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동네에서 제가 즐겨 찾아가는 구멍가게는 ‘충인상회(-商會)’입니다. 충인상회로 가는 길목에 ‘재영슈퍼(-supermarket)’가 있습니다. 동구청으로 가는 길을 따라 곧게 걸으면 ‘금곡제일슈퍼’가 있습니다. 이 구멍가게에서 오른쪽 골목으로 접어들면 ‘금곡상회’가 있습니다. 금곡제일슈퍼 건너편으로는 ‘한아름마트(-mart)’가 있어요. 저는 ‘구멍가게’에 간다고 생각하지만, 제가 가는 구멍가게마다 ‘상회’나 ‘슈퍼’나 ‘마트’라는 이름이 달려 있습니다. 적어도 ‘가게’라는 이름을 붙인 곳은 없습니다.
동무들하고, 또는 손윗사람이나 손아랫사람하고, 또는 이웃사람하고 술 한잔 하자며 나들이를 하곤 합니다. 이때 우리들은 ‘술집’에 가지만, 그 어느 술집에서도 ‘술집’이라는 말을 쓰지 않습니다. 막걸리를 팔면 ‘주점(酒店)’이고, 맥주를 팔면 ‘호프(Hof)’입니다. ‘주점’이 ‘술 + 집(가게)’을 한자로 옮긴 말일 뿐임을 헤아려 보는 사람은 찾아보지 못합니다.
옷집이 줄줄줄, 또는 다닥다닥, 또는 층층이 늘어서 있는 동대문 같은 곳을 일컬어, ‘패션(fashion)의 거리’라고들 합니다. ‘옷집거리’나 ‘옷집골목’ 또는 ‘옷가게거리’나 ‘옷가게골목’ 같은 말은 한 번도 들어 보지 못합니다. 옷을 파니까 옷집이요, 옷을 다루니 옷가게입니다. 그렇지만, ‘패션’ 아닌 말로 이와 같은 거리나 골목을 가리킬 때에는 으레 ‘의류타운(衣類town)’입니다.
우리 식구는 집에서 밥을 먹지만, 때때로 집 밖으로 밥을 사먹으러 마실을 나가곤 합니다. 집에서 해먹을 수 없는 밥이 먹고플 때, 이래저래 바깥 볼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는데 날푸성귀가 하나도 없을 때, 밖에서 밥을 사먹습니다. 우리는 밥을 먹으러 “밥 파는 가게”를 찾아갑니다. ‘밥집’을 찾습니다. 그러나, 우리들이 찾아가는 곳에는 한결같이 ‘식당(食堂)’이라는 말만 붙어 있습니다. 그나마, 보리밥을 파는 곳은 ‘보리밥집’이라 하지, ‘보리밥 식당’이나 ‘보리 식당’이라고는 하지 않더군요. 더욱이, 가게를 마련하여 밥을 파는 일을 하는 사람들을 가리켜 ‘요식업(料食業)’을 한다고 이야기하는 우리 사회요, 정부입니다. ‘밥일’을 한다든지 ‘밥집일’을 한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생각해 보면, 집에서 밥을 먹을 때에는 ‘집밥’입니다. 집 바깥에서 밥을 먹을 때에는 ‘바깥밥’입니다. 뭐, 바깥밥을 먹는다고 말하는 사람은 없고, 하나같이 ‘외식(外食)’을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만.
우리들은 예부터 얼마 앞서까지 흙을 바닥으로 삼아 흙으로 벽을 올리고, 흙에서 거둔 짚이나 풀로 지붕을 이어서 살았습니다. 두 발로 땅을 디디듯이 등과 배를 흙에 깔고 잠을 이루었습니다. 흙을 만지며 일을 했고, 흙을 다루어 집을 지었습니다. 흙으로 지은 집이었으니 ‘흙집’입니다. 풀로 지붕을 이었으니 ‘풀집’입니다. 그런데, 흙집이나 풀집에 살던 사람은 스스로 ‘흙집’과 ‘풀집’이라 했으나, 흙집이나 풀집에 안 살던 사람들이 흙집이나 풀집에 살던 사람을 가리키는 자리에서는 으레 ‘토담집(土-)’이니 ‘토옥(土屋)’이니 ‘초가집(草家-)’이니 ‘초가(草家)’니 ‘초옥(草屋)’이니 하는 말을 썼습니다. 한국사람이 살던 집을 가리켜 ‘한옥(韓屋)’이라 하는데, 이 한옥에는 ‘풀집’이나 ‘흙집’은 끼어들지 못합니다. 오로지 ‘기와집’ 하나만을 한옥이라고 합니다. 모르는 일이지만, 앞으로 스무 해쯤만 더 지나면, 또는 서른 해쯤만 되면, 아파트(apartment)라는 곳이 한옥이 되지 않으랴 싶습니다. 어느 프랑스사람이 《아파트 공화국》(후마니타스)이라는 책도 한 권 써내기도 했지만,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한국 집 문화’를 말할 때에는 아파트 말고는 이야기를 꺼낼 수 없습니다. 시골 고샅집은 죄 사라졌습니다. 박씨 집안이 쇠삽날을 밀어붙여 없애기도 했지만, 우리 스스로 우리 고샅집을 볼품없이 여겼습니다. 시골이 거의 사라지고 도시만 멀뚱멀뚱 남은 오늘날 도시에서는 골목집이 집 대접을 못 받습니다. 판자집이든 나무집이든 벽돌집이든 무슨 집이든, 돈과 힘과 이름이 없이 도시에 몰려든 사람들이 옹기종기(높으신 분들은 게딱지나 성냥갑이라고 가리키셨겠지만) 모여살던 골목집은 집이 아닌 집, 문화가 아닌 문화, 삶이 아닌 삶, 도시가 아닌 도시, 동네가 아닌 동네, 이리하여 사람이 아닌 사람으로 시달렸고 들볶였고 떠밀렸고 쫓겨났고 짓밟혔습니다.
우리 식구 달삯 내며 붙어사는 집은 1957년에 지어졌습니다. 동네 다른 집과 견주면, 지은 지 그리 오래되지 않은 집이라 할 만합니다. 그래도 벌써 쉰한 살입니다. 쉰한 살이면 그 옛날 사회와 문화와 삶을 찬찬히 헤아릴 수 있는 집인 셈입니다. 이 집, 또 우리 이웃집들마다 깃들어 있는 사회와 문화와 삶을, 우리들 시민한테 권력을 넘겨받아서 꾸려 나가는 공무원과 시장과 정치꾼들이 얼마나 보듬어 줄는지 모를 일입니다만, 그러거나 말거나 우리들은 우리 깜냥껏 우리들 깃든 보금자리를 잘 추스르며 살아야지 싶습니다.
저는 자주 못 가고, 옆지기는 부지런히 가는 ‘성당(聖堂)’이라는 곳이 있습니다. 이곳, ‘거룩한집(성당)’에서 비손을 드리노라면, 모두들 일어나서 “거룩하시도다, 거룩하시다” 하는 노래를 부릅니다. 그래요, 거룩한집에 모였으니 ‘거룩하다’고 노래를 부르지요. 그러하오나, 거룩함을 기리거나 받드는 이 집 이름은 ‘聖堂’일 뿐입니다. 성당에서 파는 ‘거룩한 물건(성물:聖物)’을 파는 가게 이름은 얼마 앞서까지 ‘성물방(聖物房)’이었습니다. 지난달 끝머리, 거룩한집 알림판을 새로 단다고 해서, 그러면 ‘거룩한가게’로 이름을 붙여 보시면 어떻겠습니까 하고 말씀을 여쭈었습니다. 그러고 나서 한 주 뒤 다시 거룩한집을 찾아가 보니, 말끔한 판에 깔끔한 글씨로 ‘거룩한가게’ 알림판이 붙었습니다. (4341.6.16.달.ㅎㄲㅅ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