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읽다 17 어떤 책이든

책벌레수다 : 가리고 가리다 가르다



  난 어릴적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치레(격식·인사)에 아무 마음이 없다. 나이가 많다거나 훌륭한 누구라고 해서 굳이 고개숙여야 할 까닭을 아주 못 느낀다. 우리는 이 별에서 그저 나란하면서 똑같은 넋이니까. 다시 말해서, 내가 나중에 훌륭하거나 대단한 자리에 앉더라도, 누가 나를 추켜세우거나 높여야 할 까닭이 없다. 우리는 아이어른 사이뿐 아니라 모든 사이에서도 어깨동무를 하기에 ‘사람’이다.


  서로 사람이기에 ‘알맹이’를 나누면서 살아가며 사랑을 깨닫고 눈뜨고 알아본다고 느낀다. 서로 사람이 아니라면 쭉정이로 겉치레와 글치레와 말치레를 일삼으면서 줄거리조차 없이, 빈수다에 헛도는 말글만 쏟아낸다고 느낀다. 어떤 사람이든 만나고 어울릴 만하지만, 아무나 만나거나 어울릴 까닭은 없다. 어떤 책이든 가릴 까닭이 없이 다 읽으면 되지만, 아무 책이나 읽다가는 스스로 망가진다.


  낯가림을 할 일이 없지만, 심을 씨앗과 먹을 낟알(씨앗)을 가리듯, 모든 책을 다 손에 쥐고서 펼쳐서 읽되, 사들여서 집으로 들고 간 다음, 두고두고 되읽을 책을 가리기는 한다. “책집에서 서서읽기”를 할 책이 있다면, “살림집에서 물려읽기”를 할 책이 있다. ‘눈가림’은 걷어치우고서 ‘씨가림’을 하면 된다. 엉뚱하게 ‘가름질·갈라치기’를 할 노릇이 아니라, 물살을 가르고 바람을 가르듯 홀가분하게 날개를 펼쳐서 생각나래로 빛살을 가르면 된다. ‘헤엄’을 치듯 바다와 하늘을 가를 줄 안다면, ‘헤엄’은 어느새 ‘헤다·헤아리다’로 잇는다. 이윽고 ‘세다·셈·생각’으로 이을 테니, 한결같이 샘솟는 맑은 물처럼 밝게 말을 들려주는 사람으로 눈뜬다고 느낀다.


  ‘알맹이’가 있는 말을 나눌 적에 ‘이야기’라고 한다. 알맹이가 없이 가볍게 주고받는 말을 ‘수다’라 한다. 목소리를 앞세워서 내놓는 말을 ‘줄거리’라고 한다. ‘이야기 = 알맹이 꾸러미 = 씨앗 꾸러미’이다. ‘수다 = 가볍게 흐르는 바람 꾸러미 = 쉬는 말’이다. ‘줄거리 = 세우는 목소리 = 틀에 가둔 말’이다. 셋(이야기·수다·줄거리)이 다른 줄 헤아릴 적에는 말이며 글이 어떻게 다른지 찬찬히 짚을 테지.


  이야기란, 씨앗을 담아서 나누는 말이면서, 알찬 말이라서, 말을 섞는 사람들은 어느새 ‘배우고 가르치는’ 부드러운 자리로 어울린다. 이야기를 거북하게 여기는 사람은 으레 있다. 이야기는 ‘씨앗꾸러미’라서, “난 굳이 내 마음이나 삶에 안 심고 싶다”고 여기게 마련이니, 이야기를 거북하게 여겨 ‘수다’만 떨고 싶을 수 있다.


  ‘줄거리’를 높이 사는 분은 이야기도 수다도 꺼리거나 싫어한다. 목소리를 드높여서 ‘옳은말’을 하고 싶기에 ‘줄거리’를 내세우고, 옳은말을 하다 보면 ‘옳은말이 아니면 다 틀린말’이라고 가르는 터라 ‘틀(이론 논쟁)’로 기운다. 요즈음 둘레를 보면 ‘이야기’는 자꾸 사라지고 ‘수다’가 늘면서 ‘줄거리’가 넘쳐난다. 목소리를 내는 말글이 흘러넘치고, 가볍게 바람처럼 주고받고서 잊어버리려는, 이른바 ‘유튜브 쇼츠나 영상’ 같은 말글이 너무 널렸다. 이와 달리 서로 마음을 열고서 생각을 싹틔우려는 이야기로 나아가려는 사람은 밀려날 뿐 아니라, ‘이야기꾼’을 오히려 따분하다고 몰아세우기까지 한다.


  그렇다면 이런 나라와 터전과 마을과 자리일수록, 줄거리도 수다도 아닌 이야기를 바라볼 노릇이 아닐까. “우리 말 좀 하자.”고 하기보다는 “우리 이야기를 하자.”고 다가가고 다가서면서 “잇는 마음과 말”을 헤아려야지 싶다. 이어서 일구고 별빛으로 이룰 삶과 살림을 바라보아야지 싶다. “말 좀 하자.”는 혼자만 떠들면서 타박하거나 핀잔하거나 꾸짖는 늪에 잠기기 쉽다. “이야기 좀 하자.”라 해야 비로소 주거니받거니 말이 흐르면서 마음이 만날 수 있다.


  톨스토이는 시골에서 누구나 손수짓기를 하는 마을에 배움터를 세워서, 이 배움터에서 아이어른이 함께 배울 책(교과서)을 ‘옛이야기’로 추슬렀다.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는 ‘톨스토이 시골 자급자족 누구나 학교’에서 교과서로 삼으려고 쓴 ‘러시아 옛이야기’이다. 이 얼거리를 헤아리지 않으면 톨스토이 ‘옛이야기(동화문학)’가 어떤 결인지 그냥 놓칠 수 있다.


  시골에서 태어나 예순이나 일흔 나이에 이르도록 오로지 흙만 만지며 삯지기(소작농)로 일만 해야 하던 할매할배한테 들려줄 ‘말’이라면 ‘수다’나 ‘줄거리’가 아닌 ‘이야기’여야 한다. 갓 태어나 한창 뛰놀 나이에 할매할배나 엄마아빠처럼 똑같이 삯지기집 아이로 고단하게 일하는 아이가 스스로 일어설 빛을 북돋우려면 이때에도 오직 ‘이야기’여야 한다. 아이한테도 이야기라는 빛씨를 베풀 일이고, 어른한테도 이야기밭이라는 빛씨앗을 나눌 노릇이다.


  뤼신은 처음부터 ‘어리석은 중국 어른을 일깨우려는 글’을 쓰되, ‘넌지시 에둘러서 나무라는 이야기’를 담았다. 뤼신은 중국이라는 나라가 너무 철없이 나뒹굴고 망가지는 모습에 슬픈 나머지, 먼 앞날에 아이들이 배우고 익힐 글을 쓰기보다는, 서둘러 ‘꼰대로 치닫는 어른’을 일깨울 이야기를 따가우면서 포근하게 쓰려고 힘썼다.


  러시아하고 중국에서는 ‘이야기꾼’인 어른이 둘 있었다면, 우리나라에는 어떤 ‘이야기어른’이 있을는지 곱씹어야지 싶다. 틀림없이 아름다운 이야기어른이 있을 텐데, 오늘을 살아가는 너하고 내가 새롭게 이야기어른으로 하루를 지을 수 있다. 톨스토이처럼 쓰거나 뤼신처럼 써야 하지 않지. 너는 너대로 네 이야기를 펴고, 나는 나로서 내 이야기를 심으면 된다.


  ‘수다’가 쓸모없지 않다. 낯선 자리에 낯선 사람만 가득할 적에는 바람처럼 가볍게 흐르는 수다로 말꼬를 트고 글꼬를 열 노릇이다. 조금 말꼬에 글꼬를 텄다면 ‘이야기’로 들어서기 앞서 살짝 ‘줄거리’를 짚을 만하다. 앞으로 어떤 이야기를 펴려는가 하고 ‘줄거리’부터 조금 맛보면서 느긋하고 느슨하게 이야기밭으로 나아가면 된다.


  한집안을 이루는 사이라면 굳이 수다나 줄거리라는 앞자락을 안 놓아도 된다. 오래오래 만나고 어울린 사이일 적에도 구태여 수다나 줄거리를 풀 까닭이 없다. 우리가 서로 동무요 이웃이며 ‘한사람(푸른별을 하늘빛으로 이루는 하나인 사람)’이라면 스스럼없이 오직 이야기 한 자락으로 즐겁게 만나고 어울릴 노릇이다.


+


“그렇잖아, 이 자동차보다 달팽이가 훨씬 훌륭해. 달팽이는 아무리 굼떠도 움직이긴 하는걸. 하지만 이 차는 1센티미터도 움직이지 못하잖아. 움직이지도 못하는 자동차에 비하면, 달팽이가 훨씬 훌륭해. 절대로 굼뜨지 않아.” 《비밀의 달팽이 호》 75쪽


현대인의 상상력은 어디를 향해 있는가? 현대인에게 살아 있는 것과 살아 있지 않은 것 사이의 경계는 무엇인가? 《애니미즘과 현대 세계》 156쪽


“무슨 기념?” “아무 일도 없었던 하루를 기념하는 거야. 사실 오늘만 해도 많은 일들이 있긴 했지만!” 《러브 로마 5》 171쪽


‘모르겠어. 이상한 말. 이상, 이상한가. 지난 주말 내내 생각했는데. 그런데 ‘신경 쓰지 말라’니. 울컥.’ 《서투른 선배 7》 61쪽


“하지만 네가 아까 카메가와를 칭찬했을 때 난 거짓말을 느끼지 않았고 그 말이 기뻤어.” 《서투른 선배 8》 137쪽


《비밀의 달팽이 호》(사토 사토루 글·무라카미 쓰토무 그림/햇살과나무꾼 옮김, 크레용하우스, 2000.8.7.)

#佐藤さとる #村上勉

《애니미즘과 현대 세계》(유기쁨, 눌민, 2023.4.28.)

《러브 로마 5》(토요다 미노루/김동욱 옮김, 세미콜론, 2012.1.4.)

#とよ田みのる #ラブロマ

《서투른 선배 7》(쿠도 마코토/이은주 옮김, 대원씨아이, 2024.6.30.)

《서투른 선배 8》(쿠도 마코토/이은주 옮김, 대원씨아이, 2025.1.31.)

#不器用な先輩 #工藤マコト


글 : 숲노래·파란놀(최종규). 낱말책과 노래를 쓴다. 숲을 품은 시골에서 산다. 살림을 짓는 하루를 가꾼다. 《열두 달 소꿉노래》, 《풀꽃나무 들숲노래 동시 따라쓰기》, 《새로 쓰는 말밑 꾸러미 사전》, 《미래세대를 위한 우리말과 문해력》, 《들꽃내음 따라 걷다가 작은책집을 보았습니다》, 《우리말꽃》, 《쉬운 말이 평화》, 《곁말》,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이오덕 마음 읽기》를 썼다. blog.naver.com/hbook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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