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노래 책읽기 / 읽는 나 + 읽는 바보

읽는 큐레이션 (좋은책이라는 독약)



  어제 인천 배다리책거리에서 조촐히 수다꽃 자리를 꾸렸다. 헌책집 할머니하고 헌책집 할아버지 두 분이 나란히 앉고, 나는 사이에서 추임새와 곁말을 넣었다. 세 사람은 ‘책집이 책집으로 빛나는 길’이란 무엇일까 하고 되새기며 이야기했다. 책집살림으로 쉰 해에 마흔 해를 살아낸 두 분은, 책집을 차리고 돌보고 지키면서 이어온 손길을 들려준다. 책벌레로 마흔 해 남짓 살아가는 나는, 책집을 찾고 살피고 이야기하면서 사랑하는 눈길을 보탠다.


  셋이서 함께한 ‘책집 생각’ 하나를 옮게 본다면, “좋은책을 가려보려는 뜻을 세우면, 으레 마음부터 좁힌다”고 말할 만하다. 백만이나 천만 사람한테 똑같은 책이나 영화를 건네지 않을 줄 알아야 한다. 백 사람이 만 가지 책을 만나고, 천 사람이 만 가지 책을 만나야 온누리가 아름답다. 좋은책이라서 읽히거나 나쁜책이라서 내치지 않을 줄 알 때에 온나라가 사랑스럽다. 어느 책을 마주하든 스스로 풀어내고 품어서 빛손길로 녹일 줄 알아야 온사람이 눈뜬다.


  그저 ‘온책(모든 책)’을 살펴서 고르게 나란히 둘 수 있어아지 싶다. 왼책도 오른책도 아닌 온책일 노릇이다. 왼책과 오른책도 읽되, 온책을 기쁘게 품으면 된다. 온책부터 읽고 나눌 적에 사람으로 선다. 모든 다 다른 나무가 어울려서 숲이고, 모든 다 다른 사람을 아우르며 마을이다. ‘통읽기(통독·완독)’이라는 그물이 아닌 ‘마음읽기(행간)’라는 숨결을 펼 노릇이다.


  요즈음 많이 생긴 ‘동네책방(독립서점)’은 “좋은책 추천 큐레이션”에 지나치게 얽매이기 일쑤이다. 책꽂이와 책살림이 늘지 않는다면 ‘마을책집’이 아닌 ‘책집시늉’이다. 한두 가지 책에만 사로잡힌 나머지 온사람(모든 다 다른 사람)을 바라보고 품고 손잡는 길을 등지면서 잃고야 만다. 우리는 좋은길을 밀거나 믿지 않아야 한다. 함께 걸어가며 살림할 하루를 바라볼 노릇이다. 그러니까 “좋은책 추천하기”가 아닌, “읽은책 얘기하기”로 나아갈 노릇이다. “나는 이 책을 이렇게 읽었어. 너는 그 책을 어떻게 읽었니?” 하고 묻고 들려주고 들으면서 마음이 오갈 적에 비로소 마을책집(작은책집)이라는 이름을 붙일 수 있다.


  오래붓(원로작가)도 새붓(신인작가)도 집안일을 안 하고 싫어하고 기계와 ai와 학교와 학원에 떠맡기는구나 싶다. 글꾼이 아니어도 집안일과 아이돌봄을 안 좋아하느라 지겨워하고 꺼리더라. 정작 손수 해보거나 몸소 짓는 살림이 없는 채 글멋만 부리는 굴레를 ‘순문학 + 문학적 표현’이라 우러르는 셈이다. ‘글쓰기(창작)’가 아닌 ‘글시늉(치장·디자인)’이라고도 하겠지. 글쓰기란 늘 삶쓰기에 살림쓰기에 사람쓰기에 사랑쓰기이다. 책읽기는 늘 삶읽기에 살림읽기에 사람읽기에 사랑읽기이다.


  거꾸로 책빛을 흐트리고 팽개친다고까지 느낄 요즈음 동네책방(독립서점)이다. 그냥 모든 책을 읽고 쓰고 나누고 팔고 사면 된다. 글쓴이 이름이나 펴냄터 이름이 아닌 속살을 읽고 이어서 이야기를 하면 된다. “내가 읽고서 좋았”더라도 좋은책이지 않다. 그저 그때에 문득 느낀 책 하나일 뿐이다. 이미 읽은 책은 오른쪽에 놓고서, 앞으로 읽을 책은 왼쪽에 놓을 때라야 마을책집(작은책집)이다. 내 마음에 들든 안 들든 온책을 헤아리면서 나누는 곳이어야 마을책집(작은책집)이다.


  아주 작아 보이는 집안일과 아이돌봄부터 기쁘게 웃고 춤추고 노래하는 하루를 살리다가, 해바람비와 풀꽃나무를 들여다보고 동무한 뒤에, 새벽에 새벽별을 바라보는 고요한 때에 작은집(보금자리)에서 작은붓을 쥔다면 비로소 글 한 자락이 깨어난다. 글은 별빛으로 쓴다. 글을 햇빛으로 읽는다. 글은 일하는 손으로 쓴다. 글은 살림하는 손으로 읽는다. 글은 사랑으로 쓰고 읽는다. 책은 사랑으로 짓고 펴고 나눈다. 별빛이 아닌 별빛흉내를 낸 글을 알아챌 수 있는가? 햇빛이 아닌 불빛(전깃불)을 켜서 흉내내는 글을 솎아낼 수 있는가? 살림을 안 하느라 죽음늪으로 사로잡히는 책에 안 속을 수 있는가?


  ‘큐레이션’이라는 죽음물(독약·농약)을 뿌리면 뿌릴수록 들숲메바다는 괴로워하다가 시들시들 죽어간다. 오롯이 사랑으로 읽고 잇는 사람과 사람 사이에 샘물 한 줄기가 솟아서 흐를 물꼬를 그린다. 2026.10.25.해.


ㅍㄹㄴ


글 : 숲노래·파란놀(최종규). 낱말책과 노래를 쓴다. 숲을 품은 시골에서 산다. 살림을 짓는 하루를 가꾼다. 《푸른말로 글빛노래 시 따라쓰기》, 《열두 달 소꿉노래》, 《풀꽃나무 들숲노래 동시 따라쓰기》, 《새로 쓰는 말밑 꾸러미 사전》, 《미래세대를 위한 우리말과 문해력》, 《들꽃내음 따라 걷다가 작은책집을 보았습니다》, 《우리말꽃》, 《쉬운 말이 평화》, 《곁말》,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이오덕 마음 읽기》를 썼다. blog.naver.com/hbook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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