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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로우 슬로우 ㅣ 봄날의 시집
강성은 지음 / 봄날의책 / 2025년 8월
평점 :
숲노래 노래꽃 / 문학비평 . 시읽기 2026.4.6.
노래책시렁 541
《슬로우 슬로우》
강성은
봄날의책
2025.8.29.
시골은 마을에 아무 가게가 없습니다. 그저 작은집에 논밭과 멧자락이 있습니다. 냇물이 흐르거나 못물이 있고, 멧등성이나 들판을 따라서 숲이 우거지거나 뭇새가 날아들어요. 어느 집은 마당이 휑뎅그렁합니다. 어느 집은 둘레로 나무를 포근히 감쌉니다. 어느 집은 갖은 흙수레(농기구)를 거느리고 끝없이 부릉부릉 몹니다. 어느 집은 손연장만 다루면서 조용히 흙노래를 부릅니다. 《슬로우 슬로우》를 읽으며 ‘서울길’로 하루를 맞이하고 한 해가 흐르고 열 해나 스무 해나 서른 해를 보낼 적에 어떤 마음으로 어떤 말을 골라서 만나는가 하고 되새깁니다. 마을 곳곳에 빵집에 잎물집에 옷집에 튀김닭집에 큰가게에 작은가게에 온갖 가게가 줄이을 뿐 아니라 높다랗게 켜켜이 있다면, 언제나 이러한 모습을 바라보고 받아들입니다. 새 한 마리 내려앉아서 쉴 데가 없으니 모두 싸게싸게 내달려야 하는 얼개입니다. 나무 한 그루가 가지를 뻗을라치면 첫봄이나 끝겨울마다 가지치기를 무시무시하게 하기에, 씨앗 한 톨이 드리워서 싹틀 틈이 없는 틀입니다. 비가 와도 하늘을 파랗게 씻는 모습을 마주할 짬이 없으면, 겨울에 싸목싸목 내리는 눈송이를 혀끝으로 받을 빈터가 없으면, 우리 노랫길은 어디로 어떻게 흘러가려나요.
ㅍㄹㄴ
말없는 창백한 사물들이 / 나를 알아볼 때까지 / 기다려야 한다 (낮잠/17쪽)
아무리 먹어도 사라지지 않는 빵 / 동네마다 빵집이 많고 / 아름다운 빵들이 진열된 환한 상점의 문을 열고 들어가면 / 사람들이 한 바구니씩 빵을 담고 / 값을 지불한다 피 묻은 빵의 값 (피 묻은 빵/23쪽)
문 닫기 직전의 술집에서 / 우리는 나가기 싫어 미적거리고 있었다 / 폭설과 한파가 도시를 집어삼키는 밤 / 위스키병을 든 반팔 차림의 남자가 들어왔다 / 열이 많아서 겨울에도 늘 반팔 차림이라는 남자의 말에 / 주인장은 끄덕이며 웃었지 (과거가 없는 사람들/2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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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로우 슬로우》(강성은, 봄날의책, 2025)
슬로우 슬로우 눈 내리는 소리
→ 천천히 천천히 눈 내리는 소리
→ 싸목싸목 눈 내리는 소리
→ 차근차근 눈 내리는 소리
→ 가만가만 눈 내리는 소리
5
잠의 문이 열리는 소리
→ 잠길이 열리는 소리
13
나는 울음을 터트리기 직전의 기분
→ 나는 울음을 터트리려는 마음
→ 나는 곧 울음을 터트릴 마음
→ 나는 아직 울음을 안 터트린 마음
17
무인 도로 위에 식물들이 무인 책방에서 글자들이 움직이고 있다
→ 빈길에 풀꽃나무가 열린책집에서 글씨가 움직인다
→ 호젓한 길에 푸나무가 호젓책집에서 글씨가 움직인다
25
개의 유령이 멍멍 짖는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 도깨비개가 멍멍 짖는다 그래 나는 살아간다
→ 깨비개가 멍멍 짖는다 그러니 나는 숨쉰다
42
검은 옷이 많아져 나중엔 검은 옷만 입고 다니는구나 알게 되고
→ 검은 옷이 늘어 나중엔 검은 옷만 입고 다니는구나 알고
50
말년 운은 어디에선가 서성이며 지루하게 내가 늙기를 기다리거나
→ 끝날은 어디에서 서성이며 따분하게 늙기를 기다리거나
→ 늘그막은 어디서 서성이며 지겹게 늙기를 기다리거나
62
이웃의 누군가 우리집 마당 한 귀퉁이 바다로 이어지는 길을 이용해도 되겠냐고
→ 이웃 누가 우리집 마당 귀퉁이 바다로 잇는 길을 써도 되느냐고
→ 이웃이 우리집 마당 귀퉁이 바다로 잇는 길로 가도 되느냐고
69
매일 오후 사료와 물을 마당에 두었다
→ 낮이면 모이와 물을 마당에 둔다
→ 낮마다 먹이와 물을 마당에 둔다
80
모래 속에 잠겨 있던 아이 하나가 어둠 속에 잠겨 혼자 집으로
→ 모래에 잠긴 아이 하나가 어둡게 잠겨 혼자 집으로
→ 모래에 잠긴 아이 하나가 밤에 잠겨 혼자 집으로
85쪽
글 : 숲노래·파란놀(최종규). 낱말책을 쓴다. 《풀꽃나무 들숲노래 동시 따라쓰기》, 《새로 쓰는 말밑 꾸러미 사전》, 《미래세대를 위한 우리말과 문해력》, 《들꽃내음 따라 걷다가 작은책집을 보았습니다》, 《우리말꽃》, 《쉬운 말이 평화》, 《곁말》,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이오덕 마음 읽기》을 썼다. blog.naver.com/hbooklove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