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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골목이 말을 걸다 - 골목이 품은 서울의 풍경
김대홍 지음, 조정래 사진 / 넥서스BOOKS / 2008년 9월
평점 :
절판
이 책 하나 78 ― 세상을 고루 느끼고자 자전거로 골목길 나들이
: 김대홍+조정래, 《그 골목이 말을 걸다》
- 책이름 : 그 골목이 말을 걸다
- 글 : 김대홍
- 사진 : 김대홍, 조정래
- 펴낸곳 : 넥서스BOOKS (2008.9.20.)
- 책값 : 12000원
(1) 우리 삶과 길
아기를 안고 이웃집에 놀러갑니다. 이웃집 아주머니는 손주를 보았으니 할머님이고, 아주머니네 어머님이 계시니 그분은 증조할머님입니다. 강원도 고장말을 쓰는 증조할머님은 우리가 천기저귀를 쓰는 모습을 보더니, “요새도 천기저귀를 쓰는 사람이 있나?” 하면서 “목욕시키고 빨래만 해도 하루가 가는데.” 하면서 걱정을 해 줍니다.
그런데 예전에는 모두들 천기저귀를 썼을 뿐 아니라, 집에서 손수 물을 덥혀서 아기를 씻겼고, 아기 빨래뿐 아니라 집식구 빨래를 죄다 손으로 했을 뿐 아니라, 밥 해 먹이고 그릇 씻고 집 치우고 하는 일을 도맡았습니다. 손으로 하지 않은 일이 한 가지도 없습니다. 더욱이 시골집에서라면 먹을거리까지 몸소 씨뿌리고 가꾸고 거두고 갈무리하고 손질했으니 일손은 훨씬 많이 들었습니다.
.. 40년 이상 된 이발관을 두 곳이나 갖고 있다는 것은 마을사람들에겐 참 복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여전히 이곳을 찾는 마을사람들을 둔 이발관 또한 복일 것이다. 국립민속박물관은 지난해 문을 닫은 서울 소격동 〈화개이발관〉을 모두 소장하기로 결정하고 내부 시설을 옮긴 바 있다. 1952년 문을 연 이 오래된 이발관을 근대문화재로 인정한 것이다 .. (23쪽)
옆지기는 성당 성가대로 안쪽에 앉고, 저는 아기를 안고 성당 유아방에서 지켜보던 지난 일요일. 아기가 잠에 깨어 쉬를 보았기에 기저귀를 갈아 주니, 옆에서 바라보던 젊은 애 어머니들이 모두 놀랍니다. “어쩜 천기저귀를 써요?” “아기가 좋아하니까요.” “익숙하게 잘 가는 걸 보니 집안일을 많이 도와주시나 봐요?” “집안일은 누가 누굴 도와주는 일이 아니라 같이 하는 일이니까요. 그런데 아저씨들이 집안일은 하나도 안 하시나요? 하긴, 어떤 아저씨들은 아기가 똥 누면 냄새 난다고 싫다고 하더라고요. 자기가 낳은 아기인데.” “호호, 우리 아저씨도 그래요. 똥 누었을 때 한 번도 안 도와줬어요.” “아기가 눈 똥도 냄새 난다고 하면, 나중에 자기 부모님 앓아누웠을 때 어떻게 수발을 들려고. 다 마누라만 시켜 먹을려고 그러실까.”
.. 송월동 골목길로 들어서니 두 사람이 겨우 지나갈 정도의 좁은 길이 나온다. 어떤 길은 한 사람만 겨우 지나갈 만한 곳도 있다. 이런 곳을 지나던 사람들은 서로의 숨소리까지 느꼈을 것 같다 .. (68쪽)
시금치와 능금을 갈고 효소를 조금 섞은 풀물을 아기한테 떠먹입니다. 아기는 날름날름 잘 먹습니다. 그냥 효소를 물에 타서 줄 때와 견줄 수 없이 맛있게 먹습니다. 날푸성귀와 능금을 때마다 갈아서 주기가 번거롭고 품과 시간이 들어서 그렇지, 이렇게 잘 먹어 준다면 지어미나 지아비가 바쁘고 힘들다 해도, 바지런을 떨어 주어야겠구나 싶습니다. 아기 때 이만큼 못하겠습니까.
아기는 풀물을 먹고 엄마젖까지 물고 나서 새근새근 잠이 듭니다. 애 어머니는 조용히 일어나서 씻는방에서 기저귀 빨래를 합니다. 애 아버지는 방에 남아서 아기를 보면서 글쓰기를 합니다. 애 어머니한테 빨래를 맡기고 싶지는 않으나, 집에서 빨래라도 하지 않으면 ‘아기와 하루 내내 붙어 있어서 바깥에도 나가기 힘든 판’에 몸뿐 아니라 마음이 너무 힘들다고 해서, 웬만한 빨래는 물끄러미 지켜보면서 아기를 봅니다.
.. 어떤 사람들은 이곳 100평 주택 팔아 봐야 강남 주택 40평도 못 산다고 하지만, 달리 생각하면 강남 40평으로 100평 역할을 하니, 오히려 삶의 질이 높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 (105쪽)
옆지기가 아기한테 젖을 물리고 있으면, 아침이나 새벽에 불려 놓은 콩과 누런쌀로 밥을 짓고 찌개나 반찬거리 한 가지를 마련합니다. 오늘 아침에는 엊저녁에 먹다가 남긴 닭볶음찌개에 시금치와 고구마와 감자와 마늘과 국수를 새로 넣어서 끓입니다. 가톨릭농 생협에서 토막닭을 1킬로그램어치 샀는데, 둘이서 엊저녁에 1/3은 튀기고 2/3는 닭볶음찌개로 해서 먹으면서 배가 너무 불러서 다 못 먹고 남기고 오늘 아침이자 낮밥으로 마저 먹습니다.
유기농 생협 닭 한 마리는 7600원입니다. 닭집에서 튀김닭을 사먹으면 1킬로그램이 못 되는데 12000원을 냅니다. ㅇ마트에서 파는 토막닭은 800그램에 6400원 하더군요. 생협 매장에서는 물건이 없어서 못 살 때가 잦지만, 집에서 튀기고 끓이는 번거로움을 조금 치를 수 있다면, 외려 더 적은 돈으로 몸에 훨씬 나으며, 우리네 시골살림에 보탬이 되는 데에 돈을 쓸 수 있음을 새삼 느낍니다. 우리 식구는 하루에 한 끼니만 먹으니 7600원으로(해바라기씨 기름을 썼으니 기름값이 닭값보다 더 들긴 했지만) 이틀치 끼니를 배불리 이을 수 있습니다.
.. 쉼터라고 하면 꼭 돈을 들여야만 하고, 또 목책을 두르고 그 안에 팔각정이라도 세워야 한다는 고정관념이 있는 것 같다. 중림동 골목길을 거닐다 보면, 평상 하나로도 좋은 쉼터를 만날 수 있다 .. (256쪽)
우리 아기 자라는 모습을 보면서 “이제 곧 보행기 태워도 되겠네.” 하고, 또 “애 엄마와 아빠가 힘들어서 어떡해요. 유모차 끌고 다녀야지.” 하고 말씀하는 이웃이 있습니다. 이런 말을 들을 때마다, 우리는 세탁기도 냉장고도 안 쓰는데 유모차나 보행기 쓰겠느냐고, 그리고 유모차가 아기한테 얼마나 나쁜데 거기에 아기를 태우느냐고 말씀 드립니다. 아기가 걸을 나이가 되면 걸릴 생각이며, 아기가 걷지 못하는 지금은 안거나 업고 다녀야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아기 데리고 책방 다니며 사진 찍으러 다니고 하자면 힘들어서 작은 차 한 대 있어야 한다고 근심해 주는 분들한테도, 우리는 여태까지 먼길을 마다 않고 가방 가득 책을 담아 자전거를 달렸다고, 여러 시간 걸어서 다녔다고, 이렇게 다니면서 한결 보람이 있을 뿐더러 더 많은 모습을 보고 더 많은 사람을 만나며 더 널리 세상을 부대껴서 즐겁다고 덧붙입니다.
.. 재래시장은 자전거나 도보와 무척 잘 어울린다. 부피가 큰 자동차는 어쩐지 시장과는 동떨어진 느낌이다. 자동차가 생활 깊숙이 들어선 것과 재래시장의 퇴조가 전혀 무관하다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 자전거길에는 꼭 우레탄을 깔아야 한다는 것은 갑자기 생긴 고정관념에 불과하다. 오랫동안 자전거는 비포장길을 달렸다. 지금 산악자전거처럼 두꺼운 바퀴가 아니었음에도 아이도 태우고 쌀짐도 싣고 다녔다. 생태계를 지킨다는 측면에서도 논둑길과 같은 자전거길이 도시에도 많았으면 좋겠다 .. (272, 310쪽)
큰돈도 아닌 작은돈조차 벌지 못한다 하여도, 우리는 우리 살고픈 대로 삽니다. 아이를 맡아 줄 사람을 쓸 만큼 돈을 벌지 못하나, 우리는 우리 스스로 아이를 맡아 기르며 함께 지냅니다. 아이를 사진이 아닌 숨소리로 느끼고, 아이를 귀염둥이가 아닌 우리 식구로 받아들입니다.
우리 동네 집값이 뛰건 말건 우리는 아랑곳하지 않습니다. 아니, 우리 동네 집값은 움직이지 않기를 바랍니다. 우리한테는 집이 없어서 집값이 오른다고 하여 도움될 일이 없을 뿐더러, 외려 달삯이 올라 걱정이기는 하지만, 앞으로 우리가 돈을 벌어서 집을 얻을 수 있다 하여도, 우리는 우리 사는 집을 재산이나 부동산이 아닌 보금자리로 느끼며 살아갑니다. 돈을 벌려고 읽은 책이 아니고, 이름값을 높이려고 찍은 사진이 아니며, 지역문화운동을 하자며 고향 동네 골목길에 도서관 문을 열지 않았습니다. 즐겁게 살고 싶어서, 신나게 어울리고 싶어서, 깨끗하게 나누고 싶어서 아침을 열고 저녁을 닫습니다.
(2) 골목마을과 길
아기를 안거나 업은 채 골목마실을 다니면, 동네 할머니나 할아버지들은 “아기 오랜만에 보네.” 하면서 당신들끼리 이야기를 주고받습니다. 엊그제 볼일이 있어서 서울 나들이를 할 때에도 할머니나 할아버지 뻘 되는 분들은 “아기 참 오랜만에 본다.”는 말을 당신들끼리 주고받았습니다.
.. 날이 풀려서인지 뛰어다니며 골목을 누비는 아이들이 종종 보인다. 하지만 그것도 오래가지는 못한다. 아주 좁은 길이 아니고서는 빵빵거리며 위협하는 자동차들 때문에 날이 풀려도 길에서 마음껏 놀 수 없다. 예전엔 길이 놀이터였지만, 지금은 동그란 울타리 안에 놀이터란 곳이 따로 있다. 벽으로 둘러싸야만 마음 놓고 놀 수 있는 세상이 돼 버렸다 .. (29쪽)
흔히 시골마을에서 ‘아기 울음소리를 들을 수 없다’고 이야기하지만, 가만히 살피면 도시마을에서도 ‘아기 울음소리 듣기’란 어렵습니다. 갓 태어나는 아기는 시골이 도시와 견주어 훨씬 적지만, 나날이 ‘자가용으로만 움직이기’ 때문에, 길에서 아기를 만나기 어렵지 않느냐 싶습니다.
제 어릴 적을 떠올리면, 작은댁이 있는 서울로 때 되면 나들이를 가느라 온식구가 인천역부터 전철을 타고 머나먼 길을 떠나게 되는데, 이때에 어김없이 갓난쟁이 안거나 업은 어머님들을 보았습니다. 우리한테 아기가 태어난 뒤 더 살피기는 했지만, 사람들이 자가용 아닌 대중교통이나 두 다리로 많이 다니던 때에는 버스나 전철에서 ‘애 업은 어머님’ 보는 일은 아주 흔했습니다. 그리고, 저잣거리로 장보기를 나오는 ‘애 업은 어머님’을 비롯하여, 아기 해바라기와 바람쐬기를 해 주는 ‘애 업은 어머님’이 퍽 많았어요.
.. 서울 지역 유일한 백제시대 토기 가마터이지만, 이곳이 문화유적지라는 것을 알 만한 것은 담 한쪽에 있는 안내판이 유일하다. 관악구청장은 선거에 나올 때마다 백제요지 보존을 이야기했지만, 이곳 풍경은 몇 년 전과 달라진 게 없다. 오히려 백제요지 바로 옆에는 공영주차장 건설이 추진 중이다 .. (45쪽)
우리도 다니면서 느끼지만, 아기를 데리고 전철로 움직이기란 몹시 힘듭니다. 고달프고 시끄럽고 진땀을 빼야 합니다. 가까운 길이 아닌 먼 길을 가느라 전철을 타기에, 전철에서 기저귀를 갈고 젖을 먹이고 해야 하는데, 덜컹거리는 전차간은 그나마 ‘영유아 동반자석’이라는 이름을 함께 달고 있기는 해도, 걱정없이 느긋하게 젖도 물리고 기저귀를 갈 수 있지 않습니다.
그러고 보면, 자전거를 싣고 전철로 움직이는 일도 퍽 고단합니다. 바퀴걸상을 놓는 칸이 앞뒤로 하나씩 있기는 한데, 이 자리는 자전거를 세우는 자리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자전거를 들고 전철에 올랐어도, 스스럼없이 이 자리에서 비켜나 주는 손님이 많지 않아요. 그냥 뻗대고 섭니다. 바퀴걸상이나 자전거가 없다면 누구나 설 수 있는 자리이지만, 바퀴걸상이나 자전거가 있을 때에는, 또 짐칸에 올리기 힘든 큰짐을 들고 타는 분이 있을 때에는, 누구나 이 자리를 내어 주어야 합니다. 두 다리 멀쩡한 사람은 계단을 타고 두 다리 아프거나 나이든 이들이 승강기를 타야 하듯, 힘이 없거나 여린 사람한테 마음을 써 주는 우리 삶이어야지요.
사람보다 시설을 탓해야 하고, 사람보다 시설을 못 갖추는 우리 문화를 탓해야 하며, 사람보다 시설을 갖출 마음을 키우지 못하게 하는 교육을 탓해야 합니다. 그런데, 시설도 문화도 교육도 다른 어느 누가 하는 일이 아니라 우리가 하는 일입니다. 우리가 받고 우리가 누리고 우리가 가꿉니다. 정치하는 사람을 우리 손으로 뽑듯, 공무원이 잘못을 하면 우리 손으로 꾸짖거나 바로잡아 주어야 합니다. 우리 둘레에 일이 터지면 우리가 나서서 다스려야 합니다. 또한, 시설이 안 되어 있다면, 시설이 될 때까지 우리들이 뜻과 마음을 모아서 손질해 나가야 합니다.
.. 추위를 녹이기 위해 어묵 파는 트럭에 잠시 들렀을 때, 아저씨가 “오늘 같이 추운 날도 자전거를 타세요?” 하며 놀랐지만, 동네사람들 또한 날씨에 아랑곳하지 않고 자전거를 탔다 .. (119쪽)
ㅇ마트 같은 큰 가게에 가면 젖을 물리거나 기저귀를 갈 수 있는 방이 따로 마련되어 있습니다. 옛 저잣거리를 나들이할 때면 뒷간조차 찾을 수 없어서 몹시 힘겹습니다. 새 도심지 큰 빌딩 사이 거리를 거닐 때에는 큰 건물 뒷간을 쓸 수 있습니다. 옛 도심지 골목길을 거닐 때에는 동사무소나 파출소를 찾지 않고서는 뒷간 쓸 곳을 찾을 길이 없습니다.
따지고 보면, ㅇ마트나 빌딩숲에서는 서로가 서로한테 마음을 쏟아 주지 않고, ‘혼자 알아서’ 해야 하는 곳입니다. 옛 도심지 골목이나 저잣거리는 편의시설이 마땅하게 없어도 서로가 서로한테 마음을 쏟아 주는 곳입니다. 비록 뒷간이 없을지라도 골목집 이웃이 당신 집에서 볼일을 보도록 마음을 써 주곤 하며, 아기를 돌볼 방이 없을지라도 고즈넉한 안쪽 골목에 꼭 마련되어 있는 평상에 앉아서 기저귀를 갈거나 젖을 물릴 수 있습니다.
.. 예전 아이들은 땅만 있으면 놀이기구가 필요없었다. 땅ㆍ나무ㆍ집이 곧 놀이터였다. 하지만 이제는 노는 것도 돈이 필요하다. 얼마나 비싼지에 따라서 정성이 결정된다 … 사회는 점점 비슷비슷해지고 그래야만 안심할 수 있게 돼 버렸다. 그런 점에서 모든 것이 제각각인 골목동네는 환영받기 힘든 세상이다. 하지만 모두 같은 것들만 존재한다면 세상이 얼마나 재미가 없겠는가 .. (136∼137쪽)
어린이부터 푸름이와 젊은이와 늙은이까지 똑같은 식구요 이웃이요 동무로 어울리게 되는 골목마을입니다. 도시에서는 골목마을이고 시골에서는 고샅마을입니다. 어린이는 어린이 따로, 푸름이는 푸름이 따로, 젊은이는 젊은이 따로, 늙은이는 늙은이 따로 어울리거나 모여야만 하는 새도시요 뉴타운이요 아파트요 쇼핑센터요 빌딩숲입니다.
관계자 아니면 드나들 수 없을 뿐더러 경찰옷과 닮은 제복을 입은 건물지킴이가 득달같이 좇아와서 왜 들어왔느냐고 캐어 묻는 새도시요 아파트요 빌딩입니다. 번쩍번쩍 차려입은 옷이라면 모르되, 후줄근하거나 홀가분한 차림새는 금세 눈총을 받습니다.
관계자 아닌 누구라도 드나들 수 있을 뿐더러 지키는 사람 따로 없는 골목길입니다. 가볍거나 단출한 옷차림이 아닌 사람은 금세 눈에 뜨이게 되는 골목길입니다. 낯선 사람이라고, 뭔가 길을 잘못 든 사람이라고, 골목마을에 무슨 볼일이 있어서 찾아왔느냐 싶어서 궁금하기도 하지만, 경계를 하게 되는 양복쟁이입니다.
.. 평지를 통해서 흑성동으로 가고자 한다면 상도역에서 상도터널을 지난 뒤, 차도 옆길을 따라 들어가면 된다. 길은 쉽겠지만 시끄럽고 공기 또한 나쁘다. 길도 쉬우면서 조용하고 공기까지 좋기를 바란다면 그것은 욕심이다. 특히 서울에서는 불가능에 가깝다 … 아파트는 참 슬프다. 대를 이어 오래오래 살 곳이 못 된다. 추억을 묻기엔 그 삶이 너무 짧다. 아파트의 삶은 도시의 변덕스러움을 참 많이 닮았다 .. (160, 172쪽)
큼직한 사진기를 어깨에 걸치고 있으면 ‘부러 꾀죄죄해 보이는 모습을 사진으로 담아서 이곳은 하루빨리 재개발해야 하는 곳’으로 여겨지게끔 하는 첩자가 아니냐며 따갑게 바라보는 골목마을입니다. 크고 빛나는 사진기는, 새 도심지와 빌딩숲 따위에서는 크게 돋보이면서 자랑 삼을 수 있을지 모르나, 골목마을에서는 두려움과 거리두기를 느끼게 합니다. 골목길에서는 짐자전거나 아이 태운 자전거가 어울리지만, 새 도심지 큰찻길에서는 으리으리 빛나는 값비싼 자전거라든지 자전거옷(저지)을 쪽 빼입고 싱싱 누비는 자전거가 어울립니다.
골목길에서는 할머니 할아버지가 헌 신문지와 종이상자와 빈병 들을 그러모아서 다문 몇 백 원이나마 벌이를 하면서 일손을 놀립니다. 새 도심지와 빌딩숲과 아파트에서는 용역업체에서 큰차를 불러서 ‘요일에 따른 재활용품 수거’를 한꺼번에 싹 해치웁니다. 골목길에서는 헌 신문지 따위를 잔뜩 그러모은 손수레가 언덕길을 낑낑대며 오르기에 뒤에서 영차영차 밀어 줍니다. 새 도심지에서는 큰소리로 빵빵거리면서 윽박지르는 자가용이며 짐차며 오토바이며 그득그득하기에 얼른얼른 길을 비키면서 몸을 사리게 됩니다.
백일이 되면 백일떡을, 돌이 되면 돌떡을 해서 집집마다 찾아가면서 인사를 할 수 있는 골목마을입니다. 백일이나 돌이 되면 호텔 한 층이나 뷔페집 한 칸을 빌려서 수백만 원을 치르고 행사(이벤트)를 벌여야만 되는 아파트단지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골목마을에서도 백일떡이나 돌떡을 구경하기 힘듭니다. 경제성장율에 매여 있는 나라에서는, 경제대통령이라는 허울만 보고 큰 심부름꾼을 뽑는 나라에서는, 더 많은 연봉을 받지 못하면 안달을 낼 뿐더러 제법 많은 연봉을 받고 있음에도 배부를 줄 모르는 나라에서는, 온갖 물질문명을 누리면서도 마음밭 살찌우기는 조금도 못하는 나라에서는, 온갖 전기제품을 쓰며 일손을 줄였다고는 하나 남녀평등도 사람평등도 이루지 못하는 나라에서는, 백일잔치도 돌잔치도 마을잔치로 치를 수 없습니다. 혼인잔치도 예순잔치도 마을잔치로 함께할 수 없습니다. 오로지 숫자, 그저 돈, 한낱 돈주머니에 매달릴 뿐입니다.
(3) ‘자전거 골목 마실’인 《그 골목이 말을 걸다》
인터넷신문 기자이기도 한 김대홍 님이 쓴 《그 골목이 말을 걸다》를 읽습니다. 이제까지 ‘골목길 나들이’를 글감으로 삼아서 나온 책이 제법 되고, ‘서울 문화’ 이야기를 다룬 책도 꽤 됩니다만, 한영수 님이 찍은 사진에 어린이문학가 어효선 님이 글을 쓴 《내가 자란 서울》(대원사)만큼 사람 냄새가 묻어나도록 이야기를 펼친 책은 찾아보지 못했습니다.
.. 자전거를 타는 것은 즐겁다. 그러나 주위를 둘러보면 자전거는 ‘일상’이라기보다는 ‘일상탈출’의 성격이 강하다. 자전거는 한강 공원에서 어쩌다 타는 것, 추억을 남기기 위해 먼 여행을 갈 때 쓰는 것, 도시가 아닌 자연에서 타야 좋은 것, 보기에 예쁜 소품으로 쓰이기도 한다 … 골목여행은 달리 말하면 마을여행이기도 하다. 골목을 통해 마을 곳곳에 새겨진 흔적과 발자취를 담고 싶었다. 그래서 이 땅에서 사랑받지 못하고 흔적도 없이 사라져야 하는 곳은 단 한 곳도 없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다 .. (머리말)
누구나 자기가 자라는 대로 고향마을을 이야기하기 마련이며, 누구나 자기가 겪은 대로 이 나라 서울을 바라보기 마련입니다. 온나라가 서울에 쏠리도록 되어 있고, 온사람이 서울로 가도록 이루어져 있기에, 서울만큼 문화며 역사며 문명이며 예술이며 교육이며 경제며 …… 이야기감이 많은 곳은 이 나라에 없습니다. 더욱이, 사람 사는 이야기도 서울사람 이야기가 가장 많습니다. 왜냐하면, 가난뱅이부터 배부른 사람들까지, 또 가난했으나 배부르게 된 사람과 배불렀으나 가난하게 된 사람까지, 서울처럼 갖가지 사람이 뒤죽박죽 얼키고 설킨 데는 없기 때문입니다. 이리하여, 아무리 우리가 외곬눈으로 서울을 들여다보고 ‘서울 골목마실 + 서울 자전거마실 + 서울 문화 이야기’를 다룬다고 하더라도 푸지면서 맛깔스러울밖에 없지 않겠느냐 생각합니다만, 이는 그저 제 생각에 지나지 않더군요.
.. 물론 이런 경사가 도움이 될 때도 있다. 지형이 불편해 집값이 저렴하기 때문에 돈 없는 서민들이 살 수 있는 것이다 .. (30쪽)
김대홍 님이 쓴 ‘작은자전거 타고 서울 골목길을 마실하면서 느낀 문화와 사람 이야기’도 다른 분들 책과 마찬가지로 어느 한 가지만 보고 다른 여러 가지는 두루 살피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더 빨리 더 서둘러 더 많이 더 깊이 파고들거나 이루거나 울궈내려고 하지는 않습니다. 골목마을에 ‘이발소’와 ‘맛집’만 있지 않습니다만, 골목길에 깃든 수많은 가게 가운데 고작 몇 군데에서만 아련함과 싱그러움을 찾고 만 대목은 아쉽기만 한데, 이 자그마한 책 하나로 모든 서울 이야기를 담아낼 수 없는 한편, 글쓴이도 모든 이야기를 담아내려 하지 않았으니, 낮은자리에서 조금 더 천천히 세상을 바라보고자 하는 서울사람들한테는, 또 서울을 맛보고 싶어하는 분들한테는 제법 괜찮은 길동무가 되리라 봅니다.
.. 골목에서 사진을 찍을 때 몇 분이 잔뜩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쏘아보며 내게 질문을 건넸다. 그때마다 나온 첫마디는 “재개발 때문에 찍느냐”였다. 혹시나 사진을 어디 이용하지나 않을까 의심하는 눈빛이었다. 이런 질문을 재개발 지역을 찍으면서 종종 받았다. 내게는 그저 사라질지 모를 동네를 둘러보며 그 흔적을 남기는 것에 불과한데, 그들에겐 삶의 터전을 위협하는 것으로 보였던 것이다 .. (148쪽)
골목에는 골목집이 있고 골목사람이 있습니다. 골목 구멍가게가 있고 골목 헌책방이 있습니다. 골목집은 지붕이 낮아 우리 집뿐 아니라 이웃집도 해바라기를 즐길 수 있고, 빨래도 햇볕에 널 수 있습니다. 골목사람은 스스로를 높일 까닭이 없으나 낮출 까닭도 없어서 누구하고나 스스럼없는 이웃이 됩니다. 나이가 벌어져도 이웃이고 나이가 비슷해도 이웃입니다. 골목 구멍가게에는 모든 물건을 고루 갖추어 놓지는 못하지만, 골목살림을 하면서 있어야 할 물건은 어딘가에 한두 가지씩 갖추어 놓아서 싼값에 내어줍니다. 골목 헌책방은 그리 넓거나 크지 않음에도 온갖 책이 골고루 꽂힌 채 우리를 기다리는 한편, 주머니가 가벼운 서민 누구나 몇 천 원만 있으면 마음을 푸근히 살찌우는 책 하나 집어들 수 있습니다.
아무나 들어가서 놀기 어려운 아파트단지 놀이터입니다만, 아파트단지 놀이터까지 가는 길은 또 얼마나 먼지요. 누구나 찾아서 쉬어도 되는 골목길 빈터요 평상이지만, 큰길에서 골목으로 살짝 들어와 조금만 걸으면 어디에서나 어렵잖이 만날 수 있습니다.
큰차든 작은차든 싱싱 내달리기만 하는 자리에서는 골목사람이고 아파트사람이고 꽃그릇을 키워서 내놓지 못합니다. 차는 들어오지 못하나 자전거는 들어설 수 있는 골목길은 어디에서나 곱고 소담스레 가꾼 꽃그릇이 담벼락 한쪽 또는 두쪽 모두 얌전히 놓인 채 꽃임자뿐 아니라 골목이웃과 모든 길손한테까지 웃음을 선사합니다.
.. 언덕이 꽤 가파르지만 올라갈수록 점점 시야가 넓어진다. 동대문 너머 동네가 한눈에 들어온다. 야경이 눈부셨지만 군데군데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올라간 아파트가 시선을 가로막는다. 세상을 볼 권리는 고층아파트 꼭대기에 사는 사람에게만 있는 것인가 .. (222쪽)
글쓴이 김대홍 님이 앞으로도 꾸준히 골목마실을 자전거로 다니면서 서울 구석구석을 더 돌아보고, 좀더 느긋이 골목가게와 골목사람을 더 부대낄 수 있다면, 그리고 서울 바깥으로도 나와서 ‘제 나름대로 살림을 꾸리는 터전’을 한 곳 두 곳 찾아나선다면, 두 번째 ‘그 골목이 말을 걸다’는 아직 짚어내지 못한 숱한 눈물콧물과 웃음자락을 알알이 곰삭이며 나누어 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이번 책에서는 ‘세상을 볼 권리’를 온몸으로 느끼면서 들려주었으니, 다음 책에서는 무엇을 온몸으로 느끼면서 들려줄지를 기다립니다. (4341.11.10.달.ㅎㄲㅅ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