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으로 보는 눈 72 : 허영만 씨가 《퇴색공간》을 그릴 자유

 겨울철에는 낮 한 시와 두 시 사이에 어김없이 빨래를 합니다. 밤과 새벽에 한 차례 더 빨래를 하는데, 영하를 오르내리는 우리 집에서는 빨래가 잘 마르지 않아, 한낮을 놓칠 수 없습니다. 이맘때 누군가 만나자고 한다든가 전화라도 한 통 걸려오면 고단합니다. 마침 가장 따뜻한 때라, 아기를 씻기며 남은 물로 빨래를 하는데, 씻기랴 빨래하랴 전화통 붙잡으랴 말이 아닙니다. 그래서 어떤 분들은 ‘그렇게 애먹지 말고, 종이기저귀 사다 쓰지’ 하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이런 고단함이 종이기저귀 사다 쓴다고 풀리겠습니까. 외려 종이기저귀는 우리 삶뿐 아니라, 자라날 아기한테도 나쁘게 영향을 끼칠 텐데요. 빨래가 따사로운 햇볕을 받을 수 있기를 바라듯, 아기도 맑은 햇살과 파란 하늘을 즐기면서 무럭무럭 크기를 바랍니다.

 한창 기저귀를 빨면서 오늘 저녁은 무얼 마련하고, 저녁까지 무슨 일을 할까 생각하다가, 지난달부터 붙잡고 있는 만화책 하나에 생각이 미칩니다. 서울 숙대입구역 둘레에 있는 헌책방에서 찾아낸 한 권짜리 대본소판 만화인데, 그린이는 허영만 님이고, 책이름은 《퇴색공간》입니다. 나온해는 1990년입니다. 만화쟁이 허영만 님은 잡지 《만화광장》에 1987년 6월부터 〈오! 한강〉을 이어실었고, 나중에 이 작품을 세 권짜리 낱권책으로 묶어서 1988년에 펴냅니다. 그런 다음 《퇴색공간》을 그린 셈인데, 《오! 한강》 세 권은 김세영 님이 글을 넣었으나, 《퇴색공간》은 글과 그림 모두 허영만 님 혼자 해냈습니다. 많은 이들이 ‘시대를 읽은 훌륭한 만화작품’으로 《오! 한강》을 손꼽기도 하고, 대학생들한테는 필독서 못지않았다는 대접을 받았다고도 하는데, 참말 이와 같은 소리를 들을 만한가에서는 고개를 갸웃거리게 됩니다. ‘작품완성도’나 ‘작품 재미’로는 뛰어날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이러한 작품들은 무엇을 보여주거나 들려주고 있을까요. ‘노동운동이나 학생운동은 배후조종자가 있고, 이들은 자본주의를 뒤엎으려는 폭동을 꾀하면서 우리 경제를 무너뜨릴 뿐’이라는 ‘서민들 생각과 목소리’일까요? 그린이 자유에 따라서 줄거리를 엮기 나름일 테지만, 《오! 한강》이며, 《퇴색공간》이며, 허영만 님이 바라보는 세상이 무엇인가를 찬찬히 보여주고프다면 보여줄 노릇이지만, 작품 하나가 독자들한테 받아들여지는 우리 얼거리를 돌아볼 때에는 무섭기 그지없습니다. 대학생이라면 으레 데모나 하고 있고, 이 데모 때문에 ‘착한 시민들’이 고달프다며, “좀 조용히 살자! 조용히! 누가 옳고 누가 나쁘든 제말 그만둬!(24쪽)” 하는 대사와 그림을 큼직하게 집어넣을 때, 이 나라 어린이와 젊은이는 이 만화를 보면서 무엇을 느끼게 될까요. “좌경세력에 의해서 노조가 결성되면 회사가 망하는데 가만히 있을 수 없었어요.(158쪽)” 같은 대사는 우리 삶터를 어떻게 보여주게 될까요.

 자유와 책임이 함께해야 한다고 말할 마음은 없습니다. 다만, 허영만 님한테 ‘노동운동 = 빨갱이’라 말할 권리가 있되, 이런 만화를 그린 허영만 님을 비판할 권리 또한 누구한테나 있다는 말 한 마디만 하고 싶습니다. (4342.1.8.나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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