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석에 반하여 수전 손택 더 텍스트
수전 손택 지음, 홍한별 옮김 / 윌북 / 202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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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칠읽기 . 숲노래 책읽기 / 인문책시렁 2026.6.6.

까칠읽기 121


《해석에 반하여》

 수전 손택

 홍한별 옮김

 윌북

 2025.12.31.



  1966해에 나온 《해석에 반하여》를 2026해에 새로 냈다고 한다. 1966해에 나온 책이라면 1950∼60해무렵을 가로지르던 나날에 바라본 바를 풀어낸 글일 테지. 그때 “미국에서 나고자란 사람”은 무엇을 보거나 듣거나 배웠을까 하고 돌아본다. 나는 미국이라는 땅을 밟은 일이 없되, 둘레에는 미국을 다녀온 사람이 많다. 이웃 가운데 미국으로 건너가서 지내는 분도 꽤 있다. ‘사잇땅(기회의 땅)’이라고도 일컫는 미국이고, 옆나라 일본은 그곳을 ‘쌀나라(米國)’라는 한자로 가리킨다. 하늬(유럽)에서 쫓겨난 사람들이 텃사람을 내몰고 죽여서 ‘홀로서기(독립)’를 했다고 여기는 나라요, 검은사람을 종으로 부려서 솜밭(목화농장)에 묶어두고 괴롭힌 나라이다. 검은사람을 ‘밭일꾼(농노)’으로 부리느냐 ‘뚝딱일꾼(공장노동자)’으로 부리느냐를 놓고 저희끼리 피터지개 싸운 나라이기도 하다.


  그나라에는 들길(민주)하고 멀지만 ‘들길’이라는 이름을 내거는 무리가 있고, 함께(공화)하고 멀지만 ‘함께’라는 이름을 내거는 무리가 있다. 파랑이와 빨강이가 악착같이 다투면서 총칼을 무시무시하게 만들어내기도 하는 나라이다. 어느 무리이건 총칼을 무척 좋아한다. 이러한 나라에서 1966해에 나온 《해석에 반하여》는 무슨 풀이를 거스른다는 목소리일까. 목소리로는 모든 옳거나 좋거나 바르다고 여기는 말은 다 외칠 수 있되, 막상 그곳에 그냥그냥 눌러앉아서 모든 길미를 누리는 사람들은 무엇을 풀이한다고 목소리를 높이는가.


  그무렵 우리나라는 미국이 거저로 내준 ‘흰가루 셋’으로 벼슬꾼과 돈꾼이 엄청나게 길미를 챙겨서 온나라를 휘어잡았다. 총칼을 앞세운 우두머리는 으레 ‘경제개발·경제성장’ 같은 허울스런 말을 일삼았는데, 그들끼리 길미를 돌라먹으면서 사람들한테는 ‘떡고물’도 아닌 검부러기를 조금 흩뿌렸을 뿐이다. 요즈음(2026해)에는 그루(주식)라는 검부러기를 조금 흩뿌리면서 사람들을 홀려서 멍청이로 길들인다.


  우리나라에서 가시내가 고개를 들고서 배움터를 느긋이 다닐 수 있던 때는 1980해무렵이다. 1970해무렵까지는 숱한 가시내가 어린배움터에 발을 디디기도 힘들었다. 으레 서울이나 서울곁 뚝딱터(공장)에 잡아먹히면서 값싼 일삯으로 부려먹히는 굴레였고, ‘식모·차장’ 같은 자리에서 말 그대초 찬밥 노릇이었다.


  내가 미국에서 나고자라면서 1966해에 《Against Interpretation》를 영어로 읽었다면 무엇을 느꼈을까 하고 어림해 본다. 그무렵 미국은 우리나라하고 사뭇 달랐지만, 그때나 이제나 미국에서 가난한 사람은 그저 가난하고, 글을 모르는 사람은 그저 글을 모른다. “SF영화에는 사회 비판이란 것이 없다. 암시적인 형태로조차 들어가지 않는다(322쪽)” 같은 대목을 읽다가 이제 이 책은 덮기로 한다. 말이 되지 않는 말이 너무 길다. 미국사람이라면 ‘옮김말씨(번역체)’가 없는 ‘그냥 말’로 이 책을 읽을 텐데, 우리나라에서는 ‘그냥 말’이 아닌 ‘옮김말씨(번역체)’를 ‘다시 우리말로 풀어서 헤아려’야 한다.


  삶터(사회)를 그대로 보여주는 글과 그림도 ‘목소리’이다. 목소리란 “마음을 나누려는 소리인 말”이기도 할 뿐 아니라, “민낯(현실)을 그대로 비추는 거울”이기도 하기에 저절로 ‘말(표현) + 타박(비판)’이게 마련이다. 익살(코미디·유머·개그)에 ‘사회비판’이 없다는 말을 대놓고 할 사람이 있을까? 들일을 하는 사람이 부르는 들노래(노동요)에 말과 마음과 삶이 녹아나지 않는다고 읊을 사람이 있을까?


  우리말 ‘풀다’를 제대로 읽는 사람을 거의 못 봤다. 아니, 책을 읽거나 보임꽃(영화)을 쳐다보거나 이야기꽃(강의)을 펴는 사람들 가운데에는 ‘풀다’를 제대로 읽는 사람이 아예 없고, 집일을 하거나 들일을 하거나, 들숲메바다를 품는 사람은 으레 누구나 다 안다고 느낀다.


  일본스런 한자말로 한다면 ‘해석·해설·해제·해명·해결·해소·해방·해독·해득·해체·해부……’를 줄줄이 읊을 텐데, 우리말로는 나란히 ‘풀다’라는 쉽고 수수한 낱말을 바탕으로 하나씩 갈래를 짓는다. ‘풀다 = 풀 + 다’이다. ‘풀다’를 알려면 ‘풀’을 알아야 한다. 풀을 모르는 채 ‘풀다’를 알 수 없다. ‘풀다·풀’을 읽어내어 차분히 알아간다면 이윽고 ‘품다·품’을 읽어내면서 알아본다. 이러면서 ‘푸르다·풀빛’과 ‘푸지다·푸근하다·푹·폭·포근·포동’ 같은 낱말이 모두 한타래로 잇는 줄 헤아린다.


  이야기를 풀든, 책과 줄거리를 풀이하든, 삶과 삶터를 풀어내든, 먼저 풀빛을 품는 보금자리와 살림살이일 노릇이다. 푸른숲과 등진 곳에서 붓끝만 놀릴 적에는 어떠한 길도 못 풀거나 안 푼다고 느낀다. 왜 이 별을 ‘푸른별’이라 하겠는가? 왜 이 별은 푸른별이면서 ‘파란별’일까? 모두 하나인 수수께끼부터 풀지 않고서야, 허울스러운 이름을 줄줄이 읊거나 늘어놓는들, 어느 길도 못 풀게 마련이다.


ㅍㄹㄴ


엄밀한 의미에서 의식의 내용은 말로 표현할 수 없다. (66쪽)


말할 필요도 없지만 문학은 둘 다 하지 못한다. (105쪽)


사실상 애도할 이유가 없다. 죽은 것은 먼 친척이기 때문이다. (196쪽)


한때는 기이하고 어리석은(어린아이 같고 무법적이고 음탕한) 존재였던 ‘흑인’이 현재 미국 연극계에서 대표적인 선의 가면으로 자리 잡아가고 있다. 게다가 흑인은 외형적으로 명확하기 때문에 신체적 특성이 모호한 ‘유대인’을 넘어서는 유용성이 있다 … 흑인은 언제나 ‘흑인’처럼 보일 것이다. 진정한 흑인으로 여겨지지 않는 한. 또한 고통과 핍박의 희생자라는 면에서 흑인은 미국의 다른 어떤 경쟁자보다 앞서 있다. 단 몇 년 사이에, 유대인을 전형적 인물로 삼던 구식 진보주의가 흑인을 영웅으로 삼는 새로운 전투적 태도에 도전받게 됐다. 그러나 이런 전투적 태도와 흑인 영웅을 부추기는 성향이 진보주의 사상을 조롱하더라도 그 감수성 가운데 한 가지는 계속 이어간다. 여전히 희생자들 가운데서 미덕의 이미지를 선택한다는 점이다. (222쪽)


SF영화에는 사회 비판이란 것이 없다. 암시적인 형태로조차 들어가지 않는다. (322쪽)


#AgainstInterpretation #SusanSontag


+


《해석에 반하여》(수전 손택/홍한별 옮김, 윌북, 2025)


이 책에 실린 비평과 리뷰는 내가 1962년에서 1965년 사이에 쓴 글들이다

→ 이 책에 쓴 글은 1962년에서 1965년 사이에 썼다

→ 1962년에서 1965년 사이에 쓴 글을 이 책에 싣는다

13쪽


페이퍼백으로 재출간되는 지금 시점에는 더욱 그렇게 보인다

→ 작은책으로 다시내는 오늘에는 더욱 그렇게 보인다

→ 손바닥책으로 새로찍는 이즈음 더욱 그렇게 보인다

→ 주머니책으로 더찍는 요즈음 더욱 그렇게 보인다

13쪽


모든 예술은 정교한 트롱프뢰유trompe l’oeil(실물처럼 정밀하게 묘사해서 착시 효과를 일으키는 그림)이며

→ 모든 그림은 잘 빚은 눈속임이며

→ 모든 꽃은 꼼꼼한 시늉그림이며

→ 모든 멋은 감쪽같은 흉내그림이며

→ 모든 아름꽃은 아주 능청이며

21쪽


내용 자체가 달라졌거나 내용이 이제는 덜 구상적이고 덜 사실적일 수도 있다

→ 줄거리가 달라지거나 이제는 덜 뚜렷하고 덜 고스란할 수도 있다

→ 속살이 달라지거나 이제는 환하지 않고 삶과 멀 수도 있다

22쪽


이런 식으로 텍스트를 변환하는 흥미로운 프로젝트는 어떤 상황에서 시작되었을까

→ 이렇게 글을 바꾸는 재미난 일은 언제부터 했을까

→ 언제부터 이처럼 재미나게 바꾸는 글을 썼을까

24쪽


우리 시대의 해석은 그것보다 더 복잡하다

→ 오늘날은 이보다 더 얼기설기 풀이한다

→ 우리는 이보다 더 여러 가지로 읽는다

→ 요새는 이보다 더 온갖길로 헤아린다

25쪽


그대로 내버려두지 않으려는 범속한 태도로 나타난다

→ 흔히 그대로 두려고 안 한다

→ 으레 내버려두려고 안 한다

27쪽


최소 세 부대의 비평가들에게 대대적으로 파헤쳐졌다

→ 적어도 석 자루쯤 되는 분들이 잔뜩 따졌다

→ 얼추 석 자루쯤 되는 분들이 실컷 파헤쳤다

27쪽


스타일이라는 개념은 구체적으로 역사적 의미를 지닌다고 일반적으로 말할 수 있다

→ 멋이란, 곰곰이 보면 지나온 날을 뜻한다고들 말할 수 있다

→ 맵시란, 아무래도 살아온 길을 뜻한다고 말할 수 있다

41쪽


엄밀한 의미에서 의식의 내용은 말로 표현할 수 없다

→ 곰곰이 보면 넋은 말로 그릴 수 없다

→ 가만히 보면 마음은 말로 못 그린다

66쪽


우리는 왜 작가의 일기를 읽을까? 작품에 대해 알게 해주니까?

→ 우리는 왜 글쓴이 하루를 읽을까? 글을 잘 알 수 있으니까?

→ 우리는 왜 글님 하루글을 읽을까? 속내를 짚을 수 있으니까?

→ 우리는 왜 글바치 삶글을 읽을까? 줄거리를 알 수 있으니까?

73쪽


일기에 두 페르소나가 있다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 하루글에 두 사람이 있다고 할 수도 있다

→ 삶적이에 두 마음이 있다고 할 수도 있다

77쪽


현대에 성애적 애착은 본질적으로 허구라고 믿게 되면서 또 한편으로는

→ 이제 사랑놀이는 다들 허울이라고 믿으면서 또 한켠으로는

→ 이즈막에 몸섞기는 무릇 빈껍데기라고 믿으면서 한켠으로는

79쪽


토디의 번역이 부실하다는 것을 말해두어야 할 것 같다

→ 토디가 엉성히 옮겼다고 말해두겠다

→ 토디는 어설피 옮겼다고 말해두겠다

→ 토디는 제대로 못 옮겼다고 말해두겠다

95쪽


레리스가 《성년》에서 답한 질문은 지성적인 것이 아니다

→ 레리스가 《어른》에서 들려준 말은 그리 밝지 않다

→ 레리스는 《어른》에서 썩 똑똑히 얘기하지 못한다

103쪽


우리 시대의 진지한 사유는 대개 집을 잃은 듯한 느낌에 시달린다

→ 오늘날은 깊이 돌아볼수록 집을 잃은 듯 시달린다

→ 요새는 차분히 살필수록 집을 잃은 듯 시달린다

→ 이제는 가만가만 짚을수록 집을 잃은 듯 시달린다

109쪽


역사주의적 접근은 분명 가치 있는 통찰을 제공한다

→ 차근차근 다가서야 제대로 깨어난다

→ 하나씩 짚어가야 뜻있게 눈뜬다

→ 길눈으로 보아야 뜻깊게 알아본다

140쪽


이 책의 방대함과 다급한 호흡은 철학적 딜레마 탓이다

→ 이 책은 엇갈린 눈 탓에 펑퍼짐하고 숨가쁘다

→ 이 책은 갈팡질팡 보느라 늘어지고 덤빈다

144쪽


이오네스코의 성취는 무엇일까

→ 이오네스코는 뭘 이뤘을까

→ 이오네스코는 뭘 했을까

174쪽


원래 이오네스코의 초기 창작 동력은 상투적 일상에서 시를 발견하는 것이었다

→ 이오네스코는 처음에 수수한 삶에서 노래를 찾았다

→ 이오네스코는 워낙 작은삶에서 노래를 캐냈다

→ 이오네스코는 모름지기 모든 곳에서 노래를 보았다

→ 이오네스코는 언제 어디에서나 노래를 느꼈다

→ 이오네스코는 늘 노래를 만났다

175쪽


이오네스코가 클리셰를 발견했다는 것은 언어를 의사소통이나 자기표현의 도구로 보기를 거부하고, 대체 가능한 개인이 (일종의 무아지경 상태에서) 분비한 진기한 물질처럼 간주했다는 것이다

→ 이오네스코가 타령을 찾았다면 말을 마음나눔이나 마음그림으로 여기지 않고, 새로운 내가 (이른바 고요히) 내놓는 놀라운 빛으로 삼았다는 뜻이다

176쪽


여기에서 브레송 인류학의 세 가지 기본 공리를 얻을 수 있다

→ 이 글에서 브레송이 편 사람길 세 가지를 볼 수 있다

→ 이 글로 브레송이 꾀한 사람길 셋을 엿볼 수 있다

274쪽


갑자기 누군가가 이상한 행동을 하기 시작한다

→ 갑자기 누가 얄궂게 군다

→ 갑자기 누가 엉뚱히 군다

→ 갑자기 누가 막나간다

305쪽


희망적 사고가 무척 많이 담겨 있는데

→ 앞길을 밝게 여기는데

→ 앞날을 푸르게 보는데

→ 무척 밝게 여기는데

→ 매우 환하게 보는데

→ 꿈에 부푸는데

317쪽


카우프만의 책이 갖는 의의는 이 책이 오늘날 전반적인 태도의 또 다른 사례라는 데 있다

→ 카우프만 책은 오늘날 흔히 보는 책을 새삼스레 보여주기에 뜻깊다

→ 카우프만이 쓴 책은 오늘날 나도는 숱한 책을 다시금 보여준다

→ 카우프만이 쓴 책은 오늘날 떠도는 책과 다르지만 닮았다

362쪽


해프닝은 시간으로부터의 자유를 표현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일시성을 추구한다

→ 오늘에 얽매이지 않으려고 갑작스레 사달을 일으킨다

→ 하루에 붙들리지 않으려고 확 깜짝짓을 일으킨다

→ 하루하루 마음껏 살려고 문득문득 이런저런 일을 한다

→ 삶을 마음껏 드러내려고 일부러 느닷없이 군다

→ 홀가분하다고 보여주려고 그냥 가볍게 군다

379쪽


컬트적 이름으로 불린다

→ 높이는 이름이다

→ 우러르는 이름이다

→ 치켜세운다

→ 떠받는다

→ 섬긴다

→ 엎드린다

391쪽


간단히 말해 ‘두 문화’라는 문제는 오늘날 문화적 상황에 대한 무지하고 낡은 이해에 기반하고 있는 것이다

→ 다시 말해 ‘두길’이란 오늘살림을 모르고 낡은눈으로 보는 셈이다

→ 그러니까 ‘두빛’은 오늘살이를 모르는 채 낡게 본다는 뜻이다

→ 곧 ‘두살림’이라 하면 오늘삶터를 모르고서 낡게 짚은 셈이다

424쪽


글 : 숲노래·파란놀(최종규). 낱말책과 노래를 쓴다. 숲을 품은 시골에서 산다. 살림을 짓는 하루를 가꾼다. 《열두 달 소꿉노래》, 《풀꽃나무 들숲노래 동시 따라쓰기》, 《새로 쓰는 말밑 꾸러미 사전》, 《미래세대를 위한 우리말과 문해력》, 《들꽃내음 따라 걷다가 작은책집을 보았습니다》, 《우리말꽃》, 《쉬운 말이 평화》, 《곁말》,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이오덕 마음 읽기》를 썼다. blog.naver.com/hbook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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