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노래 책숲마실 . 마을책집 이야기
TO YOU 님에게 (2024.9.29.)
― 부산 〈국제서적〉
해거름에 보수동을 찾아갑니다. 어제 살까 말까 망설이던 책이 있어서 ‘한동안 굶으면서 책을 읽으면 되지’ 하고 여기면서 장만합니다. 이제 저녁자리로 옮기는 길인데 〈국제서적〉 앞에서 서성이다가 안쪽으로 들어섭니다. 겉을 ‘TO YOU 님에게 초컬릿’으로 싼 《三中堂文庫 4 그리이스 로마 神話》가 보이는군요. 1982년에 나온 달콤이 겉종이로 쌌으니, 이무렵에 작은책을 아낀 손길입니다.
저는 1982년에 어린배움터에 들어갔습니다. 이즈음은 종이가 드물고 비쌌어요. 배움터 앞 글붓집에서는 똥종이도 ‘한 자락’씩 팔았습니다. 새하얀 그림종이는 ‘8절지 하나에 20원’이었고, 똥종이는 ‘하나에 5원’이었는데, 쉰이나 온 자락쯤 사면 2원으로 에누리해 주었습니다. 이해에 어린이 버스삯은 60원이고, 어른 버스삯은 110원입니다. 길바닥에 굴러다니는 종이가 없던 때를 새삼스레 돌아봅니다.
요사이는 종이뿐 아니라 책을 매우 쉽게 버립니다. 안 읽히거나 안 팔려서 버리기도 하고, 잘못 찍었기에 버리기도 합니다. 지난날에는 잘못 찍힌 책이어도 ‘잘못 찍힌 데’에 종이를 덧대거나 글붓으로 고쳐써서 팔았어요. 때로는 눅은값으로 팔았습니다.
모든 일을 빈틈없이 마쳐서 선보이는 일은 안 나쁘되, 자칫 쓰레기를 잔뜩 낳습니다. 버림받을 책이 아닌, 되살리고 되읽을 책을 헤아릴 때라고 느껴요. 많이 찍어서 많이 팔고 많이 벌어들이는 길에 책을 끼워넣지 않을 때입니다.
어제까지 잘못이나 말썽이었더라도, 스스로 즐겁게 끊거나 그만두면 아름답습니다. 오늘까지 잘하거나 훌륭하더라도, 난데없이 뒤틀거나 비틀면 얄궂습니다. 우리는 어제만 볼 일이 아닌, 오늘과 모레를 함께 볼 일이면서, 언제나 한결같이 볼 일이지 싶습니다. 사랑은 바뀔 수 없어요. 사랑은 한꽃같이 피고서 씨앗을 맺어요.
이웃을 마주하고 말을 섞습니다. 이웃하고 함께 한자리에 있는 동안, 여태 몰랐던 삶과 사람과 사랑과 살림을 부드러이 헤아립니다. 이웃이나 동무가 아닌 사람을 마주하고 말을 섞을 적에도, 서로 눈과 마음을 틔우거나 여는 조그마한 실마리를 이뤄요. 먼 남남인 그이도 ‘사람’이자 ‘숨결’인걸요. 모두 새롭습니다.
반가운 사람을 만나기에 밝게 받아들이고 배운다면, 안 반가운 사람을 스치거나 마주할 적에는 스스로 마음을 다스리고 돌보는 길을 배워요. 누구랑 어울리든 서로 살리는 길을 찾아요. 한 해 모든 날은 서로서로 빛나는 배움날입니다.
몸을 내려놓고 떠난 어느 이웃님을 떠올립니다. 이웃님은 이제 새가 되어 온누리를 날아다닌다고 느껴요. 문득 고개를 들어 가을하늘을 봅니다. 멧새와 들새와 철새와 텃새를 바라봅니다. 할머니 사랑빛이 골골샅샅 상냥하게 퍼집니다.
ㅍㄹㄴ
《三中堂文庫 4 그리이스 로마 神話》(T.불핀치/장왕록 옮김, 삼중당, 1975.2.1.첫/1981.9.10.중판)
- TO YOU 님에게 초컬릿 200원 82.2.10.
《三中堂文庫 26 復活 下》(톨스토이/박형규 옮김, 삼중당, 1975.2.1.)
- 공급처 영광종합도서. 전화 3-1553번
《三中堂文庫 220 밤과 낮 사이의 기나긴 獨白》(L.린저/홍경호 옮김, 삼중당, 1975.11.15.첫/1978.5.15.중판)
《三中堂文庫 245 二中人格》(도스토예프스키/박형규 옮김, 삼중당, 1976.4.5.첫/1981.5.25.중판)
《三中堂文庫 498 惡靈 1》(도스토예프스키/이철 옮김, 삼중당, 1982.3.10.첫/1986.5.25.중판)
《博英文庫 11 엘리아 隨筆選》(차알즈 램/공덕룡 옮김, 박영사, 1974.5.25.첫/1982.12.20.중판)
《乙酉文庫 101 菜根譚》(홍자성/이주홍 옮김, 을유출판사, 1973.2.28.첫/1982.6.10.10벌)
《村上春樹, 河合準雄に會いにいく》(村上春樹·河合準雄, 新潮社, 1996.1.1.첫/2013.5.28.28벌)
《도해관찰 탐구생활 3 나비와 나방의 무리》(기초과학진흥회, 예술문화사, 1994.1.30.)
《좋은 사람 1∼26》(타카하시 신/박연 옮김, 세주문화, 1998∼2000)
《현재진행형 1∼4》(강경옥, 대화, 1994)
글 : 숲노래·파란놀(최종규). 낱말책을 쓴다. 《새로 쓰는 말밑 꾸러미 사전》, 《미래세대를 위한 우리말과 문해력》, 《우리말꽃》, 《쉬운 말이 평화》, 《곁말》,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이오덕 마음 읽기》을 썼다. blog.naver.com/hbooklove












