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읽다 7 신주머니 떠넘기기

책벌레수다 : 힘없는 아이가 걷는 길



  왼손에도 오른손에도 짐을 움켜쥐면 손바닥을 조이는 무게에 그만 손을 놓고 싶을 때가 있다. “내가 뭐 하는 짓이지?” 하고 여기면 바로 손놓고 싶다. 이 마음을 돌려서 “나는 누가 뭐라 하든 두 손에 ‘짐’이 아니라 ‘살림’을 쥐었어.” 하고 혼잣말을 하면서 새삼스레 기운을 차리기도 한다. 어릴적을 돌아보면, 마음을 돌린 날보다 마음을 못 돌린 날이 흔했다. 한숨부터 절로 나오면서 끔찍하다고, 얼른 이 구렁에서 빠져나오고 싶다면서 하늘을 올려다보곤 했다. 나는 왜 이다지도 넘쳐나는 짐을 혼자 떠안아야 할까 싶어서 힘이 쪽 빠지기도 한다. 저 많은 사람들은 등짐도 어깨짐도 손짐도 없는데 왜 나만 유난히 이 온갖 짐더미를 들쳐메면서 어기적어기적 뒤뚱뒤꿍 느려터지게 가야 하나 싶기도 하다.


은정 씨는 비슷한 또래면서 갓 입사해서 할 줄 아는 것도 별반 없는 내가 그녀보다 높은 직급을 달고 더 많은 급여를 받는 것이나, 서무 업무를 하지 않고 남자들과 같은 영업을 하는 것에 박탈감을 느끼고 있었다. 《삼성을 살다》 96쪽


  틀림없이 너나 누가 나한테 “온갖 짐꾸러미”를 떠맡기기도 할 테지. 내 어깨에 등에 머리에 손에 차곡차곡 늘어나는 짐을 다시 바라본다. 끝없이 날라야 하는 바리바리 짐덩이일 테지만, 이름을 바꾸어 보기로 한다. “온갖 짐꾸러미”가 아니라, 단출히 ‘온짐’으로 줄여서 받아들여 본다. “‘온짐’이라고 하니 좀 들을 만한데?“ 하고 혼잣말을 한다. 이윽고 이름을 새로 바꾼다. ‘온살림’이라고 돌려서 헤아려 본다. “어? ‘온살림’이라 하니 한결 들을 만한데? 설마 이름만 바꾸어도 이렇게 다르나?” 그냥 잘 모르던 힘없는 어린이는 혼자서 생각에 잠긴다. 집에서고 마을에서도 배움터에서도 또래나 언니나 아저씨나 아줌마나 할아버지나 할머니 모두한테 시달리던 고삭부리 어린이는 곰곰이 생각해 본다. “이름을 스스로 붙이면서 모두 다르구나. 이름을 어떻게 부르느냐로 모두 새롭구나. 여태 몰랐어. 아무도 알려준 적 없어.”


모든 것이 파괴된 후에 남아 있을 색깔이라고요. 《새로운 나여, 안녕》 34쪽


  그저 짐을 떠맡는다. 나는 어린배움터 여섯 해(1982∼87)를 살면서 말끔이(청소당번)를 달아난 일이 하루조차 없다. 아니, 고삭부리에 힘없는 아이는 늘 또래가 떠넘긴 말끔이를 거의 혼자 끝까지 해내야 했다. 모둠마다 나처럼 힘없는 아이가 여럿 있고, 따돌림받는 아이도 여럿 있다. 한 모둠에 예순 언저리이던 모둠마다 늦은낮에 말끔일(교실·복도·창문·교무실·계단·교장실·사육장·운동장·화장실·쓰레기터)을 모든 아이가 나눠서 맡아야 하는데, 예순 가운데 쉰다섯 쯤은 으레 달아난다. 늦은낮에 적어도 한두 시간을 치우고 쓸고닦는다. 그나마 쉰쯤 달아나고 열쯤 남으면 두 시간 즈음에 마치는데, 쉰다섯이 달아나서 다섯만 남으면 서너 시간 걸리기 일쑤이다. 길잡이는 여섯 해 내내 살피러(중간점검·최종점검) 온 적이 없다. 그냥 말끔일을 시키고서 숙직실에서 술을 마시며 해롱거리기만 했다.


“네거티브 금지! 지금은 재미있는 만화를 그리기 위해서 눈앞의 나와 사랑하자.” 《그리게 된 이상 1》 100쪽


  “신주머니 떠넘기기”를 떠올려 본다. 숱한 또래는 말끔일을 떠넘길 뿐 아니라, 모처럼 끝까지 같이 남아서 말끔일을 마치면, “야! 네가 신주머니 맡아! 우린 간다!” 하며 낄낄거리고 달아난다. 신주머니 떠넘기기를 나나 또래 한둘이 으레 뒤집어쓴다. 나는 어릴적에 고삭부리로 여린 몸이어서 신주머니 떠넘기기 같은 짓도 곧잘 겪어야 했다. 맨 처음에는 너무 싫고 부끄럽고 스스로 못나구나 싶었지만, 어느 날 문득 옆으로 날아가며 노래하는 새를 보았다. 새는 지절지절 속삭이더군. “네(사람)가 나(새)를 보면 내(새)가 보일 테지만, 네가 나를 안 보고 짐을 보면 짐에 눌려버리겠지.” 이 말을 남기고서 휙 날아가네. 어리벙벙했다. “뭐지? 뭐야? 새가 나한테 말했나?” 하고 놀랐다. 걷다가 멈춰서 멍하니 한참 생각했다. 이러고서 다시 한 발을 내딛을 적에 마음을 바꾸기로 한다. “그렇구나. 나는 두 손 가득 또래들 신주머니를 안지 않았어. 나는 짐을 떠맡은 채 심부름에 시달리는 길이 아니야. 나는 그저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야. 자, 기찻길을 디뎌 볼까. 이 기찻길에도 꽃이 피었네. 무슨 꽃일까. 나중에 우리 마을에서도 이 꽃을 보면 어머니한테 여쭈어야지.”


‘나도 그 말을 거짓말로 만들고 싶지 않아.’ 《그리게 된 이상 2》 78쪽


  이날부터 싱글벙글 웃으면서 더 천천히 걸으며 새바라기에 구름바라기에 꽃바라기를 했다. “여러 또래 신주머니를 왕창 안은 채” 콧노래도 부르며 거닌다. 다만, 또래 신주머니를 팽개치거나 바닥에 내려놓지 않는다. 새가 나한테 들려준 이야기를 떠올린다. 새는 나더러 새를 보고 하늘과 땅을 보고 마을을 보며 무엇보다도 내 마음을 스스로 바라보라고 일렀을 뿐, 누구를 미워하거나 싫어할 까닭이 없다고 얘기했다. 짓궂은 또래가 우르르 달려들어 나를 두들겨패거나 괴롭히거나 돈을 빼앗더라도 그저 웃으면서 흘려보내고, 언제나 내가 스스로 바라볼 곳을 그려서 바라볼 노릇이라고 속삭였다. 새말(새가 들려준 말) 그대로 갖은 짐(또래 신주머니)을 잔뜩 안은 채 쪼그려앉아서 길바닥 들꽃을 바라보았다. “꽃아, 내가 손으로 널 쓰다듬고 싶지만, 두 손에는 이렇게 또래들 신주머니를 가득 안았어. 그래서 난 널 눈빛으로밖에 쓰다듬을 수 없어. 이다음에는 널 꼭 손으로 쓰다듬을게.” 하고 가볍게 말하면서 아주 천천히 한 발짝씩 나아갔다.


“난 못해. 나 자신을 그렇게 좋아하지 않는걸. 그래서 마디처럼 되고 싶다는 생각도 들고, 아직은 막연한 미래라 생각해 봐도 뭐가 뭔지 잘 모르겠어.” 《동네에서 소문난 텐구의 아이 7》 145쪽


  신주머니를 나한테 떠넘기고 앞서 달려가거나 달아난 또래는 “신주머니를 떠맡은 힘없는 녀석”이 한참 지나도 안 나타나니 속으로 덜컥 두려웠나 보더라. 한참 지난 어느 무렵에 또래들이 나한테 도로 우르르 달려온다 “뭐야! 이 ××! 아직도 여기 있잖아! 너 사라진 줄 알았잖아! 왜 이렇게 늦어!” 하며 다그친다. 이때 나는 그대로 웃으면서 “응, 새랑 구름이랑 꽃을 보며 가느라고. 너희 신주머니는 다 여기 있어. 난 새랑 구름이랑 꽃을 보며 천천히 걸을게. 너흰 먼저 가서 놀아.” 하고 말했다. 이런 일이 두어 벌 더 있은 뒤로 또래가 나한테 신주머니를 떠넘기는 짓을 더는 안 하더라. 나처럼 힘없는 다른 동무한테 신주머니를 떠넘기는 짓도 그쳤지. 신주머니를 떠맡은 동무가 있으면 조용히 다가가서 나누어 들었다. 가녀린 동무는 “야, 그러지 마. 내가 다 들게. 나 혼자 들 수 있어.” “아니야. 너도 배웠잖아? 종이 하나도 나누어 들면 낫다고. 우리가 같이 들면 돼.” “그러다 너도 걔들한테 맞아.” “맞으면 맞지 뭘. 때리려면 때리라고 해. 그리고 우리는 좀 천천히 걷자. 우리가 걔들 심부름꾼도 아닌데 왜 빨리 걸어? 꽃을 보며 천천히 걷자.”


  삶이란 뭘까 하고 늘 되새긴다. 어릴적에 겪은 바와 오늘날 살아가는 바를 으레 나란히 놓고서 곱씹는다. 누가 우리 두 손에 짐을 안기면 그저 빙긋빙긋 웃으면서 ‘내 걸음걸이’로 더 느긋이 걸으면 될 뿐이겠지. 누가 나를 때리면 “자, 더 때리셔요. 얼마든지 맞을게요.” 하고 활짝 웃으면 되겠지.


《삼성을 살다》(이은의, 사회평론, 2011.10.24.)

《새로운 나여, 안녕》(앨리스 워커/이옥진 옮김, 마음산책, 2005.4.25.)

#NowistheTimetoOpenYourHeart #AliceWalker

《그리게 된 이상 1》(타카하타 큐 글·카바 유지 그림/편집부 옮김, 조은세상, 2024.3.29.)

《그리게 된 이상 2》(타카하타 큐 글·카바 유지 그림/편집부 옮김, 조은세상, 2024.11.28.)

《동네에서 소문난 텐구의 아이 7》(이와모토 나오/김승현 옮김, 대원씨아이, 2011.4.15.)

#町でうわさの天狗の子 #岩本ナオ


ㅍㄹㄴ


글 : 숲노래·파란놀(최종규). 낱말책을 쓴다. 《풀꽃나무 들숲노래 동시 따라쓰기》, 《새로 쓰는 말밑 꾸러미 사전》, 《미래세대를 위한 우리말과 문해력》, 《들꽃내음 따라 걷다가 작은책집을 보았습니다》, 《우리말꽃》, 《쉬운 말이 평화》, 《곁말》,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이오덕 마음 읽기》을 썼다. blog.naver.com/hbooklove



우리집 텃노랑(토종노랑민들레)



바깥길을 나서려면 마을앞 시골버스는 '너무 늦게' 들어와서

옆마을로 논둑길을 따라 걸어가서 이른버스를 타야 한다.

그러나 기꺼이 걷는다.

동트는 시골 논자락을 바라볼 수 있으니.



그리고 즐겁게 태어난 동시그림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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