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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핑크스의 코
리영희 지음 / 까치 / 1998년 11월
평점 :
절판
이 책 하나 71 ― 쉽게 읽을 수 없을 뿐더러 쉬 버려지는 ‘리영희’ 넋
: 리영희, 《스핑크스의 코》
- 책이름 : 스핑크스의 코
- 글쓴이 : 리영희
- 펴낸곳 : 까치 (1998.11.5.)
- 책값 : x (판 끊어짐 / 도서관에서 빌리거나 헌책방에서 찾아내어 읽어야 함)
(1) 리영희 님 책
1999년 봄, 늦게 군대에 간 고등학교 적 동무녀석이 휴가를 나온다고 해서, 동네 책방에 들러서 《스핑크스의 코》를 샀습니다. 군대에서 ‘리영희 님 책’을 불온도서로 삼아 자칫 동무녀석이 괴롭힘을 받을지 모르는 노릇이지만, 책이름만 살피는 군대 검열이라면 아무 걱정이 없으리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리고, 차례를 살핀들, 또 책을 좀 훑는들 《스핑크스의 코》가 담은 넉넉한 이야기를 얻어내야지, 책 하나를 불온도서로 삼으며 우리 생각과 삶을 억누르면 안 되리라 생각했습니다. 무엇보다도 동무녀석이 군대에서 돌머리가 되고 봉건계급질서에 길들이게 되더라도 마음 하나만은 다부지게 가꾸어 주기를 바라면서 이 책 《스핑크스의 코》를 선물해 주었습니다.
마땅한 소리입니다만, 동무녀석한테 선물해 주기 앞서 제가 먼저 이 책을 다 읽고서 건넸습니다.
.. 신에게도 국적이 있는 것일까? 하느님도 인간처럼 인종차별적 존재일까? 미국인에게 손가락질 한 번 하지 않은 무고한 베트남인들에게 폭탄세계를 퍼붓는 폭격기 편대의 출격에 앞서서 조종사와 폭격수들에게 그렇게 축도하는 장면을 볼 때마다 나는 한국전쟁 최전방의 건봉산 향로봉 진부령 꼭대기에서 품었던 심각한 종교적 회의를 더욱 굳힐 수밖에 없었다 … 과연 종교가 없는 것이 ‘불행’일까? 종교가 있는 사회는 종교가 없는 사회보다 반드시 더 나은 사회일까? … 남한의 종교와 종교인이 북한과 북한인에게 부처님과 예수님의 가르침을 전파하려고 나서기에 앞서, 자신과 자신의 종교와 자신의 사회부터 걱정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 (23, 32, 35쪽)
책을 선물해 준 지 어느덧 열 해가 가까운 2008년, 세월은 흘렀어도 틀거리나 제도는 그리 달라지지 않았다고 느껴지는 군대에 ‘돌머리 되기 + 봉건계급질서에 길들기’에 시달려야 할 후배가 있다면 《스핑크스의 코》를 다시 한 권 사서 선물해 주고 싶은데, 그만 판이 끊어져서 더는 새책으로는 만날 수 없게 됩니다.
판이 끊어진 지는 몇 해 되었지 싶습니다. 《리영희 저작집》(한길사)이 지난 2006년 8월에 나오기는 했는데, 자그마치 26만 4천 원이나 하는 열두 권짜리 책도 ‘품절’이 되었고, 다시 찍어서 우리가 즐겁게 만날 수 있을는지는, 아니면 《스핑크스의 코》처럼 ‘절판’이라는 길을 걸을는지는 모를 노릇입니다.
세상이 아는 ‘시대를 밝힌 지성’이며 ‘사회를 일깨우는 스승’이며 ‘나라를 빛내는 어른’이라 할 만한 리영희 님입니다만, 우리들이 리영희 님 책을 대접하는 매무새는 영 ‘아니올시다’입니다. 지나치게 비싼 판짜임으로 펴낸 출판사 탓이 한몫 하기는 했어도, 한 달 기름값조차 되지 않을 《리영희 저작집》임을 헤아린다면, 집에서 자동차 굴리는 분들께서는 ‘3개월 카드 할부’나 ‘6개월 카드 할부’로 긁어서라도 장만해서 마음밭 살찌우기쯤은 해 줄 만한 마음바탕은 되어야 이 사회고 세상이고 나라가 바뀔 텐데 하는 생각을 지울 길 없습니다.
.. 한국이라는 사회와 그 속에 사는 인간들이 예수님의 계율에 역행할수록 교회는 ‘번창’한다는 방정식이 입증되었던 것이다. 교회가 혹시 ‘장사’가 되지는 않았는지? 불교는 그렇지 않다고 장담할 수 있는지? … ‘하나님의 집’은 저렇게 화려하고, 크고, 웅장하고, 돈으로 발라대야 하는 것일까? 나는 그 앞을 지나가면서 벌을 받을 것 같은 두려움을 견딜 수 없다. 사찰은 어떤가? … 내가 2년 전에 이사 와서 살고 있는(1994년) 경기도 군포시 산본이라는 작은 신도시 아파트 단지에서도 거대한 ‘하느님의 성전’을 짓는 경쟁이 한창 벌어지고 있다. 밤이 되면 주민이 고작 10만의 신도시에 수백 개의 교회와 성당의 첨탑 끝 십자가의 빨간 네온사인이 밤하늘을 비춘다 … 1백 미터의 거리도 두지 않고 서로 담을 잇대어서 올라가고 있다. 그 건축비를 모두 모으면 아마도 수백억 원이 될 것이다. 한국의 기독교 신자들이 하느님의 축복을 받은 것은 확실한 성 싶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저렇게 엄청난 돈이 드는 최고급의 호화롭고 웅장한 교회가 매일같이 새로 세워질 수 있겠는가? … 하느님과 부처님을 초대하여 모시겠다는 물질적 표시인 성당과 교회와 절은 날마다 숫적으로 늘어나면서 크고 높고 화려해지는데, 그 인간들이 엉켜서 살아가는 이 나라와 사회는 인간적으로, 정신적으로, 영적으로 날마다 메말라가고 있다 .. (42∼44쪽)
주머니가 넉넉하지 않을 뿐더러 카드 긁을 틈이 없다면, 헌책방이 있습니다. 비록 판이 끊어지기는 했어도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난다》(두레,1994)라든지 《반핵》(창작과비평사,1988)이라든지, 《역설의 변증》(두레,1987)이라든지, 《베트남 전쟁》(두레,1985)이라든지, 《10억인의 나라》(두레,1985)라든지, 《80년대 국제정세와 한반도》(동광출판사,1984)라든지 《8억인과의 대화》(창작과비평사,1977)라든지 《우상과 이성》(한길사,1977) 같은 책은 얼마든지 싼값으로 찾아서 읽을 수 있습니다. 단돈 몇 천 원이면.
《전환시대의 논리》(창작과비평사)나 《역정》(창작과비평사)이나 《인간만사 새옹지마》(범우사) 같은 책은 아직도 새책방에 남아 있기도 합니다. 이 세 가지 책은 헌책방에 꾸준히 나오기도 합니다.
새책방에서 오래도록 사랑받는 《반세기의 신화》(삼인)나 《대화》(한길사)는 그나마 남아 있는 리영희 님 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 매일 매순간, 신문의 증권 동향의 깨알 같은 숫자를 들여다보면서, 아침에는 기뻐 날뛰고 저녁에는 하늘이 무너지는 슬픔과 두려움과 ‘기대의 배신’에 분노하는 삶이란, 상상만 해도 겁이 나고 역겹다 … 주식의 긍정적 기능만을 찬양하는 천박한 일부 경제학자와 주식꾼들은 증권시장을 ‘자본주의의 꽃’이라고 한다. 그러나 ‘자본주의의 꽃’은 돈을 만들어 주는 한편으로, 인간의 물질적 행복을 위해서 요긴하게 쓰일 물자를 대량으로 낭비하는 군비확장을 다그칠 뿐만 아니라, 수천만 명의 인간생명과 상상할 수조차 없는 재부를 파괴해 버리는 처참한 전쟁을 만들어내는 ‘독을 품은 꽃’이기도 하다 .. (112, 114쪽)
생각해 보면, 1970∼80년대에는 리영희 님 책이 널리 읽혀야 할 때였고, 1990∼2000년대에는 리영희 님 책이야 읽건 말건 아랑곳 없을 때인지 모릅니다. 다가올 2010∼20년대에는 리영희라는 이름 석 자는 먼지처럼 잊혀질 때가 될 수 있어요. 판이 끊어진 리영희 님 70∼80년대 책들은 몸글에 한자가 많이 드러나 있기도 해서 읽기가 수월하지 않습니다. 한글로만 된 책도 옛 말투가 퍽 많아 요즘 사람한테는 벅차기도 합니다. 그래서 《스핑크스의 코》는 《반세기의 신화》와 함께, 리영희 님이 손수 생각을 가다듬고 되새기면서 쓴 둘도 없이 애틋한 책이건만, 이러한 책을 우리가 어느 동네 책방에서나 홀가분하게 만날 수 없게 된 일은 더없이 안타깝고 슬프고 서운합니다.
.. “베트남이 공산화되면 전체 아시아 국가가 도미노 패가 쓰러지듯이 차례차례로 쓰러지고 공산화된다.” 이것이 미국이 작은 베트남은 사태를 ‘인도지나 전쟁’으로 확대한 전쟁 논리였다. 그 당시 한국국민은 미국의 현대판 십자군 전쟁과 같은 광신적 반공주의의 허구 논리의 본질을 간파할 지식과 사상적 능력이 없었다. 사회와 국민을 계몽해야 할 나라의 소위 ‘언론기관’들과 ‘언론인’들이 앞다투어 ‘도미노 이론’의 나팔수가 되었다 .. (250쪽)
지난해 2월, 헌책방 책시렁에서 《스핑크스의 코》를 오랜만에 다시 만난 뒤로 며칠 걸러 조금씩 다시 읽어 나갔습니다. 이제는 리영희 님이 손수 쓰는 새로운 책이 다시 나오기 힘들기 때문에, 이 책이 제가 읽을 수 있는 리영희 님 마지막 책이 아닐까 싶어서, 다시 읽는 책이기는 하지만, 아주 천천히, 야금야금, 곱씹고 되씹고 거듭 씹으면서 새로 읽었습니다.
우리 사회는 1970년대나 2000년대나, 또 1960년대나 2010년대나, 그리고 1970년대나 1980년대나 그리 달라지지 않았다고 느낍니다. 사회 얼거리뿐 아니라 사회에서 주름잡는 사람부터 초중고등학교 입시교육과 문화예술과학기술 모든 자리와 농어촌 살림과 도시 노동자 일삯과 노동조합까지, 어느 한 군데 한결 나아지거나 튼튼하게 뿌리내렸다고 할 만한 모습을 찾아볼 수 없다고 느낍니다. 그래서 2010년을 앞두고 있는 2008년인 오늘날, 1998년에 나온 《스핑크스의 코》며, 1987년에 나온 《역설의 변증》이며, 1977년에 나온 《전환시대의 논리》며, 다루는 이야기감만 달라졌을 뿐, 다루려는 속내와 밑뿌리는 똑같다고 느낍니다.
세상이 발돋움하면 우리가 ‘고전’으로 삼을 만한 책도 발돋움하는 흐름에 맞추어 새로 꾸며야 할 텐데, 세상은 발돋움하지를 않고 껍데기만 번드레레하게 덧바르고 있습니다. 조금도 발돋움하지 않는 세상이고 쓰레기만 늘어나는 세상이건만, 이런 흐름에다가 쓰레기를 꿰뚫어보는 눈길이 지나치게 얕거나 모자라기에, 리영희 님 책을 새롭게 다시 읽어야 하지 않느냐 생각합니다.
(2) 책 하나와 삶
.. 시가 ‘쉽게’ 쓰여져서는 안 되듯이 소설도 이처럼 작가가 심혈을 기울여 ‘각고한’ 흔적이 뚜렷할 때에 감동을 준다 … 그밖에도 위고는 어느 한 대목도 ‘쉽게’ 넘어가는 일이 없다. 작가가 각고한 흔적을 여기저기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독자로서는 큰 기쁨이다. 나는 문학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온갖 이름모를 꽃들이 피어 있었다”는 표현으로 대표되는 작가의 안이함과 나태를 비꼬는 말들을 자주 들었따. ‘쉽게’ 문학하는 태도를 비판하는 말들이다 .. (69∼70쪽)
골목길을 거닐며 사진을 찍을 때, 늘 이 골목이 어느 구 무슨 동 몇 번지인가를 머리속으로 그립니다. 나중에 집으로 돌아와서 길그림책을 뒤적이면서 제가 거닐었던 골목을 번지수까지 하나하나 살피면서 조각맞추기를 합니다. 골목길 사진은 예술작품 만들기가 아니라 골목사람 삶을 담아내어 적바림하는 일이기 때문에, 이 집이 어디에 깃들인 곳인지를 헤아려야 하고, 이 집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이웃은 누구인가를 살펴야 하기 때문입니다.
헌책방을 다니며 사진을 찍을 때, 오늘 찾아간 이곳 책시렁이 지난번 찾아왔을 때하고 어떻게 바뀌었는지 헤아립니다. 다른 헌책방 책시렁하고는 무엇이 다르며, 동네마다, 또 큰도시와 작은도시마다 책시렁이 어떻게 다른가를 살핍니다. 그림으로 보기 좋게 담아내는 헌책방 사진이 아니라, 책 하나 매만지는 헌책방 일꾼 손길을 느끼는 사진이면서, 헌책방 한 곳이 깃든 동네 문화를 담아낼 사진이기 때문입니다.
자전거를 사진으로 담을 때에는 자전거를 타는 사람들 자취를 담으려고 합니다. 딸아이 사진을 찍을 때에는 딸아이가 하루이틀 자라는 흐름을 담으려고 합니다. 혼인잔치나 돌잔치 사진을 찍는 자리에서는 죽 흘러가는 차례보다도 잔치날 어우러지는 사람들 마음과 느낌을 담으려고 합니다.
.. 아! 한국의 젊은 여성들은 참 바쁘겠다! 온갖 유행마다 따라야 하는데 그냥 유행을 따라가기만 하면 웃음거리가 되기 일쑤이다. 재빨리 눈치를 살펴서 유행의 홍수 속에 몸을 내던져야 한다 … 그녀들은 ‘현대여성’을 만드는 그 많은 변화무쌍하고 한 계절을 넘기지 못하는 짧은 생명의 ‘유행’들이, 실제로는 유행을 조작함으로써 경제적 이득을 챙기는 자본가들과 ‘유행’이라는 마술로 무제한의 소비주의적 낭비를 조장하는 상품선전 산업의 요술에 불과하다는 사실 같은 것은 알 필요가 없다. 그와 같은 천박한 자본주의의 소비주의적 유행문화는 만물을 상품화하고, 인간을 오로지 그 상품의 소비자로 만들어버리는 경제적, 사회적 매커니즘의 비인간성을 쉽게 드러내 보이지도 않는다. 유행의 탁류에서 허우적거리는 삶을 ‘행복’으로 착각하게 만든다. 소비주의적 자본주의 경제의 유행 창조자들은 젊은 여성들에게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드러내 보임으로써 ‘풍요한 삶’을 살고 있다는 착각을 일으키게 한다. 여성이 배꼽을 드러내거나 반나체가 되는 새 유행의 옷을 남보다 먼저 걸치는 것을 ‘여성 해방’의 ‘실천적 행위’로 미화하는 소비주의 경제와 그 광고산업의 돈줄을 장악하고 있는 것은 압도적으로 남성들이다. 경제력을 지배하고 있는 남성들이 여성의 육체에 수백만 원짜리 옷을 입혔다 벗겼다 하거나, 여성들의 손에 다이아몬드를 끼웠다 빼었다 하는 유행을 ‘현대화’니 ‘풍요’로 미화할 때, 그런 유행 속에 현대화와 풍요를 찾으려는 여성은 남성의 지배에서 영원히 해방될 수 없다 .. (88∼89쪽)
책 하나를 골라서 읽을 때면, 무엇보다도 책이름을 살피고 지은이 이름을 살피며 펴낸곳 이름을 살핍니다. 낯익은 이름과 눈길을 끄는 이름을 집어들기도 하지만, 낯설거나 어설퍼 보이는 이름을 집어들기도 합니다. 낯익은 이름이라고 해서 집어들어 펼친 뒤 책값을 셈해서 집까지 가져가지 않습니다. 낯선 이름이라고 해서 그냥 지나치지는 않습니다. 살펴야 할 대목은 줄거리입니다. 읽어야 할 대목은 줄거리가 얼마나 참되었는지, 줄거리에 얼마나 피땀을 바쳤는지입니다.
책 하나 사들인 다음 읽을 때면, 이 책이 제 가슴에 어떻게 파고드는가를 헤아립니다. 머리를 무겁게 하는 지식이 넘치는 책인지, 머리를 가볍게 하면서 몸을 부지런히 움직이게 하는 책인지, 머리와 몸뚱이 모두 쓰도록 이끄는 책인지 가름합니다.
책 하나를 다 읽고 덮을 때면, 두고두고 되읽을 만하구나 싶어서 둘레에 알리고픈 생각이 드는지, 아니면 돈이 아깝다는 생각이 들어서 아무런 토를 달지 말까 하는 생각이 드는지, 돈이 참 아까웠는데 다른 이들도 돈을 헤프게 버릴까 걱정되어 이 책은 사읽지 않게끔 말려야겠다는 생각이 드는지, 또는 아무 말 없이 책시렁에 얌전히 모셔 두기만 해야겠구나 싶은지를 가누어 봅니다.
.. 뫼와 골짜기, 들과 개울, 나무와 물, 그리고 흙과 공기는 우주창생 때의 색깔 그대로 청명했고 그대로 순수했다. 대자연은 은은한 태고의 내음을 영원히 간직한 채, 사람과 동물의 후각을 쓰다듬어 가벼운 졸음으로 잠들게 하였다. 그 자연의 품 속에서 소년(리영희)은 일 년 열두 달 구리색으로 그을려 있었다. 그리고 마음과 정서를 소년과 함께했던 온갖 나무열매와 산새와 작은 짐승들이 자연 속에 가득했다. 소년은 그 자연의 품에 안겨서 생물들처럼 마음은 싱싱했고 몸은 팔팔했다. 자연도 ‘오염’을 모르고 인간도 ‘공해’를 몰랐다. 자연과 수목과 동물과 인간이 ‘생명’으로서 하나가 된 삶이 있었다. 물질이 인간이었고, 인간이 물질이었다. 그렇게 생각했건 말았건 적어도 소년은 그런 마음으로 자라면 살았다. 그로부터 50년이 훨씬 지났다 .. (262∼263쪽)
성경을 읽는다고 하느님 사랑을 널리 나누면서 살아가지는 않습니다. 불경을 왼다고 부처님 믿음을 고이 베풀면서 살아가지는 않습니다. 리영희 님 책을 읽는다고 리영희 님처럼 세상과 사회와 나라를 깊숙이 파헤치는 마음결이나 손결을 얻을 수 있지 않습니다. 성경에 담긴 하느님처럼 세상과 사회와 나라와 부대끼려고 할 때에야 비로소 사랑이 무엇인지 깨닫습니다. 불경에 깃든 부처님처럼 사람과 자연과 뭇 목숨하고 어우러지려고 할 때에야 바야흐로 믿음이 무엇인지 알아차립니다. 리영희 님처럼 무던히 자기를 갈고닦고 다스리며 일으켜세우고자 할 때에도 시나브로 슬기란 무엇인가를 받아들입니다.
서재 가꾸기를 해서는 삶을 가꿀 수 없습니다. 서재가 아닌 마음을 가꿀 노릇이고, 서재가 아닌 몸을 움직일 노릇입니다. 서재가 아닌 마음을 다스릴 노릇이고, 서재가 아닌 몸을 추스를 노릇입니다.
마음으로 받아먹은 책이 된다면, 이 책은 내 이웃사람 누구한테나 스스럼없이 나누어 줄 수 있습니다. 몸으로 뛰어드는 책이 된다면, 이 책은 헌책방에 내놓아 주머니 가벼운 이가 싼값에 다시 사서 읽을 수 있도록 베풀어 줄 수 있습니다.
.. 소년소녀들의 용돈까지 털게 하여 황당무계한 ‘평화의 댐’을 건설했던 군부정권의 바로 그 국민 속임수였다. 군인권력이든 문민권력이든, 친일적 혈통의 권력의 발상은 언제나 같다. 이렇게 해서 민족이 해방된 지 40년이 지나서야 겨우 지어진 것이 천안에 있는 독립기념관이다. 일본에서 역사 교과서 분쟁이 일어나지 않았더라면, 우리 나라에서는 생각도 하지 않았을 것이 분명하다. 그런 곡절 끝에 지은 독립기념관에 일제하에서 진정 영웅적인 ‘독립투쟁’을 한 사람들의 모습이나 유물을 별로 찾아볼 수 없다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 … 쓰러뜨려야 할 친일파의 동상들이 아직도 수없이 많은데, 이 나라는 언제나 제 정신을 차릴 것인가 .. (190∼191쪽)
굳이 책 하나를 엮어내는 까닭이 있습니다. 굳이 책 하나 찾아서 읽는 까닭이 있습니다. 굳이 책을 가까이하면서 내 매무새와 생각틀을 손질하는 까닭이 있습니다.
저마다 얼굴을 손보고 몸매를 가꾸는 까닭이 있을 테지요. 사람마다 자가용을 굴리고 큰 아파트를 장만하고픈 까닭이 있을 테고요. 누구나 손꼽히는 대학교 졸업장을 거머쥐고픈 까닭이 있습니다. 어떤 이든 영어를 배우는 까닭이 있으며, 말과 글에 영어를 섞어 쓰는 까닭이 있습니다.
저로서는 사람 되는 길을 찾고 싶어서 책 만드는 일을 합니다. 저로서는 아직 제 됨됨이가 너무 모자라고 성겨서 틈틈이 제 삶을 돌아보면서 다그치고자 책을 읽습니다. 저로서는 이제까지 알게 되고 부대끼게 된 세상과 우리 삶터가 모든 세상과 삶터가 아님을 똑똑히 느끼면서 고개숙일 줄 아는 매무새를 갖추고자 책을 가까이합니다.
(3) 헌책방에서만 찾아볼 수 있게 된 《스핑크스의 코》
.. 처음 5조8천억 원으로 예상한 고속철도 사업은 이제 그 5배에 가까운 이십 몇 조 원으로도 서울-대구 구간이 건설될까 말까 하다니, 세계의 웃음거리도 보통 웃음거리가 아니다 … 나라의 끝에서 끝까지 서너 시간이면 갈 수 있는 작은 나라에서 애당초 고속철도가 왜 필요했을까? … 지금 서울-부산 간의 공간이 과학ㆍ기술의 종합적 혜택으로 다섯 시간에 가던 것이 TGV라는 고속열차로 두 시간에 갈 수 있는 공간으로 축소될 것이라고 한다. 이제 우리는 그 나머지의 세 시간을 무엇에 어떻게 쓰려는 것일까? … 우리가 정보화 시대의 덕택으로 예전에 몰랐던 수천만 수억만 가지의 잡다한 지식과 정보를 알게 되면, 우리의 삶의 질은 얼마나 풍요해지는 것일까? .. (120∼121, 131쪽)
리영희 님 책에 앞서 송건호 님 책 또한 헌책방에서나 찾아보는 책이 되었습니다. 송건호 님 책에 앞서 문익환 님 책 또한 헌책방에서나 살펴보는 책이 되었습니다. 문익환 님 책에 앞서 숱한 사람들 책이 헌책방 아니면 찾아볼 길이 없는 책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날이 갈수록 문익환이든 송건호든 리영희든 헌책방에서조차 찾아보는 손길이 줄어듭니다. 찾아 읽는 눈길이 옅어집니다. 찾아서 받아먹는 마음길이 사라집니다.
약발이 다 되었는지 모릅니다. 늙은 사람은 떠나고 새 사람이 자리를 차지해야 하기 때문인지 모릅니다. 국가보안법은 아직도 서슬이 퍼렇기는 하지만, 사람들이 온몸으로 국가보안법 문제를 느끼지 않는 때이기 때문인지 모릅니다. 남과 북이 갈라진 채 예순 해가 지났습니다만, 구태여 남과 북이 평화롭고 사랑스레 하나될 까닭은 없다고 느끼는 우리들이기 때문인지 모릅니다. 가난한 이와 가멸찬 이 사이가 벌어질 뿐더러, 사람과 사람 사이에 푸대접과 괴롭힘이 늘어나고 있습니다만, 우리 스스로 가멸찬 자리를 꿈꾸고 정규직을 바라며 힘센 무리힘에 한몫 끼고 싶은 생각이 훨씬 크기 때문인지 모릅니다.
이제는 도덕 교과서조차 착함과 아름다움과 올바름을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이제는 사회 교과서마저 통일과 민주와 평화와 평등을 말하지 않습니다. 이제는 국어 교과서마저 말을 알맞고 바르게 쓰는 즐거움과 고마움이 어디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가를 밝히지 못합니다. 이제는 역사 교과서마저 그예 임금님들 발자취 좇기에 머물기만 할 뿐, 우리들 여느 사람 발자취에는 터럭만큼도 마음을 안 쏟습니다.
.. 철저한 자본주의 사회인 미국 사회에서 성공의 척도는 ‘돈’일 수밖에 없다 … 한국인이 자동차를 몇 만 대 생산하고, 세대마다 승용차를 가지게 되고, 교통법규와 안내판, 신호 등의 교통체계를 갖추었다고 해서 문화인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우리는 현재의 지옥과 같은 교통환경에서 실감한다 … 사람들은 무제한한 자연수탈과 무절제한 소비와 낭비를 ‘미덕’으로 착각하고 ‘문화생활’로 분장한다 … 돈이라는 신 앞에 인간과 생명은 존재하지 않는다 .. (194, 276, 277쪽)
리영희 님 책을 바라지 않는 세상에서 리영희 님 책을 이야기하는 일이란 몹시 부질없다고 느낍니다. 리영희 님 책을 읽어도 속알맹이를 캐내지 못하는 세상에서 리영희 님 책을 되살리는 일이란 대단히 쓸데없다고 느낍니다. 리영희 님 책이 없어도 잘만 굴러가는 세상에서 리영희 님 책 하나 티끌처럼 바람에 쓸려 구르다가 구정물에 퐁당 빠져서 가라앉아 사라지든 말든 참으로 아무 영향을 못 끼친다고 느낍니다.
괜히 머리 아프게 이런 책을 왜 읽으라고 말하겠습니까. 괜히 눈 아프게 이런 책을 왜 살피라고 말하겠습니다. 괜히 가방 무겁게 이런 책 왜 들고 다니면서 펼치라고 말하겠습니까.
.. 많은 호남 출신이 직장에 남기 위해서 또는 일자리를 얻기 위해서 그들의 호적을 바꾸었거나 전라도 사람이 아닌 척하면서 살려고 애쓰는 경우를 나는 수없이 알고 있다. 그들은 ‘3등국민’의 처지였고, ‘내국 식민지적’ 멸시를 당했다. 주장할 의견이 있어도 참고 소리를 거두었다. 그것은 동포집단의 큰 부분에 강요된 ‘자기부정’이고 현대적 ‘소외’였다. 상대방의 처지가 되어서 한번 생각해 보라. 남에게 자기부정과 소외를 강요하는 행위 역시 자신의 자기부정과 소외이고 보면, 영남사람들 또한 불행한 소외된 존재였을 것이다 .. (306쪽)
살고 싶은 대로 살다가 죽을 노릇입니다. 돈만 벌면서 살면 그만이라고 하니 돈만 벌다가 죽을 노릇입니다. 사랑놀이만 하면서 살면 넉넉하다고 하니 사랑놀이만 하다가 죽을 노릇입니다. 아파트와 큰차만 있으면 된다고 하니 아파트에서 살다가 교통사고 나서 죽을 노릇입니다. 대학교 졸업장이 없으면 안 된다고 하니 수능시험에 목매달다고 얼굴 허옇게 되면서 죽을 노릇입니다.
세상을 바꾸고 싶은 마음이라면 리영희 님 책을 찾아서 읽습니다. 누가 시키지 않아도 옛날 한자까지 배워 가면서 읽습니다. 내 마음그릇을 고치고 싶은 다짐을 세운다면 리영희 님 책을 두 번 세 번 곱씹으면서 읽습니다. 돈이 없으면 도서관에 가서 엉덩이에 뾰루지가 나도록 앉아서 읽습니다. 내 이웃과 동무를 사랑하되 내 이웃과 동무가 당신들 삶을 좀더 슬기롭고 알차게 여미기를 바라는 넋이 있다면 리영희 님 책을 제 주머니를 털어서 선물하고 읽히고 느낌을 나눕니다.
배가 고프면 스스로 밥을 차려야 하는데, 배가 고파도 방바닥에 드러누워서 손전화 꾹꾹 눌러 밥 배달 시켜 먹고는 대충 까만 비닐봉지에 담아 아무 데나 내다 버리는 요즘 세상에서 리영희 님 책을 이야기하자니 입만 아픕니다만, 그래도 한 번쯤은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 주절주절 떠들어 봅니다. (4341.11.26.물.ㅎㄲㅅ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