곤혹한 비평 - 이현식 문학평론집
이현식 지음 / 작가들 / 2007년 6월
평점 :
절판



- 책이름 : 곤혹한 비평
- 글쓴이 : 이현식
- 펴낸곳 : 작가들(2007.6.25.)
- 책값 : 13000원



 이 책 하나 28 ― ‘어려움’을 뚫고 나온 문학평론 하나
 : 이현식 문학평론, 《곤혹한 비평》

 

 〈1〉 한일축구, 여수박람회, 겨울올림픽


 한국과 일본이 축구 경기를 벌인다고 할 때면, 열 가지 일을 제쳐놓고 축구 경기를 보아야 한다고 말씀하는 분이 제법 많습니다. 그러면서 한 마디, ‘반칙을 해도 좋으니 이겨야 한다’. 이때 저도 한 마디 대꾸합니다. “한국이 져도 좋으니, 반칙을 안 하는 나라가 이기면 좋겠습니다.”

 지저분하게 경기를 한다든지, 성의 없이 땀 안 흘리는 경기를 한다든지, 일찌감치 두 손을 들고 온힘을 다하지 않을 때면, 운동경기 중계를 보고 싶지 않습니다. 솜씨와 재주가 몹시 뛰어나다고 해도, 맞은편 선수를 깎아내리거나 얕보거나 놀린다면, 이런 선수들은 조금도 달갑지 않습니다.

 지더라도 웃어야 하고, 지더라도 땀흘려야 하며, 지더라도 다시 애써서 다음 번에 이기도록 마음을 기울이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늘 이겨야 하는 법은 없습니다. 경기를 치르는 줄거리가 중요하지, 지고 이기고 하는 열매는 다음 차례입니다. 이기면 이긴 대로, 지면 진 대로 즐거운 일이 운동경기요, 경기를 준비하는 동안 흘린 땀방울을 소중히 여기는 운동경기라고 느낍니다.


.. 4ㆍ19세대의 세대로서의 정체성은 온통 한글, 다시 말해 문화사적 의미에 가려 정치적 의미는 달아나 버린다. 1980년의 항쟁과 탄압 역시 김현에게 오면 ‘폭력’이라는 불투명한 단어로 바뀌어 버린다. 그가 1980년대에 했던 작업들, 예컨대 지라르에 대한 연구나 기타 그의 비평적 행위들에서 그가 폭력의 의미를 파고들었다는 점이 갖는 의의는 물론 높이 살 일이지만, 폭력이란 말은 또 얼마나 추상적인가? 그 언어로는 1980년에 벌어졌던 일들에 대해 아무것도 말할 수 없다. 그건 ‘폭력’이라는 보통 명사로 지칭되기에는 너무나 구체적이고 역사적인 일들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김현은 이 대목에 오게 되면 억압에 대한 저항의 의미를 그 특유의 열린 반성적 사유로 파악하기보다는, 자기만의 성으로 완강하게 움츠러들어 왜곡시켜버린다 ..  〈29쪽〉


 “관람객 795만 명이 찾아 10조 원의 생산유발과 5조원의 부가가치, 15만 명의 고용창출 효과가 예상되고 있다. 정치·경제·사회적인 파급효과도 엄청날 것으로 예상된다. 이는 1988년 서울올림픽이나 2002년 한·일 월드컵보다 파급효과가 큰 것이다.(오마이뉴스 2007.11.27.)”는 기사를 보고 고개를 절레절레 내젓습니다. 올해 4월, 충주에서 인천으로 살림을 옮기며 들어야 했던 소식인 ‘아시아경기대회 인천 유치’에 못지않은 씁쓸함 때문입니다.

 10조 원을 벌어서 5조 원이 남는다고 하면, 이 5조 원으로 무슨 일을 하나요. 15만 사람한테 일자리가 주어진다고 했을 때, 어떤 사람이 일자리를 얻을 수 있고, 이들이 얻는 일자리는 무엇을 하며 보람을 느끼는 일자리이며, 이 일자리를 얻은 사람들이 돈을 벌어서 어디에서 어떻게 쓸 테며, 이 돈은 우리 자신한테, 우리 삶터에 어떻게 보탬이 되나요.

 795만이라는 숫자를 어떻게 셈했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이만한 숫자가 한국땅을 밟든 더 많은 숫자가 한국땅을 밟든, 이들이 묵을 잠자리는 어떻게 풀지요? 새 호텔을 잔뜩 지으면 될까요? 새 아파트를 허벌나게 올려쌓으면 될까요? 이들이 타고다닐 교통편은 어떡하지요? 이들이 먹을 밥은 또 어디에서 어떻게 마련하나요. 식량자급율이 30%도 안 되는 이 나라에서 이들한테 팔아치울 먹을거리는 죄다 나라밖에서 사들여서 시세차익 남기기로 돈벌이를 해야 하는지요?


.. 김현은 이 글에서, 적어도 저항적 폭력에 대해서는 그 특유의 맥락적 사유, 반성적 이성의 목소리를 내지 않는다. 억압당해 온 사람들의 저항으로부터 비롯된 폭력이 갖고 있는 위험성을 비판하되, 그는 그것의 맥락을 열린 자세로 접근하지 못한다. 그는 드러난 폭력에만 집착한다. 그 이유는 그것 역시 억압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물론 그것이 억압으로 전화될 수도 있다는 점은 사실일지 모른다. 그렇지만 그 전에 그것이 폭력으로 될 수밖에 없는 역사적 맥락을 드러내는 일이 선행되지 않는다면, 그것 역시 저항에 대한 왜곡이 될 수 있다. 대항 이념과 저항이 왜 개인의 자유로운 공간을 획득하려 하기보다 폭력으로 나아갔는지, 그리고 또 그것이 왜 또 다른 억압이 될 수도 있는지를 ‘사회ㆍ역사’적 맥락에서 사유하는 쪽으로 진전되었어야 한다. 그래야 억압과 폭력의 본질이 더 정확하게 드러날 수 있을 것이다. 그 점이 훨씬 더 ‘김현’다운 모습이다 ..  〈31쪽〉


 평창 겨울올림픽 끌어들이기가 여러 차례 실패했을 때 ‘만세!’를 부르지는 않았지만, ‘후유!’ 하고 한숨을 쉬었습니다. 한 번도 아닌 여러 번 우리들한테 ‘좋은 가르침’이 베풀어졌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마음을 기울일 곳은 어디인지, 우리가 몸을 움직일 일은 무엇인지, 우리가 가진 돈이며 시간이며 땀방울을 쏟을 데는 어디인지를 넌지시 알려주었기 때문입니다.

 한 사람이 한 달에 천만 원을 벌어서 900만 원을 신나게 쓴다고 할 때와, 한 사람이 한 달에 백만 원을 벌어서 알뜰살뜰 40만 원을 쓰고 나머지 60만 원은 내 이웃이나 내 삶터 가꾸기에 쓴다고 할 때와, 한 사람이 한 달에 이십만 원을 벌어서 이웃돕기는 하나도 못하지만 제 앞가림하는 데에 허리띠 졸라매며 쓴다고 할 때, 어느 때가 우리한테 기쁨과 눈물과 웃음과 아름다움을 베푸는 일이 될는지요.

 저는 한 끼니에 밥 백 그릇을 먹지 않아도 좋습니다. 한 끼니 밥 한 그릇이면 넉넉하지만, 하루 두 끼니여도 좋고, 하루 한 끼니여도 괜찮습니다. 한 끼니 밥값으로 만 원짜리나 십만 원짜리가 아니라 해도 좋습니다. 한 끼니 밥값으로 300원이나 500원만 들어도 좋습니다. 한 잔 술값이 십만 원이나 백만 원짜리가 아닌 천 원짜리나 이천 원짜리라 해도 좋고, 동무들한테 얻어마셔도 좋습니다.


 〈2〉 우리가 살 집


 지난 토요일, 참여연대 박원순 님이 우리 일터인 도서관 나들이를 하셨습니다. 인천에 다른 볼일이 있어서 오신 김에, 〈스페이스 빔〉이라는 전시관을 찾아오셨다가, 헌책방 〈아벨서점〉 아주머니가 손수 마련한 ‘시 다락방’ 구경을 하러 가는 길에 저와 만나서 들어오셨습니다. 죽 둘러보시며 도서관 살림은 어떻게 꾸려가느냐고 물으시다가, “책도 파나요?” 하고도 물으시기에, “여기는 도서관인걸요.” 하고 말씀드렸습니다.


.. 이 무렵 최일수나 정태용의 민족 인식은 커다란 반향을 얻지 못했다. 논의의 옳고 그름을 떠나 이들은 주류적 흐름에서 벗어나 있었다. 사태가 왜 그렇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속단할 수 없지만, 당대의 문학계나 지성계, 넓게는 사회적 분위기가 이들의 주장을 받아들일 만큼 성숙되어 있지 못했거나, 아니면 이들의 주장 역시 냉전 이데올로기의 한 변주로밖에 여겨지지 않았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  〈40쪽〉


 배다리 헌책방거리 한켠에 자리한 〈스페이스 빔〉 전시관에서  금, 토, 일, 사흘에 걸쳐서 연극 공연이 있었습니다. 동네 한복판에 산업도로를 뚫어서 ‘남북축 고속화도로’로 만들고, 길 둘레 살림집을 싹 쓸어내어 아파트며 쇼핑상가로 재개발하려는 안상수 인천시장 정책이 어떻게 얼마나 말썽거리인지, 우리 삶을 갉아먹는지를 살며시 들려주는 연극마당이었습니다. 이 연극마당 구경이며 일손 거들기를 마치고 신포시장에 있는 닭집으로 가서 술을 한잔 걸치며 고단함을 풉니다. 밤 열두 시 나절, 닭집 문 닫을 때가 되어서 자리에서 일어나는데, 닭집 아저씨가 같이 한잔하자고 하셔서, 우리 무리도 닭집 아저씨하고 다른 곳으로 옮깁니다. 불 다 꺼지고 조용한 신포시장을 나와 뒤쪽 상가거리를 걷습니다. 1990년대 첫머리, 이곳 신포시장 둘레를 서울 명동거리처럼 꾸미겠다는 시 정책이 있어서, 크고작은 새 건물을 무던히도 짓고 옷집이며 밥집이며 술집이며 잔뜩 들어섰으나, 거의 모든 가게가 파리를 날리다가 쫄딱 무너졌습니다. 이즈음, 인천 연수동과 청학동 들에 수십만 채에 이르는 아파트를 올려세우고, 이 둘레에 있던 학교도 터를 팔아 그리로 옮기는 바람에, 이 거리를 찾아올 사람이 확 줄었거든요(이 때문만은 아니지만).


.. 지역문학은 자기가 삶의 뿌리를 내리고 있는 생활 현장에 관심을 두고 있다는 점에서, 70∼80년대 리얼리즘 문학과 궤를 같이한다. 그러면서도 지역문학은 생활을 구체적인 자기 삶의 문제로 인식하고, 일상의 차원과 연계시킨다는 점에서 80년대 문학이 갖고 있는 한계로부터 탈출한다. 아울러 방향 없는 일상성과도 거리를 둔다는 면에서 90년대 포스트모던 문학과 스스로를 구별한다 … 인천이 갖고 있는 정서와 부산의 정서는 다르다. 자연환경도 다를 뿐더러 지역의 역사도 다르다. 자연히 그곳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생각이나 삶의 방식도 다를 수 있다. 그런 정서와 풍토들, 거기에는 그 지역에서 일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구체적 삶의 내용이 담겨 있다. 그 건강성, 그것의 문제성이 주목하자는 것이다. 80년대의 열정은 지역 안에서 구체화된 현실과 만날 수 있고, 90년대 애매한 일상의 모습이 지역 안에서 조금 더 구체적으로 드러난다 ..  〈59쪽〉


 ‘건설 경기’를 북돋우면 일자리도 늘고 경제지표도 올라간다며, 온갖 건설계획이며 재개발계획이 쏟아집니다만, 이런 ‘조금 묵은 집 헐고 새 시멘트집 짓기’가 언제까지나 우리한테 돈벌이가 될까요. 재개발한다며 옛집 헐고 아파트 올리는 일은 참말로 우리한테 돈벌이가 될까요. 길어도 서른 해를 버티지 않게 짓는 아파트 문화는, 얼마나 우리 삶을 가꾸어 줄까요. 한 집에서 대여섯 해 살기도 힘들게 하면서 자꾸자꾸 이삿짐을 꾸리게 하는 우리 사회 우리 땅에서는, 참말로 누가 집임자요 땅임자일까요.

 두 다리 뻗고 잘 수 있는 다섯 평짜리 작은 골목집보다, 빈 방이 남아도는 쉰 평짜리 아파트가 더 살기 낫거나 아름답다는 ‘생각(이미지)’은 누가 심고 있으며, 이런 생각에 왜 우리들이 끄달려야 하고, 우리 사회는 왜 이런 쪽으로 흘러야 하나요.


.. 나는 두 가지 현실이 지역 차원에서 보다 첨예하게 공존한다고 생각한다. 즉 중앙의 보수적이고 구태의연한 문단구조가 더욱 극명한 형태로 뿌리깊게 존재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위에서 지적한 가능성들이 싹트고 있는 것이다. 중앙문단 중심의 보수적 문인 조직은 오랜 기간 동안 조직 차원의 개혁 노력이 미미했기 때문에 그 존재 의미는 거의 다해 버린 것이 아닌가 여겨질 만큼 문학의 창조적 역량을 잃어버렸다. 남은 것은 형해화되어 버린 제도이며 조직이고 형식화된 권력일 뿐이다 … 적어도 내가 보는 한에서는 문학에 대한 열의나 능력보다는 예산과 이권의 다툼장으로 변해버린 것이 지방의 보수적 문인 조직이다. 여기에 값싼 문인 지망생들이 대거 몰려들어 그런 분위기에 일조한다. 세력을 만들고 파벌이 형성되면서 지방문단 조직은 권력기관이 된다 ..  〈65쪽〉


 술집에서 나와 걷습니다. 시간은 벌써 두 시, 세 시……. 몸은 고되지만 잠은 오지 않고, 술은 들어갔으나 얼근하지 않고, 터덜터덜 골목골목 사잇길로 천천히 뚜벅뚜벅 걷습니다. 고개를 살짝 기웃하면 집안이 들여다보이는 집들, 발걸음을 멈추고 귀를 기울이면 집안 사람들 소리를 모두 들을 수 있는 집들, 창문 안쪽 살림살이가 훤히 보이는 집들. 스무 해 앞서도, 마흔 해 앞서도, 한국전쟁 때 미군 함포사격을 맞는 바람에 새로 올린 집도 많지만 그때에도 살아남아서 고이 이어오고 있는 골목집들. ‘독립운동을 했건 일제부역을 했건’ 아랑곳하지 않고, ‘사상분자가 많이 사는 동네’라고 해서, 일부러 온동네를 쑥대밭으로 만드는 함포사격을 오래도록 한 뒤 ‘인천상륙작전’을 하느라 애꿎은 백성들, 서민들, 밑바닥 사람들, 보통사람들 목숨이 하늘하늘 사라져 가야만 했다던 그 동네 골목길을 걷습니다. 걸어서 집으로 돌아옵니다. 제가 깃들이는 집은 1957년에 지어졌습니다.


 〈3〉 날씨


 아침햇살을 받으며 일어나 보니, 방 온도는 6도. 너무 쌀쌀하면 안 되겠구나 싶어 살짝 보일러를 돌립니다. 보일러 돌리는 김에 머리를 감고 빨래 넉 점을 합니다. 천으로 된 시장가방은 마당 담벼락에 널어 놓고, 긴양말 두 점은 모기장 위에 얹고, 바지 한 벌은 큰방 문고리에 겁니다.


.. 오늘날 우리의 문학상 제도는 어떤 형태로건 자본과 결탁되어 있는 경우가 많기에 그 권위를 온전하게 확보하기 힘들다 … 우리는 베스트셀러 소설, 베스트셀러 시집이라고 해서 그것을 곧 훌륭한 문학 작품이라고 부르지는 않는다. 그러나 문학상 수상 작품이라는 레테르가 시장에서 소비자에게 상품의 신뢰도를 높일 수 있을 것이란 예측은 충분히 가능하다 … 인지도 높은 굵직한 문학상들의 제정과 운영에 애초의 순수한 취지가 영향력을 발휘하기보다는 자본의 논리가 훨씬 더 크고 강하게 작용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 신경숙이 훌륭한 작가가 아니래서가 아니다. 조금 지명도 있고 팔릴 것 같은 작가를, 출판사마다 문학상을 수여한다는 이름으로 서로 앞다퉈가며 끌고가려는 현실이 눈에 빤히 보여 그런 것이다 ..  〈80∼82쪽〉


 마당에 나와 둘레를 둘러봅니다. 앞집 감나무는 두 알 남고 모두 털렸습니다. 감나무 임자는 몇 알 남겨 두기를 잊지 않습니다. 앞집 옥상마당에 고인 물이 살짝 얼어 있습니다. 그 옆집 옥상마당 빨랫줄에는 담요 한 장 널리고, 하늘빛은 파랗습니다. 구름 한 점 안 보입니다. 어제 그제 살짝 비가 듣더니 12월을 코앞에 둔 11월 막바지 하늘인데도 참 맑네요. 그리 쌀쌀하지 않으면서.


.. 추상적으로 규정된 개념어들이 너무 쉽게 사용되고 있어서 일단 문장 자체를 이해하기 힘들게 만들고 있다. 글쓴이가 생각하는 ‘현대성’은 과연 무엇인지도 짐작하기 전에 거기에 욕망이 결탁되고, 또 그것을 비판한다니 이게 도대체 무슨 뜻인지 쉽사리 이해되지 않는다. 개념적인 용어들이 빈번하게 등장하는 데다가 문장을 충분히 풀어쓰지 않아서 독자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글은 아니다 … 나름대로 문학에 대해 공부도 하고 문학의 현재와 미래에 대해 고민한다고 하는 내가 잘 이해하거나 납득되기 힘든 글이라면, 평범한 문학 애호가들이 대부분일 일반적인 독자들도 이 글을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지는 않다 .. 〈98쪽〉


 겨울이 겨울 같지 않은 미친날씨가 끝나고 추위가 다가오는가 싶더니, 겨울 찬비나 겨울눈도 아닌 봄비로 느껴지는 따순 비가 내렸습니다. 겨울비 내린 뒤면 더 추워져야 하는데, 오히려 따뜻해지면서 아침에는 안개도 피었습니다. 참 재미있는 날씨입니다. 덕분에 보일러는 덜 돌려도 좋아 기름 걱정은 덜할 수 있겠네요. 이만한 날씨에도 보일러를 팡팡 돌린다면 기름 걱정이 크겠지요. 자전거로 일터를 오가거나 두 다리로 걷지 않고, 자가용을 끌고 일터를 오간다면 기름 걱정이 크겠지요. 추우면 옷을 한 벌 더 입고, 일터에 가는 시간이 늦을 듯하면 저녁에 일찍 자고 아침에 일찍 일어나면 되는데. 배가 고프면 먹고 배가 안 고프면 안 먹으면 되듯이, 꽃그릇 흙이 마르는가 싶으면 물을 주고 촉촉하면 안 주어야 하듯이, 우리 삶도 있는 그대로 있는 만큼 느끼고 받아들이고 즐기면 될 텐데.


.. 이문열의 소설은 누구에게나 소설의 재미를 한껏 북돋고 지적 욕구를 충족시켜 주는 매력을 갖고 있다. 이문열의 소설을 읽다 보면 누구나 자신이 지식인이 된 것 같은 착각에 빠져들게 되는 것이다 … 그렇지만 그의 소설은 현실을 환기시키지 않는다. 아니면 현실의 특정 부분만 확대하여 과장한다. 그의 소설들에는 과정이 생략되어 있거나 아니면 단순하게 방향이 잡혀 있다. 세계가 변해가는 과정, 삶이 흘러가는 과정은 그리 문제시되지 않는다. 세계가 변해가는 과정의 힘겨움, 삶이 진행되는 과정의 고통스러움이 세밀하게 포착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미 그렇게 되도록 짜여 있기 때문이다 ..  〈289∼299쪽〉


 시간은 어느덧 열한 시를 넘어섭니다. 창문으로 햇살이 들어옵니다. 이부자리 있는 데로 맑은 햇살이 비치니, 방 온도도 조금씩 올라가겠지요. 문득, 이 햇살을 그대로 보내기 아깝습니다. 이불 둘 걷어서 앞마당으로 나갑니다. 한손으로 뭉그러 잡고 한손으로 탁탁 텁니다. 잔먼지가 하늘에 폴폴 날립니다. 벽돌 둘을 대며 담벼락에 넙니다.

 이불을 넌 자리 옆으로 까마중 한 줄기 말라 있습니다. 봄에 줄기를 올려 여름내 까만 열매를 맺은 그 까마중. 우리 집에 놀러온 분들 가운데 도시내기는 손도 대지 않은 까마중이지만, 시골내기는 “엉? 까마중이 여기서 자라네?” 하면서 덥석 따서 먹었던 까마중. 다음해에도 고 자그맣고 까만 열매를 맺어 줄까요.


.. 작품의 배경이 조선 후기라고 하더라도 오늘날 쓰여지는 작품에서 이런 식의 언어가 과연 필요할지는 의문이다. 소설의 전후 맥락에서 보더라도 마찬가지이다. 이문열 소설에는 이런 식의 구투 어린 말들이 심심치 않게 등장한다. 그가 지닌 한문 교양을 드러내는 데는 흠잡을 데 없겠지만, 그건 권력의 언어고 억압의 언어다 ..  〈300쪽〉


 〈4〉 문학평론 한 권


 문학평론 《곤혹한 비평》을 읽습니다. 글을 쓴 이현식 님은 문학평론 등단을 한 지 열 해 만에 묶었다는 평론책 머리말에서 “문학 작품을 읽고 문학책을 사는 행위가 더 이상 흔한 일이 아닌 것이 요즈음의 세태”인데, 이런 문학평론 하나 내어놓는 일이 얼마나 쓸모있겠느냐며 걱정을 합니다.


.. 한국의 시민들은 도덕의 문제에 대해서는 아주 쉽게 공감한다 …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은 도덕적인 방식으로 현실의 문제를 우리 사회에 제기하였다 … 《난장이》를 지배하는 언어는 단문체의 도시적 언어이고 세련되게 다듬어진 말이다. 생활 속의 살아 있는 민중의 언어가 아닌, 일반화된 언어이다. 사투리도 거의 없고 비어나 속어도 등장하지 않는다. 정확하고 균형잡힌, 깔끔하게 다듬어진 언어가 《난장이》를 시종일관 지배하고 있다. 그런 언어를 통해 시민들은 《난장이》에 친숙하게 접근한다 … 독자들이 작품을 읽어가면서 이들에 대해 거부감을 가질 이유가 없다. 난장이와 꼽추, 앉은뱅이라는 육체적 조건을 제외한다면 난장이들은 시민과 다를 바가 없다. 그들은 다만 경제적으로 조금 더 궁핍할 뿐이지, 전혀 다른 세계에 살아가는 사람들은 아니다 ..  〈315∼317쪽〉


 “야, 우리 책 보러 가자!” 하는 사람은 없고, “야! 우리 영화 보러 가자!”나, “야, 우리 놀러 가자!”나 “야! 우리 술 마시러 가자!” 하고 외치는 사람만 가득한 우리 흐름입니다. 동네 꼬마들은 고무줄놀이며 제기차기는 할 줄을 모르고, 동네 어른들은 당신 눈길을 트고 마음문을 열어 줄 일거리나 놀이감과는 자꾸만 멀어지는 우리 흐름입니다.

 사람이 사람답게 살아가는 길에서 벗어나 있기 때문에, 문학이 문학답게 펼쳐지며 읽히는 길에서 벗어나는구나 싶습니다. 사람이 사람답게 살아가는 자리에서 멀어져 있기 때문에, 문학이 문학답게 펼쳐지며 읽히는 자리에서 멀어지는구나 싶습니다.

 그렇지만, 《곤혹한 비평》은 세상에 나왔습니다. 갖은 어려움을 무릅쓰고. 온갖 힘겨움을 제 몸뚱이로 껴안으면서. (4340.11.27.불.ㅎㄲㅅㄱ)


.. 문제는 서울과 지방이 아니라 권력과 억압의 체제이며, 그것을 해체하여 자유롭고 인간적인 새로운 질서를 재창출하는 것이다 ..  〈67쪽〉

 

[글쓴이 이현식 님은] 1966년 외가인 여주에서 태어나 친가인 인천에서 자랍니다. 연세대학교 영문과와 대학원 국문과를 마치고, 1997년 〈문학과사회〉 평론 추천으로 등단합니다. (재)인천발전연구원 문화정책 연구위원을 거쳐 인천문화재단 사무국장으로 일하면서 인하대학교에 강의를 나갑니다. 《문화도시로 가는 길》, 《제도사로서의 한국 근대문학》, 《일제 파시즘 체제하의 한국 근대문학비평》 들을 펴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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