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노래 책읽기 / 가난한 책읽기
누구를 보는가
어려서나 나이들어서나 같다. 몸피는 늘 바뀌지만, 마음은 누구나 늘 같다. 배우는 마음인 사람은 아직 철들지 않아서 퍽 어리숙하더라도 차근차근 나아가며 기꺼이 맞아들인다. 안 배우는 마음인 사람은 어느 나이에서도 안 배울 뿐 아니라, 어느 자리에 있든 어느 때를 마주하든 안 배우니까 노상 멈춰서 고인다. 어릴적에 멍하니 쳐다보곤 했는데, 뭔지 모르니 한참 보며 알아차리려고 했다. 이때마다 언니나 또래는 “넌 왜 함께 안 하고서 구경만 하니!” 하고 타박하며 꿀밤을 먹이거나 때렸다.
영문도 모르는 채 섞여서 뭐가 뭔지도 모르는 물결에 휩쓸리는데, “같이 하다 보면 저절로 알아!” 하고 나무라는 소리가 빗발친다. 느리거나 더디거나 더듬대거나 부끄러운 사람을 억지로 밀어넣거나 욱여넣으면, 언제나 더 말썽이거나 어긋난다. 스스로 알아채서 손모을 틈을 두어야 하지 않을까? 처음부터 억지로 서두르는 일이라면 아무리 여러 사람이 힘쓰더라도 무너지게 마련이다.
“내 너머 불구경”이라는 말처럼, ‘구경’이란 “남일로 여겨서 팔짱끼는 몸짓”이다. 그러니까 스스로 “내 일”로 받아들이려면 곰곰이 보고서 두루 짚어야 한다. 처음에는 낯설고 모르겠고 어지럽기 일쑤이지만, 보고 겪고 느끼는 사이에 천천히 알아볼 수 있다. 아기가 하루아침에 안 서고, 하루아침에 말꼬를 트지 않는다. 이리하여 ‘글꼬’가 있다. 글을 쓰기까지 누구나 “지켜보고 돌아볼 뿐 아니라. 내 삶으로 녹이고 풀어서 품는 틈”을 둘 노릇이다.
요즈음 쏟아지는 숱한 글(한국문학)은 으레 ‘구경글’이라고 느낀다. 구경글이기에 옮김말씨(번역체)가 춤춘다. 구경글은, 점잖게 “객관적 시선”이나 “적정한 거리”라는 일본말씨를 허울로 휘감는다. ‘삶글’도 ‘살림글’도 아니라서 구경글이다. “내 삶”이 아니기에 짐짓 팔짱끼고서 뒤로 물러난 몸짓으로, 내 너머에서 구경을 한다. 이윽고 구경눈에 길들고 물드느라, 한 발조차 안 담그고, 한 손조차 안 내민다. “내가 안 다치면서 길미만 누리는 데”라고 느낄 때까지 입다문다. 다칠 일이 없어도 입벙긋을 안 한다.
옮김말씨는 하나같이 ‘졸졸졸(피동형·수동형)’이다. 우리말씨는 ‘스스로+몸소(능동형)’이다. 글결이 ‘졸졸졸(입음꼴)’이라면 문득 책을 덮고서 헤아려 보자. 이 글이나 책을 쓴 이는 왜 구경만 하면서 손도 발도 몸도 안 움직이는지 생각을 해보자. 왜 옮김말씨나 일본말씨를 안 버리는지 살펴보자. 굳이 옮김말씨나 일본말씨에다가, 일본말과 중국말과 영어를 잔뜩 곁들여서 글을 쓰는 까닭을 곱씹자.
누구를 보는가? 저 먼발치 남을 보는가? 나와 너와 우리를 보는가? 글을 쓰고 싶다면 ‘자료조사’와 ‘증언수집’을 안 해야 할 노릇이다. 글쓰기를 바라면, ‘살면’ 된다. ‘살림하면’ 된다. 숲빛으로 푸르게 ‘사랑하면’ 된다. 삶과 살림과 숲과 사랑은 ‘입음꼴’이 없다. 모두 늘 ‘스스로+몸소’이다. ‘자료조사·증언수집’은 언제나 ‘졸졸졸’이면서 ‘남(사회·정부·우상·전문지식)’한테 기댄다. 남한테 기대는 곳에는 우리 나름대로 짓는 삶과 살림과 사랑이 없다. 초라하거나 가난하거나 모자라 보이더라도, 우리가 손수 짓고 몸소 하면서 스스로 펴는 삶·살림일 적에 바야흐로 ‘읽기(삶읽기·살림읽기·숲읽기·사랑읽기)’를 하기에, 저절로 ‘쓰기(삶쓰기·살림쓰기·숲쓰기·사랑쓰기)’로 거듭난다.
글은 스스로 쓸 일이다. 스스로 살아낸 바를 쓸 적에 나랑 너를 살려서 하늘(하나인 우리)을 이룬다. 몸소 살림하는 바를 쓰기에 나하고 너가 만나는 우리(아우름)를 일군다. 내가 나를 사랑하는 바를 쓰니, 나도 너도 가만히 날개돋이를 하면서 파란바람으로 피어난다.
너는 너를 보면 된다. 나는 나를 보면 된다. 너랑 내가 스스로 들여다보는 사이에 차분히 눈을 뜰 테니, 제빛을 바라보는 둘은 이윽고 한빛을 돌아보는 이곳을 편다. ‘시늉글(현대 한국문학)’이란 “남을 구경한 줄거리”이다. ‘참글(수수글)’이란 “내가 나를 사랑하면서 나로서 서는 오늘을 그리는 노래”이다. 같이 노래하니 즐겁다. 함께 노니 기쁘다. 수수하게 쓰니 스스럼없이 숲으로 간다. 수수꽃다리는 수수하게 빛나는 봄나무이다. ‘글감’이 아닌 ‘글’을 보려고 해야 비로소 너랑 나랑 우리를 읽어서, 이 별과 넋과 숨을 알아보며 쓸 수 있다. 2025.12.6.
ㅍㄹㄴ
글 : 숲노래·파란놀(최종규). 낱말책을 쓴다. 《풀꽃나무 들숲노래 동시 따라쓰기》, 《새로 쓰는 말밑 꾸러미 사전》, 《미래세대를 위한 우리말과 문해력》, 《들꽃내음 따라 걷다가 작은책집을 보았습니다》, 《우리말꽃》, 《쉬운 말이 평화》, 《곁말》,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이오덕 마음 읽기》을 썼다. blog.naver.com/hbooklov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