, 공장에서 일하는 사람들과 비닐로 벽을 삼은 작은 굴막에 들어앉아 끊임없이 굴을 까는 사람들의 생활이 계속되고 있었다. 그곳은 인천의 과거가 마지막까지 남아 있는 곳이었다 .. (찍은이 말)
찌뿌둥한 하늘이 비를 뿌릴 듯 말 듯한 낮나절, 옆지기 심부름을 받아 생협 나들이를 다녀오는 길에 자전거머리를 북성동으로 돌립니다. 답동에서 인현동으로 넘어가고,인현동에서 전동과 화평동을 스친 다음, 송월동1가로 접어듭니다. 그러면서 만석동과 잇닿은 북성동1가로 들어섭니다. 기차길과 고가도로가 맞닿아 있는데다가, 저 철길과 고가도로 건너편으로는 하늘을 뒤덮은 큰 굴뚝 공장이 가까이 바라다보이는 북성동에서 자전거를 내려, 고가도로로 올라가 보고, 천천히 골목을 거닐어 봅니다. 큰 개가 컹컹 짖어 더 못 들어가는 골목에서는 돌아나오고, 막혀 버린 골목에서도 돌아나옵니다. 굴막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허물어져 가는 집을 쳐다보다가, 뒷짐 지고 걷는 할매 앞에서 꾸벅 고개를 숙이다가, 깃들인 사람 없어 비어 있는 집과 가게 앞에서 괜히 서성이다가, 조용히 사진 몇 장 찍고 집으로 돌아갑니다.
동일방직 들머리에서 잠깐 멈추어 다시 한 번 골목 안쪽으로 살며시 들어갔다 나옵니다. 우람한 공장과 창고 옆으로 올망졸망 붙어 있는 오래 묵은 집들 옆으로 자전거를 가볍게 스쳐 지납니다. 엊저녁에 본 영화 〈고양이를 부탁해〉를 떠올려 봅니다. 용케 이 동네 삶터를 잡아채어 참으로 살뜰하게 담아냈구나 싶으면서, 이런 삶터를 이런 동네를 이런 골목길 사람들을 무대로 삼은 생각바탕에 무엇이 있었을까 헤아려 봅니다. 고가도로에 올라서서 높직한 방음벽을 옆으로 하고 걷는 동안, 이 ‘산업도로 구실’ 고가도로를 지나는 컨테이너짐차와 원목짐차와 자동차짐차가 지나갈 때마다 덜덜 떨립니다. 고가도로 한켠에 서서 동네를 사진으로 담으려 하다가도 온몸이 덜덜 떨려서 도무지 사진을 찍을 수 없습니다. 저 무거운 짐차가 무시무시하게 달리는 데에도 고가도로가 무너지지 않으니 용합니다. 그러면 이 고가도로 밑에서 살아가는 북성동 사람들과 만석동 사람들은? 이 사람들은 한두 해도 아닌 기나긴 세월을 끔찍한 자동차 소음과 매연과 먼지들에다가 공장 소음과 매연과 먼지를 마시면서 굴을 까고 부두노동자로 일하고 중공업 공장과 유리공장과 제철소와 목재소에서 일했는데, 이 사람들 삶은?
.. 조그만 배로 인천 근해(경기도)에 조그마한 섬(무인도)을 다니며 굴(조개)을 채취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수복호를 타고 다니시는 아주머니들은 대부분 이북에서 가족들과 피난 나온 분들이었고, 종종 전라도와 충청도 등에서 어렵게 사시다가 인천으로 올라오신 분들도 있었습니다. 이 아주머니들은 인천에서 굴을 따고 또 밤을 새워 굴을 까다가 연안부두에 나가 상인에게 팔고, 그 돈으로 쌀과 보리를 사서 생계를 이어오신 분들입니다. 그들이 싸 온 주먹밥은 보리쌀이 전부였고, 밀기울(밀겨)을 버무린 찬밥을 더운물에 말아 먹곤 하였습니다. 물론 당시는 경제가 어려워 온 국민이 어렵게 지내던 시절이었고, 수복호의 선장을 비롯하여 그 선박을 타고 다니는 아주머니들 모두가 어렵게 살았습니다. 하지만 경제적으로 어렵게 살았다고 해서 불행했다고 생각하진 않습니다. 선장과 아주머니들 모두 한식구처럼 지냈습니다. 어려운 일이 있으면 서로 걱정해 주고 도와주고 슬픈 일에는 서로 위로해 주며 웃음을 잃지 않고 지내 왔습니다 .. (머리글 / 수복2호 선주 최영식)
지금 살고 있는 집이 4월이면 계약이 끝나는데, 만석동이나 북성동, 또는 송월동이나 화수동, 또는 화평동이나 송현동으로 옮겨 갈까 하고 생각해 봅니다. 남들은 살기 싫다고 나오는 동네이지만, 그래도 이 동네에는 아직 보증금 50에 월세 25만 원짜리 방, 보증금 100에 월세 15만 원짜리 방, 보증금 200에 월세 10만 원짜리 방이 있어요. 저는 보증금 100에 월세 10만 원짜리 방을 찾아보고 있습니다. (4342.2.24.불.ㅎㄲㅅ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