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읽다 5 빌린책에 밑줄을?

책벌레수다 : 자랑질은 다르게 해야지



  2026해 늦겨울 어느 날, 열린책숲(공공도서관)에서 빌린 책에 밑줄을 그을 뿐 아니라 늦게 돌려주어 말밥에 오른 분이 누구일까 하고 문득 찾아보았다. 그분이 내 또래인 줄 보고는 아주 창피했다. 내 또래인 사람이라면 ‘도서관 책에 밑줄긋기’라든지 ‘도서관 책에 침을 묻혀서 넘긴다’든지 ‘도서관 책 귀퉁이를 접는다’든지 했다가는, 예전(1980해무렵)에는 책지기(사서)가 달려와서 따귀를 갈기던 무렵이다. 나는 따귀를 맞은 바 없지만, 따귀를 맞은 사람을 본 적이 있다. 철썩 하는 소리가 책숲을 쩌렁쩌렁 가르면 얼마나 무서웠던지. ‘그때’에는 책숲뿐 아니라 배움터에서도 따귀를 갈기는 길잡이가 넘쳤고, 그냥 마을이나 골목에서도 ‘어른’이란 이름으로 윽박지르는 덩치 큰 사람은 어린이나 푸름이를 찰싹찰싹 갈기기 일쑤였다.


누군가를 우상화시키는 자들은 다른 사람들의 말을 절대로 듣지 않는다. 오로지 한 사람을 위해 세상이 움직여야 한다. 오직 그를 향해 세계가 집중되어야 한다. 과오를 숨긴 채 엄지를 세우며 그를 추앙하고, 다른 해석을 금지시킨다 … 하고 싶은 말과 글을 마음대로 옮길 수 없으면 느끼고 싶은 감정마저 박탈당하고 만다. 반성하고 희망할 수 있는 기회마저 숨겨야 한다. 《때가 되면 이란》 100, 126쪽


 요즈음은 ‘공공도서관 대출표’에 굳이 안 적는 듯싶지만, 예전에는 ‘책에 밑줄 긋지 마시오’를 비롯해서 ‘책을 침 묻혀서 넘기지 마시오’에 ‘책을 접거나 찢지 마시오’ 같은 알림글을 빼곡하게 적었다. 나는 일부러 이런 알림글을 차근차근 읽었다. 이런 알림글은 곧잘 띄어쓰기나 맞춤길이 틀리더라. 틀린글씨를 찾아낸 뒤에는 동무하고 아주 낮은 목소리로 “칫! 알림글부터 틀리게 쓰면서 주먹이나 휘두르고!” 하고 툴툴댔다. 그나저나 책숲에서 이렇게 알림글을 적어 놓아도 엉뚱한 짓을 하는 사람은 으레 있게 마련이다. 요새는 ‘책숲에서 밑줄긋기’나 엉뚱짓을 하는 버릇을 나무라거나 꼬집으면 오히려 ‘꼰대 같다!’는 핀잔을 들을 테니까 나무라거나 꼬집는 사람이 확 줄기는 했다만, 그분은 부끄러운 줄 모르는구나 싶다.


나는 잔돈을 놓을 때도 큰돈을 둘 때도 항상 똑같이 고맙다고 적는데 팁에 따라 태도를 확 바꾸는 그녀가 거북했다 … 젊은 시절, 나는 ‘사람’을 지키고 싶었는데 요즘은 자꾸 ‘재산’을 지키고 싶어집니다. 그래야 나도, 내 가족도 지킬 수 있을 것 같은 불안이 들어서요. 《안녕이라 그랬어》 83, 141쪽


  부끄러운 줄 모르니까, 밑줄긋고 싶은 책을 사읽지 않았겠지. 밑줄을 긋고 싶은 책이라면 곁에 두고서 되읽고 거듭읽고 다시읽을 노릇이니까, 사읽기를 해야 맞다. 책 한 자락 값이 얼마나 되는가. 참으로 요즈음 책값은 매우 싸다. 게다가 우리나라는 온누리 여러 나라에 대면 책값이 대단히 싸다. 비록 책집이 많이 줄었다고 해도, 일본만큼 책집이 많지는 않다고 해도, 우리나라는 책집이 제법 많은 나라로 손꼽을 수 있다. 밑줄을 긋고 싶은 책을 만난다면 사읽으면 된다. 책숲에서 빌려읽은 책이 마음을 사로잡는다면, 얼른 책숲에 돌려주고서 마을책집으로 나들이를 갈 노릇이다. 마음을 사로잡는 책을 한 자락 장만하는 김에, 새삼스레 우리 마음을 녹이는 다른 책도 몇 자락 더 장만하면 된다.


“같이 늙어서 이렇게 힘을 쓸 수 있는겨.” “멋진 모습을 보여주고 싶어서 그런 거구먼, 영감.” “하하하, 맞네, 맞어.” 《할아버지 할머니 회춘하다 1》 72쪽


  책을 왜 읽나? “나, 책 좀 읽어!” 하고 남한테 자랑하고 싶어서 읽는가? 책에 왜 밑줄을 긋나? “봐, 나 책 읽는다구!” 하고 둘레에 자랑하고 싶어서 밑줄을 긋는가? 누리길(SNS·인스타) 자랑질을 하고 싶으면, 책집에 가서 샀다고 찰칵찰칵 찍고서 자랑을 하면 될 일이다. 참으로 자랑놀이를 하고 싶다면, 책집마실을 하는 발걸음을 자랑하기를 빈다. 마을책집을 찾아가는 하루를 자랑하는 이웃이 늘기를 빈다. 마을책집에서 책을 열 자락쯤 장만하면서 배가 부르다고 자랑하는 이웃이 늘기를 빈다. 요즘 같은 때에는 손소리를 뚝 끊고서 가만히 종잇결을 느끼면서 책을 읽을 뿐 아니라, 따로 빈종이에 “밑줄을 긋고 싶은 대목을 천천히 옮겨적은” 다음에, “옮겨적은 손글씨”를 찰칵찰칵 찍어서 자랑잔치를 해보기를 빈다. 그러니까 “책읽은 자랑하루”를 선보이고 싶다면, 자랑할 일이나 길이 수두룩하다. 열린책숲에서 누구나 스스럼없이 손에 쥘 책은 정갈하고 곱게 다루고서 제때에 돌려주어야 맞다.


‘어머니와 시골로 돌아왔지만 처음엔 논일이 익숙하지 않아 입에 풀칠하는 것만으로도 필사적인 형국이었다. 처음엔 진흙투성이가 되는 게 고통스러웠다. 하지만 영감을 만나고서, 이 진흙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할아버지 할머니 회춘하다 2》 92쪽


  노래듣기(음악감상)는 자랑이 아니다. 이른바 ‘좋아함(취미)’이기는 하다. 책읽기(독서)는 자랑이 아니다. 그저 삶을 즐기는 길이다. 스스로 즐기는 이 삶을 굳이 남한테 자랑하려고 한다면, 스스로 속없이 텅 빈 수레라고 밝히는 셈이다. “나, 이런 책 읽는다?” 하고 보여주는 매무새는 너무 철없고 어리숙하다. 멋지거나 훌륭한 책을 읽는다고 할 적에는, 겉멋이 아닌 속치레를 할 노릇이니까. 그리고, 밑줄긋기를 자랑할 짬이 있다면, 밑줄을 그을 만한 대목을 읽고서 “느낀 바”를 글로 적어서 띄워야지. 우리 마음을 울리는 글 한 자락을 일군 이웃을 헤아리면서, 나는 오늘 이 하루를 어떻게 가꾸고 돌보면서 살아가려는 길을 새롭게 배웠는가 하고 쪽글을 써서 둘레에 나누면 아름답다. 책을 읽으며 느끼고 배운 바를 여러 이웃과 동무하고 나누면서 두런두런 책수다를 펼 적에 반갑다.


‘트라우마. 그 녀석 언뜻 보기에는 아무렇지 않아 보여도, 사실은 엄청 충격받은 거 아닐까.’ 《안녕, 아름다운 날 2》 51쪽


  비슷해 보이는 말꼴이지만 달라도 사뭇 다른 낱말인 ‘자람·자라다’하고 ‘자랑·자랑하다’이다. 책읽기와 글쓰기란, 스스로 자라려고 몸소 하면서 차분히 가다듬고 갈고닦는 살림길이다. 자랑하려고 읽거나 쓴다면 부질없을 뿐 아니라 창피하다. 자라려고 읽고 쓰는 모든 사람은 아름답다. 자랑하려고 읽고 쓰는 모든 사람은 불쌍하다. 어린이도 자라고 어른도 자란다. 푸름이도 자라도 할매할배도 자란다. 몸뚱이만 키우려 하지 말고, 나이만 머금으려 하지 말고, 마음과 숨결과 넋과 꿈과 사랑이 무럭무럭 자라나는 길을 헤아리면서 읽고 쓸 노릇이라고 본다. 몸뚱이만 젊게 보이려고 하는 사람이기에 겉치레에 쉽게 휩쓸리더라. 겉몸과 겉얼굴과 겉이름과 겉모습에 얽매이는 탓에 자꾸자꾸 자랑질이라는 늪에 빠지더라. ‘자랑늪’이 아닌 ‘자람숲’에서 만날 수 있기를 빈다. ‘자랑살이’는 내려놓고서 ‘자람씨앗’으로 살림을 짓기를 빈다.


《때가 되면 이란》(정영효, 난다, 2017.5.28.)

《안녕이라 그랬어》(김애란, 문학동네, 2025.6.20.)

《할아버지 할머니 회춘하다 1》(아라이도 카기리/이은주 옮김, 대원씨아이, 2022.4.30.)

《할아버지 할머니 회춘하다 2》(아라이도 카기리/이은주 옮김, 대원씨아이, 2022.5.31.)

#じいさんばあさん若返る #新挑限

《안녕, 아름다운 날 2》(아카네다 유키/한나리 옮김, 대원씨아이, 2018.8.15.)

#さらば佳き日 #?田千


ㅍㄹㄴ


글 : 숲노래·파란놀(최종규). 낱말책을 쓴다. 《풀꽃나무 들숲노래 동시 따라쓰기》, 《새로 쓰는 말밑 꾸러미 사전》, 《미래세대를 위한 우리말과 문해력》, 《들꽃내음 따라 걷다가 작은책집을 보았습니다》, 《우리말꽃》, 《쉬운 말이 평화》, 《곁말》,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이오덕 마음 읽기》을 썼다. blog.naver.com/hbook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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