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노래 삶읽기 / 숲노래 마음노래
수다꽃, 내멋대로 65 걸으면서 쓴다
나는 이웃을 만날 적에 미리 옮겨적은 노래(시)를 건네곤 한다. 내가 건네는 노래종이(시를 적은 종이)를 받는 분은 곧잘 “글씨가 참 정갈하네요” 하고 말씀해 주시는데, 나는 자리맡에 앉아서 손글씨를 쓰는 일은 아예 없다시피 하다. 나는 자리맡에 앉을 적에는 ‘낱말책 새로쓰기’로 거의 온하루를 보낸다. 손글씨는 시골버스를 타고 움직이면서 저잣마실이나 나래터(우체국)를 다녀오는 길이라든지, 먼고을로 이야기를 들려주려고 시외버스를 타고서 다녀오는 길에 쓴다.
‘버스에서 책읽기’는 열일곱 살 때부터 했다. 열일곱 살 여름에 우리 아버지가 갑자기 집을 옮기는 바람에, 늘 걸어서 오가는 배움터를 이때부터 버스를 타야만 오갈 수 있었다. 버스를 타고도 40분 남짓 걸렸는데, 처음 하루이틀은 길을 익히느라 오직 바깥만 바라보았다면, 길눈을 익힌 뒤에는 책을 읽었다. 1991년 인천 연수동은 이제 막 삽질을 하던 무렵이라 길이 어마어마하게 나빴고, “이런 길을 다니다가는 버스가 망가지겠구나” 싶도록 흔들리고 덜컹이는 흙길(비포장도로)을 오르내렸다. 동무들은 “야, 넌 어떻게 이런 버스에서 책을 읽어? 이런 버스에서 영단어를 어떻게 외워? 이런 버스에서 ‘수학 정석’을 푼다고?” 하면서 놀라지만, 나는 동무들한테 이렇게 대꾸했다. “이런 덜컹버스에서는 책을 안 읽거나 수학문제를 풀지 않거나 영단어를 외우지 않으면 오히려 멀미가 나. 책을 읽고 수학문제를 풀고 원서(영어책)를 읽어야 마음을 다스리면서 멀미가 안 나.”
2008년에 큰아이를 낳으면서 ‘버스에서 책읽기’를 멈췄다. 아기가 있으니 아기를 보면서 아기랑 놀고, 아기한테 끝없이 노래를 들려주고 함께 춤을 추었다. 큰아이가 2009년부터 한글을 익히겠다며 아버지한테 달라붙느라 2009년부터 큰아이한테 읽힐 노래(시)를 썼다. 다른 어느 곳도 아닌 바로 버스와 길에서 노래를 쓰고, 버스와 길에서 읽히고, 버스와 길에서 가락을 입혀서 읊었다.
큰아이는 혼자 마음껏 걸을 수 있던 2010년 무렵부터 ‘걸으며 책읽기’를 했다. 나는 큰아이 곁에서 ‘걸으며 사진찍기’하고 ‘걸으며 책읽기’를 나란히 했다. 다만, 나는 1991년뿐 아니라 1982년부터 늘 큼지막하고 묵직한 등짐을 짊어진 채 걸었고, 버스를 탔고, 버스에서 책읽기를 했고, 걸으면서 책읽기를 했다.
어린배움터(국민학교)를 다니던 1982∼1987년 사이에 나보다 걸음이 빠른 사람을 꼭 하루 스쳤다. 1988∼2005년 사이에 나보다 걸음이 빠른 사람을 새로 한 사람 스쳤다. 2006∼2025년 사이를 사는 동안, 나보다 걸음이 빠른 사람이라면 우리집 작은아이가 있다. 다만, 나보다 걸음이 빠른 세 사람은 등짐을 짊어지지 않은 맨몸일 뿐이다. 나는 맨몸으로 걸어다닌 일이 아예 없다시피 하다. 늘 앞뒤로 잔뜩 짊어지며 걷는다.
2006년 무렵이었지 싶은데, 어느 이웃님이 “최종규 씨가 얼마나 빨리 걷는지 궁금해서요, 등짐을 벗고서 같이 걷기를 겨루면 어떨까요?” 하고 여쭈었다. “네? 왜 겨뤄야 해요? 저는 그저 길에서 하루를 흘리기 싫어서 그저 신나게 걸을 뿐인데요.” “그래도, 등짐을 푼 맨몸으로 같이 걸어 봐요.” 열 해에 하루조차 거의 없을, 아니 쉰 해를 살며 등짐 없이 걸어 본 일이란 다섯손가락에 꼽을 만큼 없을 일을, 어느 날 겪어 보았다. 그런데 등짐이 없이 맨몸으로 걷자니, 너무 힘들더라. 이미 나는 무게를 잔뜩 이고 진 몸에 맞게 팔다리를 놀리는 매무새에 익숙한 터라, 아무 짐이 없이 빨리 걸어가기란 오히려 너무 어렵더라. 몇 걸음 떼다가 그만두었다.
충북 음성 생극면 버스나루에서 충북 충주 무너미마을까지 8킬로미터 즈음이다. 생극 버스나루에서 무너미마을까지는 오르막이다. 이 오르막을 2003∼2007년에 50분∼70분 사이로 걸었다. 늘 등짐차림이었다. 무너미마을에서 생극 버스나루는 내리막이다. 이 내리막을 두바퀴로 달릴 적에 4분∼7분 사이로 갈랐고, 거꾸로 오르막일 적에는 15분∼24분 걸렸다.
인천 배다리(창영동)에서 서울 합정나루까지 32킬로미터 즈음 나오는 듯싶은데, 서울과 인천에서 살던 무렵에 이 길을 두바퀴로 50∼70분 사이로 달렸다. 걸으면 두 시간 반이 넘었다. 어떤 분은 말이 되느냐고도 묻지만, 왜 말이 안 될까? 예전에 이 길을 달리거나 걸을 적에는 언제나 때(시간)를 쟀다. 달리거나 걷고서 킬로미터도 쟀다. 이제는 구태여 이런 짓을 안 하지만, 한때 두바퀴에 때바늘(속도계)를 달고서 사람들한테 보여주기도 했다. 두바퀴에 붙인 때바늘은 길에서 쇳덩이(자동차)가 나를 치고서 달아난 탓에 조각나서 사라졌다.
요즈음 두바퀴를 달리면서 어림해 보니 24∼28킬로미터로 느릿느릿 밟는구나 싶다. 더구나 요새는 예전처럼 안 걷는다. 요새는 ‘걷는읽기’하고 ‘걷는쓰기’를 한다. 그렇지만 내가 ‘걷는읽기’하고 ‘걷는쓰기’를 하더라도 둘레에 나란히 걷는 웬만한 사람들보다 훨씬 빠르더라. 서울·부산·인천으로 마실을 가면, 쇳길(전철)을 갈아탈 적에도 걷는읽기하고 걷는쓰기를 하는데, 나는 으레 디딤돌(계단)로만 오르내린다. 디딤돌을 오르내릴 적에도 걷는읽기하고 걷는쓰기를 한다. 이미 이런 매무새는 1991년부터 붙인 터라, 등에 묵직하게 책짐을 짊어지고서도 꽤 빠르게 디딤돌을 오르내리면서 읽고 쓴다.
모든 사람은 모름지기 ‘느리’지 않다. ‘한글’이라는 이름을 처음으로 지었을 뿐 아니라, 우리말글 밑동을 처음으로 닦은 주시경 님이 있는데, 주시경 님이 새길(신학문)을 배울 적에, 서울에서 인천 싸리재(중구 답동·경동)까지 날마다 걸어서 오갔다고 했다. 이오덕 님이 남긴 글을 보면, 경상북도 멧골마을 아이들은 아침저녁으로 멧길을 네 시간 남짓 걸어서 오가기 일쑤였다. 우리는 구태여 빨리걷기를 해야 할 까닭이 없다만, 고작 쉰 해 앞서만 해도 “누구나 꽤 빨리 걸어서 길을 오갔다”고 할 수 있다. 늘 걷는 사람은 ‘걷기’가 그다지 느리지 않은 일인 줄 안다. 오히려 늘 걷고 오래 걷는 동안 스스로 마음을 추스르고 생각을 가다듬고 몸을 북돋우는 줄 알게 마련이다.
아기수레를 굳이 써야 할 까닭이 없다. 아기를 안고 업고 걸리면 된다. 이따금 짐을 쇠(자동차)한테 맡길 수 있되, 언제나 스스로 짊어지고서 걸어다니면, 우리 몸은 오래오래 한결같이 튼튼하면서 빛난다고 느낀다. 무엇보다도, 등짐으로 걸어다니면 이동안 책읽기와 글쓰기를 실컷 누린다. 등짐걷기를 하면서 책읽기와 글쓰기를 한다면, ‘껍데기 아닌 속읽기’에다가 ‘글치레 아닌 삶쓰기’를 스스럼없이 하게 마련이다. 반듯한 책마루(서재)가 있어야 책을 읽거나 글을 쓰지 않는다. 부엌에서 쓰고, 마당에서 쓰고, 길에서 쓰면 된다. 한 손으로는 아기를 안고 달래되, 다른 손으로는 책을 읽거나 글을 쓸 수 있다. 걸으면서 읽고 쓰는 이웃이 한 사람씩 늘어난다면, 우리가 함께 살아가는 이 별이 아름답게 거듭나리라 본다.
ㅍㄹㄴ
글 : 숲노래·파란놀(최종규). 낱말책을 쓴다. 《새로 쓰는 말밑 꾸러미 사전》, 《미래세대를 위한 우리말과 문해력》, 《들꽃내음 따라 걷다가 작은책집을 보았습니다》, 《우리말꽃》, 《쉬운 말이 평화》, 《곁말》,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이오덕 마음 읽기》을 썼다. blog.naver.com/hbooklove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