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노래 책읽기 / 가난한 책읽기

극좌와 극우 사이



  나라(농림부·지자체)에서 풀죽임물(농약)을 뿌리는 돈을 대줄 뿐 아니라, 혼날개(드론·무인헬리콥터)나 큰바람개비로 잔뜩 뿌리는 돈까지 대준다. 혼날개로 풀죽임물을 뿌릴 적에도 텃새와 철새가 엄청나게 줄어들었는데, 큰짐수레에 실은 큰바람개비로 한여름부터 끝없이 풀죽임물을 논을 비롯해서 논 둘레로 뿌려대면, 새도 개구리도 벌나비도 거미도 어마어마하게 죽는다. 요즈음 이 나라에서 풀죽임물을 어떻게 뿌리는지 조금이라도 들여다본다면, 새와 벌나비가 왜 이렇게 빨리 사라지는지 쉽게 알 수 있다.


  시골이건 서울이건 나무를 모질게 괴롭히면서 ‘가지치기’를 넘어 ‘줄기치기’를 해대기 일쑤이다. 새가 쉬거나 깃들 큰나무가 사라지면서 작은새도 큰새도 철새도 그야말로 아주 죽어나간다. 앞으로는 ‘달구지길(자동차 전용도로)’과 ‘달구지집(주차장)’을 차근차근 없애면서 ‘나무가 우람하게 자랄 푸른터’를 늘려야, 새도 사람도 함께 느긋이 살아갈 수 있다. 그런데 ‘달구지길’과 ‘달구지집’을 줄이려고 마음을 기울일 나라일꾼(공무원)이 있을는지 모르겠다. 부릉부릉 매캐하게 쇳덩이가 널뛰는 길이 아닌, 어린이도 푸름이도 어르신도 느긋이 거닐며 오갈 자리와 마을로 바꾸려는 눈길을 밝힐 수 있을까.


  철이 들지 않기에 오지랖만 부리거나 ‘젊어’ 보이고 싶어서 겉모습만 꾸민다. 철이 들기에 품거나 안거나 쓰다듬을 뿐 아니라 ‘어질게’ 살아가려고 살림짓기에 마음을 둔다. 벼슬자리에 앉는 이를 보면, 이미 어릴적과 젊을적부터 집안일과 집살림을 안 했다. 아이를 낳아서 돌보는 나날을 스무 해나 서른 해쯤 지내고 나서야 벼슬자리에 앉는 이는 아직 없다시피 하다. 나라일꾼(대통령·장차관·국회의원·기초의원·기관장·공무원)이라면 ‘일(집안일)’과 ‘살림(집살림)’부터 차근차근 익힐 노릇이다. 굳이 중국 옛말을 들추지 않아도 알 수 있다. ‘내’가 나로서 살아가는 ‘집’부터 사랑으로 아름답게 돌보는 길을 걸어온 사람일 때라야, 마을일과 고을일과 나라일을 알뜰살뜰 여미게 마련이다.


  글은 누가 쓰면 될까? 글은 어떻게 쓰면 될까? 먼저 집안일과 집살림부터 할 노릇이라고 느낀다. 어릴적부터 어버이 곁에서 함께 집안일을 하고, 같이 집살림을 펴고, 나란히 보금자리를 푸른숲으로 일구는 길을 걸으면 된다. 이렇게 일과 살림을 온몸으로 익히는 동안, 스스로 즐겁게 놀이하고 노래하는 하루를 살아내면 된다. 곧 ‘일·살림·놀이·노래’라는 네바퀴를 즐거우면서 사랑으로 다독이는 삶을 지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어진 일꾼이자 스승이자 동무이자 두레로 마주하는 이웃으로 우리 곁에 있을 만하다.


  지난날에는 ‘극좌’라는 말을 무섭게 쏘아댔다면, 오늘날에는 ‘극우’라는 말을 무섭게 쏘아댄다. 지난날 젊은이(20∼30대)는 ‘극좌’라는 삿대말을 듣고, 오늘날 젊은이는 다시금 ‘극우’라는 삿대말을 듣는다. 지난날에 ‘극좌’라는 삿대말을 듣던 젊은이는 이제 아지매아재(40∼50대)라는 나이에 이르는데, 오늘날 아재아지매는 지난날 할매할배(60∼70대)한테 오지게 얻어맞으면서 가시밭길을 견디었다. 지난날 젊은이인 오늘날 아지매아재는 동생이나 아이인 오늘날 젊은이가 예전처럼 얻어맞거나 가시밭길을 걷지 않는 새나라를 일구려고 온땀과 온힘과 온마음을 쏟았다. 누가 무슨 삿대말을 하든 말든 아랑곳하지 않으면서 ‘새길’을 바라보았기에, 이 나라가 조금은 아름길을 걸을 만했다고 느낀다.


  예나 이제나 젊은이는 ‘새길’을 바라본다. 어느 곳에도 안 치우치면서 아름답게 살림을 짓는 ‘사랑집’을 그린다. 지난날 젊은이였고 오늘날 아지매아재인 사람은 ‘왼끝(극좌)’이 아니었다. 오늘날 젊은이요 앞으로 아지매아재로 설 사람은 ‘오른끝(극우)’이 아니다. 둘 모두 어느 쪽으로 기울지 않았다. 그저 ‘새길·새집·새사람·새나라·새빛·새눈’을 바란다. 지난날에는 새길과 새눈이 왼끝으로 쏠린다고 느낄 수 있었다면, 오늘날에는 새길과 새눈이 오른끝으로 쏠린다고 느낄 수 있다. 그렇지만 예나 이제나 새길과 새눈은 왼끝도 오른끝도 아니다. 새길과 새눈은 언제나 나란하고, 한결같이 ‘가운쪽’이다.


  가운데는 ‘중도·중용’이 아니다. 가운데·가운쪽이란 ‘가슴’이다. ‘가슴’이란 ‘마음’이요, 스스로 가슴(심장)이 느끼는 결을 살펴서 마음(영혼)이 이끄는 곳을 바라보기에 젊은이일 테지. 흔히 젊은이를 ‘불타는(열혈·열렬)’ 쪽으로 잘못 여기기 일쑤인데, 젊은이는 ‘가슴·마음’에 샘솟는 길인 새길을 바라보면서 새빛을 새꽃으로 피우고는 새눈을 틔워서 새사람으로 거듭나는 ‘어른’이 되기를 바라는 뜻이라고 해야 맞다.


  철들지 않은 모든 벼슬아치는 끌어내릴 노릇이다. 철들지 않은 벼슬아치는 왼켠이건 오른켠이건 다 끌어내릴 노릇이다. 벼슬아치라는 감투는 ‘일자리’여야 한다. 일하는 사람은 왼켠이나 오른켠으로 가를 까닭이 없다. 날개지기(비행기 조종사)는 왼켠도 오른켠도 아닌 가운켠에 서야 한다. 버스지기와 택시지기도 가운켠에 서면 될 뿐이다. 우리는 고린내(남성 가부장권력)를 거의 쓰러뜨렸다. 그러나 고린내를 쓰러뜨리기에 끝나지 않는다. ‘집’을 ‘지어’서 ‘즐겁’게 ‘지내’는 길을 새로 세워야 한다. 한집에서는 어머니와 아버지가 나란히 기둥이어야 한다. 처음에는 둘(가시버시)이 나란히 기둥이어야 하고, 나중에는 아이가 셋째 기둥이어야 하며, 이윽고 할매할배도 나란히 넷째 기둥이어야 한다. 한집을 이루는 모든 사람이 ‘한기둥(함께 하나로 기둥)’으로 거듭날 적에 비로소 모든 고린내가 사라지리라고 본다.


  우리나라에 일하러 찾아오는 이웃나라 사람은 ‘이웃일꾼’이다. 이웃이니까 ‘이웃일꾼’이다. ‘이주노동자’나 ‘외국인노동자’가 아닌 ‘이웃 + 일꾼’이다. 지난날 젊은이였던 오늘날 아지매아재는 오늘날 젊은이를 가만히 볼 수 있기를 빈다. 오늘날 젊은이는 오른끝이 아니요, 왼끝으로 가야 하지 않는다. 그저 가운쪽에 서면서 가슴과 마음을 사랑으로 밝히는 살림길을 넉넉히 펴도록, 함께 손잡고 어깨동무하는 새길을 바라볼 노릇이지 싶다. 우리는 두 손을 함께 쓰기에 ‘빚’고 ‘짓’고 ‘가꾸’고 ‘일구’고 ‘나눈’다. 두 손을 함께 쓰는 둘인 사이라서 ‘두레’라 하고, 둥그렇게 만나서 둥글둥글(동글동글)하기에 ‘동무’로 만나고 ‘동아리’를 이루며 ‘돕’고 ‘돌보는(돌아보는)’ 사람으로 나란히 선다.


  지난날 젊은이와 오늘날 젊은이가 ‘서로이웃’으로 마주하기를 빈다. 오늘날 젊은이와 지난날 젊은이가 그저 ‘이웃’으로서 ‘사랑’을 나란히 펴는 ‘함께짓기·함께살기·함께노래’를 이룰 수 있기를 비는 마음이다. 2026.3.2.


ㅍㄹㄴ


글 : 숲노래·파란놀(최종규). 낱말책과 노래를 쓴다. 숲을 품은 시골에서 산다. 살림을 짓는 하루를 가꾼다. 《열두 달 소꿉노래》, 《풀꽃나무 들숲노래 동시 따라쓰기》, 《새로 쓰는 말밑 꾸러미 사전》, 《미래세대를 위한 우리말과 문해력》, 《들꽃내음 따라 걷다가 작은책집을 보았습니다》, 《우리말꽃》, 《쉬운 말이 평화》, 《곁말》,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이오덕 마음 읽기》를 썼다. blog.naver.com/hbook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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