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에게 말을 걸다 - 백성현 포토 에세이
백성현 지음 / 북하우스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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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 = 삶’인 줄 알면, 사진은 저절로 예술이 된다
 [잠깐 읽기 23] 백성현, 《당신에게 말을 걸다》


- 책이름 : 당신에게 말을 걸다
- 글ㆍ사진 : 백성현
- 펴낸곳 : 북하우스 (2008.12.19.)
- 책값 : 15000원



 (1) 사진, 사진기, 사진쟁이


 사진 찍는 사람 많고 사진 즐기는 모임 많습니다. 이제는 사진이 따라붙지 않는 신문기사를 찾아보기 어려우며, 사진이 함께하지 않으면 재미없어 하거나 지루해 하기까지 합니다. 글로만 이야기를 건네는 문학책에도 사이사이 사진(또는 그림)이 끼어들기 일쑤이고, 과자봉지며 길거리에 붙거나 흩날리는 광고전단지에도 사진이 박혀 있습니다.

 초상권이란 예전에도 있었고 오늘날에도 있으나, 오늘날 최민식 님처럼 《인간》 사진을 찍으면 틀림없이 멱살잡이가 나오거나 법원에 서야 하지 않으랴 싶습니다.

 필름사진만 있던 때, 35미리 필름 쓰는 사람을 바라보는 중형 필름 쓰는 사람은 ‘저걸로는 사진이 안 나온다’고 여겼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대형 필름 쓰는 사람은 중형 필름으로는 사진이 나올 수 없다고 여겼습니다. 그런데 똑같은 35미리 필름을 써도, 완전수동 기계식을 쓰는 사람은 완전자동 전자식을 쓰는 사람을 ‘사진도 모르는 녀석’이라고 바라보기 일쑤였습니다. 옛날, 그리 멀지 않은 열 해쯤 앞서만 하더라도.


.. eos5, eos1 ……. 그건 선배들이 사용하는 까맣고 커다란 렌즈가 달린 카메라였는데, 그냥 보기에도 비싸 보였다. 선배들은 보도반이라는 자부심과 함께, 보여지는 것에도 꽤나 신경을 쓰는 듯했다 … 요즘이야 디지털카메라를 쓰는 사람들이 워낙 많아서 수동 필름카메라를 보면 괜히 예뻐 보이고 무언가 특별한 듯 시선을 주곤 하지만, 그때는 단지 한물 간 카메라를 구입했다는 생각에 속상하기만 했다. 집에 와서도 계속 인상을 쓰고 툴툴거리고 있는데 아버지가 들어오셨다. 새 카메라를 구경하자고 하셨는데, 나는 오만가지 인상을 쓰며 보여드렸다. 아버지는 내게 왜 기분이 그리 안 좋은지 물어 보셨다. 나는 철없는 소리만 해댔다. “다른 친구들과 선배들은 모두 좋은 카메라 쓰는데 나만 싸구려 옛날 카메라 쓰는 게 창피해요!” 나의 철없는 투정을 다 들으시더니 아버지께서 말씀하셨다. “좋은 펜을 쓴다고 글씨가 잘 써지는 것이 아니다.” 다음날 보도반 선배들이 한 명씩 새로 구입한 카메라를 보자고 했다. 아니나다를까 다른 친구들은 모두 선배들이 추천해 준 좋은 카메라를 자랑하듯 꺼냈다. 나는 풀이 죽은 채 가방 안에 숨겨 두었던 카메라를 꺼내들었다. 선배들과 친구들은 표현하지는 않았지만, 내 카메라를 본 순간 보도반 안에는 묘한 기운이 돌았다. 선배들은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고, 다들 카메라를 새로 샀으니 열심히 하자며 교실로 돌아가자고 했다. 친구들은 어깨에, 목에, 카메라를 자랑하듯 걸었고, 나는 카메라를 가방에 다시 집어넣었다 ..  (33∼34쪽)
 





 저는 1998년부터 사진을 배우고 찍었습니다. 그무렵 제 한 달 벌이는 16만 원이었고, 이 가운데 9만 6천 원을 적금으로 붓던 터라 사진기를 장만하는 일이란 꿈처럼 아득했습니다. 어렵사리 후배한테 미놀타 x-700을 빌려 썼는데, 제가 일하며 머물던 신문사지국에 도둑이 들어, 두어 달 만에 이 녀석을 잃어버렸습니다. 후배한테 사진기를 돌려주어야 하고, 저도 사진을 찍어야 하기에, 그때 우체국에서 이십만 원 빚을 얻어 미놀타 x-700을 재활용매장에서 13만 원을 주고 겨우 다시 장만했습니다. 저로서는 없는 돈을 털어 장만한 사진기였고, 이 사진기로도 제가 바라는 모습을 얼마든지 담을 수 있었기에 늘 목걸이처럼 목에 걸고 다녔고, 집식구나 동무나 선후배들 사진을 즐겨 찍어 주었습니다.

 그러고 두 해 뒤, 신문배달을 그만두고 들어간 출판사에서, 사장님이 새해 선물이라면서 저한테 캐논 이오에스 5번을 덜컥 장만해 주었습니다. 이때만 하여도 필름 사진기에서 이오에스 5번은 프로와 아마가 두루 쓰던 ‘값싼’ 장비라고 했는데, 그렇더라도 백만 원을 치러야 하는 녀석이었습니다(요즈음 이 녀석은 25만 원밖에 안 합니다).

 출판사에서 일하는 동안 한 달 일삯 62만 원을 받았고, 신문배달 할 때와 견주어 여러 곱이 되었기에 푼푼이 돈을 모아, 미놀타 사진기는 후배한테 돌려주고, 저는 캐논 AE-1로 기종을 바꾸었습니다. 이때나 예전이나, 또 요즈음이나, 미놀타 x-700이나 x-300을 쓰는 사람은 아주 드물었고, 캐논 AE-1을 쓰는 사람도 퍽 드물었습니다. 예전 35미리 수동사진기를 쓰는 이들은 으레 니콘 FM-2나 콘탁스나 펜탁스를 썼지, 미놀타나 캐논은 ‘쓸 만한 녀석’이 못 된다고 여겼습니다. 그래도 저는, 13만 원짜리 미놀타에서 28만 원짜리 캐논으로 한 계단 올라선(?) 일만으로도 주머니가 홀쪽해졌고, 홀쪽해지는 주머니에도 ‘이제는 함부로 기계 탓을 하면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렇지만 다른 사진쟁이도 비슷할 텐데(《당신에게 말을 걸다》를 쓴 백성현 님도 이천만 원이 넘는 사진장비를 도둑맞았다고 했습니다), 그 뒤로 캐논 이오에스 5번과 AE-1에다가 애써 찍은 필름이 든 사진가방을 두어 차례 도둑맞았고, 눈물을 쪽 빼면서 새롭게 사진장비를 장만할 때, ‘아예 더 낫다고 하는 장비를 써 보자. 또 도둑맞아도 나중 일이고, 어쨌든 쓰고픈 장비를 써 보자’고 하면서, 48만 원 하던 FM-2를 장만했습니다. 전자식 이오에스 5번은 중고 C급으로 70만 원을 치러 새로 장만하면서.


.. 한국에 돌아와 제일 먼저 한 일은 사진관으로 달려가서 카메라(1회용카메라)를 맡긴 것이었다. 다음날 사진을 찾아 연습실에 들고 갔다. 사진을 찾아왔다는 말에 모두들 나에게 달려들었다. 한 장 한 장 사진을 보며 다들 말도 많고 웃음이 흐르는 즐거운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모두들 자기 사진을 보며 웃고 떠드는데, 나는 혼자 흐뭇함과 복잡함에 휩싸였다. 그 순간 이런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사진이라는 것은 이런 거구나, 사람들이 참 좋아하는 거구나 ..  (91쪽)
 





 처음 사진을 배우며 찍을 때 부럽게 바라보았던 FM-2를 손에 쥐니 살짝 떨리기까지 했습니다. 사진관 분은 ‘니콘은 사람들이 워낙 많이 써서 오히려 잔고장이 있을 수 있다’고 이야기하며 ‘캐논이나 미놀타가 값도 싸고 사진도 잘 나온다’고 값싼 녀석을 써도 괜찮다고 했습니다. 그렇지만 제가 찍는 사진감인 ‘헌책방’을 무지개빛 필름으로 담아낼 때에는, 미놀타와 캐논보다는 니콘이 한결 잘 나왔습니다. 헌책방 사진은 늘 실내에서 찍어야 하고, 형광등 불빛 때문에 렌즈에 FL-W 필터를 꼭 끼어야 합니다. 바깥에서 햇볕을 받으며 사람이나 풍경을 찍는다고 한다면 미놀타와 캐논도 훌륭하지만, 제 사진감을 헤아릴 때에는 달랐습니다.

 라이카 사진기만 쓰는 한 분이 ‘책’을 사진감으로 삼아 우리 동네 헌책방에서 사진일을 하고 있습니다. 얼마 앞서 이분 사진기를 몇 초쯤 빌려 ‘라이카에 눈을 박고 헌책방을 죽 돌아보’았습니다. 그러니 웬걸, 헌책방을 사진으로 찍는다고 할 때에, 니콘보다 라이카가 느낌과 화각이 한결 뛰어납니다. 라이카 쓰시는 분은 ‘단추를 눌러서 한 번 찍으셔도 돼요’ 했지만, 단추까지 누르지 않았습니다. 속에서 눈물이 났거든요. 사진은 ‘돈으로 장만하는 장비로 찍지 않는다’고 생각하며 살았지만, 이런 장비가 있으면 어마어마한 구석을 채워 주는구나 하고 느꼈습니다.

 나로서는 꿈도 꿀 수 없는 장비이구나 싶고, 며칠쯤 사진기앓이를 합니다. 그러나 이런 장비를 쓰시는 분은 그분대로 푼푼이 돈을 모아서 장만하셨을 테고, 멋이 아닌 발바닥으로 찍으시는 만큼, 나는 나대로 내 발바닥으로 사진을 찍으면 그만이 아니겠느냐, 내 장비가 많이 뒤떨어지면 뒤떨어지는 만큼 더 부지런히 땀흘리면 되지 않느냐고 생각을 고쳐먹습니다. 좀더 헤아리면, 저보다 주머니가 홀쭉한 분은, 제가 쓰는 장비만큼도 못 갖추고 있지 않겠습니까. 사진찍기를 하고 싶어도 사진기 살 돈조차 없을 뿐더러, 사진기를 들고 다니며 찍을 겨를 없는 분도 있을 테고요.


.. 런던의 한 노천카페 앞. 열 살 남짓 한 꼬마가 대낮에 맥주를 마시고 있었다. 처음에 나는 그저 어이없이 그 아이를 쳐다보고 있었다 … 나는 카메라의 노출을 적정으로 맞춘 뒤, 아이가 있는 쪽으로 천천히 다가가 순간을 놓치지 않기 위해 셔터를 눌렀다. ‘찰칵’, 순간, 셔터 소리를 들은 아이가 나와 정확히 눈이 마주쳤다. 사진을 찍힌 아이는 내게 맥주캔을 집어던지더니 사람들 사이로 빠르게 사라졌다 … 아직도 그 아이에게 너무나 미안한 마음이 든다. 다시 그때로 돌아가 나도 맥주 한 캔을 들고 그 옆에 앉아 시원하게 한잔 마시며 말동무나 되어 주었으면 좋으련만 ..  (177쪽)
 





 늘 느끼고 있는데, 사진을 못 찍는 바보 같은 마음일 때 장비 탓을 합니다. 또, 자기가 다른 일로 바쁘다는 핑계를 댑니다. 무슨 사진을 어디에서 찍든, 자기 마음에 찰 때까지 두 번 세 번 열 번 스무 번 백 번 이백 번 거듭거듭 찾아가야 합니다. 때로는 그곳에서 그 사람들과 한솥밥을 먹으며 살아야 합니다. 김영갑 님이 찍은 제주섬 오름 사진은 제주섬에서 오름 곁에, 아니 오름과 함께 먹고살았기에 담아낼 수 있었습니다. 김영갑 님 앞이나 뒤에 제주섬 오름을 찍는 분이 제법 많은데, 이분들은 한결같이 구경꾼 사진만 찍었습니다. 요즈음도 오름을 구경꾼 사진으로만 멋들어지게 담아낼 뿐입니다. 이런 사진을 보면서 멋있다 말하고 훌륭하다 말하는 분이 꽤 많지만, 제 눈으로는 한낱 겉멋과 겉치레로만 느껴집니다. 제주 두모악갤러리에서 본 김영갑 님 오름 사진은 저를 그 자리에 못박히도록 하고 눈물이 뺨을 타고 흐르게 이끌었지만, 김영갑 님을 뺀 다른 분들 오름 사진은 ‘이 따위를 사진이라고 찍었나? 찢어버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게 합니다.

 자기 사진감하고 먹고살면서 일궈낸 작품으로 안승일 님이 빚은 《굴피집》이 있습니다. 안승일 님은 산 사진만 찍던 분인데, 자기 사진감으로 지루해 하던 어느 날 중국으로 사진여행을 하다가 문득 깨달아 부랴부랴 한국으로 돌아와 ‘가장 한국다운 한국땅과 한국사람이 무엇인가’를 헤아린 끝에 강원도 산골짝 굴피집 한 채를 찾았고, 이 굴피집을 열 해에 걸쳐 뻔질나게 찾아가고, 때로는 두어 달씩 굴피집 두 늙은 식구와 한솥밥을 먹기도 하면서 사진을 찍었습니다. ‘굴피집 딸아들보다 더 살가이 지내며 사진을 찍은’ 안승일 님은 ‘다른 사진은 다 찍었지만 한 장을 아직 못 찍어’ 열 해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고 했는데, 이 한 장은 가을날 산자락 논에 누런 물결이 일렁이는 모습을 담는 사진입니다. 둘레 산꼭대기에 올라서 굴피집 앞으로 펼쳐진 다랑이야 어찌 보면 흔한 사진인데, 아주 맑고 구름 몇 점 살짝 흩뿌려진 날씨에 누렇게 일렁이는 나락 물결을 담을 수 있는 날은 한 해에 며칠이 안 됩니다. 한 해 가운데 하루도 없을 수 있습니다. 있더라도 때를 놓치면 못 찍습니다.

 김기찬 님이 담은 《골목 안 풍경》도 빼놓을 수 없는 ‘이웃사촌 사진’입니다. 김기찬 님은 골목길에서 살지 않았습니다만, 골목길이 훌륭한 사진감이 되는 줄 깨달으면서, 오래도록 골목길을 두 다리로 거닐고 골목집 사람하고 이웃이자 동무이자 말벗으로 사귀면서 사진을 일구었습니다. 골목사람 스스로 골목 삶터를 사진으로 담아내지 못하던 1980∼90년대에 부지런함 하나와 수수함 하나를 모아 눈물과 웃음이 함께 어우러진 사진 열매를 맺었습니다. 골목길은 있는 그대로 예술이 되고 문화가 됨을 몸으로 깨닫고 마음으로 느끼면서 사진을 즐겼습니다. 오늘날이나 옛날이나 골목길을 사진감으로 삼는 이들이 꽤 많은데, 이들은 하나같이 ‘구경꾼 곁다리 사진’ 틀을 넘어서지 못합니다. 구경꾼이라 하여도 오래도록 머물고 자주 찾아오면서 골목을 마음으로 품어야 비로소 무엇을 찍어야 하는지 눈길이 틉니다. 그렇지만 빨리빨리 얼른얼른 예술작품 얻어내려는 싸구려 생각에 젖은 채, 자기 머리를 깨지 않으니 골목길을 골목길 그대로 담지 못해요.

 헌책방이나 골목길이나 마찬가지인데, 헌책방도 골목길도 ‘꾀죄죄하거나 퀴퀴한’ 곳이 아닙니다. ‘마냥 어둡기만 한’ 곳이 아니며, ‘추억이 묻은’ 곳 또한 아니에요. 무슨 얼어죽을 추억입니까. 당신들이 언제 헌책방을 열 해 스무 해 단골로 날마다 찾아다녔기에 추억이고, 당신들이 언제 골목집에서 태어나 열 해 스무 해 서른 해 마흔 해 살아 보았기에 추억입니까. 달콤쌉싸름한 사탕발림이 아니라 한다면, 헌책방과 골목길을 비롯한 모든 사진감은 몸으로 부대끼고 마음으로 녹여내는 매무새로 다가설 때라야만 사진기를 든 우리한테 문을 활짝 열어 줍니다.


.. 니콘에서 나온 필름 수동카메라인 FM2는 사실 들고 다니기에는 꽤 무거운 편이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추천하기에는 살짝 걸리는 부분이 있다. 요즘에는 콤팩트한 디지털카메라를 들고 다니는 이들이 대부분이라, 그 정도의 무게감을 가진 카메라를 거의 매일 들고 다니는 것은 어떤 이들에게는 쓸데없는 고생처럼 느껴질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처럼 필름으로 사진교육을 받았던 세대의 사람들이나 필름 특유의 색감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는 그러한 단점이 아무런 걸림돌이 되지 않는다. 무겁고 짐이 되는 것이야 사실이지만, 사진가가 원하는 사진을 찍기 위해서라면 조금 무거운 카메라라는 이유는 눈꼽만큼의 영향도 끼치지 않는 법. 마치 사랑하는 이의 단점이 문제되지 않듯 말이다 ..  (347쪽)


 우리한테 ‘아직’ 문을 활짝 열어 주지 않은 사진감한테 사진기를 들이대는 일은 주먹다짐이나 칼부림입니다. 어려운 말로 ‘폭력’입니다. 무시무시한 주먹다짐이고 소름돋는 칼부림입니다. 얼핏 보거나 모르는 눈으로 보기에는 그럴듯할는지 모릅니다. 손뼉칠 만한 예술이라고, 돈이 되는 예술이라고 할는지 모릅니다(이를테면 배병우 님 사진처럼). 그러나, 사진쟁이로서는 더 뻗어나갈 예술을 이루면서 사진에 담아낼 수 있는 틀을 버리고 섣부른 눈요기에 머문 셈일밖에 없습니다. 사진은 기다리면서 이루어지고, 오래오래 곰삭이면서 다시 태어나기 마련인데, 날짜를 못박고 이때까지 뭘뭘뭘 찍어대자고 한다면, 어줍잖은 틀로는 마무리될는지 모르지만, 제대로 담아낼 사람 삶터나 자연 삶터를 스며들게 하지 못해요.

 스스로 내로라하는 사진쟁이 많고, 사진잔치 끊임없이 전국 곳곳(거의 모두 서울입니다만)에서 다달이 수백 가지씩 펼쳐지고 있으나, 우리 나라는 아직 ‘사진문화를 즐기는 나라’라고 말하기 어렵습니다. 사진기 든 손은 많으나 사진기를 배우는 손은 적고, 사진기를 휘두르는 주먹은 많으나 사진기를 쓰다듬는 손길은 드뭅니다. 사진으로 밥벌이하는 사람이 늘지만 사진으로 사랑을 나누는 사람은 적고, 사진으로 이름값 높이는 사람이 생기지만 사진으로 삶을 아름답게 가꾸는 사람은 드뭅니다.
 



 (2) 아직 설익은 《당신에게 말을 걸다》이지만


 사진과 글로 이야기를 건네는 《당신에게 말을 걸다》를 읽습니다. ‘코요태 래퍼 빽가’로 방송에 얼굴을 내밀었다고 하는 백성현 님은, 연예인으로 뛰기 앞서 사진길을 걷고픈 꿈이 있었다고 합니다. 집안살림이 넉넉하지 못해 사진길은 일찌감치 접어야 했다지만 사진길을 놓고 싶지 않았고, ‘사진 = 삶’임을 어렴풋하게 느끼면서 지금과 같은 자리에 섰구나 싶습니다.


.. 아버지는 아주 검소하시다. 특별한 날이 아니면 자동차를 타지 않으시고 대중교통만을 이용하신다. 그리고 3년 전부터는 자전거만 타고 다니신다. 부모님 집은 일산이고 내가 사는 곳은 강남인데, 일산에서 강남까지도 자전거를 타고 다니신다 ..  (278∼280쪽)


 ‘사진 = 삶’인 까닭을 고개 끄덕이며 읽어내지 못하면 사진을 즐기지 못합니다. ‘삶 = 일’이자 ‘삶 = 놀이’인데, ‘일 = 놀이’입니다. 억지로 힘겹게 돈벌이만 해야 하는 일이라면, 놀이 또한 돈만 펑펑 쓰면서 몸을 마구잡이로 부리는 억지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적게 벌든 많이 벌든 남이 알아주건 안 알아주건 스스로 즐겁고 기쁘게 일을 할 수 있는 마음그릇이라면, 자기가 즐기는 놀이도 돈하고는 아랑곳없이 언제나 가슴벅참과 가슴뜀을 느낍니다. 이러는 가운데 사진을 자기 일감이나 놀이감으로 삼을 때 시나브로 ‘사진 = 삶’이 이루어지면서, 자기가 펼치는 사진 하나마다 저절로 예술이 되고 바야흐로 문화가 되어요.


.. 많이 찍고 주변사람들에게 많이 보여주고, 그러다 보면 자연스레 남들이 좋아하는 구도와 당신이 좋아하는 구도가 나올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당신의 구도가 될 것이다 ..  (357쪽)
 





 그런데 백성현 님이 빚은 《당신에게 말을 걸다》는 스스로 ‘말을 건다’고 하면서, 백성현 님 모습을 모두 드러내지는 않은 듯합니다. 좀더 남김없이 털어내지는 못한 듯합니다. 아직 자기 나름대로 사진길을 마무리하지 못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차근차근 만들어 나가고 있으니 ‘이것이 백성현 사진이다’ 하고 말할 만한 모습을 못 보여주지 않느냐 싶습니다.

 앞으로 더 힘차게 사진길을 걷고, 더 바지런히 사진나라를 열며, 더 널리 사진밭을 일구면서 “당신에게 말을 걸다”가 아닌 “나(백성현)한테 말을 걸다”를 보여주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먼저 나한테 말을 걸 수 있을 만큼 땅을 디디고 땅냄새를 맡은 뒤 “당신한테 말걸기”를 해도 늦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아직 우리한테 말걸기를 할 만한 이야기가 넉넉하지 않은데 섣불리 말걸기부터 하고 나면 백성현 님 두 손에 무엇이 남겠습니까. 사진길 걷는 수많은 분들이 소리와 이름 없이 열 해나 스무 해씩 자기 사진작품을 고이 모셔 두고 갈고닦으면서 기다리는 까닭을 백성현 님 스스로 더욱 곱새길 수 있으면 고맙겠습니다. 사람은 저마다 달라, 누구는 오래 곰삭이는 사진을 빚고 누구는 금세 짠하고 보여줄 사진을 빚기도 하지만, 곰삭이든 짠하고 보여주든 ‘똑같은 사진’입니다.

 백성현 님 스스로 다부지게 사진길을 걷노라 말하려 한다면, 사진작품 귀퉁이에 ‘백성현 것’이라고 이름을 안 적어 놓아도 ‘이 사진은 백성현이 사진이군’ 하고 고개를 주억거릴 만하게 사진기와 살아내야 한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아무튼, 사진길을 걷노라 당차게 밝히신 만큼, 이 길에서 흔들리지 말고 꼿꼿하게 길닦기를 해 보시면 좋겠습니다. (4342.1.31.흙.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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