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읽다 12 밑뿌리를 캐면서

책벌레수다 : 말밑을 누구나 읽는다면



  낱말책을 손수짓는 짝꿍을 둔 우리집 곁님은 으레 나무랐다. 왜 낱말책을 쓴다면서 ‘말밑책(어원사전)’부터 안 하느냐고 타박했다. 비슷한말을 풀고 겹말을 풀고 새말을 풀면서 손질말을 풀면, 바야흐로 차분히 말밑도 풀 수 있다고 들려주었지만, 그냥 처음부터 말밑을 풀려고 하면 다 이루지 않느냐고 꾸중했다. 이 말을 내내 곱씹으며 살아간다. 나무가 서려면 밑동부터 있을 노릇이다. 나무가 줄기를 올리려면 뿌리부터 내릴 노릇이다. 뿌리를 안 내리면서 줄기나 가지를 먼저 뻗으면 그만 쓰러진다. 적잖은 나무는 뿌리를 적게 내린 채 줄기와 가지를 늘리느라 비바람에 쓰러진다. 그러니까 우리말을 제대로 짚거나 알거나 익히려면 말밑부터 차분히 짚고 배우는 길을 가야 맞다.


“전에 다니던 회사가 돈 줄 테니까 다시 돌아오라고 하더라고.” “뭐?” … “완전 제멋대로지 않아? 자기들이 쫓아냈으면서! 곤란해지니까 이제 와서 도와달라고? 그리고 돈 얘기를 꺼내기 전에 사과부터 하란 말이야! 몇 번이고 전화하지 마, 바보들아!” 《네? 사내 시스템을 전부 혼자 관리하는 저를 해고한다구요? 3》 83, 84쪽


  우리나라 배움터를 돌아보면, 말밑을 아예 못 가르친다. 어린배움터도 푸른배움터도 똑같다. 이 나라 배움터는 ‘글눈(문해력·리터러시)’은 내세우지만, 정작 ‘글눈’을 익히려면 낱말이 태어난 뿌리부터 차근차근 짚어야 하는데, 말밑 이야기는 건너뛰면서 온갖 한자말과 영어부터 잔뜩 머리에 욱여넣는 얼거리이다. 우리말은 제대로 모르는 채 한자말과 영어만 배운다면, 아이도 어른도 무슨 말을 하거나 어떤 글을 쓸까? 말을 말로 다룰 줄 모르는 채 스무 살까지 불굿(입시지옥)에 시달리다가 ‘서울에 잔뜩 있는 열린배움터’에 들어간들, 머리를 틔우거나 깨우는 익힘길을 스스로 못 열고 만다. 영어를 가르치는 나라에서 영어 말밑을 안 가르칠 까닭이 없다. 어느 나라에서든 그 나라말을 익히려면 그 나라말을 이루는 뿌리부터 짚고 들려준다. 우리는 어린이집과 어린배움터에서 차분히 ‘우리말밑’을 가르치고 배울 수 있어야 맞다. 푸른배움터에서는 ‘우리말밑’을 제대로 가다듬으면서 ‘새말짓기(사투리 쓰기)’를 이끌 수 있어야 한다.


“바보 같은 놈. 니는 언제까지 니를 배신하지 않을 인간만 찾아다닐 셈이고?” … “유이 씨가 같이 있으면 엄마가 즐거워 보이니까. 유이 씨는 료헤이 군에겐 좋은 아버지가 아니었을지 몰라도.” 《자전거집 타카하시 군 7》 51, 120쪽


  나풀나풀 나는 ‘나비’이다. 나풀거리듯 날기에 나비이기도 하지만, 날 줄 알고, 날개돋이를 한대서 나비이기도 하다. ‘날개’하고 ‘활개’는 비슷하면서 다르되 나란한 낱말이다. 활짝 펴기에 활개요, 환하게 빛나는 활개이다. 내가 나를 스스로 알아보면서 새길을 낳는 나로 서는 나무와 같이 눈뜬다고 해서 ‘나’를 밑동으로 ‘날다·날개·나비’하고 ‘낳다·남다·나무’로 잇는다. 곧, ‘나’하고 ‘너’가 서로 다르면서 나란한 나비로 날아오르는 줄 알아본다면, 서로 하늘(하느님)인 줄 깨달을 만하다. 나부터 눈뜨기에 너랑 만나는 너머로 넘어가고, 서로 넘나들기에 ‘너나들이’라 하며, 이때에 ‘우리·울(나 + 너)’이라는 길을 열어서, 나하고 너는 ‘하늘·한울(하나인 우리·울)’을 이룬다. 나하고 너가 우리로 만나서 하늘을 이루기에 파랗게 빛나는 바람을 숨으로 들이마시고 내쉬는 사람이라는 빛살을 몸으로 입는다.


아무런 신체 기관도 갖지 않은 사후 생존자에게 쉽게 기대되는 행위는 상상이라는 내적 활동이다. 《사후 세계의 철학적 분석》 71쪽


  말밑을 누구나 읽는다면, 언제나 누구나 스스럼없이 눈뜨고 깨어나서 일어나는 하루를 맞을 테지. 말밑을 누구나 못 읽거나 모른다면, 둘레에서 누가 일으키거나 돕더라도 못 일어나고 못 깨어나고 못 눈뜬다. 아침에 따르릉 크게 울려야 일어난다면 이미 틀렸다. 아침에는 어떤 따르릉 소리도 없이 일어날 노릇이다. 굳이 아침에 소리를 듣고 싶다면, 새가 들려주는 노랫소리를 듣고서 일어나면 된다. 새벽에 이는 바람소리를 듣고서 깨어나면 된다. 아직 별이 총총한 때에 가만히 눈뜨면 된다. 말밑읽기란, 눈뜨는 별을 읽는 길이고, 듣는 노래를 알아채는 길이며, 마주하는 햇빛을 따라서 기쁘게 일하려고 일어나는 길이라고 할 만하다.


우리 가면은 이상과 같이 현실을 장난기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점박이 가면은 돌림병과 관련이 있지만 노장탈의 점은 파리똥이라고 한다. 《탈춤의 사상》 169쪽


  우리는 밤에 자고 낮에 일한다. 밤낮이 가만히 갈마든다. 아무리 즐겁거나 아름다운 일이라 하더라도 내내 안 쉬면서 하지는 않는다. 알맞게 하고서 쉬거나 마칠 일이다. 알맞게 했기에 밤에 느긋이 쉰다. 비록 못 끝내거나 미루어야 하더라도 걱정없다. 늘 하루치를 하면 된다. 한꺼번에 다 하거나 맡아내려 하기보다는, 그날그날 사뿐사뿐 일거리를 다스리기에 넉넉히 웃고 노래하는 사람으로 선다고 느낀다. 우리는 날마다 책을 100자락이건 1000자락이건 읽을 수 있다. 때로는 하룻밤에 이만큼 읽어도 된다. 이러다가 몇날 동안 한 쪽조차 안 읽어도 된다. 날마다 비슷비슷한 쪽을 읽는다고 해서 꾸준히 읽는다고 여기지 않는다. 글종이에 담은 책도 읽고, 바람소리에 흐르는 책도 읽고, 새와 풀벌레와 매미와 개구리가 베푸는 노랫가락에 흐르는 책도 읽고, 들풀과 나무와 꽃송이와 씨앗과 열매에 감도는 책도 읽으면 된다. 빨래하고 비질하고 치우고 밥하고 설거지하고 집안일에 아이돌보기라는 온갖 살림노래라는 책을 함께 읽으면 된다. 손으로 만지면서 일하는 모든 길이 책읽기이다. 빨래도 책읽기이고 밥짓기도 책읽기이다. 나물을 손질하고 양념을 마련하고 마당에 옷가지를 널다가 걷어서 정갈하게 개는 일도 책읽기이다. 아기한테 자장노래를 들려주고, 아이를 무릎에 앉혀서 그림책을 읽는 길도 스스로 피어나는 책살림이라 할 만하다.


‘이제껏 따라잡느라 급급해서, 따라잡은 다음 따윈 상상하지도 못했다. 내 앞에는 키사라에겐 없는 길이 놓여 있다. 키사라를 따라잡은 다음, 나는 그쪽으로 나아갈지도 모른다.’ 《투 온 아이스 2》 26쪽


  ‘일’이라는 낱말이 있다. ‘일하다’는 돈을 버는 길만 가리키지 않는다. 돈만 번다면 ‘돈벌이’라고 따로 쓴다. ‘일’이란, 돈을 벌든 말든 스스로 몸을 일으키고 마음을 일구면서 삶과 살림을 잇고 이야기하는 이곳에 있는 몸짓과 눈짓과 손짓과 숨짓을 고루 나타낸다. 우리는 일꾼으로 서면 된다. 일지기로 만나고 일동무로 어울리면 된다. ‘직장인·회사원·사업가·근로자·노동자’가 아니라, 그저 ‘일꾼’이면 된다. 바람과 바다가 일듯 일을 맡고 하면 된다. 눈뜨고 깨어나서 일어나는 하루이듯, 이렇게 일어서는 온빛으로 일을 나서면 된다. 일을 하기에 아름답게 사람이다. 일을 알고 나누기에 사랑스레 사람이다. 일할 줄 알기에 놀 줄 알고, 일놀이를 나란히 품기에 노래하는 노을빛으로 곱게 물든다.


ㅍㄹㄴ


《네? 사내 시스템을 전부 혼자 관리하는 저를 해고한다구요? 3》(카시로메 유키·이오·icchi/박용국 옮김, 씨엘비코믹스, 2025.12.31.)

#え社內システム全てワンオペしている私を解雇ですか #伊於 #下城米雪

《자전거집 타카하시 군 7》(마츠무시 아라레/오경화 옮김, 대원씨아이, 2025.12.31.)

#自轉車屋さんの高橋くん #松蟲あられ

《사후 세계의 철학적 분석》(T.페넬름/이순성 옮김, 서광사, 1991.11.20.)

#TerencePenelhum #SuvivalAndDisembodiedExistence

《탈춤의 사상》(채희완 엮음, 현암사, 1984.3.15.)

《투 온 아이스 2》(이츠모 엘크/오경화 옮김, 대원씨아이, 2025.8.31.)

#ツ-オンアイス #逸茂エルク


글 : 숲노래·파란놀(최종규). 낱말책과 노래를 쓴다. 숲을 품은 시골에서 산다. 살림을 짓는 하루를 가꾼다. 《열두 달 소꿉노래》, 《풀꽃나무 들숲노래 동시 따라쓰기》, 《새로 쓰는 말밑 꾸러미 사전》, 《미래세대를 위한 우리말과 문해력》, 《들꽃내음 따라 걷다가 작은책집을 보았습니다》, 《우리말꽃》, 《쉬운 말이 평화》, 《곁말》,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이오덕 마음 읽기》를 썼다. blog.naver.com/hbook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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